20화.
내가 1학년 때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엔 현재 홍보부 부장인 손경식과 같은 반이었는데, 10월 중순 쯤 되어 갑자기 머리는 반삭을 하고 덩치가 큰 선배가 아침 조회시간에 들어와서 호기롭게 외쳤다.
"애들아, 나는 홍보부 부장인 이태민이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수능 응원 모금을 할거야. 한사람당 3000원씩이고, 내일 모레까지 학급회장이 책임지고 다 걷어오도록 해. 이거 너네가 3학년 되면 어차피 다 받는거니까 불만 가지지 말고."
학생회라면서 초면부터 반말이었다. 내가 속해 있던 1학년 9반에선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모두들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학생회라는게 진짜 개싸가지가 없네."
"초면부터 반말 지랄이고."
"안내면 지들이 어쩔건데."
"3000원이면 햄버거를 두 번 사먹는데 아깝게 그걸 왜 줘."
그러나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셨다.
"애들아, 그래도 학생회에서 저렇게 협조를 구하면 해주는게 맞는거야. 내가 보기에도 좀 아닌것 같지만, 어찌됐든간에 3000원 걷어서 3학년 선배들한테 마음을 전하자는거니까."
그 말에 마음이 약해진건지, 그냥 별로 싫지는 않았던건지 우리 반 친구들은 대부분 돈을 내기는 했다. 그러나 끝까지 절대로 내지 않겠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우리 반에 다시 찾아온 이태민 선배는 돈을 내지 않은 우리 반 친구들을 향해 강압적으로 말했다.
"너네 이거 돈 안내면 우리가 벌점주고 생활기록부에 안좋게 적어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일까지 당장 내."
그러자 우리 반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지들이 뭔데 우리에게 벌점을 주고 생활기록부를 적냐고.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 반 담임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이 나고 말았다.
"니들이 뭔데 생활기록부 운운하면서 말해? 벌점은 학생회가 줄 수 있는건 줄 알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애들이 돈을 안내서..."
"애들아, 그냥 좀 더러워도 내렴. 3000원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더러운 돈을 챙기고 이태민 선배는 특유의 화가 난 표정을 하며 교실 문을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와 손경식은 다짐했다.
"우리가 반드시 저 수능 모금을 없애버리자."
......
어느덧 올해의 10월 중순이 되어, 캠페인 이후 모이지 않았던 우리가 다시 모이게 되었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수능 응원금 모금입니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부원들은 기운이 빠지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뭐, 어제 제가 김재형 선배에게 수능 모금에 대한 인수인계를 다 받았어요. 지금 여기 작년 영수증이랑 돈 낸사람 명단도 다 있구요."
어젯밤 나를 비롯한 회장단은 김재형 선배와 이태민 선배를 만나 햄버거 집에서 수능 모금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그때 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다.
"교신아, 니가 손명수랑 친하겠지만, 걔는 진짜 학생회의 적이야. 우리가 수능 모금할 때 손명수가 선동해서 걔네반에서 6명밖에 안냈다고."
손명수라는 형은 나와 중학교때 축구부 시절부터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다가, 나와 사상이 맞는 부분이 많았고, 게다가 공부를 매우 잘해서 평판이 좋은 선배였다.
"그때 진짜 손명수네 반 담임 선생님까지 우리한테 협조 안해줘서 개짜증났다고. 막 '우리 반 학생들이 그걸 내야하는 이유가 뭐지? 모금인데 왜 의무적으로 내야돼?' 이랬다니까?"
그 말을 듣던 나는 마음 속으로 '맞는 말이네' 했지만, 일단 표정관리를 하며 최대한 들어주는 시늉을 했다.
"어쨌든, 손명수를 비롯해서 그 때 돈 안낸 사람들 명단이 다 나한테 있으니까, 걔네한텐 절대 아무것도 주지마. 니가 손명수랑 친하다고 사적인 감정 동원해서 선물 주면 나 정말 가만히 안있는다."
이태민 선배가 특히 흥분해 있었지.
나는 다시 회상을 멈추고 회의로 돌아왔다.
"여러분 일단 저는 여러분의 의견부터 물어보겠습니다. 수능 모금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일단 1학년 전체가 다 찬성을 했고, 2학년도 신정화와 정재근, 손경식, 박기동, 김태환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했다.
"흠...일단 그러면 계획은 짜놓죠. 제가 임의로 배정해 놓겠습니다. 1학년 1반부터 3반까지는 저랑 다영이가 가구요..."
나는 그들에게 일을 분배해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건 아닌데, 내가 어떻게 부원들을 설득해야하지?
이것이 회장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 하나이다. 다수의 부원들이 어떤 의견을 내고 여론을 조성하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부원들은 그냥 그 쪽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며 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회장은 엄청난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회장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회의 결과에 따라야 하는 것이니.
"각자 들어갈 반 배정은 했으니, 선물 메뉴는 내일 정하도록 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 방과후에 다시 만나죠. 해산!"
오늘은 특별히 회의를 일찍 끝냈다. 그러자 박기동과 김태환이 만세를 부르며 먼저 나갔지만.
나는 학생회실에 홀로 남아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수능 모금 준비 시늉만 하자. 설득은 좀 이따가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선배들도, 선생님들도 아니다. 학생회 부원들과, 일반 학생들의 여론이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모금에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는 현재 조건에서, 선생님들이 학생회에게 반드시 모금하라고 강요할 당위성은 없다. 왜냐면 형식적으론 학생회가 자치적으로 하는 활동이니까.'
참 웃긴 것이, 선생님들은 수능 돈걷는 것을 학생회에게 시키면서, 절대로 도와주지는 않는다. 학생회가 돈 걷는건 알아서 해야할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래놓고 없앤다고 하면 절대 안될 일이라며 말린다. 이 얼마나 악순환적인 현상인가.
'그리고 지금 돈을 걷으면 작년 학생회와 다를 바가 없다며 안좋은 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그렇다고 내 맘대로 없애자니 학생회 부원들이 나에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학생회 부원들을 설득하는 수 밖에는 없다.'
머릿 속이 살짝 복잡해지긴 했으나, 일단 정리는 대충 된 것 같았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학생회 부원들을 설득하는 것.
'애꿎은 3학년 선배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악순환의 고리는 언젠가 끊어야한다.'
내가 3학년의 입장이었어도 화가 날 것 같긴 했다. 나는 1,2 학년때 3000원씩 꼬박꼬박 냈는데, 왜 고3 와서는 돌려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없애야 할 이유는 내가 무작정 없애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유가 있었다.
......
다음 날, 회의시간이 되자 나는 학생회실에 모두를 앉혀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항상 웃고있던 내가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으니 부원들도 차분하게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수능 모금 계획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
"저는 1학년 때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하는 걸 느끼고 회장이 되어서 이걸 없애버리겠다 하는 뜻을 세웠었어요. 그리고 지금 이자리에 있고 말이죠."
부원들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수능 돈 걷는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찬성 의견을 냈으니, 저는 회장으로서 저의 의견이 아닌 학생회의 의견을 내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하기에 이대로 가다간 우리 입장이 곤란해 질 수 있어요.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만, 어느 대학교 학생회에서 졸업생들을 위해 재학생들에게 3만원씩 걷어서 시계를 사줬다가 제재를 당했죠. 그리고 그 기사가 뉴스로 나오자,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저런 악습은 끊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고 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뭔가 불안해 보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예측이 되었던 것일까.
"강제성이 있는 모금은 엄연한 재산권 침해이고, 공갈과 협박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저는 회장으로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1,2학년을 대상으로 투표를 하여, 수능 모금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의 의견대로 결정해야, 그것이 진정한 학생회라고 봅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기동과 김태환이 크게 외치자, 뒤이어 다른 부원들도 동의한다는 표시로 "네" 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설문지를 만들어보죠."
"그런데, 3학년 선배 분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욕을 먹더라도 그것을 끊어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내년부터 신입생의 숫자가 160명이 줄어드는데, 지금 없애지 않으면 다음 학생회가 힘들어지니까요. 그리고 예산 100만원으로 한사람 당 2300원 꼴의 선물을 할 수 있긴 합니다."
"아..."
나는 예상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까지 다 정해놔서, 무슨 질문이 와도 다 대답해줄 수 있었다.
모두의 찬성을 받게 되는데에 성공했으니, 이제 나는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
결국 우리는 설문지를 만들어서, 모든 교실에서 투표를 실시했고, 그 날 학생회실에 모두 모여서 합산을 했다. 결과는 수능 모금 철폐 찬성 450표, 반대 350표였다.
"그러면 일단 이 결과를 가지고 내일 대의원회의를 하도록 하죠. 저는 이 결과표를 가지고 창의체험부장 선생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빨리 갔다올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내가 학생회실에 부원들을 놔두고 창의체험부에 갔을 때였다. 부장 선생님과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부회장인 구연모에게 전화가 왔다.
"형, 지금 31대 선배들이 와서 이게 뭐냐고 난리가 났어요...빨리 와주세요."
......
아마 소설이 30화 정도에 끝날 것 같습니다. 이거 웹툰으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은데... 그림 잘그리시는 분 없나요 ㅎㅎ
그리고 저때문에 손해보신 선배님들에게 참 죄송합니다...그러나 악습을 끊기 위해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부디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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