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학생회장 김교신 11

주방보조 2017. 6. 11. 13:38

11화.

회의를 끝낸 후 내가 교무실에서 예산안을 짜고 돌아와보니, 꽤 많은 부원들이 아직 집에 가지 않고 계속 학생회실에 있었다. 각자 수다를 떠는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학생회실에 들어오자마자 천혜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교신, 아까 너 없을때 선배들이 와서 애들한테 니 욕했어"

"뭐라했는데?"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안든다고. 선배들한테도 예의없고, 선생님들한테도 예의없고, 후배들한테 엄청 권위적이라면서..."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선배와 선생님들께 약간 격식을 차리지 않는것은 인정한다. 특히 가요제를 저녁에 해야 한다며 임기 초반부터 창의체험부에서 선생님들과 엄청 싸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후배들한텐 권위적으로 행동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후배들한테 뭘 권위적으로 했는데?"

"저번에 니가 발목아픈척 하면서 연우한테 자기 짐 넘겼다고 그러던데?"

"와, 그걸 모함한다고?"

내가 다리를 자주 다치는 것은 나와 일주일만 같이 지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픈 척을 하면서 이연우에게 짐을 대신 들라고 시켰다니. 그것도 이연우가 너무 아파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자기가 들겠다며 가져간건데 말이다.

"그래서, 애들은 그거 들으면서 뭐라 그랬어?"

내가 약간 큰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천혜린을 쳐다봤다.

"아니, 솔직히 누가 봐도 아까 그상황 때문에 말도 안되게 모함하는건데 애들이 믿겠냐."

"하긴, 그걸 믿었으면 지금 넌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부원들은 내가 아무리 못미더운 사람이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선동될만큼 미성숙하진 않았나보다. 다만, 아직도 부원들 전체가 나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특히 1학년 차장들이 말이다.
나는 학생회실 책상에 앉아, 칠판에 적혀있는 부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되뇌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걸까? 그들이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 미워도 난 이 녀석들이 좋았다. 나의 자식 같은걸 어떡하는가. 언젠가 부원들도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날이 오겠지.

...

다음 날 학생회실에서 귀신의 집 세부계획을 회의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귀신의 집 장소 구조를 칠판에 그리면서, 어디에 무엇을 배치할건지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 또다시 31대 선배들이 찾아왔다.

"어디, 귀신의 집 회의 내용 좀 보자"

무엇이든지 말해보라는 거만한 표정을 한껏 지으며 말하는 선배들. 귀찮지만, 나는 그들 앞에서 어제 회의한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설명을 듣는 내내 그들은 계속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가오를 또 부릴까 전혀 예상이 안되었지만, 어쨋거나 꿋꿋하게 설명을 모두 마쳤다.

"야, 그냥 너 니 자리로 들어가봐."

또다시 칠판 앞으로 걸어나오는 이태민 선배. 내가 자리에 앉자, 정색을 한 표정으로 칠판 부원들을 하나하나 다 훑어보더니, 칠판에 써져있는 오늘 회의한 내용을 지우개로 다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32대 학생회의 특징은, 화가나면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

"애들아,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귀신의 집 운영은 이렇게 해야 돼"

갑자기 튀어나온 이태민 선배의 말에 무슨 미친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그가 새로운 운영방식을 칠판에 쓰고 있었다.
상당한 반전이었다. 이딴거 때려쳐 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 자신이 더 신나서 운영 계획을 짜고있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세팅을 해서, 참가자들 등에 종이를 붙이고 귀신들이 달려와서 그걸 뺏는거야. 그리고 컨셉은 다 좀비로 바꾸고 좀비 연기를 시키는거지."

어쨋거나 그가 우리의 회의 내용을 전부 바꾸고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는 점에 있어서 바뀐 점은 없었다.

"일단 귀신들이나 참가자들의 안전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너무 동선이 짧아서 귀신의 집 통과하는데 10초밖에 안걸릴텐데 과연 재미가 있을까요?"

내가 그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태민 선배는 약간 말을 버벅이면서 대답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음...그, 그, 그 뭐냐, 귀신들이 안전하게 종이를 떼면 되는거지."

역시 말도 안되는 계획엔, 말도 안되는 논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도 대답을 하고서는 민망했는지, 나에게 일단 회의를 계속 하라고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승리자의 표정을 하고서 다시 앞에 섰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질서팀으로 7명 정도가 필요하고, 귀신 역할 해줄 도우미가 18명, 분장 도와줄 사람이 적어도 3명은 필요해요. 다영아, 그때 도우미 신청한 사람 명단 있어?"

"네, 있어요. 지금 칠판에 적어볼게요."

그 모습을 선배들이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쳐다보니,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들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귀신의 집은 자신들이 해본적이 없고, 가요제 인수인계는 이미 내가 다 받아버렸으니, 내가 회의를 진행하지 못할 이유도, 일분배를 시키지 못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까의 말싸움에서 밀린 것으로 인해, 부원들의 신뢰도가 나에게 꽤 쏠렸으리라.
이대로 가다간 자신들의 자리를 잃어버릴까 걱정이 된 것일까? 갑자기 그들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며 말했다.

"와, 귀신의 집 하면 진짜 재밌긴 하겠다."
"우리땐 환경이 열악해서 못했는데, 얘네는 좋겠네."
"도우미들이 저렇게 많이 뽑히는 것도 신기해."

'......'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렇게라도 학생회실에 붙어있고 싶었을까.

......

미친 날씨였다. 37도가 넘어가는 더위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태양을 위해 문을 열었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오늘 모인 귀신의 집 도우미들도,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지 땀을 뻘뻘 흘렸다.
귀신의 집 장소는 바로 학생회실 옆에 있는 정보관 6층 체육관. 쓰지 않는 샤워실과 탈의실, 먼지 가득한 창고, 너무 넓지 않은 체육관 크기 덕분에 귀신의 집으로 사용하기에 적당했다.

"와, 더워 뒤지겠는데 여기서 귀신의 집을 한다고?"

귀신의 집 도우미 중 한명인 김태현이 선글라스를 고쳐쓰며 나에게 말하자, 옆에 있던 강다영이 그를 보며 한마디 던졌다.

"선글라스는 왜쓰고 왔어요? 연예인이에요?"

"......"

생글거리는 그녀의 말투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는지, 그는 조용히 선글라스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다 올 사람은 온 것 같으니,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모두 일어나서 저를 따라와주세요."

나는 15명은 되어보이는 인원들을 데리고 체육관을 구경시켜주며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체육관에 모두를 앉히고 회의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각자 무슨 컨셉을 가지고 귀신을 하고 싶은지 아이디어 한 번 말해주세요. 저희 분장팀으로 오신 분들이 정말 잘하시는 분들이라서, 뭐든 잘 소화해 내실겁니다."

"저는 아기귀신 하고싶어요."
"저는 처녀귀신?"
"전 막 숨어서 발목잡고 싶은데."
"갑자기 나타나서 막 소리지르고 뛰어가는 그냥 무섭게 생긴 귀신이요."

그때 갑자기 명휘찬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신, 나 좀비연기 개잘해."

"한 번 해봐."

"뀌에레에겍에레헤엑게??쀄에이이애야레렉?"

"......"
"......"
"......"

"정말 병신같다 휘찬아."

해괴망측한 표정연기와 목소리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때, 김태현이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민망한듯, 그는 '그냥 사리고 있을게' 라며 무안함을 표시했다.

"각자 귀신 컨셉을 다 잡았으니, 이제 일주일 뒤에 또 오시면 됩니다. 그땐 귀신의 집 세팅 다 해놓고 연습해볼테니까, 편하게 입고 와주세요. 아 그리고 그땐 에어컨 틀어드릴게요. 너무 걱정마세요! 이제 집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네~잘가세요!"

도우미들을 보내고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요제 때문에 학생회 부원들과 회의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힘든데, 이제 수많은 도우미들과도 회의를 해야한다니. 정말 머리가 터질것 같았다.

"교신, 방학때 같이 놀 시간없어? 우리 팬션으로 놀러가기로 했는데."

나를 따라 에어컨 바람을 즐기러 학생회실로 들어온 명휘찬이 말했지만,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해줬다.

"단 하루도 시간이 나질 않아...미안하다. 당선된 이후로 너랑 한 번도 못놀았네 그러고보니까."

학생회장이 되어서, 원래 같이 놀던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그렇다고 학생회 부원들과 가까워진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그냥 나는 혼자서 외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뭐 대학 졸업하고 같이 놀면 되는거지."

그러나 나도 알고 있었다. 원래 놀던 친구들도 요즘은 나와 어색해져서, 같이 어울리기 약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


오픈채팅으로 가끔 힘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제가 학생회 일을 할때, 누군가가 저에게 고생하는거 진짜 응원한다고 말해주어서 크게 감동받았는데, 아직도 그 친구가 누군진 모르겠네요. 이제 20일 약간 남은 임기지만, 학생회장으로서 저에게 댓글로나 채팅으로나 힘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휘찬아 미안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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