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4)
죄의 결말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질서이며 우리가 결코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무던히 죄를 짓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심판의 처절한 결과에 대해 선지자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었고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판의 외침은
우리 이 시대의 기독교에 대하여도 너무나 절실합니다.
개혁이나 부흥을 부르짖기 전에
교회의 죄의 고발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강력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인이 늘고 교회재정이 풍부해지고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부르며 안일하게 지내다가는 마침내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악해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악해서 세상사람들이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복음이 아닌 거짓 수단들로 사람을 끌어들이기만 하는 작금의 현상 앞에, 어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가 있는 것인지요.
그러나 선지자는
공의의 법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법을 만드시되, 공의의 법을 만드신 분이니 또한 사랑의 법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자기의 죄를 알았으면 무서운 심판을 당하는 중에라도 마음을 찢고, 거의 다 파괴된 절망의 끝자락에서라도 주의 이름을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분이므로 뜻을 돌이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하나님은 언제나 기쁘게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벌을 내리고 고통을 주는 것이 그분의 원래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진정한 뜻은 ... 살리는 것입니다.
심판이 그렇게도 가혹한 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커서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아픔을 무릅쓰고 더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망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리기 위하여 더하여 제정하신 자비의 법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저지르기 기뻐하다 망하게 된 이스라엘의 살길이었으며
나아가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이 ... 살기 위해서 취해야 할 유일한 방책입니다.
...
과연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것인지...
니느웨성 동편 언덕에 앉아 있던 요나의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