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지금까지 내려져오는 학생회 전통 중엔, 고3인 학생회 선배들에게 수능 100일 전인 날에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사드리는 이벤트가 있었다. 당선되고 난 직후에 이태민 선배가 너무나 당연하게 '수능 100일 전 날에 너네가 우리 식사 대접하고 선물 사줘야 돼' 라고 말하는 것이 꽤나 황당했지만, 인수인계 못받을까 두려워서 일단 승낙하긴 했다. 그러니 지금 와서 '인수인계 다 받았으니 안사드릴게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약속대로 롯데백화점에 있는 프리가 라는 뷔페 식당을 12시로 예약하고, 모든 부원들이 자신의 직계 선배들을 대접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상황보다, 며칠 전에 이태민 선배가 우리를 모아놓고 한 이야기가 더 가관이었다.
"야, 저번에 누가 머그컵 선물했다가 선배 표정 개썩었었다. 뭐, 우리가 큰걸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아 그리고 막 홍보부랑 회장단이랑 서로 더 비싼거 사려고 경쟁 붙었었지. 아니, 내가 진짜 큰 걸 바라는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구차하게 왜 그렇게 돌려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난 매우 좋은걸 같고 싶어. 근데 다른 선배가 나보다 더 좋은거 받는건 싫어.' 라고 말을 하지.
"아, 솔직히 처음 보는 선밴데 어색해서 어떡하냐."
이벤트 전 날, 선물을 준비하면서 총무부 부장 정재근이 하소연을 했다. 평소에 찾아오는 31대 선배는 회장출신 김재형 선배와 홍보부 부장 출신 이태민 선배, 체육부 부장 출신 강현석 선배 밖에 없었으니, 나머지 부서의 부장과 차장은 완전히 처음보는 선배와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새로 제작한 부채 최종본, 팜플렛 최종본, 포스터 최종본, 찬조팀 공연 순서, 공연 시간표 등을 일출제 담당이신 최영배 선생님에게 오늘 당장 제출해야 하는데, 하필 수능 100일 이벤트와 겹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오늘 아침에 제출을 하기로 했지만, 자료를 가지고 있는 서민지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현재 최영배 선생님이 크게 화가 난 상태였다.
"내가 지금 너네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교무실에 와있는데 어떻게 10시까지 안올수가 있어? 이럴거면 일출제고 뭐고 다 때려쳐!"
"정말 죄송합니다. 진짜 꼭 오늘 오후 한시 반까지 제출하겠습니다."
"내가 너네 귀신의 집 때문에 국제전화까지 걸면서 체육관 다 빌릴 수 있게 만들고 했는데, 너넨 도대체 일을 제대로 하는거야, 마는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할거 없어. 지금까지 시간 약속을 너네가 제대로 지킨적이 있어야지. 그냥 축제 하지마! 참 웃긴 놈들이네 이거."
면목이 없었다. 사실 지금 예산결재를 받아야 겨우 주문을 할 수 있는데, 현재는 품의서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니, 선생님이 화가 나신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발, 민지야 전화 좀 받아주라. 제발.'
선생님 옆에 앉아서 두시간 동안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도통 받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선생님은 크게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됐어. 그럼 점심 먹고, 한시 반까지 와. 그때는 부회장도 일어나겠지."
"알겠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었다. 12시에 빠르게 식사를 하고 1시 반까지 파일을 들고 가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럼 갔다오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나갔다. 머리가 터질것 같은 기분이었다.
......
11시 30분, 식당에 가기 전 20명 모두 학생회실에 모였다. 정신없이 도착한 서민지가 내게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제부터 실수 안하면 되는거지 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그런데 지금 제출할 것들이 다 최종본이 아니야. 수정할게 좀 많은데..."
미칠것 같았다. 포스터와 팜플렛을 제작하느라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샌 그녀에게 왜 이렇게 불성실하냐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시간이 부족한 것을 탓할 수밖에.
'지금 제출까지 2시간 남았는데 수능 100일 식사는 해야하고.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할까?'
보통 같았으면 선배들에게 서민지와 나는 일때문에 참석을 못하게 됐다고 말하고 수정작업에 들어가는게 정상이지만, 선배들은 그것을 용납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배들이 화가 났을때, 부원들이 과연 나의 편을 들어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결국 나는 비정상적인 선택을 해야했다.
"밥부터 먹으러 가자. 자, 다들 출발합시다!"
......
약속시간이 되고, 31대 선배들까지 모두 모이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형식적인 오프닝을 했다.
"네, 안녕하세요. 32대 학생회장 김교신입니다. 서로 초면인 분들도 계신것 같은데, 이 식사 자리를 통해서 더 친해지셨으면 좋겠군요. 자, 그럼 서로 인사도 하고, 즐거운 식사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말없이 음식을 퍼왔다. 10분 정도 지났을 땐 약간 말이 통해서 시끄러운 테이블도 있었고, 여전히 어색함이 풀리지 않아 고요하게 밥만 먹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난 도저히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제출시간이 정말로 촉박하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야아, 밥 다먹었으면 각 부서별로 사진촬영 하자! 먼저 회장단부터 찍어라."
모두가 배불러 할 때 쯤에 이태민 선배가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김재형 선배와 현재 4명의 회장단은 그 말대로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만 찍고 가야지.'
벌써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 이미 제시간에 제출하기는 글렀다.
"그럼, 저랑 민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님들. 일이 바빠서 죄송해요."
"아냐아냐, 빨리 가 바쁘면."
우리를 보내주는 이태민 선배와 김재형 선배는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6~7만원짜리 선물에 케이크도 받고 식사 대접까지 받았으니 만족을 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됐다.
"아, 혜린아 너도 찬조팀 명단있는 usb 가지고 지금 빨리 와야돼. 같이가자."
특별활동부 부장인 천혜린까지 데리고, 나는 서둘러 교무실로 뛰어갔다. 서민지는 당장 집으로 가서 최종적으로 수정작업을 한 다음에 나에게 파일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급하게 교무실에 도착했을땐, 약속시간에 약간 늦은 1시 45분이었다.
"15분이나 늦었네. 어디 한 번 보기나 해보자. 서민지는 아직도 안일어났어?"
최영배 선생님의 표정은 매우 굳어져있었다.
"일단 혜린이가 제출할 자료부터 보시죠. 서민지가 지금 최종적으로 수정해서 20분 내로 저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하자, 선생님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이 놈 자식들이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도대체 약속을 몇 번 미루는거야? 나 이거 진심으로 말하는데, 정말 일출제고 뭐고 다 때려쳐. 예산도 쓸데없이 너네한테 뭔 600만원이나 쓰냐. 됐어. 하지마 그냥."
"아니, 선생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컴퓨터 화면에 나와있는 천혜린의 보고서를 읽고있었다.
"봐봐. 내가 분명 공연 시간 1시간 30분으로 맞추라고 했지? 근데 지금 이대로 가면 2시간이 넘어간다니까? 내가 이걸 몇 번째 말하는거야!?"
보고서를 다 읽으신 선생님의 목소리에 교무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계속되는 그의 역정에, 나와 천혜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김교신. 서민지보고 그냥 여기로 오라그래. 일출제 그만한다고 통보할테니까, 일단 여기로 오라그래. 지금 당장!"
......
결국 서민지가 집에서 부리나케 달려오고, 최영배 선생님의 역정에 천혜린과 서민지가 눈물을 흘린 후에야 겨우 선생님을 달래어서 축제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럼 내가 한 번만 더 기회를 줄테니까, 내일까진 다 해와"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그래. 너네 한 번만 더 이런식이면 정말로 안할거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가라."
교무실에서 나와 같이 학생회실로 올라가는 내내, 서민지는 말이 없었다. 아마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리라.
"야, 진짜 괜찮아. 기죽지마. 니가 밤새서 만드느라고 아침에 못일어난거니까, 난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내가 아무리 위로를 해줘도, 그녀는 혼이 빠져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생회실에 도착하자, 양우주와 장소명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표정이 왜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양우주가 나에게 물었다.
"걍 별거 아니야. 선생님한테 좀 혼나서 그래."
여전히 혼이 빠진 것처럼, 서민지는 책상에 앉자마자 엎드렸다.
"아, 근데 오빠, 아까 이태민 선배랑 김재형 선배가 오빠 욕 엄청 하던데요?"
장소명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되물었다.
"도대체 왜?"
"애슐리가 더 맛있는데 왜 프리가로 예약했냐면서..."
"......"
미친놈들. 정말 미친놈들이다. 절대 고마운 줄 모르는 미친놈들. 맨몸으로 온 사람들 밥사주고 선물주고 케이크까지 샀는데. 제대로 정신이 나간것인가.
.....
피곤하네요. 빨리 자고 싶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좋아요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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