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이태민 선배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 애들아, 사실 내가 점심이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어."
조울증 컨셉인가. 아마 우리들 대부분의 머릿속에 '진짜 배고파서 그랬나보네.'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리라.
이태민 선배는 학생회실의 분위기가 매우 썰렁해지자, 다시 표정을 심각하게 고치며 말을 이었다.
"너네 잘못한건 잘못한거니까, 뭐 잘못했는지 다 서기노트에 적고, 김교신은 지금부터 묻는 것에 대답 똑바로 잘해라. 니가 진짜 회장이면."
"네."
"그럼 너네가 뭘 잘못했는지 읊어봐."
나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깊게 쉬었다.
'여기서 그냥 쫓아내버려?'
하지만 그러기엔 이태민 선배가 귀신의 집을 꽤 많이 도와줬다. 물론 간섭이 너무 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냥 꼰대 지랄 한 번만 더 받아준다고 생각하자.'
나는 일단 지금은 한 수 양보하기로 했다.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먼저...제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첫번째, 체육관 뒷정리를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한 것이 두번째, 선배님들을 고생시킨 것이 세번째, 감사문자를 성심성의껏 보내지 않은 것이 네번째 잘못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아까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김교신 자리에 앉아. 너네 잘들어라. 앞으로 이런 일 한 번만 더 일어나면 내가 진짜 너네한테 어떻게 할지 몰라."
'한 번만 더하면 뭐할건데.'
"내가 옛날부터 쌓였던거 아직 안풀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고."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자고 축제 전날에 누가 말했더라.'
"그리고 사과 문자 돌리고 제대로 감사하다고 문자보내. 단체 문자로 하지 말고 한 명 한 명씩."
'문자성애자인가. 문자를 왜 저렇게 좋아해?'
부원들은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있었지만, 각각 표정은 달랐다. 일단 내 바로 앞에 있는 김태환은 웃음을 참고 있었고, 내 맞은 편에 앉은 신정화는 뭔가 따지고 싶은 듯 한참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학예부 부장인 유희진은 멍때리는 표정, 나머지는 그냥 체념한 듯 듣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난 사과를 받았으니까 용서는 해준다. 다만, 날 또 화나게 하지 마라. 알겠냐?"
"네."
"회의 하던거 계속 진행해."
그렇게 선배들이 우르르 나가자, 잠시 침묵만이 학생회실에 가득 찼다.
"급식 먹고 기분 좋아진거 실화냐?"
김태환이 침묵을 깨고,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미친 진짜 조울증 저거 뭐냐."
"괜히 분위기 띄우려다가 실패하니까 정색하는거 봐."
"롱핀 관리는 우리가 잘못하긴 했지. 수거를 늦게 했으니까."
"근데 고무발 하나 빠졌다고 저 정도는 아니지."
각자 분노를 표출하며 떠들고 있는 중에, 손경식이 손을 들고 한마디 했다.
"이제 인수인계 받을거 없으니까, 쌩까는거 어떨까요? 뭐, 솔직히 우리 괴롭힐 방법도 없잖아요."
그러자 서민지가 또 손을 들고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많이 괴롭힌건 사실이지만, 많이 도와준 것도 사실이니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하나로 종합해서 결론을 내렸다.
"많이 도와준 것에 대해선 어느 정도 저도 고맙게 생각은 해요. 물론 저를 괴롭힌 것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받은 것이 있으니, 고맙다고 말은 해주고, 오늘 이후로 선배들이 오늘같은 행동을 해서 우리에게 꼰대짓을 한다면 그때부턴 고맙고 뭐고 없는걸로 하지요."
"네."
오늘 난동을 부린 것이 그들에겐 큰 실수였다. 만약 이 난동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우리가 뭉쳐서 싸우진 않았을테니까.
'이제 슬슬 역전이 되어가는군.'
......
축제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 우리가 임원수련회에 갔을 때였다. 첫째날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집에 돌아가는 날 아침 식사 중에 갑자기 강다영이 나에게 뛰어왔다.
"오빠 미친 이거 봐봐."
그녀가 보여주는 핸드폰 화면 속에는, 정말 아무리 다시 봐도 어처구니 없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31대 학생회장 김재형 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학생회 대선배님들을 위한 작은 운동회를 준비했는데요, 날짜는 바로 내일이고, 몇몇 분들은 이미 오신다고 연락까지 마쳤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대선배님들의 친목도모와 학생회끼리의 동창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ㅎㅎㅎㅎ 장소는 정보관 6층 체육관이고, 문의 전화는 31대 홍보부 부장 이태민 (010xxxxxxxx)으로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
자양고등학교 학생회엔 역대 학생회를 했던 대선배 분들이 모여있는 '대자양고 학생회' 그룹이 있는데, 그곳에 김재형 선배가 글을 올린 것이다.
도대체 운동회 진행을 어떻게 하겠다는거지. 이건 보나마나 우리들을 부려먹겠다는 뜻이 아닌가?
"왜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는거지?"
그들은 현재 회장이고 뭐고 그냥 자기들 재미를 위해 일하는 노예로 보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영아, 일단 밥 다먹었으면 그 인간들한테 전화해서 뭔 일인지 상세하게 말하라 그래. 나 밥 먹다가 체하겠다."
"알겠어."
순수한 분노가 일어났다. 나를 무시하고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부원들을 자신들이 일을 시키면 응당 시키는대로 하는 노예로 취급하고 있는것 아닌가.
곧 강다영이 나에게 와서 통화내용을 보고했다.
"이게, 자기들도 곤란한지 좀 돌려서 말하는데, 본론만 말하자면 오늘 당장 다 모여서 오늘부터 그 '작은 운동회'라는 걸 어떻게 진행할지 짜야된대."
"진짜 미친놈들."
"아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나와 나도."
결국 나는 곧 학생회 부원들을 모두 모아서 이 내용에 대해서 말했다.
"미친 놈들이 작은 운동회를 해보겠대요 갑자기. 하하하하, 그래서 오늘 모여야 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아...축제 끝나니까 이제 좀 편하나 했는데."
맨 먼저 신정화가 한숨을 쉬며 말했고, 다들 힘빠진 듯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일단은 가보죠.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아직 부원들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가 없었기에, 중립을 지키는 듯 일단 선배들 말대로 하자고 말했다. 보통 같았으면 정중하게 '우리 피곤하니까 안가요'라고 했을텐데 말이다.
"피곤하니까 버스에서 좀 자두세요 여러분. 이따가 학생회실에서 만납시다."
사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선배들과 싸웠다가, 부원들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릴까봐. 또 나에게 '우린 견딜 수 있었는데 왜 또 앞서가서 그러는거야?' 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
학생회실에 모인 부원들은 모두 피곤에 찌들어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미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태민 선배는 기세좋게 칠판을 두드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애들아, 너네가 이제부터 해야할 일이 있어. 내가 대선배님들 연락처를 다 줄테니까 너네가 한 분씩 다 연락 돌리면서 오실건지 확인해야하고, 운동회 사회자 정해서 대본 짜야되고, 종목 어떻게 뭐 할건지 다 정해야 돼."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충격에 빠졌다. 이런것도 다 안정해놓고 무작정 일을 벌인 것인가.
모두들 싫은 표정이었다. 왜 해야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것이 사실이었으니.
"근데요, 솔직히 저희가 오늘 이거 알았는데 수련회 끝나고 당장 모여서 일하라고 하시니까 좀...당황스럽긴...한데..."
서민지의 입에서 갑자기 용기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2차로 충격에 빠졌다. 지금껏 순종적이던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다니.
사실 내가 만약 선배들과 싸우면 제일 걱정이 되는 요소가 서민지였는데 말이다.
"뭐? 너 지금 다시 말해봐. 당황스러워?"
"아니, 그게 아니라요 진짜 제가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말그대로 당황스럽다구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오늘 전달 받고 오늘 바로 일을 하라그러니까..."
"이야,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 다 이거 너네한테도 이득되는건데 우리한테 감사한 줄은 모르고."
그 말을 듣자 서민지는 말문이 막혔는지 더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곧 내가 냉정한 표정을 짓고 이태민 선배에게 말했다.
"이 일을 만든건 선배들이잖아요. 저희야 도와주는 입장이지만, 굵직한 일들은 제 책임이 아니라는거죠."
그러자 이젠 이태민 선배가 할말을 잃었는지, 잠깐 머리를 쓸어올리고 아무 말 없이 발만 동동 굴렸다.
김재형 선배도 우리 앞에 나오더니, 이태민 선배와 같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우리가 다 연락 돌리고, 우리가 프로그램 다 짜고, 우리가 어떻게 진행할지 다 회의해서 너네한테 공지할게. 어때?"
"그렇게 하죠."
"......"
말이 나오자마자 덥석 물어버리는 내 대답이 자신들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일까. 또다시 그들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럼 알겠고, 어. 알겠어. 그래. 내가 좀 실수를 한 것 같다."
이젠 말을 버벅거리기까지 한다. 그 모습을 약간 풀린 얼굴로 바라보는 부원들을 보니,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럼 너네 피곤할텐데 빨리 집에 가. 나 도와줄 사람은 혹시 남아서 도와주고."
"네."
그리고 우리들 중 그들을 위해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아무도 안오시네."
작은 운동회 당일 날, 우리가 테이블을 다 옮기고 과자와 음료수도 다 세팅해놨지만, 대선배님들은 한 분도 오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올린 다음 날에 바로 한다는데 누가 시간을 갑자기 내서 올 수 있겠는가.
"하..."
이태민 선배도 민망한 듯 한숨을 잔뜩 쉬며 학생회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
소설 제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뭐가 적절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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