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디션 두번째 날은 대선배 분들이 6명이나 오셨다. 그 중 나의 친형에게 말로만 듣던 친형의 친구들도 있어서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야아, 니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넌 기억 안나겠지만 너 엄청 어릴때 몇 번 봤는데."
"저는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만나니까 약간 실감이 안나는데요?"
자양고 학생회라는 것이 이런 우연도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찾아온 6명의 대선배 분들은 어제와 같이 전혀 군기같은건 잡을리가 없는 인상을 가진 분들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오디션 끝나고 선배들에게 잔뜩 까이고 난 후에 단톡방에서 '내일 대선배들에게 과연 죽을것인가 살것인가'를 토론하며 긴장하던 우리 학생회 부원들에겐 희망찬 소식이었다.
오디션 두번째 날은 참가자가 전날에 비해 적어서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평가서 쓰는 일 또한 팀이 적으니 퀄리티가 훨씬 높아졌다. 다만 이틀 연속 목을 혹사시킨 회장단과 손경식의 목소리가 제대로 안나오기 시작했다는게 문제였지만.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저도 여러분과 정말 재미있는 시간 보낸것 같아서 좋습니다. 참가자 여러분들도 좋은 결과 받고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럼 여러분 안녕히가세요~"
배경음악과 함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까지 끝날 무렵, 뒤를 돌아보니 한 대선배 분께서 피자를 몇 판 사들고 서계셨다. 큰 체구에 안경을 쓴, 이미 와있던 대선배들에 비해 확실히 나이가 더 있는 분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 대선배에게 인사를 드리러 다가갔다. 솔직히 무서웠다. 혹시나 이 오디션에 허점이 보여서 기합을 받지 않을까? 결코 나 자신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회 부원들이 견디지 못하고 학생회를 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안녕하세요, 32대 학생회장 김교신이라고 합니다."
나는 땀이 가득 찬 손으로 악수를 청했고, 그 분은 그에 응하며 나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야아, 안녕하세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후배님이라고 불러야되나? 하하하하!"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옆집 아저씨가 성장하는 꼬마를 보며 웃는것 같은 순박한 웃음이랄까. 곧 내 온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자 사온거 다 식겠다. 빨리 애들보고 모이라 해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내가 무대 앞으로 학생회 전원을 불러내자, 31대 학생회 선배들은 우리의 평가서를 걷어서 대선배들에게 갖다드린 후, 여유롭게 피자를 가지고 무대위에 올려놓았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와아, 대선배님 포스가 정말 장난 아니신걸요? 으하하하! 악수 한 번만 해주십쇼!"
대선배들이 우리의 평가서를 보고 있을때, 31대 선배들의 아부 섞인 영업용 멘트가 들려왔다. 피자를 사오신 그 대선배 분에게 가서 하는 것이었다.
"뭐, 학생회 문화가 갑자기 아부떠는 문화로 바뀐건가? 허허허"
약간 난처한 듯한 대답소리. 나는 결코 사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성격이 아니기에, 저런 점은 어느정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가끔 처음부터 과한 아부는 안좋은 이미지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저런 멘트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한편 우리의 평가서를 보고있던 대선배 분들이 갑자기 탄성을 내뱉었다.
"와, 이거 진짜 잘썼다. 그냥 평가서가 우리때랑 다르게 예술적인데?"
"나는 회장인데도 3줄 이상 안썼는데.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말이야."
"요즘 애들은 다 똑똑한가봐. 똑같은 무대를 보면서 다른 표현을 쓰네"
다행이었다. 우리의 평가서가 칭찬을 받으니 사실 조금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러면, 대선배님들께 이 후배들이 인사드리겠습니다. 얘들아 Fm인사 준비해라!"
이태민 선배가 큰소리로 외치고, 먼저 자신들이 하겠다며 31대 선배들이 인사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자양고등학교 직선 31대 학생회장! 김!!재!!형!!입니다!!"
그래도 공식적 서열은 지키는지, 31대 학생회장인 김재형 선배부터 시작해서, 체육부 부장인 강현석 선배, 마지막으로 홍보부 부장인 이태민 선배 순서대로 인사를 했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자양고등학교 직선 32대 학생회장!! 김!!교!!신!! 입니다!!"
기분은 별로 굴욕스럽진 않았다. 약간 굴욕스럽다면, 이 인사를 하지 말라고 말리던 대선배 앞에서 굳이 시키려고 애쓰는 31대의 지시에 내가 따라야 한다는 것 정도. 어느새 나도 이 인사에 익숙해졌는지, 나 스스로가 무감각해짐을 느꼈다.
나의 앞에 있는 대선배 분의 미소는 아까와 같았다. 인사를 못한다고해서 화를 낼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실수하면 크게 웃을 것 같았다.
그 때와 분위기가 엄청나게 달랐다. 맨 처음, 내가 31대 선배들에게 혼나면서 인사를 배우던 그 때와. 역시 한가지 또 깨닫는 바가 있었다. 꼰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기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
......
오디션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자양고등학교 축제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회장은 쉬는 날이 없다. 오디션이 끝나면, 바로 다음 날 회의를 준비해야했고, 매일 아침 9시에 나와서 밤9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축제 준비 기간 동안의 일상이다.
-교신아, 내일 밤 10시에 스타시티 로비에서 보자. 축제 인수인계 해줄테니까. 회장단 4명 다 오도록 해.
오디션이 끝난 날 밤, 웬 일인지 31대 회장인 김재형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해준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선배가 왜 나에게 먼저 인수인계를 해준다고 말을 할까? 보통 같으면 먼저 물어본다고 해도 제대로 답을 안해줬을텐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내고 나서, 문득 내가 당선되고 난 직후 이태민 선배가 말해줬던 것이 떠올랐다.
'교신아, 물어볼거 있으면 회장한테 물어보지 말고 나한테 다 물어봐. 김재형은 좀 무능하고 일에 대해서 잘 몰라서, 너한테 제대로 인수인계 못해줄거야.'
그 당시 나는 상당히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자세한 내막은 모르니까, 일단 두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지켜보니, 31대 학생회의 실질적인 리더는 홍보부 부장인 이태민 선배였다. 그에겐 우선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강한 리더십이 있었고, 자신의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크게 키우는 능력까지. 그에 비해 회장인 김재형 선배는 기가 약했고, 선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태민 선배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임기였던 기간동안 여러가지 사건 때문에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일을 할 때 김재형 선배가 이태민 선배에게 혼나는 모습도 가끔 보였다.
그것으로 판단해보면, 한가지 가설이 설정되었다.
'선배들 중 대장노릇을 자기가 못하고 있어서 불만이 꽤나 쌓여있었겠지. 심지어 자기 임기때도 회장노릇을 제대로 못했을텐데 말이야.'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는 것은, 다음 날 10시가 되고나서 알 수 있었다.
......
다음 날 밤 10시, 스타시티 로비에 도착하니 부회장들은 먼저 도착한 상태였고, 그 맞은편에 김재형 선배가 앉아있었다. 김재형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부회장들은 놔두고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교신아, 잠깐 나 좀 따라와봐. 따로 할 얘기 있으니까."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건 뭔가 기회의 발판이라고.
그는 나를 데리고 로비와는 좀 떨어져있는 우편물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야, 지금부터 말하는건 진짜 남자끼리의 비밀이다.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무슨 얘긴데요?"
그는 처음부터 한숨을 지었다. 뭐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솔직히 말해서 이태민이 지금 대장노릇을 하고있잖아. 사실 내가 회장인데, 왜 걔가 너희한테 일을 가르쳐주고 인수인계 해주는지 이해가 안가거든?"
그걸 듣는 중에 한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회장은 니가 아니라 나다 이놈아'
그리고 김재형 선배의 저 말은 마치 자신이 인수인계를 정말 잘해주고 싶었다는 뉘앙스였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이태민 선배랑 같이 아무것도 안알려주려고 스스로 함구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데.
"이것도 비밀인데, 교신아. 너한테 이태민이 인수인계 절대 해주지 말라고 그래서 내가 못한거야."
상당히 모순적이었다. 회장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왜 홍보부 부장의 명령을 듣는가?
나는 김재형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이제부터 모르는거 있으면 다 나한테 물어봐. 내가 회장 출신인데 당연히 내가 제일 잘 알지. 게다가 난 30대 학생회 홍보부 차장도 했으니까 경력만 2년이라고.
김재형 선배가 그 말을 한 순간부터 나는 더이상 을의 입장이 아니었다. 인수인계를 김재형 선배에게 받으면, 아마 이태민 선배가 또 나를 따로 불러서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할 것이고, 그게 반복될수록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으니까.
"당연하죠. 회장끼리 한 번 잘해봐요."
나는 기쁜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부턴 슬슬 힘을 찾을 때가 된것이었다.
...........
어제 휴재해서 참 죄송했습니다 허허 그래서 오늘은 일찍올리네요.
대선배 분들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저희32대 학생회를 찾아주신 분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었습니다. 후배님들이라고 불러주시면서 상당히 겸손하게 저희를 대해주셔서, 소문과 너무 다른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만나보지도 않고 판단하면 안된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맞더군요. 이 점은 저도 약간 판단미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 그리고 이번주 금요일에 학생회 면접이 있습니다! 관심있는 1,2학년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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