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가톨릭과 프리메이슨(펀글)

주방보조 2013. 4. 29. 23:08

* kayoo36 님의 답변

 

프리메이슨에 대한 아래 링크 4 개는 추가 답변입니다.

http://myhome.shinbiro.com/~fatima3/news51.htm

http://http://myhome.shinbiro.com/~fatima3/news80.htm ㅡ 프리메이슨의 계획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303&docid=636011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303&docid=650536&l_url=L2xpc3QvZGlyX2hvbWUucGhwP2QxaWQ9NiZkaXJfaWQ9NjAzMDM=

 

프리메이슨 결사에 관한 교황 레오 13세의 칙서
 HUMANUM GENUS
 (1884. 4. 20.)

 

레오 13세가 프리메이슨 결사의 사악함을 알리다

프리메이슨 결사에 관하여 그 완악한 목표를 본질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파헤친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칙서는 응당 교황 레오 13세의 것인즉, 말할 것도 없이 회칙 서한 후마눔 제누스(Humanum Genus)가 그것이다.

레오 13세는 몇 가지 점에서 나약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는데 공화정으로 재편하는 정책을 폈던 자들, 즉 프랑스를 다스리는 자들의 악덕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그같은 전술상의 오류를 제외하면, 동 교황이 집필한 칙서는 참으로 탁월하여 놀랄 만한 신학적 논문들에 해당된다.

그러면 칙서 후마눔 제누스를 주의를 다해서 면밀하게 살필 터인데, 교황 문서를 따라서 프리메이슨 결사를 연구하다 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모조리 납득할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교황 문서를 연구하지 않고는 사실상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문명의 은덕을 입은 봉신(封臣)이요 그리스도교적인 덕의 절조였던, 이른바 문명화된 우리의 모든 단체가 그렇듯이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교황 레오 13세가 극명하게 밝혀 주었듯이, 프리메이슨의 목표는 모든 그리스도교 기관을 파괴하여 1000년 혹은 1200년도 더 되는 세월 동안에 교회가 일으켜 세운 것을 몽땅 끝장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있다. 도덕률이건 도의이건 신덕도리이건 교회의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조리 다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효율적인 조직이 간섭하는 것이 아니면 그런 파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리메이슨이 몇 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필요하다면 몇 세기가 걸리더라도 승리하고야 말리라"고 예견 및 공표했던 것을 이루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다는 것 말고는 그같은 계획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지속적인 원칙이란 바로 사탄이다. 교황은 그것을 극명하게 밝힌다. 교회에 대항함은 말할 것도 없고 유달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하는 프리메이슨 결사에 연료가 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광포함의 정체를 밝히자면, 사탄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식이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설명이란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프리메이슨 결사와 사탄을 연결해 주는 진정한 결합력이 다름 아닌 비밀 의식 및 비밀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하는 모든 것에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그렇듯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근거를 이해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엄청난 교활성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음을 납득하게 된다. 이는 그 교활성에 걸맞게 남달리 뛰어난 지능이 작용한다는 표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일찍이 프리메이슨 결사의 세력이 지금처럼 막강한 적이 없었음은 물론 그 영향력이 지금처럼 광범위한 때가 없었다. 프리메이슨의 숫자와 그 활동의 대담무쌍함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저들중 상당수가 직접 정부에 침입해 있음에 따라 두려울 게 없음으로 해서 벌건 대낮에도 회합을 연다. 숨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여전히 따로따로 모임을 가져 작전을 논의하고, 계획을 짜며,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존재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이제 저들은 교회를 공공연하게 공격하지도 않는데, 이는 저들이 겨냥했던 것을 교회 스스로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전에는 교회가 프리메이슨 결사를 단죄했는데 이제는 그 프리메이슨 결사가 바라는 위치에 교회가 서 있다고까지 할 수 있게 된 판국이다.

레오 13세는 분명하고도 직설적인 어조로 "그리스도교 문명과 프리메이슨 결사 사이에는 어떠한 협조 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천명했었다. 그러던 것이 우리 시대에 들어서자 프리메이슨 결사 쪽으로 기울어진 그릇된 에큐메니즘을 시행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프리메이슨은 대단히 만족스러워 하는데, 교회가 프리메이슨의 생각과 소망을 구체적으로 수용한 데다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레오 13세는 1884년 4월 20일부로 프리메이슨 분파에 관한 칙서 후마눔 제누스를 발표했다. 그것에는 데 섹타 마쏘눔(De Secta Massonum)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표제에서 볼 수 있듯이 교황은 주제를 얼마 못 가서 없어지고 마는 방식으로 다루려 하지 않는다.

사탄의 도성

교황 레오 13세는 이미지, 바로 두 도성 사이에서 반대편의 것에 해당되는 천주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면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사용했던 이미지를 이용하여 화제를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와 똑같은 이미지가 성 이냐시오(St. Ignatius)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서도 엿보인다. 인류는 두 적대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다.

    "악마가 시기함으로 인하여" 비참하게도 창조주이시며 천상 은혜를 베풀어주는 분이신 천주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로 인류는 두 가지의 색다르고 반대되는 부분으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진리와 덕행의 편에서 싸우는 편이요, 다른 하나는 덕과 진리에 반하는 것의 편에서 싸우는 편이라. 하나는 지상의 천주님 왕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요....다른 하나는 사탄의 왕국이라.

교황은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명을 진전시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겨루는 까닭에 법률적으로도 반대가 되는 두 도성을 좇아, 그렇듯 양편의 왕국을 예리하게 구별하여 묘사함과 더불어 지극히 간결하게 각각의 동인(動因)을 설명하였음이라....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을 인용한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이루나니. 자아를 사랑함은 천주를 모욕하는 데까지 이르고, 천주께 대한 사랑은 천상의 도성, 즉 자아에 대한 멸시로 이끄느니라.

그래서 그것들은 완전히 반대인 것이다. 천주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멸시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아를 경멸하는 반면, 사탄은 그와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인 자기 중심성을 천주께 대한 멸시 및 천주께 반대되는 곳으로 옮아가게 한다.

    매 시기마다 각각은 비록 늘 같은 열성과 공격의 정도는 아니지만 다양한 무기와 전투로써 다른 것과 갈등을 이루는도다.

교황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문헌과 교회의 역사를 배열하면서 두 도성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악한 도당이 한데 뭉침은 물론 혼신의 힘을 모아 싸우고 있는 듯한즉, 강하게 조직화되고 널리 보급된 프리메이슨이라 불리는 모임에 의해 꾀이거나 원조를 받고 있도다.

그리하여 레오 13세는 프리메이슨 단체를 특징짓기를 악마의 도성, 사탄의 도성이라 일컫는다. 그는 그들의 목표를 일일이 열거한다.

    저들은 자기네 목표 중 어느 것도 더 이상 비밀로 삼지 않음은 물론 감히 천주님 자신을 거슬러 일어서고 있음이로다. 저들은 공공연하게 드러내놓고 성교회를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있나니, 그리스도교계 나라들에게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강복을 될 수 있는 대로 철저하게 약탈하려는 목표를 세움으로써 그렇게 하는도다.

그같은 사실에 직면하여 또 그렇듯 긴박한 상황에 맞닥뜨려 교황은 최고 주교로서, '마귀다!' 하고 소리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결론짓는다.

    짐의 권에 맡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온전하게 유지될 뿐만 아니라 날로 성장하여 전 세계에 확장될 수 있도록,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누가 악마인지 표시해 주며, 온 힘을 다해 저들의 계획과 발상에 맞서 봉기하는 것이야말로 짐의 임무니라.

이전에 있었던 선고문

교황은 이전의 교정권에 의지하여, 자신이 그토록 끔찍한 원수의 공격에 직면하여 경보를 울린 최초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의 전임교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번 공부에서 이미 인용 및 연구된 바 있는 문서들, 즉 클레멘스 12세, 베네딕또 14세 그리고 비오 7세의 문서들을 언급한다. 이상의 문서들이 중요한 것은, 교황이 과거의 것을 근거로 해서 무엇인가를 단죄하거나 인가하면 자신의 말에 힘을 더 실어주기 때문이다. 똑같은 주제에 관하여 그렇게나 많은 교황들이 이미 말하고 반복했던 것을 "짐도 또한 전임교황들께서 말한 바를 모두 확인하노라"는 식으로 재고하는 관습이야말로 교회에 힘이 되는 일이다.

같은 식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그런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선고문은 교황이 그저 사견을 말할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한, 교회의 참된 교정권임으로 해서 무류한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런 경우에 레오 13세는 사견을 표명하기보다는 교황들이 이전에 말했던 것을 모두 상기시키는 방법을 쓴다. 위험을 고발해 주는 것이야말로 교황들의 의무라 여겼기에 그는 프리메이슨 및 그 분파에 대항하여 파문이라는 조처 및 교회법상의 벌칙을 마련했다는 것을 일일이 열거한다.

    그렇게 하는 것에 분개하여 부분적으로는 교령들을 멸시함으로써 또 어느 면으로는 비방함으로써 교황들이 내린 교령의 힘을 교묘히 피하거나 약화시키려던 요원들은, 교령에 있어서 적정한 정도를 지나쳤다거니 혹은 정당치 않은 것을 반포했다거니 하면서 선고를 내린 최고 주교들을 무고했나니. 이는 저들이 기를 쓰고 교회의 권위 및 비오 7세와 비오 9세 뿐만 아니라 클레멘스 12세와 베네딕또 14세의 교황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했던 태도 바로 그것이니라.

레오 13세는 역대 교황들 및 국가들이 행했던 것에 의지하여, 그들 중 많은 이가 그 분파들로 하여금 국내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는 것을 하나하나 나열하되, 다음과 같이 일일이 거명한다.

    많은 군주들과 정부의 우두머리들은 자진해서 특별법을 제정하였거늘, 예컨대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바바리아, 사보이 및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들에서 그랬듯이 유해하다는 낙인을 찍거나 혹은 프리메이슨의 결사를 교황청에 고발하는 것을 자기네 사업으로 삼았음이로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일로 중요한 것, 즉 일이 되어 가는 양상은 짐의 전임교황들의 분별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를 증명해 보였음이로다.

프리메이슨 결사의 진전

교황은 자신의 전임교황과 국가 원수들이 그렇게 관여했음에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리메이슨이라는 분파는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에 상상을 초월하여 급성장했나니.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도, 교황들이 하지 않은 것이라곤 도통 없었음에도 프리메이슨 결사의 활동을 반대하는 국가 원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정도로 프리메이슨이 잠식해 버렸음을 말해야겠다. 프리메이슨 결사가 추방당한 나라 가운데 교황들의 활동을 지지 및 찬성하는 세력이 다 없어지고 만 것이다.

지난번의 전쟁이 일어났을 적에는 그나마 마샬 페탱(Marshall Petain)이나 살라자르(Salazar)에 의한 가냘픈 저항의 몸부림이 있었으니, 그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에 대항하려는 뜻에서 몇 가지 조치를 강구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정부 상태 혹은 전쟁으로 인한 특정 상황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악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었던 사람들, 즉 배반자가 프리메이슨의 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산발적인 시도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리메이슨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용감한 인물이 사라지자 물 건너 가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의 저항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와 반대로 모든 나라 심지어는 이른바 가톨릭 국가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프리메이슨이다.

    이제로부터 노심초사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으리니...

선견지명이 있었던 교황은 장래를 걱정하였으니, 그 위험이 지대하다고 주장한다...

    ...실로 교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나--그 기초가 하도 튼튼한지라, 인간의 노력으로는 감히 뒤엎지 못하리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교황이 목격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말했듯이 교회는 절대로 전복되지 않으리라는 확언은 했을 것이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교회의 원수인 프리메이슨 및 프리메이슨 결사가 교회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들 사이에서 그 열렬한 지지자 혹은 괴뢰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 식의 침범을 이루리라고는 꿈도 못 꿨으리라.

    ...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분파 혹은....그와 유사한 다른 분파들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국가에게는,....

교황은 그렇듯 보편화된 음모에 직면하여 마냥 침묵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선언한다.

    짐의 전임교황들의 표양을 따라, 악을 편드는 세력을 빛 가운데로 더욱 더 데려오기 위하여, 프리메이슨결사 자체와 그 전반적인 가르침과 그 목표 그리고 사고 방식과 행동 양상을 직접 다루고, 또 엄청나게 앙화로운 전염병을 저지하고자 짐이 할 수 있는 바를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짐의 의향이니라.

교황이 가하는 또 한 차례의 공격은 바로 그 분파에게서 과도한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우선 분파의 존재에 관해서 말한 다음에는 그 목표에 관해서 말할 것이고, 목표들을 설명하면서 그 이론의 통탄스러운 결과를 공표하고, 마지막으로 처방을 제시한다. 칙서의 윤곽을 보면 (1) 저들의 분파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함, (2) 저들 활동의 목표, (3) 저들의 원칙에 대한 해설, (4) 저들 원칙의 결과, (5) 저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 (6) 저들에게 적용할 만한 처방들이다.

모두 한통속에 지나지 않는 비밀결사

    예식을 보거나 모습과 근원을 볼 때, 그 이름은 다를지언정 일치된 목표와 유사한 주요 의견으로써 똘똘 뭉친 몇 개의 조직체가 있나니, 그들은 자기네가 퍼져 나가는 중심인 동시에 귀착지가 되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분파와 함께 그저 한 가지만을 이루려 하는지라. 그 조직체들은 이제는 눈에 띄지 않게 있으려는 소망조차도 보이지 않음에 따라, 대낮에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회합을 열고 자기네 나름대로 소식지를 발행하며, 그러다가도 철저하게 알려지노라면 이전과 다름없이 본색과 비밀결사의 행태를 숨기는도다. 저들의 결정 사항과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 및 수단은 물론이거니와 저들의 비밀과 최종 목적, 주요 지도자의 이름 그리고 모종의 은밀하고도 내부적인 회합들과 같이, 외인들에게는 물론 자기네의 많은 회원들에게마저 조심에 조심을 다해 본성을 감추도록 규칙을 정한 것을 보아하니 비밀스런 것들이 많고도 많음이로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회원들간에도 계급과 등급을 각기 다르게 부여받음이요, 중대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되--자격, 직책 및 특권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두는 동기가 되니라.

    지원자들은 보통--특별 선서로써, 아니오, 라고 맹세하겠노라고--약속하라는 명령을 받음에 따라 그들은 아무에게도, 언제든지 혹은 어떤 식으로든지 회원, 과정 혹은 논의되는 주제를 절대로 알리지 않으려 하는지라. 그리하여 겉으로는 속임수를 쓰는 가운데 언제나 한결같은 모양새인 듯 꾸미면서, 프리메이슨은 그 옛날의 마니교도와 같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함은 물론 자기네 요원 외에는 아무런 목격자도 없게코자 애쓰는도다.

그 결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한 교황은 저들이 있는 그대로의 본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이려 함을 지적한다.

    ...저들은 배울 목적으로 모인 문학가 및 학자의 신분인 양 사칭하나니. 훨씬 세련된 품위를 지향함에 대하여 자기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를 말하는 한 편으로 빈자(貧者)를 사랑한다고 역설하며,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란 그저 대다수 민중의 환경을 개선하여 시민 생활의 유익을 가능한 최대다수와 함께 누리는 것이라고 공언하는도다....

    그러나 짐짓 겉꾸밈으로써 숨겨진 채로 있으려 하고,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결박하여 충분한 근거를 대지 않아도 노예처럼 맹목적이게 만들며, 숨어있는 다른 이의 의지에 노예화된 자들을 이용하여 오만 방자하게 굴기를 밥먹듯 함은 물론, 무기를 가지고 오른 손에 피를 묻힐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마련한 다음에는 살인을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노라고 하는즉--그 모두가 인간성이 설자리를 잃은 극악무도함에 지나지 않음이니라(역자 주: 비밀결사는 감언이설과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진짜 목표는 감춘다. 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눈이 멀게 하는 것으로,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결속을 다진 다음에는 사람들을 결사에 묶어놓는다. 그러나 결사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의무가 어떤 종류인지 알지도 못하며, 그런 식으로 해서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비밀결사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며, 따르지 않는 자들을 죽이려 든다. 비밀결사는 무장된 자들을 준비해 놓고는 그들에게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처벌당하지 않으리라고 한다).

교황은 그 결사들의 은폐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저들이 범하는 죄를 고발하되, 그 악한 열매로써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 결사의 기본 조약

그리고 나서 교황은 명심해야 할 문장, 그러면서도 심히 통찰력 있는 문장을 써서 프리메이슨이 설정한 목표를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향해 몰아가는 것인즉--그 의도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일구어 낸 세계적인 종교 및 정치 질서를 송두리째 타도하는 것과 저들의 관념에 일치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바꿔치는 것으로, 그 기초와 법칙은 다름 아닌 '자연론'으로부터 도출되니라.

우리 사회의 기초를 완전히 바꾸는 것, 이는 불행하게도 프리메이슨이 감행하되 악마적인 수법으로써 달성한 상태를 말한다. 그같은 심적 경향, 생각, 세계관의 변화는 저들이 탈취하여 장악한 학교 및 모든 교육 과정을 통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들이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독극물을 들이키게 하는 식의 사악한 전복을 꾀하는 중에 야금야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부지불식간에 정신 구조가 바뀌고 말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는 동안과 그 이후에 초래되었으면서도 그 기원이 프리메이슨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 현대주의 및 그릇된 에큐메니즘의 입김을 쏘인, 마찬가지 방식의 변화와 변혁은 다 전염성이 강한 변혁들이다. 쉼 없이 반복하건대, 그런 변혁에는 더 이상 가톨릭 정신이 담겨있지 않음으로 해서 오염된 변혁이다. 그것들은 다른 정신을 발산한다. 그런 변혁에 따라 살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데 익숙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가톨릭 정신이란 것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런 자들은 보속과 희생과 금욕의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교계제도를 존중하는 마음도 누군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도 더 이상 없다. 틀림없이 그렇다.

신성함에 대한 공경이란 바로 전례 안에 계시는 천주, 인간과 사물 안에 존재하시는 천주이신 바로 그 천주를 공경하는 것인 까닭에, 첨례(축일)에 따른 전례가 가르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는 공경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함이란 그런 것을 뜻한다. 현대식 예절에서 접하게 되는 세속성과 비속성(卑俗性)은 공경심을 파괴한다. 성체성사께 대한 공경심도, 인간이나 교계제도에 대한 공경심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절의 꽃은 바로 공경심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개인 안에, 만물 안에 계시는 천주님을 흠숭하는 법인즉, 천주께서는 성사에 실제로 계심으로써 현존하신다. 전례를 지배하는 장엄한 예식은 모두 장궤로써, 경례로써 천주께 대한 공경의 표시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무를 행하는 중에 사용되는 물건, 예컨대 신성한 그릇들에 대해 공경의 몸짓을 표현한다든지, 사제가 영대를 걸치기 전에 친구(親口)를 한다든지 혹은 기타 등등을 통해서 천주께 대한 공경심을 표한다.

우리는 또 이웃도 존중해야 함에 따라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인간 상호간에 아무런 존중의 표시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대하고, 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은 채 인간을 일종의 짐승처럼 취급하는 광범위한 야비함보다 더 불쾌한 것은 없다. 영혼은 천주 성신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 우리의 영혼 안에는 뛰어나게 거룩한 무엇인가가 있으니, 우리가 그들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존중해야 하듯 다른 이들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이와 연관됨에 있어서 비속성은 추방돼야 마땅하니, 우리 주위의 사람 대하기를 마치 그들 안에 신성한 것이라곤 있지도 않다는 듯이 처신해서는 아니 된다.

프리메이슨 결사의 기본 원칙

교회 및 가톨릭교의 파괴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다 하는 프리메이슨 결사의 목표를 만천하에 드러낸 후에, 레오 13세는 그들을 지배하는 기본 원칙의 목록을 일일이 열거한다. 그들의 행동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면서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도 식별해야 한다고 한다.

    거듭하건대 그들 [협력 단체] 중 어떤 것은 때와 장소의 조건에 따라 이리 저리 휘둘리나니, 다른 이들이 통상적으로 시도하는 것보다 더 작은 일을 겨냥하거나 저들이 직접 시도하려는 것보다 더 작은 일들을 겨냥하기 위함이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프리메이슨 연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즉, 프리메이슨 연합은 공언된 견해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행하거나 이룬 것을 가지고 평가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니라.

이상은 전임교황이 행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데, 레오 13세는 프리메이슨 결사의 원칙을 더 깊이 고찰하려 했기 때문이다. 19세기초의 교황들은 프리메이슨이 스스로를 은폐하는 수단인 비밀주의와 그들이 범하는 죄악을 특별히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원칙을 샅샅이 조사하지는 않았었다.

제1 원칙: 자연론

    자, 자연론자들의 기본 이론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인간의 본성과 이성이 여신인 동시에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라(<르페브르 대주교 강론집: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P.37, 1999년, 선우미디어).

자연론은 교황이 프리메이슨 결사에 대해 선고를 내리게 만든 제1의 원칙이다. 대충 생각해 보아도 자연론이란 결국 인간의 본성에 의존함과 더불어 그것을 규율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인즉, 자연론은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아담과 에와의 죄로써 원죄가 생긴 이후로 계속해서 인간은 성총을 잃기도 했거니와 본성도 파괴되었고 뒤죽박죽인 데다가 무질서해졌다고 한다. 그 점을 계속 명심해야 할진저. 이는 성 토마스(St. Thomas)께서 매우 명쾌하게 연구한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절대로 필요한 내용이다. 인간의 본성이 원죄로 인하여 상처받은 것을 보면 그 방식이 네 가지다. 또 성 토마스에 의하면 성총이 회복된 후에도 그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성세성사의 성총으로써 죄에 해당되는 원죄가 없어진다 해도 본성에는 흔적, 다시 말해서 그 효험이 남아 있다.

네 가지 상처에는 우선 무지의 상처가 있다. 무지로 인하여 상처받는 것은 지덕(智德)으로, 그대로 있어서는 아니 되는 모습이다. 무지한 자 및 오류에 기울어진 자는 분별력이 없음으로 해서 신중하지 못하다. 깨우침이 올바르지 못한 탓에 기어코 죄를 범하고야 만다. 사추덕(四樞德)이 상처받음에 따라 지덕은 오류로써 상처받았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이면서도 으뜸인 덕에 해당되는 의덕(義德)은 서로에게 마땅한 것을 천주님, 우리의 이웃 및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덕이다. 이 덕목은 악의로써 상처받았다. 우리 안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원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불행하게도 그것을 인간 안에서 보기 때문이니, 악의(惡意)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상처는 용덕(勇德)을 시달리게 하는 나약함이다. 인간은 더 이상 유감(유혹)에 저항하지 못한다. 나약해져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려움에 맞닥뜨린 용덕이 씩씩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상처는 절덕(節德)을 공격하는 것으로 색욕(色慾)이다. 인간은 세물(世物), 말하자면 돈과 쾌락을 즐기려고 하는즉, 색욕의 이끌림에 맞서려면 절덕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그같은 쾌락을 즐기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은 또 교만, 명예욕으로 말미암아 쉽게 동요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서, 이상의 네 가지 상처는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자연론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프리메이슨과 현대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은 그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한 까닭에 교회가 무질서라고 이를 때에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쾌락을 요구하는 것은 본성인 까닭에 허용되어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있고, 그것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신앙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인간이 본성적으로 상처받아서 욕구가 무질서해졌다는 것을 시인할 양이면...그리고 나서 무질서를 따르도록 부추겨진다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인간이 나약하다고 고발할라치면 저들은 아니다, 인간은 나약하지 않다고 응수한다. 인간에게는 그런 즐거움을 취할 필요가 있고 또 권리가 있다고들 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인간의 권리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본성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고 한다. 그나마 무한정 자라지 못하게 속박하는 한계라곤 하나밖에 없다면서 그저 공공 질서를 방해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우리와 갈등을 일으켜 싸우는 자들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인간이 밑바닥 본능을 따를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평화를 훼방하지 않는 것, 경찰과의 대치를 피하는 것(그런 경우에도 주로 경찰을 비난함) 한 가지 뿐이다.

아뿔싸, 사회가 프리메이슨 결사의 그릇된 원칙을 기저로 하는 경우, 우리가 어디로 이끌리는지를 보라. 저들의 자연론이 이르는 곳은 이상과 같다. 또 교황들이 '자연론'을 단죄한 것을 볼진대, 저들이 가리키는 것은 본성 그 자체도 인간성도 아니요, 인간성이 원죄로써 상처받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우리 본성에서 무질서해진 것이라고 해서 다 거부하지는 말아야 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요, 각자에게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을 거스를 권한이 없다는 것만을 주장하는 오류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들이 인권으로써 의미하는 바는 각기 자유를 희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성향을 볼진대, 프리메이슨 결사의 그같은 신조에 동조하는 쪽이다.

합리론

교황은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자, 자연론자들의 기본 이론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인간의 본성과 이성이 여신인 동시에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라. 이는 저들이 천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면 무엇이건 다 부인하며, 인간의 지력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의 신덕도리나 진리 어느 것 하나 그냥 내버려두지 않음은 물론, 권위 때문에라도 마땅히 신뢰받아야 하는 스승마저 용납치 않는 연고라.

이상과 같은 이유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천주님도 주인도 원치 않는다. 우리 시대에 모든 나라에서 무성하게 횡행하는 것으로, 가르침에서 일어난 온갖 변화의 해답은 그와 같다. 가르침에는 이제 가르치는 누군가로부터 비롯되는 권위란 것이 없어져 버렸고 그 보다는 차라리 대화를 택하는데, 그 이유는 누군가 자신에게 진리에 대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황이 말하고 있는 바는 요컨대 다음과 같다.

    저들은 ...권위 때문에라도 마땅히 신뢰받아야 하는 스승마저 용납치 않는 연고라.

앞으로 교사에게는 신앙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즉, 마치 각자 나름대로 진리를 생각하거나 믿어야 하기라도 하는 양, 교사에게는 진리를 강요할 권한이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지도 않기 때문이라나. 세상에, 누구나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견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관념이 충돌한 결과라고 저들은 말한다.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생각을 표현하는 법이라면서, 그런 방식으로 지식에서 진전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는 최근 들어 참된 지식을 파괴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 이유는 교정권의 가르침, 말하자면 이미 획득된 전통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물리학 관련 학문--화학, 공학, 기타 등등--에서는 다른 식으로 다루어야 한단다. 그런 학문에서는 일시적인 자기 나름의 생각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것으로,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따르지 않기로 정하는 경우에는 분명히 실패작이 되고 말 것을 개척해야 하는 얼간이가 되고 만다.

러시아와 미국의--거대한 무기고를 비축한--초 권력자 둘을 예로 들어보자. 탄도탄 관련 학문이나 기계 관련 학문이란 것이 없어야 한다면--아무라도 그런 문제에 관해서 좋을 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 한쪽에서는 군비, 폭탄, 지대공 미사일과 대지공 미사일 그리고 기타 등등을 확충해도 된다고 한 원칙들을 저버린 결과 저항력이라곤 전혀 없는 자기 경쟁자를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를 계속하리라. 이는 그리 탐탁지 않은 곤경의 원인이 될 게 뻔하다. 그런 경우에는 원칙을 따라서, 원칙대로 일을 추진하라고 알려줘야 한다. 그런 문제에서는 자기 의견을 따를까 어쩔까 망설이는 자가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철학과 신학을 볼진대, 중요한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 나름의 의견을 따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음은 물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렇듯 나름의 의견을 따르는 철학과 신학에는 아무런 기반도 없고 진리도 없는 탓에, 나름대로 의견을 따르는 방식으로는 지성이 말살 당하기만 한다. 또 그같은 이유로 대학교에서까지 가장 기초적인 기본 원칙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무지가 득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연론과 합리론이라는 오류

자연론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꼭 이해해야 한다. 역대 교황들의 저작물에서 거듭 거듭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역대 교황들이 자연론을 끊임없이 거론함에 따라 그들이 어째서 그토록 자연론에 집착하는지를 파악해야 하는즉, 자연론은 죄가 사해진 다음에도 원죄의 결과로 상처를 입은 인간 영혼의 불균형에 관한 것이로되 교회의 교리에 대립하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이를 아주 잘 깨닫고 있다. 비정상적인 욕구의 매력을 곧잘 경험하는 가운데서도 절제, 굳셈, 정의 그리고 의견과 같은 덕을 제대로 사용하여 삼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본능이 선하다고 존중함에 따라 그 본능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여기는 프리메이슨의 이론에 동의해야 하겠는가? 어디로 향할 것인가? 결과는 진작에 나타났으니, 무질서, 마약, 부패, 파멸과 자살이 그게 아니고 무엇이리요? 안타깝게도 그런 이론은 실제로 자살, 영혼 소멸로까지 인도한다. 그같이 그릇된 관념이 인도하는 곳은 그런 것인즉, 그 때문에 자살하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초자연적 질서 및 자연적 질서를 부인(否認)함

교회가 가르치는 바에 따른 자연에 관한 교리와, 오류에 속해 있으면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반박하는 자들이 공언하는 자연론 및 합리론을 잘 파악해야 한다. 프리메이슨은 모든 진리와 종교상의 신덕도리를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소멸을 꾀한다. 교회 및 진리와 신덕도리를 가르치도록 위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단체는 어떤지 교황 레오 13세가 상기시켜주는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께로부터 부여받은 진리를 말로써 반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을 향한 다른 신성한 도움, 직책의 권위를 가르치며 다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섞지 않고 순전히 똑같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특별하고도 고유한 의무니라....

거론된 도움이란 성총, 성사, 기도, 미사성제들을 말한다. 그것이 교정권의 역할이요, 교회가 목적하는 바다. 아무에게도 신덕도리 하나라도 바꾸거나 고칠 권한이 없을진저. 프리메이슨이 말하듯이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면, 절대로 불변하는 교리가 없다면 진리는 상대적이게 된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천주님에 관하여 절대 진리란 없는 셈인 것이다.

교회와 프리메이슨 결사: 대화란 것이 있을 수 없다

프리메이슨 결사는 자기네 목표는 어떤 것도 부인한 적이 없는 데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고 나자 성직자는 마치 아무거나 다 해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으니, 프리메이슨 결사와 연합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개방'이라는 것의 부분인 동시에 한 덩어리로, 이는 대화의 공의회, 에큐메니즘의 공의회였던 공의회에 의해 선포되었다.

최근에 독일 주교단은 다음과 같이 매우 시사적인 문헌을 발행했다.

    1974년에서 1980년에 걸쳐, 독일의 주교단 회의와 프리메이슨 총본부 연맹의 계약에 의거하여 교회와 프리메이슨 결사간의 공식 회합이 개최되었다. 독일 주교단 회의는 전문가 회의 참가자에게 의뢰하기를, 우선은 프리메이슨 결사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확인하고, 둘째로는 교회와 프리메이슨 결사 둘 다에서 회원 지위의 양립성을 조사하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와 비슷한 것을 읽노라면, 너무도 믿어지지 않는 까닭에 이것이 정녕 꿈은 아니런가 하고 생각하리라.)

    ...셋째로 전술한 문제에 관한 확답이 있는 경우에는 공식 캠페인에 의한 태도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공공 여론을 준비시키라고 했다....

독일 주교단은 세간의 평판을 교회와 프리메이슨 결사의 연합에 호의적이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플롱카 다싸크(Ploncard d'Assac)가 기술했듯이, 그들은 '개방'이라는 것을 한답시고 아주 멀리 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독일 주교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문을 열어 선량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함께 대화를 나눠야 함은 물론 호의를 지닌 집단과 기꺼이 접촉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바오로 6세는 이론적 기반을 넓히면서까지 그렇게 하라고 주장했으며, 실질적인 방침을 지시하여 개방적인 대화를 하는 데 적합할 갖가지 집단을 따르게 하였으니, 이는 교회가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방식으로 인식하는 대로라면 제대로 이해되는 인간의 자유로되 사사롭건, 종교적이건, 공적인 생활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프리메이슨 결사와 대화할 것을 장려하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 문헌에서 독일 주교단이 설명한 내용은 치명적이다. 프리메이슨 결사와 거의 같은 용어에 상당하는 종교의 자유를 채택한다는 것은 믿을 자유, 모든 종교의 자유, 그리하여 오류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에 프리메이슨 결사가 협조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의 태도를 보고 프리메이슨 결사는, 자기네의 인권에 대한 태도와 별 다름이 없는 인본주의적인 인간의 자유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결국 인권이란 인본주의자가 기꺼워하는 것만을 하는 인권이요, 자기가 바라는 것만을 하는 인권인 것이다.

또 독일 주교단이 제안하는 것을 보면, 본질적인 면에서 독일의 프리메이슨 결사가 자선 기관을 지원하는 것을 볼진대, 그런 일은 일종의 애덕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에 분명히 동(同) 결사와 교회 사이에 접촉점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급기야' 독일 주교단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에 이른다.

    ...지금과 같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사는 어떤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노상 이루어지는 상징 및 예식과 마찬가지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프리메이슨 결사의 상징 및 예식으로써도 충족시킨다는 사실에 비추어, 거기서도 상호 이해에 도움이 되는 공통점과 기반을 찾을 수 있다고 추정하는 바이다....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사탄에 의한 프리메이슨 결사의 의식과 교회의 전례 사이에 공통점이라니! 그런 구절이 공식적인 주교 문서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행히 그들은 플롱카 다싸크가 진술했듯이, 다음과 같이 어느 정도나마 바로잡는다. "주교단 회의의 문건은 그 무게와 가치를 싣고 있다. 그 부분만큼은 멍청함, 환상 그리고 이미 들은 바 있는 타협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문건의 논조가 갑작스레 다음과 같이 바뀌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교회와 프리메이슨 결사의 동시 회원 자격에 관한 그같은 의견은, 거론된 언론 캠페인을 좇았던 지난 번 공의회를 완전히 잘못 해석함으로 해서 도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장은?

    문제를 진정으로 적절하게 검토하려면 프리메이슨 결사의 핵심을 연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주교단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공식적인 의식(儀式)을 연구했으니,

    파악된 것을 보건대, 프리메이슨 결사가 교회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 회의의 결론이 내려진 직후인 올해에 발행된, 프리메이슨식 프로그램에 해당되는 2000년 동안의 명제들을 읽기만 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것을 보면 저들은 원칙적으로 계시된 진리의 가치를 부인하며(그에 따라서 신덕도리를 부인하며), 종교무차별주의의 결과와 같이 계시 종교란 아예 무시되어 있다.

이는 레오 13세가 사용했던 말과 똑같은데, 프리메이슨에게는 계시 종교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첫 명제를 근거로 하면, 고유 의무를 강요할 만한 종교 철학 체계란 전혀 존재치 않는 것이다.

그런즉 저들의 논제에 따르면, 어느 하나만을 두고 참되다고 할 수 있는 종교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모욕 행위를 노골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교회가 다른 교파와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어떤 어조를 사용하든지 유행에 뒤진 경고조의 태도 및 프리메이슨 결사를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 근거가 교회에는 전혀 없다는 식의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프리메이슨 결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가 맨 처음 세 단계의 프리메이슨 계급의 의도가 무엇인지 검토하기 시작한 순간, 가톨릭 교회는 넘을 수 없는 반항이 밑바닥에 깔려있음에 유의해야 했으니, 근본적으로 보건대 프리메이슨 결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프리메이슨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상대주의 세계관이다.

    객관적인 자료로 취급되는 프리메이슨 국제 사전에 의하면, 프리메이슨 결사야말로 신조, 이념 그리고 제도에 관하여 광범위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단언한다. 프리메이슨 결사는 인본주의 이상을 장려하는 데 목적이 있는 신념을 상대주의자인 사람들에게 모아주는 데 도움이 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주관론은 계시된 천주님의 말씀에 깃 들어 있는 신앙과 타협을 이룰 수 없다.

프리메이슨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독일 주교단은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계속한다.

하나 밖에 없는 객관적 진리를 거부함

    전문가 회의가 열리는 동안에 프리메이슨인 레싱(Lessing)의 좌우명이 공개적으로 인용되었으니, "만일 하느님이 오른손에 진리란 진리는 몽땅 쥐고 있고, 왼손에는 진리 탐구를 쥐고 있다면, 내가 영원토록 잘못 생각했음을 시인할 때마저 그분이 '택하라' 하시면, 겸허하게 그 왼손을 향해 내 몸을 내던지리라."

결국 천주께서 한 손에는 진리를, 다른 손에는 진리 탐구를 쥐고 있다면 레싱은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진리 탐색의 길에 남아있고자 왼손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프리메이슨은 또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나는 또 아버지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나를 벌하소서, 온전한 진리는 당신만을 위한 것인즉,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일을 더 좋게 여기나이다. 나는 진리 탐구를 택하나이다."

진리를 거부하고 좋으신 주님더러 진리를 주시기보다는 차라리 벌해 달라고 하다니,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해 발행된 문헌, 종교의 자유에 관한 가우디윰 에트 스페스(Gaudium et Spes)이건 디그니타티스 후마네(Dignitatis Humanae)이건 아무거나 주의를 다해 연구해 보면, 하나같이 종교란 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라는 식의 관념만이 들어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라는 곳이 어떻게 해서 그따위 것을 단언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이미 주어져 있다. 프리메이슨을 기쁘게 하려던 자들 모두와 상대주의로써 설명되는 프리메이슨식 이론을 공유하기도 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란 그저 다음과 같을 뿐이다.

    독일 주교단은 계속하기를, 프리메이슨 결사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리의 상대성뿐이며(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란 없다고 하며), 그것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신덕도리상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진리에 관한 그같은 개념은 진리에 관한 가톨릭적인 개념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자연 신학의 관점은 물론 계시에 의한 신학의 관점과도 모순을 이룬다.

    프리메이슨에게 있어서 종교의 개념이란 상대주의자의 것으로, 종교란 다 신적인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공동의 시도로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 프리메이슨이 지금까지도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보라.

다행스럽게도 독일 주교단은 다소 용기를 내어 그런 문헌을 발행했으니, 그것은 공의회 이후에 그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표명한 첫 번째 것이었다.

공의회 동안 자신이 프리메이슨과 대화하는 것에 열렬히 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유명한 예수회원에 의한 논문으로서 로마에서 발행된 키빌타 카톨리카(Civilta Catolica)를 볼지니, 독일 주교단이 발견한 것을 경멸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오, 그것은 독일 주교단에게만 그럴 것이며,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마에서 발행되고 예수회원들의 지휘를 받는 가장 중요한 가톨릭 저널에서 읽는 것도 그와 같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공의회 이후에도 프리메이슨과 교섭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인즉, 그것은 우리의 신학과 철학의 괴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남아나는 것이라곤 도통 없지 않은가.

100년도 더 전에 이루어진 레오 13세의 선언문을 연구하면서 이상에서 밝힌 것과 같은 식의 여담에 빠져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다. 1세기가 지난 후인 우리 시대에도 프리메이슨의 원칙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은 상태다. 그것들은 변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교회를 못 견뎌 하기까지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프리메이슨 결사에 맞서지 않고는 못 배긴다. 저들은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진리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신덕도리란 없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계시된 진리 및 신덕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오 13세가 단언한 대로 프리메이슨은 계속해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를 있는 대로 다하리라는 이유가 그것으로, 교회는 반드시 프리메이슨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불일치하는 것이다. 저들의 자연론적 원칙은 교회의 교리를 정식으로 거스른다. 이는 교황이 다음과 같이 단언한 바에 해당된다.

    종교 관련 문제에 있어서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특히 절제 없이 제멋대로 활동하기에 어디가 더 자유로운지를 알려주어, 누구라도 프리메이슨이 자연론자들의 정책을 실제로 이행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원치 않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게 할진저. 저들은 그같은 결과--즉, 시민 국가에서 교회의 직책과 권위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오래 동안 무진 애를 썼음이로다.

국가의 속인성 그리고 교회를 거스르는 싸움

    그와 똑같은 이유로 저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융합돼서는 아니 된다고 백성들에게 선포 및 논쟁하나니.

저들의 자연론에 따라 프리메이슨은 국가가 세속화해야 한다고 설파하되,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고 신덕도리 및 객관적 진리가 제거돼야 한다고 한다. 저들은 국가가 시행하는 공립 학교와 대학 교육에 영향을 주어서 그리 되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정신과 영혼을 세속화시키고, 특별히 천주를 억압하는 쪽으로 유인하는 자기네 상대주의적 관념을 투입하려 한다.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예거한다.

    저들은 또 자기들이 품고 있는 적의로써 교회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교회--최상의 안내자인--를 멸시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고 여기는지라.

일을 추진하다가 최고로 불가능한 자유는 교회에 떠넘기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적대적이지 않은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교회 활동의 자유를 훼방하는 쪽으로 짜 맞춰진 법규로써 이루어진다. 게다가 성가신 법규를 지키도록 성직자에게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언제까지 강요하느냐 하면 그 법규의 가짓수 및 필요한 수단이 계속 줄어들다가 급기야는 더 줄어들래야 줄어들 수 없을 정도로 자유를 속박할 때까지 계속된다.

성직자는 강제로 종군활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국가는 또 교회 재산에 대한 교회의 처리 권한을 빼앗아 옥죄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성직자에게서 학교와 자선 사업을 일구고 지원할 수단을 박탈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짐은 교회 재산의 자투리마저 최고로 빡빡한 상황으로 인하여 차꼬가 채워짐은 물론 국가 행정관의 권력과 방자한 뜻에 종속되는 것을 보는도다.

제2 원칙: 종교무차별주의

프리메이슨의 제2 원칙은 자연론의 필연적 결과인 종교무차별주의인데, 아직까지도 명백한 원칙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상태다. 종교무차별주의는 교황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어휘로 정확한 의미를 보면, 종교무차별주의는 모든 종교가 다 같아서 다른 것에 비해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관념을 요구 및 권장한다.

    프리메이슨에 얼굴을 내미는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떤 형태의 종교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떠 안게 됨에 따라 이 시대의 엄청난 오류--즉, 종교에 대한 관심이 무차별적인 것으로 여겨져 모든 종교가 다 비슷하다는 오류를 가르치는도다. 그같은 추론 방식은 모든 종교 형태, 특히 가톨릭교를 괴멸시키고자 하여 기획된 것이나, 가톨릭교만이 오직 하나이요 참된 종교인 까닭에 다른 종교들과 순전히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식의 터무니없는 불의를 저질러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제는 이상과 같은 방침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2차 바티칸 후에 사라진 것이다. 레오 13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진리와 오류를 같은 수준에 두는 일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천명하되 참말로 옳은 일을 한다.

제3 원칙: 천주 존재 및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함

교황은 다음과 같이 원칙을 논한다.

    저들은 이제--천주 존재, 인간 영혼의 비물질성과 불멸성....과 같은 것들을 자연 이성의 빛으로써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확실하고 영원한 것이라 여기지 않음이라....천주님에 관한 그같은 문제가 저들 사이에 일고 있는 불화의 최대 원천인 동시에 원인이라는 것을 감추지도 않나니....

프리메이슨이 대 건축사라고 말하는 경우를 볼진대, 그것은 자기들이 천주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대 건축사란 궁극적으로 세상이 존재하게끔 지탱하는 자연의 힘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현존하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며 유지하시는 위격의 천주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레오 13세가 말한 바대로 차라리 범신론의 한 형태라고나 해야 맞는 말이다.

    이렇듯 가장 위대한 기본 진리가 뒤집히거나 약화되면, 그 뒤를 이어 자연의 가르침으로써 알려진 진리들도 와해되기 시작할 게 뻔한즉.

그런 식으로 부인하다 보면 생명의 원천이 되는 진리를 소멸시키고 마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연 원칙들인 동시에 지식 및 실용에 중요한 원칙들에 해당되는 진리가 없어지고 나면, 공공 윤리와 개인 윤리 둘 다 어떻게 될는지 아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아무라도 천주의 특은과 성총이 없이는 실행하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이로되 한층 더 천상적인 덕을 말하지 않나니, 헤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인류의 구원, 천주의 성총, 성사 그리고 천당에서 누리게 되는 복락들을 배척하는 자들 안에서는 필경 성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일세라. 지금 짐은 조금도 꾸밈없이 저들이 시작한 종교적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즉. 천주께서 세상의 창조주이심은 물론 신성한 지배자시라는 것, 영원한 법이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명함과 동시에 그것이 방해받는 것을 금한다는 것, 인간의 최종 목표는 인간적인 것을 훨씬 뛰어 넘어 지상에서 머무르는 것을 초월한 천주의 뜻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 모든 정의와 윤리성의 근원인 동시에 원칙이니라.

    이상의 것들이 자연론자 및 프리메이슨이 바라는 대로 배제되는 순간, 정의와 불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혹은 어떤 원칙 위에서 윤리성이 세워졌는가에 관한 지식이 모조리 없어지리라. 또 진리에 있어서, 프리메이슨 분파의 마음에 드는 동시에 그 안에서 젊은이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리성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게 아니고 저들이 '민간의', '독립적인' 그리고 '자유로운'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즉, 그것에는 그 어떤 종교적인 믿음도 포함돼 있지 않음이로다.

요즘 하는 말로 치자면 '관대한 도덕률'이라고들 하리라.

프리메이슨 원칙의 앙화로운 결과

레오 13세는 프리메이슨 결사의 원칙을 자세히 설명한 끝에 드디어 저들이 발생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결과는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공공연한 부도덕성

    그리스도인다운 교육을 제거함으로써, 분파가 더욱 완전하게 지배하기 시작한 곳이 어디이건 거기서는 도덕의 선량함과 완전성이란 것이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한 까닭에 기괴하고도 추잡한 여론이 자라나 대담 무쌍한 악행이 고도로 득세하게 되었도다. 그 모두가 대체로 불만스러운 데다가 개탄을 금치 못할 것 투성이로, 불평하기를 싫어하는 자들 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똑같이 불만스러워 하는 증언을 해야 하는 때가 드물지 않음은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 넘쳐나는 연고라.

이상의 문단을 읽어보면, 레오 13세가 신문에서 매일같이 보도하는 대담 무쌍한 악행, 즉 납치, 범죄, 암살, 프랑스와 스페인은 물론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폭탄 테러에 의한 무죄한 자들의 살해....와 같은 것들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기술하고 있던 것이라고 믿을 만하다. 흉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대담 무쌍한 악행'이란 실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광경 그대로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그같은 온갖 무질서가 원죄를 부인한 결과임을 다음과 같이 내비친다.

원죄의 부인과 소비자 단체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은 원죄로써 더럽혀졌으며, 그로 인해서 미덕보다는 악덕에로 더 기울어져 있나니. 덕스럽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무질서한 동향을 자제하여 정욕을 이성에 순종케 하는 것이야말로 필요불가결한 일이니라. 그런 갈등이 있게 되면 인간적인 일이란 대체로 무시되어야 하는즉, 언제나 이성이 지배하게 하려면 가장 큰 노력과 고초를 겪어야 하느니라. 자연론자 및 프리메이슨 둘 다에게는 우리가 천주님의 계시로 배워 익힌 것들에 대한 신앙도 없고, 우리의 원조가 범죄했다는 것도 부인하며, 그에 따라서 자유의지가 약해지지도 않았거니와 악에로 기울어져 있지도 않다고 여기는도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자연적인 덕과 뛰어남을 과장하고는 거기다가 정의라는 원칙과 법칙을 끌어다 붙이는 탓에, 폭력과 정욕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데 필요한 부단한 싸움과 완전한 굳건함이란 것이 도무지 불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하니라.

    그러므로 짐은 인류가 공공연하게 쾌락을 추구하게 하는 유혹에 의한 유감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니, 타당치도 않을 뿐더러 수치를 모르는 저널 및 팜플렛들이 나도는 것, 무대 공연들이 눈에 띄게 방자한 것, 예술 작품을 위한 디자인이 후안무치하게도 이른바 리얼리즘이라는 풍조에 물드는 것, 편안하고 화려한 생활을 위한 기획물이 용의주도하게 고안되는 것 그리고 그저 미덕을 얼러 잠재우기만 하는 유혹적인 쾌락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데 열중하는 일 등이 그것이니라.

그리하여 인간은 이른바 소비자 단체에서 제공하는 것만을 희구하는 노예화된 정욕에 예속된다. 생활 용품을 마음에 드는 대로 다량 확보한 다음에는 그것들을 쾌락, 금전, 돈벌이 그리고 상품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려는 뜻에서 비롯된 단체라는 것 말고 소비자 단체를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유용하고 고귀한 물건을 마음에 드는 대로 활용하는 문제뿐이라면 그나마 그냥 참아 견딜 수 있지만, 사악하고 음란한 물건을 선한 것과 동등한 수준에 놓기 때문에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궁극적으로 모든 게 다 죄를 부추기기 위한 것이다. 사회가 완전한 자멸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말지어다.

물질보다 우선해야 하는 원죄, 덕, 영혼의 무형한 속성, 영적인 요소들이 다 무시당하고 있다. 인간의 실체는 소비하도록 만들어진 육체뿐이라는 것이다. 다들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들여 가능한 한 많이 소비하도록 자극 받고, 죄로 유인하는 수단을 있는 대로 죄다 제공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공산주의식 노예 상태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남아 돌아가는 소비자의 재산이란 재산은 다 지배자에게로 쓸려 들어감으로 해서 백성들은 여분의 재산을 갖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란 그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계에 불과하여, 육체와 영혼이란 그런 노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만 먹어야 하는 노예로 전락한다. 남는 것은 몽땅 나라로 들어가서 악마의 일, 프리메이슨 결사, 공산주의 그리고 세계 혁명과 교회의 파괴를 돕는 데 쓰인다.

소비자 단체에 속한 인간을 볼 것 같으면, 공산주의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보다는 덜 심각해 보이는 정욕의 노예 상태가 지배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정욕의 노예 상태는 공산주의의 노예 상태인 것에 비해 영혼의 생명과 신앙 그리고 종교 보호에 훨씬 더 유해하다. 공산주의식 노예 상태는 인간에게서 소비자 단체가 제공한 물건들을 모두 빼앗아 버림으로써 인간을 고행, 금욕의 상태에 있게 하는데,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더 많이 생각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기도 한다.

이상의 내용은 종교가 어쩌면 서방에서보다는 '철의 장막' 뒤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있고 잘 보존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쾌락을 누림으로써 영혼을 침몰시켜 종교를 끝장내게 하는 데에는 인간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다. 그렇듯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프리메이슨의 방해로 종교 생활을 못하게 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노예 취급을 당하면서 세속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까지 빼앗긴 채 강제 노동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종교 생활을 못하게 되기보다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같은 나라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있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는 경우에, 세상살이에 필요한 물건을 빼앗긴 자들이 영혼에 필요한 것을 향해 돌아설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밀어 넣는 억압된 상태로부터 아무런 편의도 취하지 못하도록 집요하리 만치 종교에 맞서 싸우는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천주 공경을 금지한 모든 학교에서는 아직도 무신론자인 교수들이 잔인하리 만치 종교를 거스르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혼인의 붕괴로 인한 가정 파괴

프리메이슨 결사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그 원칙들이 계속해서 영적인 생활, 사사로운 도덕과 심지어는 정치에까지 적용되는 통탄스런 결과를 고찰한 후에는 범죄 행위 및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정욕의 노예가 된 상태를 고발하고 나서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가정 파괴의 실체를 끄집어낸다.

    대체로 정욕의 지배를 받음에 따라 영혼이 나약해져 망가진 자들만큼 간악하고 영악한 사람들에게 유순하게 순종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 없나니, 프리메이슨 분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교활하게 그리고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악덕을 허용하는 것을 목격한 군중이 기가 질리게 해야 한다고 결정 및 제안하는 자들이 있는지라, 그렇게 되기만 하면 아무리 과격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군중이 쉽사리 저들의 세력과 권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까닭이니라.

프리메이슨에게는 민중이 차근차근 붕괴되도록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가정 파괴를 야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자연론자들의 가르침에서 가정 생활에 관련된 것은 거의 다 그 뒤를 잇는 선언서에 포함되어 있나니. 그런 혼인은 상거래에 의한 계약의 부류에 속해 있어서 그런 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의지로 곧바로 무효화될 수 있음이로다.

원칙적으로 모든 계약은 무효화될 수 있다.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그것을 파기하기로 결정하는 경우에는 해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계약 당사자의 의지로 계약이 이루어졌으니,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해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순전히 계약 당사자의 의지에만 달려있는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에 이상과 같은 추론을 적용하면 그렇다. 혼인이 정말로 계약이기는 하나, 개인의 선택에 관련된 만큼만 자유로울 뿐이고 그것이 체결된 조건에 대한 것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계약의 조건은 남자와 여자의 본성 자체에 새겨져 있다. 본디 계약의 조건을 정하신 분은 바로 천주 자신이시다.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계약에 가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약에 가입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절대로 해제하지 못하는즉, 계약이 성립된 조건에 의하면 계약이 파기되지 못한다고 명시된 까닭이다. 그같은 계약은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구속력을 지닌다.

가정은 종족을 번성케 할 목적으로 출산하라고 생겨난 것이다.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는 이혼은 자녀들을 버려진 채로 놔두게 하므로, 부모는 자기네 좋을 대로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는 법이다. 이혼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란 다른 게 아니고 바로 그것이 아닌가. 교회가 노상 혼인의 불가해제성을 가르쳐 온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즉, 결합은 절대로 깨질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 교회는 육체적인 별거를 그냥 참아주기는 할지언정 결코 이혼을 용납하지는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에 교회가 혼인의 무효를 인정하더라도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만 하니, 이를테면 두려움이나 위협이 있음으로 해서 계약의 조건 중 하나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여자가 부모의 억압에 못 이겨 자기를 해칠지도 모르는 위협을 받고, 또 감히 혼인을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결혼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 압박감이 없었다면, 그녀는 결혼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으리라. 계약이 성립되기 전에 의지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등의 도덕적 압박이 강요되었음을 진정으로 밝힐 수만 있다면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인즉, 그 계약에는 당사자 중 한 사람의 자유가 결여된 연고이다. 이는 구제 받을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또 다른 경우를 인용해야겠다. 배우자 중 한 사람 혹은 다른 이가 혼인하기에 앞서, 그것도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인이 참석한 상태에서 자녀를 원치 않았노라고 또렷이 진술하는 경우, 이는 계약의 무효화가 성립되는 또 다른 조건에 해당된다. 혼인의 계약은 배우자들이 자녀를 낳게 할 목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자녀를 가질 수 없다면 문제가 다르다. 그러나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의지는 혼인의 계약을 무효화시킨다.

그렇듯 가끔 발생하는 희귀한 조건을 제외하고는, 교회는 절대로 혼인을 파기하는 법이 없다. 무효화의 요인이 없음으로 해서 혼인이 존속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면 교회는 혼인을 깨뜨릴 수 없는데, 그것은 권한에서 벗어나 있는 연고이다. 교황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혼인을 파기할 권한이 없음은 물론 그의 권한에 속해 있지도 않다(주: 눈에 띄는 예외가 두 가지 있으니, 완결되지 않은 상태의 혼인은 중대한 사유가 있으면 교황에 의해 해제될 수 있으며, 이교도끼리의 혼인에 있어서 만일 이교도인 배우자가 세례를 받은 배우자와 평화롭게 살기를 거부한다면, 성세성사를 받는 이교도의 '신앙에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 해제될 수 있다).

천주님은 혼인의 성사를 제정하시되 그 조건과 목적을 명시하셨다. 혼인 및 그 목적을 의도하신 분은 조물주이신 당신 자신이시다. 엄밀히 따져서 혼인의 목적은 자녀 출산 및 자녀 교육으로, 혼인의 그런 목적 때문에라도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는즉, 그 이유는 자녀가 잘 양육되려면 부모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결합이 안정되어야 하며, 가족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혼인이란 '계약을 성립시킨 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곧바로 철회될 수 있는' 다른 계약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혼인의 불가해제성은 가톨릭교에만 고유한 것임을 상기할진저. 가톨릭교만이 그렇듯 기본이 되는 교리를 공언하는즉, 그 이유는 인간 사회의 밑바탕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심지어는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역자 주: 열교 혹은 개신교)마저 다소 관대하게 이혼을 옹호하는 입장을 받아들인다. 혼인을 정하신 천주께서 이혼을 막으셨음으로 해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가톨릭교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스도인의 혼인: 여자의 위신을 보장함

천주께서 직접 여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으로 삼으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는 모델을 제시해 주심으로써, 교회가 여자들을 존중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면에 모든 고대 문명 및 이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대체로 여자들을 경멸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물건쯤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시민권이란 것이 도통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이혼 당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팔리기까지 할 수 있다.

교회는 여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보장해 주기까지 한다. 내가 맞닥뜨렸던 이교도 부족을 보면,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커다란 문제는 늘 여자에 관련된 문제였음을 아프리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자기 딸을 팔거나 아내를 사거나 혹은 되팔거나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그들은 그런 제도를 혼인 지참금이라고 칭한다.

이는 그릇된 것인즉, 실제적인 상거래 행위를 이루는 까닭이다. 소녀들은 태어나기가 무섭게 매매행위의 대상이 되어 누군가 그들을 사기 위한 돈을 미리 비축해 놓는다. 그 밖의 누군가 본남편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내는 순간이 오면 양친은 딸더러 현재의 남편을 버리라고 결정해 버린다. 양친은 그녀를 처음으로 샀던 남편에게 '혼인 지참금'을 돌려준다. 만일 여자가 200달러에 팔렸는데 다른 이가 400달러를 갖고 오면, 그들은 첫 번째 사람에게 200달러를 돌려주고 나머지 200달러는 갖는 것이다.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매혼의 현주소인 것이다.

전교 사업을 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혼인을 장려하기 위해 무지하게 싸워야 했는데, 그리고 나서도 그런 습관이 그들의 관습에 너무나도 뿌리깊이 박혀 있었음으로 해서 매우 힘이 들었다. 그 후에도 부모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도인 상태였고, 그리스도인이 됨과 더불어 교회에서 결혼한 딸에 대해서는 그 딸이 마치 이교도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부모의 강압에 못 이겨 자기 남편을 떠난 여자들은 부모를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언제나 명령만 내리는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그저 순종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기 딸더러 집으로 오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겠다고 하면, 딸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자기 아버지에 의해 묵살 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녀는 맏아들에게 속하게 된다. 늘 누군가에게 속하여 자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남편을 떠난 아내를 찾으러 마을로 가야 했다. 교리문답 교수자가 우리에게 귀띔해 주기를, 전교 신부가 나서서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릴 거라고 하는 바람에 여자를 찾아 방공호 속에서 젊은이 몇 명과 함께 특공대 같은 작전을 수행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여자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 나에게는 차라리 익살맞은 일이라고나 해야 할성싶은 임무로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몇 가지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협박하고 있는 아내 되는 사람을 데려오려고 우리가 간다는 것을 그들이 미리 알게 되면, 그녀를 숲 속에 숨겨버리는 식으로 해서 찾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을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렇게 해서 늘 여자를 찾는 데 성공했으니, 여자는 대체로 자기의 본남편에게 돌아오기를 원했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자기 부모 앞에서는 그 반대인 것으로 보여야 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가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떠나야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뜻에서 마구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곤 했다. 부모는 사제 앞에서는 감히 여러 말을 하지 못했다. 때때로 우리는 그녀를 마을로 도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우격다짐으로 여자를 빼앗아서 묶어 가지고 배에 태우기까지 해야 했다. 배와 부모의 거리가 조금 떨어지면서부터 여자는 손뼉을 치면서 남편과 재회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에는, 오, 그녀는 믿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었으니, 나는 자살해야겠어...(그리고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 것이었다)...내 몸을 내던져야겠다....그리고 나서 젊은이들이 그녀의 시신을 데려올 것이었다. 이 모든 내용으로 미루어, 그 불쌍한 여인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할 자유가 없음은 물론 당사자인 여자가 매매혼의 대상인 것이 분명함을 입증해 주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혼인을 보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회교와 회교도의 행위를 생각할진대, 마찬가지의 치욕스런 일이 여자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제리와 모로코에 있었을 적에 몇몇 후궁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잔혹하게도 여자들은 서너 명이 한데 모여 극히 제약된 공간에서 온통 갇혀 지내는 채로 생활해야 한다. 그들은 또 매매되었다가는 되 팔리기도 한다. 말도 안 되는 매매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혼인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성가정 및 많은 그리스도교계에 존속하고 있되 여자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보장하는즉, 천주께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혼 및 프리메이슨의 이론이 퍼지는 정도가 어느 만큼이냐에 따라 여자에 대한 멸시와 비하의 정도도 달라지는데, 말하자면 이혼과 프리메이슨의 이론이 퍼지면 퍼질수록 여자는 더욱 더 경멸의 대상이 되어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혼인은 그리스도교다운 문명의 표시 중 하나로, 교회가 힘닿는 대로 이혼의 합법화를 막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혼이 아직 허용되지 않았던 대부분의 나라를 보면 프리메이슨이 캠페인을 벌여 이혼의 합법화를 도입시키려는 뜻에서 압력을 행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인들마저 그리고 타란콘(Tarancon) 추기경과 같은 주교들은 두 가지 유형의 혼인을 정하는 게 어떠냐면서 이혼을 부추기는 일을 어느 정도 도와줘 왔으니 두 가지 유형이란, 하나는 결합이 풀리지 말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언젠가는 이혼할 가능성을 열어 놓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민간 혼인을 말한다. 나는 그것을 스페인의 유명한 저널에서 읽었는데, 그 추기경은 틀림없이 두 종류의 혼인을 정하는 것을 옹호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런데 스페인은 가톨릭 전통을 지키는 나라로 알려져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비가톨릭인들을 위한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인들을 위한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추기경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런 제안에 부딪치게 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리요!

그런 생각의 발원지에 있는 자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모든 것이 비롯되는즉, 그것이 세계적인 움직임에 연루되는 연고이다. 그런 일이 그저 1개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다면, 정부의 우두머리가 선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걸 어쩌리요, 입법 기관이 이혼을 해도 되도록 정하는 법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입법하는 일이 한 나라씩 한 나라씩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것은 또 프리메이슨 결사의 책동으로, 정부의 우두머리에게 혼인에 의한 결합을 좌지우지할 힘을 갖게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청소년 교육을 독점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프리메이슨 결사는 청소년 교육을 통제하려는 뜻도 있으니, 교황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프리메이슨 분파는 또 눈곱만큼도 이의를 품지 않고 젊은이에 대한 교육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분투노력하나니.

이혼을 강요한 다음에는 청소년 교육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 각국을 두루 살펴보면, 가르치는 일에서 세속화의 진척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내세우는 목표가 교육의 보급 및 문맹 퇴치인 유네스코와 같은 기구들을 보면, 온 인류에게 더 높은 차원의 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식의 핑계로 현혹시키면서 실제로는 무신론적인 교육에 해당되는 교권(敎權) 반대를 전세계에 확산시키려는 뜻으로 중무장한 프리메이슨 결사가 조종하고 있다.

전교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그 모든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우리에게는 유네스코라는 기구 때문에 최악의 난관에 봉착했으니, 학교를 세울 만한 장소가 다른 곳에도 많았고 학교가 전혀 없는 곳도 많았음에도 저들은 하필이면 가톨릭 학교가 세워진 곳에다가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무조건 공립 학교를 설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저들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바로 그 근처에 일부러 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저들에게는 마음껏 쓸 수 있는 돈이 넘쳐 났으므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우리가 급료로 지급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자기네 교수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종교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서 자기 자녀들을 다른 학교보다 우리 학교에 더 진학시키려는 아프리카인이 많은 상태였는데, 심지어는 회교도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늘 그 숫자의 비율이 15%를 넘지 않게 했는데도 회교도인이 많았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첫 지원자들을 보면 그 가운데에는 회교도들도 있었으니,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그런 것이었다. 학부모들은 우리가 그들을 개종시키거나 가톨릭 신자로 삼으려는 뜻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어린 회교도 학생의 교리문답 성적이 가장 우수하더라도 개종시키지 못함에 따라 첫 영성체를 하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혹 어린 학생은 다른 학생들은 모두 영성체하러 앞으로 나가는 반면, 자기는 학급에서 1등인데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엉엉 울기도 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학부형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어린 학생에게 몰래 영성체를 하도록 허가해 줬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학교를 불살라 버릴 판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종교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기에 자기 자녀들이 배우는 것이 대관절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교황은 프리메이슨 결사가 젊은이 교육에 집착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프리메이슨 분파는 또 눈곱만큼도 이의를 품지 않고 젊은이에 대한 교육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분투노력하나니. 저들은 그렇듯 유연하고 고분고분한 나이 정도는 돼야 자기네 의견에 쉽사리 끼워 맞출 수 있음과 더불어 교육을 휘어잡아 흐지부지되게 하려 함은 물론, 그 어떤 것도 국가의 청소년을 자기들이 직접 계획한 바에 따라서 기를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지라. 그리하여 저들은 교육 및 어린이들을 훈계함에 있어서, 가르침이건 훈육이건 교회의 성직자와 함께 하는 것이란 도무지 허용치 않음은 물론 여러 곳에서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이 배타적으로 평신도의 손안에만 들어있도록, 그리고 도덕 관련 훈계에는 천주께 대한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의무를 다루는 것은 무엇 하나 도입되지 못하도록 손을 썼음이로다.

이제는 최근까지도 학교에서 가톨릭교를 가르칠 의무가 법적으로 유효했던 이태리 같은 나라에서조차 끝장나고 말았는데 새 정교(政敎)협약(로마 교황과 정부 사이의)에 의해서 끝이 난 것이다(주: 비오 11세 치하에서 교황청과 이태리 사이에 체결되었던 것을 대체한 새 정교(政敎)협약은 1984년 2월 18일 카사롤리(Casaroli) 추기경과 이태리의 베티노 크락시(Bettino Craxi) 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음). 법이 완전히 발효된 것은 아니어서 세속화된 새 법률이 사제들이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그냥 봐주고는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다. 학부형들에게는 당분간 학교에서 혹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 자기 자녀에게 가톨릭 교육이 제공되게 할 자유가 있음으로 해서, 사제들은 아직도 나라에서 급료를 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입법자들의 의향은 사제들에 대한 급료 지급을 금지하는 것으로, 그 때문에 가톨릭 교육을 실시하는 사제가 학교에서 없어질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에서처럼, 사제들이 학교 밖에서 교리문답 교실을 열어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 가톨릭 교육을 무너뜨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프리메이슨들은 어린이에게 교리문답에 참석할 자유를 허용해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 시간은 긴장을 풀어야 할 때인 레크리에이션 동안에 시간이 닿도록 스케줄을 조정하리라. 저들이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받으러 가도 된다고 허용하는 때는 바로 그 직후로, 그렇게 되면 수업 받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다. 그들이 가톨릭 교육을 받으려면 희생 정신을 발휘해야 하리라. 그 다음에 가서 자기 자녀들이 가톨릭 교육을 받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동의서에 모든 학부형들이 서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권

다음으로 레오 13세는 인간의 권리가 다 평등하다는 것에 관한 이론을 다음과 같이 들추어낸다.

    그 다음에는 저들의 정치에 관한 이론이 등장하는즉, 그 이론에서 자연론자들은 모든 인간에게는 똑같은 권리가 있으며 모든 점에서 평등하고 비슷한 조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이요.

이는 '인권'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인간이 다 평등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교황이 계속 말할 터이지만, 인간은 다 공통된 본성으로 인하여 천주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인데, 사실을 보면 모든 인간은 그 천부적인 재능에 따르더라도 평등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비추어 보아도 평등하지가 않다.

프리메이슨 결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계속 분석하면서 교황은 또 다른 그릇된 원칙, 즉 인간이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회적 자유라는 것을 다름과 같이 고발한다.

    각자가 천부적으로 자유롭다고 함이요, 아무라도 다른 이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함이요, 저절로 취득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권위에 순종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폭행이라고까지 하는도다.

민주주의 이념이 권위를 파괴하다

그같은 그릇된 이념은 민중이 주권자라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권위가 모든 사람, 즉 백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저들은 다른 이에게 유효한 권위를 부여하는 자가 백성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이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을 저절로 지니게 된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도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렇지만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분은 바로 천주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은 천주님의 권위에 참섭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는 바이다. 그저 그렇고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가 받은 권위를 자연적인 환경 혹은 선거로써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 권위는 천주께로부터 온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요, 그들이 어떻게 해서 권위를 받는지는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자연적인 권위로, 자연스럽게 부여받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권위를 주는 자가 자녀가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직 그런 어불성설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모모한 가족이 왕족이 되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민중이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그 중에서도 특히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했을 때 유명해진 인물들이 있음을 들어야겠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해서 외적에 대항해 싸우는 백성을 보호하려면 국민에게는 사회를 통솔하고 명령을 내릴 지도자가 필요했다. 백성은 직감적으로 원수에 맞서 싸우는 자기들 앞에서 지휘하되, 지능과 재주를 발휘하여 성공적으로 보호했던 누군가의 권위를 인정했다. 다들 그를 왕으로 여긴 것이다. 그런 재주는 왕이 되었거나 그밖에 군주로 인정받아 왕족을 이룬 그 자에게 천주께서 주신 자연적 은혜, 즉 조력성총(역자 주: 우리 영혼의 힘을 돕는 초성은혜로, 천주께서는 때때로 조력성총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비추시고 마음을 움직이시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 천당영복을 얻게 하신다)인 셈이었다. 교황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다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능력이 같지도 않고, 지능도 제 각각이며, 심지어는 체력도 다르다. 어떤 이는 손재주가 능한가 하면, 다른 이는 재주가 없다. 어떤 이는 지능이 매우 뛰어난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다 같은 것이 아니니, 좋으신 천주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 서로 도와주며, 우리가 받은 은혜를 그런 은혜를 덜 받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그런 불평등성, 즉 다양성을 바라신 것이다. 이런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공장을 가지고 있음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는 회사 운영자인 경우,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를 도와 함께 일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그 운영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보조자가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공장 건설, 생산품 판매, 새로운 시장 개척....에 대해 생각하는 관리자가 필요하다. 좋으신 천주님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다. 당신께서는 사회가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하며 계통적이기를 바라셨으며, 프리메이슨과 자유주의자들이 바라듯이 동일한 권한을 가진 획일적인 인간으로 구성된 불분명한 집합체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런 관념은 완전히 그릇된 관념으로, 자연을 거스른다.

레오 13세는 완전히 오류로 똘똘 뭉친 관념을 비난하되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만물은 자유로운 인간에 속해 있으며, 권력은 백성의 명령이나 허가가 있어야만 지탱되는 까닭에 군중이 바꾸려고만 하면 지배자마저 합법적으로 파면할 수 있다고 하는지라....

이제는 선거가 늘어나는 것으로써 백성들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후보자가 다음 선거를 생각해서 다음에 있을 투표에 대비하기 시작하면 거의 당선되지 못할 게 뻔하다. 정치가는 백성에게 아첨하고 물품 공세를 펴, 다음 투표에 대비한 표결에서 이기려고 한다. 이는 순 엉터리인즉,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사회로 인도한다. 뽑히게 될 사람은 많은 자원과 돈을 가장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거나, 영향력을 제일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공할 사람은 국가 원수가 되기에 최적의 자격을 지닌 후보가 아니라,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자다.

레오 13세는 덧붙여서 프리메이슨식 민주주의 속성이로되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속성과 함께 무신론적인 오점을 지적한다.

    국가가 천주를 배제해야 하고, 다양한 종교 형태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이보다 우월할 근거가 없으며, 그들이 다 같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도 신봉하는도다.

프리메이슨 결사가 공산주의로 향한 길을 터놓다

교황은 프리메이슨 결사에 의해 공언되는 정치 원칙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한다.

    저들은 계급과 재산의 모든 차이를 파괴함으로써 모든 물품을 공동으로 균등하게 획득하려는 노력으로써, 서둘러 더 악한 일을 꾀하려 하되 적지 않은 수의 더 대담한 자들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도다.

그런 관념은 공산주의 관념이라고 교황은 말하는데, 프리메이슨은 그것을 공언함으로써 공산주의로 향한 길을 열어 놓는다. 프리메이슨이 공산주의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오류다. 저들의 원칙이 실제로 공산주의의 기반을 닦는 게 아니라면, 저들은 어쩌면 공산주의로 인한 결과가 어떤지 보려 하지도 않으리라(역자 주: 다시 말해서 저들이 공산주의의 기반을 닦았기에, 자기들이 수고하여 얻은 열매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결과를 확인하려 한다는 것임).

완악한 프리메이슨 결사

프리메이슨의 원칙과 그 결과를 폭로하면서 교황은 저들 위로 내려질 판결문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므로 프리메이슨이라는 분파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과정은 무엇인지는 짐이 간단하게나마 제공한 요약문만으로도 충분히 밝혀진지라. 저들의 주요 신조는 너무나도 눈에 띄게 불합리하여 그보다 더 사악할 수가 없음이로다.

그런즉 온전한 원칙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프리메이슨은 자칭 자연론자 및 합리론자라지만 저들의 원칙은 틀림없이 자연 이성의 법칙을 절대적으로 거스른다.

    천주께서 친히 세우셨음은 물론 당신의 보호로써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보증해 주신 종교와 교회를 파괴하고 18세기가 지난 후에 이교도식 관습과 풍습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어리석은 행위요, 철면피의 사악한 행위로다....그렇듯 광기 어리게 사악한 노력에서는 사탄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에 대적하여 날뛰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와 원한의 정신만이 보임이로다.

사탄의 사업

교황이 공식화한 판결문은 명쾌한 데다가 형식에도 맞는 것으로, 프리메이슨의 프로그램은 사탄에게서 온 것인 까닭에 그 계획은 그야말로 악마의 것에 지나지 않음은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증오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게도 그리스도교의 관례를 거슬러 급기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시는 것을 막으면서 계략과 용의주도함--인간적인 신중함--으로써 이끌리고 있는 전투랄 수 있는, 그같은 싸움의 근원과 동기를 잘 이해하려면 교황 레오 13세가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사안을 잘 주시해야 한다. 저들은 여러 세기 동안이나 전 세계에 걸쳐 속속들이 이 전쟁을 벌여 왔다. 그런 계획 및 사업의 배후에 있는 자가 그저 인간뿐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와 같다. 악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주님의 도성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러 조직되고 있는 사탄의 도성인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탄은 교활한 데다가 그지없이 지능적이다. 사탄은 때로는 폭력으로써, 때로는 인도주의라는 베일을 쓰고 숨음으로써, 때로는 공산주의와 같은 전제주의 이론 및 그리고 나서는 그 안에 자취를 숨겨주되 극히 미묘한 옷감이랄 수 있는 자유주의로써 작용하는 방법을 안다. 성찰하는 데 익숙지 않아서 스스로 미혹되고 마는 나약한 마음을 꾀려는 뜻으로 기획된 애매한 언어에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많은 이가 스스로 기만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기를, 인간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형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을 보건대, 그것은 진정한 자유도 아니고, 참된 평등도 아니며, 진짜 형제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실로 사탄에 의한 전투의 동기와 목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서든 파악해야 한다. 교황은 자신의 말을 조심스레 꺼내지도 않으며, 사탄을 직설적으로 고발하되 다음과 같이 인간과 가정과 사회를 더럽히는 프리메이슨 이론의 원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정의와 정직의 주요 기초를 파괴하고 그저 동물일 뿐이라는 듯이 프리메이슨이 기꺼워하는 것을 하려는 자들과 협력하는 프리메이슨의 용의주도한 노력은 비열하고 불명예스런 인류의 괴멸로 향할 뿐인지라. 가정과 시민 사회 둘 다를 위협하는 위험으로 말미암아 악도 늘어만 가고 있음이로다. 짐이 다른 부분에서 이미 알려 주었듯이, 거의 모든 국가의 신앙에 의하면 혼인에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것이 있나니, 천주님의 법은 혼인이 풀릴 수 없다고 정했노라. 그 신성한 속성을 빼앗겨 혼인이 풀릴 수 있게 된다면, 그 결과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곤란과 혼란일 것인즉, 아내는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자녀는 유익과 안녕에 관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채로 버려지니라.

프리메이슨 결사 때문에 야기된 청소년 범죄

프리메이슨의 활동에서 비롯된 갈등을 살펴보는 것은 색다른 일이다. 저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별별 짓을 다하여 한 편으로는 청소년과 아동을 위한 세속적인 사업을 창출하고, 다른 편으로 감옥을 어린이들로 채워 놓는다. 저들은 교회의 도덕률을 배격하고 정결을 더럽히는 까닭에 교회가 그리스도인다운 교육을 시키도록 배려하는 것을 그냥 두고보지 않는다. 저들은 악덕을 전파하고 호색 잡지와 영화를 퍼뜨린다. 청소년을 파괴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건 다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감옥, 정신병원과 청소년 범죄자들을 위한 사회복귀 시설을 세우는 일이 필요해질 것은 뻔한 이치다.

이는 전에는 그런 일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좀 당황케 하는 부분이다. 아동용 감옥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회복귀 시설은 종종 천주의 성 요한(St. John of God)회에 소속된 수녀나 수사들이 관리했던 아동을 위한 고아원이었다. 예컨대 프랑스에는 아직도 경찰이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동들을 데리고 오는 뽕뜨갈의 수녀회(Sisters of Pontcalec)가 있다. 그들을 거두어 들인 수녀 혹은 수사들이 가족애로써 어린이들을 품어주되 애정으로 가득 차 환영해 마지않았던 그런 곳에는 일거리가 여전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단체들을 핍박하여 수사와 수녀들을 추방하고 만 것이다. 표면상 세속적인 사업을 만들어 낸답시고 그들의 사업이 사라지게 하기 위한 온갖 조치가 취해졌다. 그 결과 저들은 아동용 감옥을 건설해야 했으니, 그 곳은 사실상 온통 악덕만이 지배하는 진정한 의미의 강제 수용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청소년 범죄자가 너무 많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그들을 느슨하게 관리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들을 다 가두어 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나라에서든지 범죄자, 도둑 그리고 마약....들이 늘어만 가는 것을 목격하는 게 일반화되었다.

스위스조차 청소년에게 영향을 주는 그런 방해물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태다. 쮜리히(Zurich)와 로잔느(Lausanne)에서는 자동차를 훔치고 또 그런 것들을 훔치려고 가게 앞 유리창을 깨뜨리며, 자칭 산적인 듯이 행동하는 청소년 부대를 볼 수 있는데도 경찰은 그냥 수수방관하기만 한다. 그것을 두고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자료를 모으고, 몇 명은 체포하여 심문도 한다....그리고는 며칠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방면해 버린다. 그것은 또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책임을 지고 있는 당국은 이제 사회를 제대로 다스릴 줄도 모르는 데다가 도덕 기반이 몽땅 무너지고 말았다.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안정되고 규칙적인 삶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란 모조리 억압당한 상태다. 방벽이란 방벽은 죄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거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마약 사용의 확산이 그 일례다. 지금도 가톨릭을 표방하는 학교에마저 마약이 확산된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힐 앙화로운 일이다. 어느 누구도 점점 더 널리 퍼지는 그같은 악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찌 어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이 그 정도까지 된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천주님의 법인 도덕법을 의무화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천주십계는 이제 사회, 가정 그리고 교육의 기초에서 제외되었다. 그저 자유를 향한 권리, 인권만이 남은 것이다. 자유라! 결과는 자명하다.

혁명과 변화에 대한 갈망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다 똑같다는 것에 의거한 프리메이슨 이론은 시민 사회의 정치 기구에 들어있는 권위란 권위는 죄다 훼손한다. 그런 개념이 교회에 적용되면, 그 전체 구조는 단번에 무너지고 만다. 교회는 본디 계층적인즉, 권위는 더 높은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데 교황 선거 회의 동안의 교황 선거만이 거기서 제외된다. 주교는 교황에 의해 임명되고, 사제는 주교의 부름을 받으며, 기타 등등이다. 그럼으로 해서 교회 조직은 프리메이슨의 합리론에 의한 이론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위계제도에 의한 사회이다.

프리메이슨 이론을 실행하다 보면 혁명으로 이끌리기 마련이라고 교황은 말한다.

    자, 짐이 묘사한 바 있는 불온한 오류로 인하여 국가에 가장 큰 위험이 닥쳤음을 염려해야 하나니. 천주를 두려워함은 물론 천주법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지배자의 권위가 멸시당하고, 난동이 허가 및 승인되며, 대중화된 정욕이 무법을 향하도록 몰아치는 탓에 필연적으로 만물의 변화와 전복이 거리낌없이 뒤를 잇되, 징벌이라는 제재만이 제외되는도다. 오호라, 그같은 변화와 전복을 신중하게 기획하고 나면 많은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단체가 그것을 촉진하고, 프리메이슨 분파는 그들의 사업에 적의를 품기는커녕 그 의도에 크나큰 호의를 표명하며, 자기네 주요 의견을 그들과 함께 공유하여 지키는도다. 또 그 단체에 속한 자들이 일제히 그리고 어디서든지 자기네의 극단적인 견해를 공들여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네 가르침과 뜻에 기여하지 않음이요, 무너뜨릴 수 없는 천주님의 종교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하는즉, 천주님의 종교를 무너뜨릴 수 없음은 비밀 결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더 건전한 쪽의 사람들이 저들의 미친 짓에 강경하게 저항하기 때문이기도 하니라.

    온 인류가 열매로써 나무를 알아보아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악의 씨앗과 근원 및 임박한 위험을 인식했기를! 짐은 입에 발린 말과 아첨으로써 백성과 군주들의 귀를 만족시켜 함정에 빠뜨리되, 사기성이 농후함은 물론 교활하기 그지없는 원수를 처리해야 함이로다. 프리메이슨은 우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지배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삼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파괴하는 강력한 협조자로 만들려 노력함이요....그와 유사한 태도로 저들은 아첨 어린 말로써 백성을 현혹했나니. 저들은 소리도 높게 자유와 공적인 번영을 선언하고, 군중이 불의한 노역과 빈곤에서 끌려 나오지 못한 것은 교회와 주권자의 탓이었노라면서 백성들을 기만한즉,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써 그들을 선동하여 교회와 시민권 둘 다를 맹렬히 공격하도록 몰아 부쳤노라.

현대화라는 것: 자유주의 정신에 맞춤

교황들은 종종 변화하고픈 갈망이라는 것을 고발하기도 했다. 변화에 대한 욕구는 현대인의 악으로, 공의회 때에 무성했다. 저들은 현대화를 구실로 삼아 적응이라는 명분으로 무엇이든지 바꾸려 드는데, 현대인의 물결에 발맞춰야 한다고 한다. 현대인은 늘 변화하는 까닭에 한도 끝도 없이 따라가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도직(역자 주: 사도직)에 관한 방법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말인즉, 두말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여 설교하는 방식과 어른에게 설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며, 보통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지식인에게 연설하지 않는다. 환경에 적응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인즉,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그에 관한 공의회를 별도로 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저들은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에 변화를 주고자 하여 신앙이 표명되는 신앙 고백문 자체를 바꾸려 들었으니,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현대인에게 더 근접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권리라! 어떤 인간을 말하는가? 현실과 괴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인간', 즉 인류밖에 없는 것을. 저들은 유럽, 남아메리카, 중국 혹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대로의 현대인에게 맞추는 것을 말하는 것일진대, 어떤 인간을 말하는 것인가?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현대인이란 그 정신이 교회, 자연 법칙, 천주께서 의도하신 법규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인 프리메이슨 이론에 의해 변형된 인간을 말한다. 그같은 '현대인'이라는 관념과 어휘가 그리스도교화될 수 있는 듯이 꾸미는 것은 완전한 몽상이다. '인권이 복음화 운운....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전혀 쓸 데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불가능하다. 프리메이슨이 그것들을 천주십계에 반대가 되도록 교묘하게 발전시키는 까닭이다. 저들은 인류의 의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인권만을 말하는즉, 사회의 기반을 자유로 대체시켜 천주님의 법이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천주님의 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이성신(理性神), 인간의 이성을 경배하는 것에 해당되는 인권이란--혁명이다. 인간이 천주님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저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순응시킬 수 있노라고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들은 그다지도 거룩하고, 신비로우며 신성한 아름다운 것들을 함축하고 있던 전례를 끝장을 낼 정도로 적응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것을 합리론자의 조합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저들은 거룩한 미사 양식을 변조 및 격하시켜 식사로 삼았다. 저들은 교계제도를 민주화시켜 중단해야 했으니, 교계제도가 무너진 바람에 사제는 공동체에 의해서 그리고 임명이 가능한 임명된 의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듯 굳이 현대 생활에 맞추려는 의지로 인하여 우리가 어디로 인도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른 단어에는 저들이 바라는 것을 잘 표현해 주는 정확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다른 단어를 쓸 수도 없는 실정이다. 조금씩 점차로 직접 합리론자가 되지 않고서는 프로테스탄트나 합리론자다운 언어를 쓸 수 없는 까닭이다.

프리메이슨 결사에 대항하는 싸움

프리메이슨의 원칙과 그것을 응용한 결과를 폭로하고 나서 레오 13세는 구제책을 제시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경애하는 형제들이여, 앞으로 어찌 되든 그렇듯 중하게 널리 퍼진 악한 환경에서는 구제책을 찾고자 분투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짐의 의무로다. 짐이 바라는 최고로 탄탄한 구제책은, 프리메이슨이 그 구제책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증오하는 신성한 종교의 손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니, 공동의 원수에 대비하여 구제권을 청구함을 통하여 짐을 원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노라.

교황이 말하듯, 거룩한 우리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짐의 전임자였던 로마 교황이 프리메이슨 분파의 사업과 노력에 항거하는 뜻에서 선언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종류의 단체에 들지 못하게 하거나 탈퇴하게 하고자 하여 어떤 법률을 제정했든지, 짐의 교황권에 의존하여 그것을 비준 및 추인하되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뜻에 크게 의지하나니, 그 문제에 관한 한 교황좌에 앉아 명한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다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으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빌고 또 간청하노라.

프리메이슨 결사에게서 가면을 벗겨낼지니

그리고 나서 레오 13세는 주교들에게 직접 연설한다.

    ...그러나 짐이 나서서 적당한 행동 지침 몇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야말로 짐의 직권에 걸맞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짐은 무엇보다도 먼저 프리메이슨 결사에게서 가면을 벗겨내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하....는 것....이 그대들의 규율이 되기를 바라노라.

교황은 주교의 첫 번째 임무는 프리메이슨 결사를 고발하여, 그 사기성이 농후한 언어 및 프리메이슨 결사가 운영하는 이른바 갖가지 자선 기관과 저들이 과시하고 있는 헌신을 앞세워 본 모습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 모든 것 뒤에는 사탄의 영이 숨어 있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저들이 나를 여러 차례 공격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몇몇 회담에서 프리메이슨 결사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신문지상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리메이슨 결사 문제를 건드리거나 그것을 공식적으로 비판하자마자, 그 열렬한 지지자는 반응을 보인다. 저들은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네 모습이 염려한 대로 노출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격노하여 갑자기 공격을 개시한다.

1977년 릴(Lille)에서 있은 설교에서 내가 프리메이슨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모든 혁명 및 교회를 반대한 전쟁의 근원지에는 프리메이슨이 있었고 아직도 작용하고 있노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저들은 반발을 조종하지 않았다. (또 저들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발표가 있은 후에 우리 전통주의자 집단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할 정도로 도리어 전통주의자의 모습을 한 채 논평을 능수 능란하게 조종하는 언론인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의 부친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시인했다. 그가 작성한 기사를 보면 내가 프리메이슨 결사를 공격했다 하여 매우 불쾌해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 이상이었다. 폭력에 가까운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림자 밖으로 나와 자기가 정말로 프리메이슨
에 가입해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다수의 독자층을 놀라게 했으니, 그들은 그가 프리메이슨 결사를 비호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정 의외의 일이었으며, 그의 편에서 볼 때 그의 논평--전통주의자들이 늘 매우 흥미로운 정보와 심지어는 매우 전통적인 종교 관련 기사를 읽을 수 있었던--을 읽는 전통주의자 사이에 막심한 손해가 발생했다(역자 주: 그 언론인은 프리메이슨이었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쓴 기사가 읽혀지도록 도리어 전통주의자인 듯한 인상을 풍긴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가 프리메이슨을 다시 비난하고 나서자, 매우 난폭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변호했으며, 이는 그가 어떤 자라는 것이 우리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가톨릭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프리메이슨에 가담해서는 아니 되나니

그리하여 교황은 우선 주교들에게 프리메이슨 결사를 고발하라고 주문한다.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하라"고.

    그런 부류의 단체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부추겨 자기네 계층으로 끌어들이는 데 이용하는 책략에 관하여, 또한 저들 의견의 악성(惡性) 및 저들 행위의 사악함에 관하여 강론하고 주교교서로써 사람들을 훈계하는 것....짐의 전임교황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한 바 있듯이, 자신의 가톨릭 이름과 더불어 영원한 구원을 중히 여겨야 함에 따라 세례명과 구령 사정을 중히 여기는 자는 어느 누구도 여하한 이유를 막론하고 프리메이슨 분파에 가입해도 괜찮다고 생각지 못하게 할지니....

    게다가 군중은 용의 주도한 가르침과 권고를 통한 종교적 교훈을 부지런히 배워 익히도록 이끌려야 하나니....경애하는 형제들이여, 성직자 및 평신도의 노력을 결집시킴으로써 인류가 교회를 완전히 알아 사랑하도록 애쓸지니, 이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사랑이 더 커짐에 따라 그들이 비밀 결사를 떠나 더 많이 회두케 되는 연고니라.

정말로 그렇다, 우리 종교를 더 많이 알수록 종교, 특히 우리가 놓치지 않고 꼭 붙들고 있으면서 한때 교회 전체의 전례였던 전통의 전례에 해당되는 우리의 전례를 실생활에 더 잘 연결하게 되어, 이른바 합리론이라는 사악한 조류 및 온갖 오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저항력이 생기게 되리라.

합리론이 전례를 파괴하다

2차 바티칸에 의하여 재구성된 전례에 부닥치자, 다들 일종의 슬픔과 구역질을 느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사고 방식,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더 이상 표출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편편치가 않은 것이다. 이는 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런 변형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마비되어 신자들은 교회를 저버리기 시작한다.

새 전례에 합리론이 침투한 것에 관한 일례를 보건대, 그 지지자들은 신자들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합리론에 의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데, 모든 것을 이성으로써 판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전례에는 물론 라틴어라든지, 종교적인 용어라든지, 경문을 낮은 소리로 바치는 것과 같이 신비적 요소가 깃들어 있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사제는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 있는 탓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 신자가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저들은 그의 모든 제스처를 따라 할 수 없다고 투덜댄다. 그러니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런즉, 신비도 있고 종교적인 용어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런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손 쳐도, 우리 주님의 신비를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큰 소리로 그것도 자국어로 낭송되는 미사경문을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우선 어떤 구절은 자국어로 되어 있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진리 자체를 납득하기란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그런 데다가 정신이 산만해진다는 것도 참작해야 한다. 신자들은 쉽사리 분심에 사로잡혀 있다가, 잠깐 듣고는 하나의 구절에 집중하여 매달리는 바람에 연속된 생각을 놓치고 만다. 그들은 노상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이 지루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잠시도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신적인 행위로, 우리 주께서 사마리아 부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이에 참으로 흠숭하는 자들이 영신과 진리로써 성부를 흠숭하리니. 대저 성부 이렇게 흠숭하는 자들을 원하심이요(성 요왕 4:23)." 기도는 외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내적인 행위에 속한다. 외적인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내적인 기도, 영신적인 기도로서 우리 영혼이 천주께로 향하여 고양되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와 같은즉, 기도는 영혼을 천주께로 들어올림에 반하여 다른 것들은 끊이지 않는 소음으로써 영혼을 지치게 한다. 한시도 잠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급기야 신자들은 지루해져서 포기해 버리게 된다.

전례를 변형시키려 하면서 범하는 오류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합리론자다운 정신의 결과다. 합리론자들은 무엇이든지 이해하고 싶어 안달하는 현대인에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하였으니, 자기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참아 견디지 못하는 것인데, 저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신자라면 모름지기 라틴어 원문과 자국어 번역문이 옆옆이 배열되어 있는 미사경본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아는 법이다. 그런 종류의 미사경본은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미사를 따라잡기가 어렵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신비를 달가워하지 않는 현대인의 정신에 끼워 맞추려 했던 까닭에 자기가 듣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저들은 신비를 파괴시켜, 종교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예식에서 떨어내었다. 결론을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전례에 꼭 붙어 있어야 할진저.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

그리고 나서 교황은 묘하게도 좀 인상적인 것, 즉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The Third Order of St. Francis)를 추천한다.

    짐은 이번 기회를 빌어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 다시 말해서 얼마 전에 짐이 그 규율을 조심스럽게 누그러뜨린 바 있는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를 주의를 다해 장려하고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거듭 말하나니, 그 수도회의 목표는 설립자가 규정한 대로 오로지 사람들을 불러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하며, 그리스도인다운 만덕을 지키게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사악한 단체의 전염병을 잠재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게코자 함이니라....

    그것으로부터 기대되는 많은 이익 가운데에는 인류의 마음을 자유, 박애, 권리의 평등을 향하여 끌어가는 크나큰 이익이 있을 것인즉, 짐이 뜻하는 바는 프리메이슨이 얼토당토않게 상상하는 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얻어 주셨고 성 프란치스꼬가 열망한 것과 같은 자유, 즉 극히 사악한 교사인 저들 중 두 가지에 해당되는 사탄이나 우리 정욕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천주의 아들들의 자유, 그 근원이 만유의 창조주이시요 만인의 성부이신 천주님 안의 박애, 정의와 자비 위에 세워졌음은 물론 인간 사이의 모든 차이를 외면하지 않고 다양한 생활과 임무와 직업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가의 이익과 존엄성에 이바지하되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평등을 말함이니라.

그리하여 교황은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원을 격려하되 그 정신에 존경을 표명한다. 또 제3회가 헤아릴 수도 없는 선업을 행하여 많은 영혼들이 스스로 성화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길드를 재건하라

제시된 구제책 중에서 교황은 '종교의 인도를 받아 현세의 이익과 도덕성 둘 다를 보호받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조합 혹은 길드'를 재건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한다.

    우리 조상들이 오랜 이용과 경험으로 길드에 유익한 점이 있다고 느꼈다면, 우리 시대는 어쩌면 그 분파들의 세력을 분쇄할 기회 때문에라도 길드가 더 유익하다고 느끼리라....그런 이유로 해서 짐은 적당한 시기에, 주교들의 보호와 후원을 받되 백성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길드가 대부분 재건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

교황은 길드 혹은 '조합'으로부터 얻었던 이점(利點)을 자주 지적했으니, 길드란 신앙의 정신인 종교 정신으로 가득 찼었음으로 해서 활기를 띤 그리스도인 노동자 조합이었던 동시에, 기능이나 상거래에 대한 애착과 그들 사이의 노동 및 이익과 상품을 더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있어서 그보다 더할 수 없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관리자와 노동자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조합은 상거래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각 조합에는 자체적인 주보 성인 및 첨례날(역자 주: 축일)이 있었다. 관리자와 노동자는 또 공통된 신앙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과 정의뿐만 아니라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반면에 요즘의 노조는 정치 기구로, 계층간의 싸움을 악화시킴은 물론 노동자와 관리자가 힘을 모아 일할 수 있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이간질하기 위해 만들어진 투쟁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조는 공산당 노조, 사회당 노조, 그리스도인 노조 그리고 기타 등등과 같은 정당의 그림자 및 당파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로 인하여 저들의 목적은 자기네 사업을 개선한 것도 아닐뿐더러 완전한 모습도 아니다. 그런데 노동자와 관리자는 둘 다 자기네 회사의 생존에 이해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노동자와 관리자의 협동은 자신들의 생계와 직업을 존속시키는 데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노조는 기업이 파산을 선언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가의 요구이건 노조의 요구이건 간에 늘어만 가는 요구를 많은 소기업이 충족시키지 못해 파산하고 말았다. 거대 산업단지에 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거기서 그들은 군중일 따름이다. 인간적인 계약이란 것이 이제는 있지도 않은데, 그런 것은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음으로 해서 한층 자연스러웠던 더 작은 규모의 기업에서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한편 지금은 수천 명의 노동자가 산업 도시에 소재하고 있는 거대한 공장에 집중돼 있는 상태다. 이는 사회주의 소산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모두는 그들 자신이랄 수 있는 다국적 재단 법인 및 대규모 은행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바로 프리메이슨 결사의 손 안에 들어 있다. 언제나 저들에게로 귀결되는즉, 모든 것은 저들의 손안에 있다. 이것 저것할 것 없이 모두 다!

교황들은 항상 길드를 복구하거나 존속시키는 것을 두둔해왔으며, 그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하도록 애써야 한다. 지난 세기 말, 1870년경에 쓰여진 작품을 읽어보면 유용한데, 특히 레네 드 라 뚜르 두 팽(Ren de la Tour du Pin)과 같이 알베르 드 멍(Albert de Mun)과 몇 사람이 노동자 단체의 노력에 대해 서술한 것들이 그렇다(주: 추천된 책은 자비에 발라(Xavier Vallat)가 지은 La croix, les lys et la peine des hommes라는 제목의 책으로 프랑스 가톨릭의 사회 운동의 역사를 일일이 열거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매우 잘 이해했다.

지난 세기에 교회는 노동자를 잊은 채 그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여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런 규탄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리스도인다운 사회 질서를 재건하고 노동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싸움을 이끈 사람들은 가톨릭 엘리트였다. 누가 길드를 파괴했는가?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었으니, 그 단체들은 상거래를 행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을 때조차도 종교를 굳이 지키고 있었음으로 해서 나라를 그리스도화 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온 인류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그런 장치를 파괴했다고 하는 것으로, 프랑스 혁명은 이전의 교계제도와 조합 내에 존재했던 기구를 제쳐놓은 채 노동자층이라는 유일한 군중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유주의자인 사장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착취당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소유주와 관리자는 조금씩 조합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프리메이슨 결사는 그것을 방해하는 공작을 폈고, 이미 거대한 영향력을 결집한 사회주의는 정치화된 노동 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층의 구세주인 양 행세하는데, 사실과 전혀 다르다.

변증법과 계급 전쟁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고용주에 맞서 싸우는 투쟁 속으로 밀려들어가기만 했으며 절덕(節德)과는 철저하게 반대되는 탐욕의 정신이 노조에 주입되었다. 그들은 상품과 소비자 단체의 이익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해야 한다고 부추겨져서 세물(世物)의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한계와 절제를 모르고 부풀려지기만 했으니, 이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는 절대적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는 가능한 한 최대다수를 마르크스주의자의 변증법 이론에 편승하되 끝도 없는 싸움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들어진 환경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데 꽤 길이 든 상태였다. 그런데 변증법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발전이란 계급간의 전쟁을 치르는 것일 뿐으로 시민의 반대 세력으로부터 시민으로 그리고 시민으로부터 정부로 진행한다고 한다. 저들은 그런 대결을 촉발시킬 기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대결을 조장한다. 그런데 저들이 무너뜨리려 하는 그리스도인 단체에서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문제다.

똑같은 변증법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실행되는가? 물론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공산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노조로 편성하려는 경우에 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에 맞닥뜨리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유가 자유로이 세력을 떨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에는 스트라이크란 것이 없는데, 스트라이크를 일으킬라치면 금방 철저히 진압되기 때문이다. 계급 전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니, 그 자리에는 정부와 노동자만이 있다(주: "정당을 구성하는 지배 카스트는 정치적인 지배 계급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소유자인 동시에 고용주다."(장 마디란(Jean Madiran), La vieillesse du monde, "La technique de l'esclavage," 제1편, Ⅳ)).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즉, 노동자는 일만 하면 되고 정부는 돈을 챙겨서 겨우 겨우 살아갈 만큼만 노동자들에게 지급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교회의 사회 관련 교리: 칙서 레룸 노바룸

교황들은 한층 진보된 몇 가지 칙서, 예컨대 레오 13세에 의한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사회 문제 및 길드로부터 얻는 이점에 관한 다른 칙서들도 있다. 그것들을 적극 참조해 현 상황과 비교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스위스가 동업조합주의 정신을 지켜 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로, 1927년인가 1928년에 소유자와 노동자간에 파업은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협정을 맺은 바 있다(역자 주: 스위스인들은 파업이 불법적이라는 것을 함께 선언한 노사 양측간의 바람직한 협정(싸우지도 않고 투쟁하지도 않는)을 실현한 것이다). 스위스에서 파업이라는 것이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회사 대표들, 노동자들 그리고 국가의 경제부 대표들이 만나서 불협화음을 연구하고 해결하며, 임금을 올리는 일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마침내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위원회 혹은 의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그런 중에도 작업은 계속되는데, 일을 중단하는 것은 기업을 위험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이는 파업이 장기간 계속될 경우, 경쟁사가 상황을 이용하여 파업에 의해 마비된 회사의 고객을 얼른 유치하는 까닭이다. 그런 방식으로 일해서 노동자들이 자기네 생계를 꾸려 가는 수단을 놓치는 것은 얼빠진 짓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스위스는 모범이 아닐 수 없다. 파업이 불법인 나라는 유럽에서 단 한 군데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얘기할라치면 다들 쉽사리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파업이 금지된 나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스위스는 최고의 생활수준을 누리는 나라 중 하나다. 이런 게 정상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

이티네레르(Itinraires)지 1980년 12월 호를 보면 칠레에 관하여 최근에 발행된 서적에 관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공산주의를 추방한 후에 이룩한 진보를 보여준다(주: 수잔 라뱅(Suzanne Labin)이 쓴 책에 관한 루이 살르론(Louis Salleron)의 논평, No. 28, Chili, le crime de rsister(Nouvelles ditions Debresse)). 그것을 보면 지난 5년 동안에 경제적인 진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룩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살라자르(Salazar) 치하의 포르투갈과 프랑코(Franco) 치하의 스페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모두 일을 하되 그리스도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정의의 정신이 회귀했음으로 해서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리스도교 정신이 사회를 제어하면 그와 함께 정의, 상호 부조, 이해와 평화의 정신이 도래하는 법이다. 통화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이는 너무나 확연하여, 교회가 이해하는 대로의 사회 정의의 원수는 광포하게 날뛰며 자기네 계획과는 정반대의 사례를 보여주는 나라를 파괴하려 든다.

또 다른 보기로는 쿠바가 있다. 그 곳의 백성들도 굉장히 고달픈 건 마찬가지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뭐든지 부족하여 배고픔에 허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무질서가 난무하는즉, 그런데도 서방 국가들에서는 공산주의가 언제나 노동자들의 정당, 불쌍한 자들을 지켜주는 진보 정당인 것으로 비쳐지는 판국이다. 그런 의회는 거짓말 같은 일로서 그릇된 정보 및 고집스런 맹목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정신을 거부하고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관한 교황들의 가르침은 유달리 교화적이다.

마침내 레오 13세는 또 다른 구제책, 다시 말해서 성 빈첸시오 아 빠울로(St. Vincent de Paul)를 주보로 삼아 설립된 단체를 제시한다.

    짐은 설립자이신 성 빈첸시오의 이름을 딴 모범적인 단체를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겠으니, 그 단체는 하층 계급에 속한 백성들에 대하여 공로가 있는지라. 그 단체의 행실과 목표는 대단히 잘 알려져 있도다(주: 여기서는 성 빈첸시오 아 빠울로의 형제회(the Institute of the Brotheres of St. Vincent de Paul)를 사례로 인용할 수 있다. 그들은 1845년에 처음에는 평신도였다가 나중에 신품성사를 받은 3명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그 3명의 평신도는 라 쁘레보(La Prvost), 마이요네(Myionnet) 그리고 모리스 매냥(Maurice Maignen)들이다. 그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사회 관련 가르침 및 계속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으로써 잘 훈련됐을 뿐만 아니라 출감자 및 정신 장애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중간 시설, 고아원, 단체, 신용 협동 조합, 도제(徒弟)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관 그리고 자선 단체들을 운영했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존엄성의 재생과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에 기여한 탁월한 업적이었다).

다음은 교황 레오 13세가 그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그 단체의 목표란 오로지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라. 이들은 유례없는 절제와 검소함으로써 그것을 행하는도다. 또한 눈에 띄지 않으려 할수록, 그리스도인다운 애덕을 실천하고 고통을 위안하는 데에는 더 잘 들어맞는 일이니라.

요즈음 다소나마 불행을 경감시켜 주는 복잡한 보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특히 대도시에서 그러한데, 그렇더라도 빈곤이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그들 중 많은 이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 그런 경우에는 성 빈첸시오 아 빠울로의 형제회가 훨씬 더 많은 선업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적인 구제뿐만 아니라 그 형제회가 갖가지 곤경에 처한 빈자들을 돕기 위해 운영한 여러 단체로써 영신적인 원조를 베푸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은 연고이다. 우리 주께서는 "대개 가난한 자는 너희가 항상 얻어보려니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성 마두 26:11).

젊은이들을 그 분파로부터 보호해야 할지니

그리고 나서 교황은 시행되고 있는 교육으로 인한 위험이 청년들을 위협하고 있노라고 주교들에게 상기시킨다.

    짐이 원하는 바를 더욱 쉽사리 달성하고자 그대들의 충성심과 경계심에 호소하나니 짐은 특별히 청년들에 대해 명하고 또 명하는즉, 그들은 인간 사회의 희망이 되는 연고니라. 그대들은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일지니, 그 어떤 예방책도 청년들을 분파의 유해한 숨결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가는 교사와 학교로부터 지키는 데에는 충분치 못함을 잊지 말진저.

이로써 추론하건대, 교황은 공립 학교를 지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전히 자기 아들이나 딸을 가톨릭 학교보다는 차라리 공립 학교에 두는 편을 택한다는 부모들의 말을 자주 듣는데, 역시 시의 적절하게 유익한 경고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 세속 학교는 종교나 가톨릭 신앙에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세속 학교에서는 자녀들이 천주님과 종교가 배제된 분위기에서 길들여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기본적으로 무신론인 그런 분위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자녀들에게는 심각한 위험이 따른다. 그런 식으로 오래 진행되다 보면 그들이 종교에 관하여 완전히 무차별하게 되기 십상이다. 종교가 불필요하다는 식의 인상을 깊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군가? 그것은 어떻게 좋은가? 학교에 가서, 학점을 따고, 직업이나 상업을 공부한다든지.....종교는 도무지 쓸모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세속 학교의 분위기는 자녀들의 정신과 마음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래서 온전하게 가톨릭다운 학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분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을 위한 기도

그리고 나서 교황은 극히 당연하게, 언제나 그래야 하듯이, 기도로 방향을 틀어서 거기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포도밭의 천상 주인께서 우리가 시도하는 바를 자비로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힘을 합하여 노력하더라도 주님의 밭에서 그렇듯 악한 씨앗을 뿌리째 뽑는 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짐은 알고 있나니. 그러므로 짐은 가장 큰 위험과 곤경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십사 하고 주의에 주의를 다하여 당신께 간구해야겠도다....그다지도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울타리가 필요한즉--그 울타리란 모든 착한 사람들이 행실과 기도 모임을 가능한 대로 가장 광범위하게 결성하는 것을 말함이니라.

교황은 우리의 참된 도움은 기도에 있으니, 기도에 의지하라고 명한다.

    그러므로 짐은 착한 사람들이 부디 마음을 한가지로 하되 한데 모여 끄떡도 하지 않으면서, 커져만 가는 분파의 힘에 대항하기를 바라노라. 또한 비탄과 애원에 젖어 손을 천주께로 뻗쳐 올려 기구할지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번영 번창하도록, 교회가 맞갖은 자유를 누리도록, 길을 잃은 자들이 올바른 정신을 되찾도록, 드디어는 오류는 진리에게 또 악덕은 미덕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하기 위함이라. 우리의 원조자시요 중재자이신 동정녀 마리아, 천주의 모친께 우리를 맡겨 드릴지니....극악 무도한 원수를 내쫓으신 하늘의 총령 천신 성 미카엘, 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정배시요 가톨릭 교회의 천상 주보이신 성 요셉, 또 그리스도교 신앙의 아비시요 승리자이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께도 간구할진저. 그분들의 보호하심으로써 및 항구하되 한데 뭉친 기도로써, 인자하심은 물론 적당한 시기에 천주께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를 짐은 바라고 또 바라나니, 인류는 지금 너무도 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는 연고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임교황들이 프리메이슨 분파 문제에 관하여 말한 바 있는 것을 몽땅 집약시킨 중요 칙서를 마감하면서 교황은 교황 강복을 베푼다  ㅡ

 

공의회 이후, 손영성체를 처음 실시한  추기경은 벨기에의 수에넨스 추기경입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드려졌던 미사에 대한 다음 기사는 사이먼 키건에 의하여 영국에서 발행된
‘International Catholic Priest Association'에 실려있었다.

벨지엄의 추기경 레오 수에넨스 에 의해 인도되는 “오순절파”와 “카리스마 운동가”들이 성체 찬양을  위해 왔다. (성령운동)

 바실리카를 채운 거대한 군중들 속에서 그 회중들 속에 흩어지고 있던 ‘흰 꽃잎’으로
우선 생각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직 내가 좀 더 (가까이)밀고 들어 갈 수 있었을 때,
나는 추기경을 지지하는 신부들이 영성체를 빨리 시키려 군중들 속에 뿌리고 있었던 한 줌의 축성된 면병들이었던 것을 알았다.

 성체들은 남자들의 어께위에; 염색한 , 아무런 것을 쓰지 않은 여성들의 머리위에 떨어졌다. 피할 수 없었듯이,  적지 않은 수가 땅위에 떨어져, 군중에 의해 밟혔다.
나는 내 옆에 있던 한 숙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축성된 면병들) 몇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디서 왔으며 카톨릭 신자인가를 물었다. 그녀는 이집트 출신이며 사실 어떠한 종교적 신앙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정서는 그녀의 가족이 속한 마호멭교를 선호하며, 그러나 그녀의 약혼자는 영국 성공회 교도이며, 그녀는 오순절운동이 아주 고무적인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일년에 한번씩 행하여지는 야외미사에서 일어났던 실제이야기 입니다.

여유있게 준비된 면병이 성체 분배 후에 많이 남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이에 대한 처리 곤란함을 인식하고, 앞줄에 앉아 있는 부녀자매들에게 한 묶음씩 집어서 그들 손에 놓아 줍니다.

응, 이거 남았어. 이거 남은 거야.

그들은 그저 킬킬거리며 손을 내밀어 5-6개의 성체를 받아 먹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ㅡ 서울대교구 게시판에서.


 


밝혀진 계획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중심으로 프리메이슨 총수로부터 하달된
지령.  1962년 3월 발효.
모든 프리메이슨 형제 단원들은 결정적으로 중대한 이 지령을
준수 시행상황을 보고할 것!

1)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성 미카엘 대천사를 미사 경문을 포함한
모든 기도문에서 마지막으로 완전히 제거하라.  그의 모든 고상을 지워버리게 하라.  그것이 그리스도를 손상시킨다고 주입시키라.

2) 사순절 동안 금요일의 금욕재와 단식재로 고행하는 것을 중단케
하라.  자기 자신을 버리는 모든 행위를 중단케 하라.  그것은 기쁨과
행복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면 된다고 주입시키라.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를 위해 천국을 얻어 놓았으며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입시키라.

4) 라틴어 미사 전례와 신심 행위와 성가는 신비와 공경심을 불러
일으켜 주니 이를 중단시키라.  미신적인 점쟁이들이 떠들어대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입시키라.  신부들이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될 것이다.

5)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섹시하다고 하여, 성당에서 여자들의 미사보를
벗게 하라. 여자 복사를 주장하고, 여성 사제직을 주장하게 하라.  이것을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입시키라 

 여성 해방 운동을 주장케 하라.

6) 영성체때 무릎을 꿇지 않게 하라.  

수녀들로 하여금 어린이들이 영성체 전후에 두 손을 합장하는 일을 중단케 하라.  하느님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고 가르쳐라.  그리고 완전히 편안한 자세로 있기를 하느님이 원하신다고 가르쳐라.

7) 거룩한 올갠 음악을 중단하고 키타를 가져오게 하라.  북을
치고 발을 구르며 노래하게 하라.  그렇게 하여 예수와 개인적인 기도나 대화를 갖지 못하게 하라.  예수에게 아이들을 신앙성소로 부를 시간을 주지 않게 하라.

11)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서 미사 지내는 것을 중단케 하라.
미사용 제대 위에 감실을 두지 못하게 하라! 제대를 저녁식사 테이블과 흡사하게 꾸미고, 회의용 혹은 트럼프용으로도 쓸 수 있는 다목적 탁자로 만들게 하고, 나중에는 이 탁자 옆에 의자를 하나 놓아두고 신부가 영성체 후에 이 의자에 앉게 하여 그가 식사를 하고 난 후 앉아 쉰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리게 하라 

 미사때 신부가 절대로 두 무릎을 꿇거나 한쪽 무릎도 꿇는 일이 없게 하라.  사람들이 식사때 무릎을 꿇지 않는 것과 같이.

14) 모든 개인 기도서들을 없애고 파괴하라.  그렇게 하면 예수성심
호칭기도, 성모성심 호칭기도, 성요셉 호칭기도를 중단케 될 것이며 영성체 준비 기도도 바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영성체 후 감사를 줄일 것이며 그것을 거짓으로 바치게 될 것이다.

16) 구마나 마귀를 쫓아내는 행동을 중지하라고 하라.  구마식에
사용되는 모든 소책자를 제거하라.  세상에는 정말 마귀는 없다는 말을 전하라. 그리고 그것은 성서에서 단지 악마를 지칭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 악마가 없으면 선이 없게 되므로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전하라.
그렇게 하면 저들은 지옥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옥이란 것은 하느님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라.  그것이 왜 그렇게 나쁘단 말인가?

18) 수녀들의 허영심을 조장하고 그들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하면
옷을 벗고 수녀원을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수녀복을 사복으로 대체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자동적으로 묵주마저도 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그들의 수녀원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고 알려 주어라.  그러면 수도성소는 말라버릴 것이다.

24) 평신도에 대한 사제들의 존경심을 격추시켜 사제성소가 격감되게
하라.  한 사제의 정치적인 스캔들이 천명의 사제성소를 잃어 버리게 할 것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옷을 벗고 환속한 사제들을 칭찬해 주라.  그들을 영웅이라고 칭찬해 주어라.  세속화한 신부들을 존경해 주어라.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극도로 박해받는 참된 순교자라고 존경해 주어라.


26) 평신도 위원회를 만들어 믿음이 부족한 신부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의 새로운 발현이나 기적들과 특히 성미카엘 대천사의 발현이나 기적들을 부정하고 비난하게 하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단 한 건의 성모 발현도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도록 절대로 철저히 봉쇄하라.  어느 누구라도 그 발현의 메시지를 따르거나, 그것을 전하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불복종, 불순명 하는 것이라고 낙인을 찍으라.


30) 여자들과 평신도들이 성체를 영해 주게 하라.  지금은 평신도의
시대라고 말하라.  혀로 받는 대신 개신교 신자들처럼 성체를 손으로 받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였다고 하라.

 

  우리(프리메이슨) 회당의 가짜 미사에서 그 성체를 나눌 수 있도록 몇 개씩 성체를 모으라.  그리고 성체를 그릇에 담긴 웨풀(기계로 눌러 납작하게 만든 과자)로 바꿔치기 하라.  그 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하나씩 가져갈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을 매일 일터로 갖고 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라.  동전을 넣고 성체를 빼낼 수 있는 자판기를 설치하라.  그것을 감실이라고 부르라.


34) 교황이 온 세상에 한 종교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거룩한 운동에
전력하도록 모든 과제를 하나로 모으라.  사탄은 잃어버린 황금이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무자비하게 세계를 정복하라.  이것이 인류에게 저들이 항상 꿈꾸어 왔던 - 평화의 황금시기 - 를 가져다 줄 것이다

새 미사를 만들기 위한 바티칸 위원회에 6명의 프로테스탄트들 있었다

1969년부터 도입된 새 미사를 만들기 위하여 바티칸 위원회(Vatican Commission)가 만들어졌고, 그 위원들 중에는 6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있었다.

조지 박사(Dr. George), 성공회 참사회 의원 야스퍼(Canon Jaspar), 세퍼드 박사(Dr. Shepherd), 코네드 박사(Dr. Konneth), 유진 브랜드 목사(Rev. Eugene Brand), 막스 투리안 목사(Rev. Max Thurian)

그들은 세계 교회 공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성공회(the Anglicans), 떼제 공동체(the Presbyterian Community of Taize), 그리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1967년 6월 27일 윌리엄 봄(William Baum) 주교(나중에 추기경이 됨)는 《디트로이트 뉴스(The Detroit News)》에서 “그들은 단순히 관람자로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문으로서 있었으며, 가톨릭 전례 쇄신에 대한 토론에 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단지 경청한 것이 아니라 기여하였다”라고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