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모두가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이태민 선배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 앞에 음료수 병을 뒀으니 말이다. 이태민 선배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교신이한테는 섭섭한걸 말하는 것 보단, 그냥 좀 미안하다."
무슨 이런 뜬금없는 사과가 있을까. 아침까지만 해도 나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던 그가, 갑자기 나에게 사과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너 임기 초반때부터 못챙겨준것도 있고, 솔직히 마음에 안든건 사실이야. 우리한테 싸가지가 없었잖아. 그런데 니가 너무 기가 세서 좀 죽이려고 일부러 혼도 많이 낸거고."
미친놈. 그냥 꼰대짓을 하고 싶었다고 말해.
"어쨋든 오늘을 계기로 화해 했으면 좋겠어."
날로 먹겠다는 심산이다. 여기서 내가 거절을 할 수는 없는 입장 아닌가.
"아뇨 뭐, 저한테 죄송할 필요 없어요."
가식에는 가식으로 맞대응해야 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 다 지켜보고 있는데 웃음을 잃으면 가오가 죽지 않는가.
"그래, 이걸로 옛날 일들은 싹 다 잊자."
"......"
여기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200만원 빌려놓고 10만원으로 퉁치자 하는 식이니.
디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다가, 김태환 앞에 음료수 병을 두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한테 섭섭한게 있겠어? 라는 얼굴이었다.
"태환, 미안하다. 솔직히 나도 학생회가 이럴 줄 몰랐는데, 괜히 내가 너를 끌어들인것 같다."
김태환은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사이였지만, 고등학교 와서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학생회장이 되고나서 체육부 부장엔 누가 봐도 김태환이 제일 잘어울릴 것 같아서 학생회 면접을 보라고 권했고, 면접 때 엄청난 패기로 심사위원들의 눈에 띈 덕분에 결국 학생회가 되었다.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해보면, 꽤나 많이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에, 무서운 선배들이 화장실에서 휴지에 물을 묻힌 다음에 막 천장에 던지는 모습을 봤다면 어떻게 하실거죠?"
"현피떠야죠."
체육부 부장에 걸맞는 패기였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뽑지 않을까? 그러나 막상 뽑히고 나니, 그는 학생회의 이상한 관습들에 염증을 느꼈는지 항상 나에게 학생회 활동이 솔직히 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면접보라고 안했으면, 그렇게 힘들어하진 않았을텐데.
"아니야. 그래도 막상 학생회 해보니까 좀 후배들이랑도 친해지고, 나름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김태환은 나를 위로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줬다.
그렇게 내 차례가 끝나자, 두려움의 대상인 그 음료수 병은 여러차례 내 앞으로 왔다. 대부분 나를 위로하는 말이나 고맙다고 하는 말이었지만, 자율부 차장인 정세빈만은 달랐다.
"오빠 왜 자율부 애들 불러놓고 리허설 때 신경도 안쓰셨어요?"
할 말이 없었다. 리허설 때 도우미로 일해줄 자율부(다른 말로 선도부)를 불렀지만, 내가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던 탓에,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내가 그들에게 가려고 할 때는 이미 이태민 선배와 김재형 선배가 그들을 관리하고 있었기도 했고.
"그건 진짜 미안하다. 이게 좀 변명이긴 한데, 회장이 되어보면 알아. 너무 바빠서 다 신경쓸 수가 없어. 내가 신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불러놓고 책임을 못진거니까, 정말 미안해."
음료수 병은 계속 돌았다. 대부분의 부원들이 서로 서운했던 것을 말하기보단, 칭찬을 많이 해서 분위기는 점점 훈훈해졌다.
그 분위기는 결국 양우주가 박기동 앞에 음료수 병을 두었을 때 절정에 치닫는다.
"오빠가 저 대신 대기실 맡아주신다고 해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냥 제가 이기적으로 무대 보고싶다고 투덜댄것 뿐인데..."
그러면서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자, 또 뜬금없이 옆에서 장소명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이태민 선배가 김재형 선배에게 한마디 던졌다.
"야, 우리땐 서로 욕해서 재밌었는데, 역시 32대 애들은 재미가 없어."
난 저 이태민 선배의 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우리 32대를 보고 정말 재미없는 학생회라며 비웃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얼마나 재밌다고.
음료수 병이 모두 돌고 이태민 선배에게 다시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김재형 선배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이태민 선배가 음료수 병을 정가운데에 놓고 소근거리는 말투로 우리에게 말했다.
"김재형은 솔직히 회장도 아니야. 우리한테 상당한 실망도 안겼고. 그러니까 뭐 궁금한거 있거나 하면 나한테 물어봐. 알겠지?"
그렇게 당당하면 앞에서 좀 까지, 왜 굳이 뒤에서 까는건지 이해가 안갔다. 물론 저런 이태민 선배와 같이 붙어다니는 김재형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뒷담화 하는 사실은 과연 알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리는 결국 12시 반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단톡방엔 자비없이 공지를 띄웠지만.
-아침 6시까지 안오면 1분에 벌금 500원.
......
6시에 학생회실에 도착하자, 나보다 먼저 대기하고 있던 부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연락이 닿지 않는 부원들도 있었다. 특히 정세빈은 1시간을 넘게 지각하는 바람에 상한선인 30000원이 쌓여버렸다.
사실 6시에 학생회실로 오는 것은 의미가 없긴 했다. 할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자 부원들은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했고, 남자 부원들은 단체로 면도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긴장된다."
한 달을 넘게 미친듯이 일하며 준비한 축제가 바로 오늘이라니, 매우 설레면서도 침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면도를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잘될거라는, 평소의 나같지 않은 긍정적 마음가짐을 같기 위해서.
동아리 발표회는 모두 무난하게 끝이 났다. 다만 체육관 의자 대형이 무너지고 엄청난 쓰레기들을 다 치우는 것이 상당한 일이었지만. 우리가 준비한 2부 축제는 5시 반 귀신의 집 오픈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절망적인 일이 터졌다. 3시까지 멀쩡하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망했다."
나와 강다영이 하늘을 보며 동시에 말했다. 나라면 비가오면 절대 자양고 축제 구경하러 안가겠다면서. 그러나 5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비오는데 줄을 어떻게 세우지.'
수없이 회의를 하며 만든 귀신의 집 질서정리가 비가 오면서 모두 무너졌다. 비가 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고민을 하던 중 이민진에게 무전기로 연락이 왔다.
-오빠, 체육관으로 빨리 와주세요. 지금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돼요.
체육관 쪽으로 가보니, 가요제를 보러 온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다만 다들 비를 피하기 위해 체육관 안으로 몰려들어가서 모든 질서가 깨져버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태환, 소명, 재근. 너네가 일단 지금 들어온 사람들 자리 정렬 좀 해줘."
그리고나서 다시 정보관으로 가니, 질서팀으로 나온 도우미들이 사람들에게 엄청 욕을 먹고 있었다.
"아니 더워 죽겠는데 어쩌라는거야 지금.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거야?"
"사람들 몰려서 지금 줄도 안세워졌는데 질서 보는 애들은 뭐하는거지."
"학생회 일 더럽게 못하네."
그 와중에 질서팀 도우미인 김민서라는 1학년이 특히 욕을 먹고 있어서,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당장 정보관 안으로 들어가서 질서팀 도우미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당장 번호표 만들어서 발급해. 순서는 대충 정해서 나눠줘. 그리고 예상시간을 적어주고 찾아오라그래."
사실 원래부터 번호표를 발급하고 순서대로 문자를 보내서 찾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태민 선배가 비효율적이라며 아예 그 시스템을 없애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오빠, 또 비상사태가 일어났어요. 찬조팀들을 관리할 수가 없어요. 찬조팀 전용 입구에 전기 선들 때문에 위험해가지고...
또 다시 이민진의 무전을 들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양 쪽을 동시에 관리하려니 머리가 터질것 같았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그냥 의욕이 없어요..바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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