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학생회장 김교신 14

주방보조 2017. 6. 11. 13:43

14화.

"너네, 1학년들이 기어오른다고 생각 안하냐?"

"네?"

정말 뜬금없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잘지내다가 이게 무슨 말인가.
이태민 선배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1학년 애들이 내가 보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너희한테 선을 넘고있어. 야, 태환아 너는 소명이가 너한테 반말 쓰는거 신경 안쓰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태환도 잠시 당황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놓으라고 했는데요?"

"그게 문제야 그게. 내가 보기엔 1학년들이 너네한테 너무 기어오른다니까?"

그 말을 듣던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까지만해도 웃으면서 잘 지냈는데 이게 뭔 말인가. 그러나 서민지까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태민 선배를 거들었다.

"이게 진짜로 1학년들한테 군기를 잡기는 해야 돼. 일단 나도 다영이한테 좀 쌓인게 있어. 다들 하나씩은 후배들한테 쌓인거 있지않아?"

그러자 우리들 중 한두명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명이가 회의하다가 놀러갔던거."
"건휘가 풋살할때 나한테 공 엄청 세게 찼던거."
"연모가 가끔 짜증나게 입터는거."
"아진이가 찬조포스터 만들 때 연락 안됐었던거."

처음에는 약간 웃으면서 장난처럼 말하다가, 점점 이태민 선배의 선동에 의해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강다영이 좀 문제야. 지금 강다영이 뭔가 학생회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 같아."

그러자 또다시 서민지가 거들었다.

"다영이가 김교신 없을때 회의 대신 진행해가지고 난 되게 좀 솔직히 비참했어. 내가 분명 2학년 부회장인데, 나는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거지 싶기도 하고. 난 그냥 포토샵이랑 영상편집 해주는 그런 사람인가."

서민지의 말에,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맞아 김교신, 니가 바쁠 때는 민지한테 회의를 맡기고 갔어야지."

"음, 그건 맞는 말인것 같다."

천혜린과 손경식도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김교신, 이게 다 니가 회의 때 존댓말을 써서 애들이 너를 얕보기 시작한거야. 그러니까 저절로 다른 2학년 선배들한테까지 기어오르는거지."

이태민 선배의 말에, 몇몇 부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대답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선동이었다. 나는 여기에 휩쓸릴만큼 이성을 잃진 않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리라. 그러나 나를 제외한 서민지와 몇몇 부장들은 나와 같지 않았다. 특히 정재근이 말이다.

"야, 애들아 김건휘 카톡 상태메시지 바뀐거 봐. '사려야지' 라는데? 이거 우리 저격 아니냐?"

심지어 바뀐시간이 3분도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역시 아까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나가더니 이렇게 되는건가. 이것을 시발점으로, 결국 분위기는 점점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그 원인을 점점 나로 돌려갔다.

"김교신이 애들을 너무 좋게좋게 대해줘서 그래."
"회의 진행할 때 가끔 다영이한테 맡겼잖아. 그게 문제였어."
"회의시간에 확실히 존댓말을 쓰면 안될 것 같아."
"애들 학원 가야한다고 하면 강하게 군기를 잡아야 되는데 김교신이 너무 잘보내줬어."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태민이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불순물에 가까운 것인가. 나는 분명 이 곳을 정화시키기 위해 왔는데, 오히려 불순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쨋든, 내일 아침에 한 번 모여서 얘기를 해봐. 너네끼리 알아서 잘 풀고, 얘기할거 있으면 얘기를 해야지."

이태민 선배가 마무리를 지을 무렵, 우리는 곧 학생회실에서 나가야했다. 학교 당직 선생님께서 몸소 학생회실까지 찾아오셨기 때문이었다.

"야, 니네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당장 나가! 지금이 몇신데 뭐하느라고 여기있어?"

"죄송합니다, 지금 나갈게요."

"에잉, 미친것들. 내가 도저히 무서워서 정보관을 닫을 수가 없어!"

평소와 다름없이 대단한 역정이셨다. 우리는 곧 모든 짐을 싸서 정보관에서 나왔고, 각자 집으로 흩어지기 위해 학교 정문쪽으로 향했다. 그때 정문쪽 운동장 축구골대 옆에 1학년들이 빙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우리는 모두 그들을 못본척하고 지나갔다.
여러가지 의도가 있었으리라. 나같은 경우엔 지금 딱히 1학년들에게 인사할 타이밍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고, 방금까지 마음이 격해지면서 그냥 인사하기 싫어진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교신, 치킨이나 먹으러가자."

김태환과 손경식, 정재근이 나에게 치킨집을 가자고 했다.

"나야 좋지."

그렇게 2학년 남자 4명이서 치킨집에 가서, 아까 학생회실에서 다 풀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김건휘 상태메시지 이렇게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생각할수록 너무 화나네. 미친거 아니야? 나랑 맞먹으려고 생각하는건가."

"재근, 너무 흥분한것 같은데 좀 가라앉혀."

"진짜 내가 흥분을 안할 수가 없다 교신. 이건 하극상인거야."

치킨을 먹는 내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재근. 그 와중에 김태환도 한마디했다.

"나는 소명이가 말을 놓든말든 상관없는데, 내가 불만인건 애들이 다 내가 무슨 의견만 내면 장난일 줄 알고 다 웃는거야. 난 그게 진짜 좀 기운 빠진다."

손경식은 딱히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후배들이랑은 그럭저럭 잘 지냈으니 말이다.

......

치킨을 다 먹고 시간이 늦어 각자 집으로 흩어지는 길에, 강다영에게 문자가 왔다.

-지금 잠깐 못만나?

마침 강다영과 따로 통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만나서 얘기를 하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스타시티 로비에서 보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알겠어 오빠.

5분 후 내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강다영은 매우 어두운 낯을 하고 먼저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는 또 무거워진 마음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대충 무슨 얘기 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아무래도 알려주려던 참이었어. 지금 이거 너 몰래 만나는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응 알겠어. 일단 말해줘."

"그러니까, 지금 이태민 선배가 1학년들 군기 잡아야 한다면서 선동했는데, 지금 좀 다들 넘어간 분위기거든. 물론 그 와중에 나를 또 몰아내려고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래서 2학년은 다들 뭐라고 그랬어?"

"일단 니 욕이 제일 많이 나왔어. 이것도 예상했겠지만. 그리고 소명이랑 아진이, 연모, 특히 건휘가 욕을 많이 먹었지."

"뭐 때문인지는 알것같긴 한데, 난 왜 욕먹은거야?"

"니가 나 대신 회의 진행했던거랑, 뭐 정희구한테 말놓는것도 싸가지 없다고 이태민 선배가 뭐라 그랬고, 등등 뭐 여러가지 있었어. 하도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기억도 안나."

"아니 학생회도 아닌 정희구 오빠 얘기는 왜나오는거야?"

"너무나도 너를 까고 싶었나보지. 내 생각엔, 여기서 1,2학년이 서로 싸울게 아니라 31대의 이간질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건 선동이야 정말로. 게다가 너무 급작스러워서 1학년 애들 단체로 좀 멘탈 나갔거든? 그러다가 애들도 막 화나가지고 쌓인거 잔뜩 있다고 그러던데..."

"에휴, 나도 정말 미치겠다. 건휘 상태메시지는 왜 그렇게 한거래?"

"나도 모르겠어. 일단 내리라고는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일이 좀 더 심각해진거 아닐까."

"그런것같아..."

"오빠, 내가 진짜 학생회 하면서 느낀건데, 나이가 어리면 절대 나대면 안된다는거야. 나 솔직히 지금 부회장 왜 했는지 잘 모르겠어."

가슴이 또 아팠다. 이것조차 부모의 마음일까? 자식들이 나에게 화내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 더 마음 아픈 일이라는걸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내일 아침에 모여서 얘기하면 뭔가 더 나아지긴 할거야. 오해가 있었으면 푸는거고. 아니, 어떻게든 뭘 해서든 풀어야지."

강다영의 눈빛을 보니 매우 풀이 죽어있었다. 평소 생기 넘치던 모습과는 매우 다르게, 뭔가에 굴복한 총기없는 눈.

"다영아, 따지고 싶으면 당당하게 따져. 그리고 뭐 그냥 내 탓으로 돌려 곤란한건. 내가 다 감당해줄 수 있으니까."

"그냥 내가 1학년답게 가만히 있으면 되는거겠지 뭐..."

"그러지 말라니까."

도저히 위로를 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해줄 수 있는거라곤 마음을 편하게 먹게 해주는 것.

"피곤할텐데, 일단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보자. 마음 편하게 먹어 괜찮아.

"난 안괜찮단 말이야..."

"나도 지금 피곤해서 안괜찮아. 빨리 집 들어가라. 나도 이제 간다."

약 30분 정도의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선동은 먼저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1,2학년이 모두 학생회실에 모였다. 분위기는 살벌했다. 모두 모인지 1분이 지나고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2학년들부터 1학년한테 할 얘기 있으면 해봐."

내가 침묵을 깨며 말했고, 곧 2학년들은 하나씩 어제 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김건휘, 너 어제 상태메시지 그거 뭐야?"

정재근이 정말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자, 갑자기 김건휘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아, 그거 정말 오해예요. 전 그거 선배들한테 한 말이 아니라 다른 애들이랑 마찰이 있어서 그랬던건데..."

분위기가 극도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덕분에 2학년들의 흥분도 약간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장소명, 너는 앞으로 김태환한테 말놓지 마. 보는 입장에서 불편하니까."

"저는 그냥 태환오빠가 말놓으라길래..."

"그래도 우리가 옆에서 듣는 입장으로서 불편해."

"네."

서민지와 장소명의 대화속에는 뭔가 치열한 기싸움이 느껴졌다.

"아진아 너는 왜 그때 연락이 안됐었어? 희진이가 포스터 다 만들었잖아 그 날에."

"정말 죄송해요..."

전아진이 또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제가...학원이 너무 많아가지고..."

그 눈물에 모두가 마음이 약해졌는지, 살벌하게 말하던 2학년들이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아니, 너희를 혼내려는게 아니라 그냥 쌓인게 있으면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고 이태민 선배기 말해서..."

아니, 너희를 혼내려는게 아니라...라는 말은 이태민 선배가 자주 쓰는 말이었다.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세뇌라는게 이렇게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니.
또다시 침묵이 돌기 시작하자, 내가 다시 진행을 했다.

"이번엔 1학년들이 2학년들한테 섭섭했던거 말해봐."

그러자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강다영이 대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딱히 불만이 없어요. 그때 제가 멋대로 나서서 회의진행 했던건 죄송하고요. 그냥 제가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할 말 없니?"

"저...할 말 있는데..."

이민진이 손을 들었고, 나는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일단 경식오빠가 31대 선배들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서 약간 뭔가 휘둘리는 느낌이고, 재근 오빠는 다같이 일할때 가끔 에어컨 앞에서 바람만 쐬어요. 전 그게 약간 불만이었어요."

이민진의 말이 끝나자 양우주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하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다른 사람들 할 말 없으면, 일단 지금 서로 오해를 풀고, 미안한거 있으면 미안하다고 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뒤끝없이 풀도록 하죠!"

그러자 여기저기서 서로 오해를 풀면서 미안하다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선배들이 맨날 나 불러서 압박하는데 나도 정말 힘들어..."
"상태메시지 오해해서 미안하다 건휘야. 그리고 일 열심히 할게."
"아녜요. 저희도 선을 지키면서 선배들 대할게요."
"또 너무 그러진 말고."

그러나 다들 뭔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서로 사과를 끝내고 나서도 찜찜하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게 바로 32대 학생회 부원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일이나 하죠 여러분. 다들 각자 할 일이나 하러 갑시다. 귀신의 집 창문도 빛 못들어오게 막아야 하니까요!"

나는 쉴 틈 없이 또 일분배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거리감이 형성된 기분이었지만, 어쨋든 일을 하면서 다시 친해지겠지 하는 판단이었다.

.......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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