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학생회장 김교신 21

주방보조 2017. 6. 17. 08:03

21화.

구연모의 전화를 받고 내가 급히 학생회실로 올라갔을 땐, 이미 학생회실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태였다.
고개를 푹 숙인 나의 부원들과,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선배들이 보였다.

"이거 뭐냐 김교신."

이태민 선배는 칠판에 적힌 '찬성 450, 반대 350'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그 와중에 김재형 선배는 옆에서 심각한 표정만을 짓고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마치 동네 형에게 맞은 꼬마가 부모님이 오자 기가 살아 설치는 것처럼.

"나가서 얘기하죠."

나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부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부원들에게 꼰대짓을 하다니.
나가서 얘기하자는 나의 말에, 선배들은 묵묵히 나의 뒤를 따라서 학생회실을 나왔다.

"너네 미쳤냐? 지금 수능 돈걷는걸 아예 없애버리자는거야?"

"지금은 단지 투표를 했을 뿐입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요?"

"저렇게 투표 결과가 나오면 없애버리자는 뜻이랑 뭐가 달라? 아니, 일단 저 쓸데없는 투표는 왜한건데?"

"학생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모금을 하는 것은 엄연한 공갈과 협박이자 재산권 침해입니다. 이번에 어느 대학교에서 모금했다가 제재받은 일을 모르시는군요."

"아니, 그건 아는데...하..."

이태민 선배는 말문이 막혔는지 더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한참의 침묵 후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투표를 한 것 자체가 문제야. 애초에 저런 짓을 하면 안됐어."

또다시 억지 논리가 시작됐다. 투표의 필요성은 아까 분명히 말했는데, 이건 그저 어린아이의 떼쓰기에 가까웠다.

"내년부터 학생 수가 160명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없애지 않으면, 33대 학생회는 힘들어질 것 아닙니까?"

"그걸 왜 너네가 걱정해? 그건 그때 가서 33대 학생회가 걱정할 일이고. 지금은 너넨 그냥 시키는대로 돈 걷고 선물 준비하면 되는거야."

"물론 갑자기 없애는 것은 무리겠죠. 그래서 차근차근 없애는 것이 좋겠다 판단해서 걷는 돈을 3000원에서 2000원으로 줄이는 건 어떨까 하는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난 선배들을 살살 달래주면서 말했다. 물론 방금 말한 걷는 돈을 2000원으로 줄인다는 방안은 헛소리였다. 그저 그들을 빨리 집으로 보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내 설득이 먹혔는지, 그들은 약간 누그러진 얼굴로 내게 지시했다.

"투표 결과는 공개하지마. 아니, 그냥 결과를 조작해서 공개하고, 수능모금폐지 반대표가 더 많이 나와서 작년 그대로 진행한다고 발표해. 그리고 돈을 적게 걷어도 내가 저번에 말한 돈 안낸 사람들은 절대 선물 주지 말고. 손명수 이런 애들."

"네 뭐, 제가 회의해서 잘 결정할테니 너무 심각하게 걱정 안하셔도 돼요."

"그래, 수능 모금 잘 준비하고. 우린 그럼 내려가 있는다."

"네~ 안녕히가세요~"

그들이 떠나고, 내가 다시 학생회실에 들어가자 다들 풀이 확 죽어있었다.

"우리 투표 진짜 하면 안됐던거 아닐까요?"

강다영이 말하자, 모두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지 않았다.

"여러분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상태에서 수능모금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도 폐지 반대가 350이나 나왔으니까 그 의견을 아예 배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그러니 돈을 3000원에서 2000원으로 감축해서 모금하는 것이..."

방금 전 호되게 이태민 선배에게 압박을 당했는지, 서민지가 절충안을 내세우며 의견을 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순간 예전 생각이 났다. 나를 회장에서 끌어내리려고 할 때, 이태민 선배에게 설득당했던 그 눈빛.

"그럼 먼저 지금 투표를 한 번 해보지요. 돈을 걷어야한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손을 드세요."

그러자 나를 포함해서 4명을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고, 나는 그들을 다시 설득하기 위해 차가운 눈빛을 한 채로 연설하기 시작했다.

"투표의 목적은, 어떤 것을 하나로 확실하게 결정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두가지를 절충해서 결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가 문재인과 득표율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고 해서 대통령의 권한 절반을 문재인에게 뚝 떼어서 주지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부원들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말은 곧, 설령 찬성 401표, 반대 399표가 나왔다고 해도 우리는 찬성 쪽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 우리의 의견은 학생들 다수의 의견과 정반대가 되었지요. 우리는 학생의 대표로서 학생회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는 내내, 그들의 얼굴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아마도 선배들이 무서워서 수능 모금을 하자고 말했는데, 막상 회장의 말을 들으니 선배들 의견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

"다시 투표하도록 하죠. 수능 모금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손을 드세요."

그러자 그들은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같이 손을 들지 않고, 누가 손을 드는지 살펴보려는 듯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최초로 회장의 딜레마를 깨뜨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대로 최종결론을 내겠습니다. 학생회에선 수능모금 폐지하는 것으로 의견이 나왔다 하는 것으로요."

"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두려운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지지하고 저의 편이 되어준다면, 방금 온 선배들이든지, 어느 나이 지긋하신 권위있는 분들이라든지, 다 제가 선두에 서서 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만 제편이면 무서울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나는 단지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부원들의 얼굴에서 약간의 감동을 받은 표정이 드러났다.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빠르게 회의를 끝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자, 해산!"

......

회의가 끝나고 학생회실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있는데, 정말 우연히 정문에서 손명수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오오, 형! 뭔가 오랜만이에요."

"어디가냐?"

"집가고 있죠. 형은요?"

"나는 친구들 기다리느라고."

"아아...형 근데, 이번에 제가 수능응원금 모금하는거 없애버리려고 1,2학년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하는데, 100표 차이로 수능모금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와서요. 아마 없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야, 그거 당연히 환영이지. 난 어차피 돈 안내서 받을 생각도 없었어. 진짜 그거 없애버려야돼. 자양고등학교의 대표적인 악습이야."

역시 그는 나와 생각이 똑같았다.

"근데 오늘 선배들이 와서 난리를 쳐가지고..."

"야, 그런거 그냥 싹 다 무시해. 니가 회장인데 누구 눈치를 보면 안되는거지. 안그래?"

그 말을 듣자 내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묘한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 때는 학생회가 그거 못없애는거 보고 불편하게 생각했는데, 너넨 진짜 대단하다."

손명수 선배같은 사람들도 많을테니, 다른 3학년 선배들도 나의 결정에 동의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

학생회 회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학생회장의 권한으로 대의원회의를 열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것으로 모든 1,2학년 학급 임원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대의원회의는 처음이군요. 지금부터 제가 나눠드린 자료를 보시면, 반 별 투표결과와 합산결과가 나와있을 것입니다. 각 학급은 맞게 나온건지 확인해주세요."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한참동안 들리는 것을 보니, 문제는 딱히 없는것 같았다.

"여러분은 대의원으로서, 이 결과를 보고 의견을 내주시면 됩니다. 학생회와 학생 다수의 의견은 수능 모금을 폐지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엄연한 악습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내기 싫은 사람에게 강제로 돈을 걷는 것은 엄연한 공갈 협박이자 재산권 침해이니까요."

재산권 침해라는 말이 나오자 대의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거의 '반드시 수능모금 폐지에 대해 찬성하라.' 라는 식 아닌가. 사실 그것을 노리고 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한창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다영이 회의실로 황급히 들어오더니, 내게 와서 귓속말로 말했다.

"이태민 선배가 지금 회의실로 들어오고 싶다는데 어떡해?"

"쫓아버려. 지금은 대의원회의지 학생회 회의가 아니니까. 그리고 난 분명 1,2학년만 불렀다고."

"알겠어. 잘 말해볼게."

순식간에 이태민 선배를 쫓아버리고, 나는 다시 태연하게 진행을 재개했다.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수능 모금을 작년처럼 해야한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그러자 모든 대의원 중 4명만이 손을 들고, 나머지는 눈치를 약간씩 살피더니 손을 들지 않았다. 재산권 침해라는데 누가 손을 들겠는가?

"이러면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군요. 그러면 대의원회의 결과도 똑같이 수능응원 모금을 폐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건 거의 독재 수준에 가까웠지만, 가끔은 이런 것이 필요할 때가 있긴 하다.
이제 수능 모금 폐지를 위한 절차를 모두 끝냈으니, 남은 것은 일방적 통보 뿐이었다.

'이태민 선배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싶군.'

.......


소설이 30화에서 안끝날 것 같아요...저에게 힘을 좀 더 주세요...요즘 너무 외롭네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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