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평소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중계에 올라서보니 몸무게가 52kg이었다.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인건지, 며칠 사이에 8kg이나 빠져버린 것이다.
너무 배고픈데, 밥이 영 들어가질 않았다. 식탁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닭볶음탕이 있건만, 먹자니 뭔가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했다.
"갈게요."
"아침밥 안먹고 그냥가?"
"밥 맛이 없어요."
"그래 뭐, 알아서 하거라."
죄송했다. 나를 생각해서 차려놓으셨을텐데, 예의없이 그냥 가버리다니.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배는 고프지만, 숟가락을 올리는 순간 토가 나올 지경인 것을 어떡하는가.
빈 속으로 학교에 도착하고, 미리 멀티실 에어컨을 틀어놓았다. 10시까지 모이기로 했는데 혼자 9시에 오니 멀티실이 휑한게 참 기분이 좋았다.
원래는 혼자가 싫었는데, 혼자 있으니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없고, 나를 내몰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고, 나를 비참하게 하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9시 45분쯤부터 하나둘씩 멀티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1학년 차장들이 인사를 하는데, 뭔가 못미덥다는 것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래도 난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냥 괜찮다는 듯이,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2학년 부장들은 뭔가 나의 눈치를 살피는 듯 보였지만, 내가 아무렇지 않아하니 그들도 평소처럼 나를 대했다.
"다 모였으니까, 일단 자리에 앉아주세요."
10시가 되자 모두 모인 학생회 부원들에게, 나는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애들아, 내가 그렇게 싫냐?"
갑자기 반말로 바뀌어서 그런건지, 나의 눈을 피하던 부원들도 나를 바라봤다.
"내가 여기서 회장을 계속하면 무능력한 회장이고, 그렇다고 그만두면 무책임한 회장이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니?"
말을 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진심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 터져나왔다.
크게 한숨을 쉬고,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극도로 가라앉았고, 침묵만이 무겁게 가득차있었다.
그 때 갑자기 침묵을 깬 것은 다름아닌 체육부장 김태환이었다.
"야 교신아, 그런걸로 울지말자. 난 솔직히 여기서 까놓고 말할게. 그냥 선배들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너 싫어해서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해준거 아니야. 맞지?"
김태환이 나의 편을 들어주며 말하자 뭔가 눈물이 멈추는 듯 했다. 그러나 대답하기엔 목이 너무 막혀있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솔직히 존나 하기 싫어. 학생회 너가 같이 하자해서 했는데, 그냥 진짜 다 마음에 안들어. 그런데 어떻게해, 책임이란게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거지. 그런데 니가 그만둔다고 하면 나도 안할거야. 너를 뭐 학생회장에서 몰아내자고? 참 나 어이가 없어서."
평소 말이 별로 없던 그가 흥분을 해서 말하자, 다들 뭔가 놀란 표정이었다.
"야, 김교신 내가 궁금한게 있는데, 니가 잘못한게 도대체 뭐야?"
신정화까지 가세하자, 부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차장들은 시선이 점점 바닥쪽으로 내려갔다.
질문을 받은 나는 일단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음, 내가 회의시간에 잤고,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지금 모든 부원들이 나를 싫어하게 됐으니 이제 회장 자격이 없다는거지."
"너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어제도 솔직히 이태민 선배 얘기듣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물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과연 모든 부원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일까?"
그러자 신정화와 나의 대화를 끊고 서민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김교신이 잘못한건 맞아. 인정해야돼. 지금 선배들도 다 화나셨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인수인계가 잘 이루어지지 못한거니까, 일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선배들이랑 사이가 좋은 손경식을 내세우자 이런 말이었지. 난 김교신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없고, 그냥 상황이 이렇게 흘러버린것 뿐이야. 나도 김교신한테 더 기회를 주고 싶어. 근데 선배들이 안된다고 하니까 곤란한거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태민 선배란 사람은, 사람을 정말로 비참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고, 자신만을 믿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뭐, 그럴 수 있어. 일리있는 말이야."
뭔가 서민지의 말에 신정화가 반박하려는 듯 보여서 일단 내가 대화를 끊었다. 싸움이 일어나면 또 머리가 복잡해지니 말이다.
"경식아, 니 입장 한 번 정리해봐."
일단 지금 학생회 내에서 가장 기가 센 두명이 나의 편을 든 상태에서, 나에게 어제와 같은 이야기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손경식은 망설임없이 내가 쥐고있는 마이크를 넘겨받고 말하기 시작했다.
"애들아, 나는 진짜 교신이한테 기회를 더 주고싶어. 내가 회장도 아닌데 회장을 해서 뭐해. 솔직히 나도 싫어. 얘는 나랑 친한 친구인데다가, 나도 얘를 회장으로 내세운 사람 중에 하나니까. 근데 선배들이 나를 너무 압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어제 너네 모아놓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야."
이로써 분위기는 반전이 되었다. 이젠 비난의 대상이 내가 아닌 선배들로 바뀌었으니.
"그리고 교신아 어제 전화는 진짜 미안하다. 어제 너랑 통화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선배들이 나 둘러싸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왜 나의 신뢰를 저버리는 말을 했는지.
난 그 사과를 듣고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이해가 됐으니까.
"아, 태환아 어제 내가 전화했을때 있잖아. 그 때 선배들이랑 같이 스피커폰 켜고 너한테 '나 선배들이랑 같이 있는데 올래?' 했을때 니가 '응 안가' 이래서 선배들이 좀 빡쳤어."
그러자 방금 손경식이 말한 전화 내용마냥 김태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응 상관없어."
그러자 멀티실에 있는 학생회 부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야, 할 말 다했고, 그냥 오디션 연습이나 다시 시작하자. 내가 같잖은 회장이어도 그냥 참고 지휘받아. 그리고 앞으로 선배들이 나를 뭐 어떻게 헐뜯어도 먼저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까 여러분?"
마지막으로 내가 힘을 주어 말했고, 부원들은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 내가 선배들과 사이가 안좋은게 단점이라면, 싫더라도 선배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게 회장으로서의 의무 아니겠는가?
이 일을 통해서 나는 몇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사람이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는 것, 세뇌와 분위기라는 요소가 신념이 약한 사람들의 머릿속을 무섭게 파고든다는 것, 그리고 더러운 사람과 친해지려면 같이 더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
...
오전에 일어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후에 찾아온 선배들은 또다시 우리를 집합시켰다.
"애들아, 내일 찬조오디션인거 알지?"
"네..."
김재형 선배의 말에 약간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태민 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야, 대답 똑바로 안해?"
"네!!"
"뭐, 어쨋든 내가 너네 회장한테 기회 한 번 더주기로 했고, 지금까지 열심히 준비 잘 했으니까 실수하지마. 진짜 실수 한 번만 해도 내가 화내는 모습 보게될거니까. 특히 회장, 무슨 사고나도 다 니 책임이다."
"네, 알겠습니다."
"한 번 더 연습해봐. 잘하는지 못하는지 내가 봐줄테니까. 일단 다 각자 위치로 가봐!"
그렇게 모두 다 각자 포지션대로 서자, 이태민 선배와 김재형 선배가 나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실수 한 번이라도 나오면 각오해라."
......
다행히 연습 중 실수는 한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실전이 아닌 이상 실수가 나오기 어려운게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연습이 끝나고 우리를 집합시킨 선배들의 표정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야, 회장단 너넨 평가서 쓰는 일 밖에 없으면서 무대에 호응해주는게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작아? 연습은 실전처럼 해야지."
연습이라하면, 무대에 임의로 한 명 세운 다음 노래만 튼 채로 춤이나 노래를 하고있다고 가정하고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빈 무대에 대고 와아아아!!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말이다.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하니까.
반박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죄송하다고 대답했다. 아마 이 말을 정말 듣고싶었을테니.
"회장단 빼고는 다들 아주 잘했어. 특히 경식이가 진짜 진행잘하네. 아무튼 수고했고, 다들 집에가도 돼. 우린 좀 나중에 갈게."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나는 멀티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옆에 있는 정재근에게 한마디했다.
"저 또라이 새끼들 진짜 두고봐라."
.....
옛추억을 떠올리다보면, 안좋은 기억도 그냥 웃으면서 지나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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