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스크랩] “침례교회와 역사” 독서보고서

주방보조 2013. 5. 11. 10:27

1.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에 대한 비평적 고찰

  침례교회가 언제부터 어떤 연유에서 기원하였는가에 관하여 3~4가지 학설이 주장되어 왔다. 미국의 북침례교의 대표적인 역사신학자인 Robert G. Torbet은 그의 저서 ‘침례교회사’에서 ‘전승설’, ‘아나뱁티스트 영혈설’,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을 제시하며 침례교회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남침례교회의 대표적인 침례교회사 역사가인 H. Leon Mcbeth 교수는 ‘영국 분리주의 파생설’, ‘성서적 아나뱁티즘의 영향설’ 성서적 교훈의 계속설‘, ’조직화된 침례교회의 전승설‘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승설이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바로 침례교회이며 이 침례교회는 기록되어진 교회 역사 밖에서 기독교 이단으로 취급받으면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존속되어 왔다는 주장인데 1930년대까지만 해도 침례교단 내에서 통설의 지위를 유지했던 학설이다. 이 주장은 ‘침례의 전승’에 근거한 학설인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받았던 침례가 오늘날까지도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고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는 가장 성서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통설은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인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와 스튜어트 왕조시대에 부패하고 타락한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신자들로부터 침례교회가 기원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는 1609년에 영국의 분리주의자 John Smyth와 영국인 피난민들에 의해 화란 땅 암스테르담에서 일반침례교회가 그리고 한 세대 후인 1938년 경에 런던 근교 사우스워크에서 John Spilsbury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특수침례교회가 세워짐으로 비로서 침례교회는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영국의 초기 침례교도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침례교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침례교도들의 조상을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에게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본격적인 논쟁의 불이 붙었던 것은 1956년에 허드슨 교수가 영국 침례교연맹의 역사관계 계관지인 Baptist Quarterly에 “Who Were the Baptists?"라는 논문을 게제하면서부터였다.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도들은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아나뱁티스트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영국 내에서 영국 국교회에 반발했던 무리들, 즉 영국의 류리터들과 분리주의자들에게서 파생된 무리였음을 단정적으로 결론내렸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페인’총무는 Baptist Quarterly 다음 호에서 똑같은 논문 제목에 ”A Comment by Dr.Emest A. Payne on Dr. Winthrop S. Hudson's Article in Our July Issue"라는 편집자의 부제가 붙은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논쟁은 불붙기 시작하였다.

  허든슨 교수는 19세기 중반에 ‘전승설’에 입각한 침례교회사 책들이 대거 등장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러한 와중에 뚜렷한 역사적인 문헌 증거들이 제시되지도 않은 채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 간의 영적인 유사 혈연성이 주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왜 침례교도들은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상관이 없는지를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진술하고 있다. 첫째로, 초기 영국의 침례교도들이 자신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아님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나뱁티스트들의 삶과 사상을 강력하게 거부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침례교도들은 영국의 회중주의자들로부터 연유했다는 것이다. 영국 국교회의 감독정치 혹은 국왕을 수장으로하는 정치에 대항하여 회중들에 의한 자치적인 정치를 도모하던 자들이 영국 국교회를 정화하려 했거나 혹은 분리되어 떠나왔는데, 이들 회중주의자들이 바로 침례교회의 조상들이지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인들이 신자의 뱁티즘을 채택한 것이 반드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오직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신자들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 내의 국교 반대론자들 사이에서도 신약성서에 유아세례가 행해졌던 구체적인 실례가 없었고, 그들에게도 신자들에게 뱁티즘이 행해진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공감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넷째로, 침례교도들을 아나뱁티스트들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이유는 John Smyth의 신앙행적에서 볼때 더욱 확실하다는 것이다. John Smyth는 1607년에 핍박을 피해 분리주의자들의 무리인 Gainsborough 교회를 이끌고 화란의 암스테르담으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침례교를 창설한 것이다. 그러나 John Smyth는 뱁티즘의 연속성에 대해 번민하다가 이미 약 100년 전부터 신자의 뱁티즘을 계속해 온 메노나이트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하여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교인을 이끌고 Jan Munter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메노나이트 교회로 들어가고자 신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담임목사 John Smyth의 행보에 대해서 토마즈 헬위즈는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뱁티즘을 누구에게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자신들이 받은 뱁티즘에 하등의 하자가 없고 자신들이 세운 최초의 침례교회는 지극히 정당한 교회임을 주장하고 담임목사 John Smyth와 결별하고 1611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비로서 영국 땅 런던 근교 Spitalfield에서 침레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영국 땅에서 새롭게 시작한 침례교회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교회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허드슨 교수의 주장이다. 다섯째로, 초기의 영국 침례교도들을 핍박했던 과격한 반대자들은 이들을 아나뱁티스트들과 동일시 하면서 비난했는데, 그러나 온건하고 분별력 있었던 반대자들은 그러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고 했으며, 두 부류 간의 차이를 인정했던 점을 허드슨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페인 총무는 그의 반박문에서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도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점이나 연결점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회의 기원과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놓쳐 버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페인 총무는 아래와 같은 다섯가지 논거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휠씬 광범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스위스 형제단, 후터라이트들, 멜키오르 호프만과 그의 추종자들, 메노나이트들 그리고 이 외에도 수 많은 다양한 그룹들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초기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이 어떻게 기원하였는가에 대해서 아직도 상당히 모호한 점이 많이 있음을 페인 총무는 지적하였다. 초기 분리주의 교회들이 켄트지역과 동부 앵글리아 지역에서 등장하였다는 것이 우연 일치인가 하고 페인 총무는 반문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16세기 중반에 화란의 피난민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던 곳이고 그들 중에는 아나뱁티스트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허드슨 교수는 John Smyth와 Thomas Helwys에 미친 화란 메노나이트들의 영향에 대해서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으며, 동시에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에 대해서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17세기의 거의 모든 침례교도들은 칼빈주의자이며, 그들의 교회 정체도 모두 유사한 것처럼 허드슨 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모인’ 성도들의 교제인 교회, 신자의 뱁티즘 그리고 신앙과 양신의 자유라는 원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초창기 침례교인들은 일반침례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대체로 알미니안주의자이었다는 것이다. 넷째로,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은 폭력과 반율법주의를 뜻하는 욕설의 말이었음을 페인 총무는 지적하고 있다. 스위스 형제단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핍박을 받음으로 인하여 또 뮌스트 폭동으로 말미암은 비극적인 참사로 인하여 ‘아나뱁티스트’라는 말은 유럽 사회에서 혐오와 비난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영국의 침례교도들이 스스로를 ‘아나뱁티스트’가 아니라고 항변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나뱁티스트와의 신앙적 및 신학적, 더 나아가 역사적 관련성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 페인 총무의 주장이다. 다섯째로, 허드슨 교수가 ‘실제로 모든 초창기 침례교도들은 침례교도가 되기전에 회중주의자들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페인 총무는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그는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갖가지 종교적 상황과 동떨어진 단절된 상태에서 영국침례교회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스텝 교수는 1970년, 80년대부터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하여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즘의 중요성을 활발하게 강조해 온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비록 최초의 침례교회가 영국인들에 의해 기원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섬나라 영국 내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분리주의자 John Smyth가 화란 땅에서 피난하며, 화란의 아나뱁티스트들과 상호 신앙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교회관을 철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신자가 뱁티즘을 받음으로 교회 회원이 된다고 하는 신자의 뱁티즘에 기초하여 교회를 새롭게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화란의 아나뱁티스트의 영향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의 가장 심각한 취약점은 명확한 신빙성이 있는 사료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영국 땅에 잡입해 들어온 것이 사실이고 당시 의식 있는 지성인들과 신자들에게 신앙적인 감동과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사료로서 인정할만한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은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의 유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이 두 부류 간에는 차이점과 불연속성도 적지 않다. 두 부류간의 가장 중대한 차이점이라면 세속정부나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세속정부를 자신들의 ‘복음적인’ 기독교운동에 핍박을 가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기관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세속정부 공무원이 자신들의 교회에 회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회원이 공무원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탈세상적이고 타계적인 신앙, 또한 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시한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의 세속국가와 세상을 향한 태도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써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어두움을 몰아내는 등 적극적이며 기여적이고 봉사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나뱁티스트들과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저자는 스위스 형제단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뱁티즘을 베풀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 혹은 ‘신자의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침례교회의 하나의 큰 물줄기 가운데 한 지류라는 점에서 대륙의 아나뱁티즘과 신앙적인 관련성은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강조했던 ‘모인’ 교회, 신자의 뱁티즘,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도의 삶, 양심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의 신앙원리는 침례교회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신앙원리이다. 그러나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근원적인 뿌리를 찾고자 할때는 역사적인 연결고리가 확실한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에서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분리주의자들의 Gainsborough교회, 특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또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JLJ교회, 이들로부터 분열되 나온 성도들이 ‘신자의 뱁티즘’과 ‘회중정치’ 원리를 중심으로 이룩한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침례교회의 뿌리인 것이다.


  2. 스튜어트 왕조시대 영국 침례교 지도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1) 서 론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시대는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했던 때로부터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물러났던 때까지를 가리키다. 16세기에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 권위가 실추되면서 상대적으로 각 나라의 왕권이 강화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1세에 의해 절대주의 왕정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후원을 입으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에 자연히 영국 국교회 이외의 분파들은 정죄를 받았으며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침례교회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피난갔던 존 스마이드와 그 추종자들은 1609년 암스테르담에서 신자의 뱁티즘에 의한 교회를 최초로 창립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토마스 헬위즈와 그 추종자들은 1611년 혹은 1612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런던의 스피탈필드 지역에서 새롭게 침례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638년에 존 스필즈버리 등은 대륙의 칼빈주의 구원관에 입각하여 런던 서덕에서 또 다른 침례교회를 창립하였다.

  (2) 스튜어트 왕조시대와 당시의 영국의 종교적 상황

  ‘나는 영국과 결혼하였노라’고 선언하며 영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부강한 영국과 하나의 영국교회를 이루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에드워드 6세, 1547-1553)과 자신의 언니(메리 여왕, 1553-1558)로 말미암아 겼었던 영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중도 노선’을 선포하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양극단을 조화시키기 위해 타협적인 정책을 펼침으로써 ‘엘리자베스의 해결’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계 후손 없이 죽자 왕위 계승에 어려움이 생겼다. 결국 헨히 7세(1485-1509)의 증손자이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5촌 조카뻘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영국 왕으로 모시면서 그를 제임스 1세(1603-1625)로 칭하였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왕이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여러 기독교 분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견고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제임스 1세로서는 기존의 종교 권력인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개신교 계통의 종교지도자들이 영국 국교회 이외의 타종파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는 ‘1,000인의 탄원서’를 왕에게 올리기도 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만이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다른 분파는 이단시하면서 핍박하였다.

  1625년 제인스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했으나 그는 부왕보다 더 완고하게 왕권신수설을 믿고 전횡하였다. 프랑스와 전쟁하면서 의회를 무시하고 전쟁 수행자금을 쓰려고 했을때 의회와 충돌하였다. 그의 전제 정치는 의회와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켰고 심지어는 의회를 강제로 폐쇄시켜서 11년 동안 의회 없는 정치도 펼쳤다.

  이 결과로 개신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의회에 많이 진출하여 왕권에 맞서서 그 세력을 결집하였다. 특히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의회의 지도자로 등장하였고, 의회 세력을 중심으로 정예병인 ‘신규병 군대’를 조직하여 왕 휘하의 군대와 대결하였다.이것이 소위 영국의 내전(1642-1651)이고 또한 청교도 혁명이다. 결국 영국 왕 찰스 1세는 1649년 1월 화이트 홀 궁전 앞마당에서 도끼에 목이 잘리는 처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제는 정치의 중심이 의회로 옮겨지게 되었고 공화정(1649-1660)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1653년에는 자신이 호국경(호민관)의 칭호를 가지면서 권력을 독점하고 독재적인 정치를 자행하였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는 개신교도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침례교회도 이 시기에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그 아들 리차드 크롬웰(1659-1660)이 호국경의 지위에 올랐으나 그는 그 능력이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였고 우유부단하여 결국 정치적인 혼란과 사회적인 불안을 가중 시켰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체제와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싫증을 느끼며 왕정으로의 복귀를 희망하였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왕정 복고(1660년)이다. 은둔 중에 있던 찰스 2세는 1660년 영국인들의 환호 속에 귀국하여 왕좌에 앉게 되었다. 찰스 2세 복귀 후 영국 의회에 영국 국교도들이 많이 진출하여 영국 국교회 이외의 다른 분파들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1661년 이후 일련의 종교법령을 만들어 다른 분파 종교를 탄압하였다. 찰스 2세 치세 동안에는 영국 국교회 이외의 기독교적 종교활동이 왕명과 영국 국법에 저촉을 받는 범죄 행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1685-1688)가 왕위에 즉위하여 영국을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회귀시키려 하였다. 제임스 2세의 친가톨릭 정책은 백성들로부터는 물론이고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결국 영국 국교회 정치 지도자들이 제임스 2세에 저항하며 네덜란드의 통치자인 오렌지 공 윌리암(1672-1702)을 초청하여 영국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을때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은밀히 망명하여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혈혁명을 ‘명예혁명’이라고 불리운다. 윌리암 3세로 즉위한 그는 1688년 ‘권리장전’을 승인하였다. 영국 왕은 영국 국교회의 신자이어야 하며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못 박았다. 그리고 1689년 용인법에 서명함으로써 영국 국교회 이외의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3)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초창기 침례교 지도자들

  존 스마이드(1570-1612)는 침례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1609년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을 이끌고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텔르담으로 이주해 갔다가 그 곳에서 침례교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그는 ‘침례교 역사의 분수령에 서 있는 자’ 혹은 ‘침례교의 길을 연 개척자’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1609년에 쓴 「야수의 성격」에 이르면, 유아들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며,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교문제에 관한 한 세속 정치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궁극적으로 세속적인 권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610년에 스마이드가 썻던 「간략한 신앙고백」에 이르면,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에 대한 그의 견해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 당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노나이트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그들은 교회에 가입하고자 자신들의 믿는 바를 위의 신앙고백에 담았다. 이 신앙고백을 쓸 당시 스마이드는 기본적으로 세속정치에 관한 한 메노나이트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1612년 8월 스마이드는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토마스 헬위즈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메노나이트 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스마이드의 추종자들은 그가 생존시에 써 놓은 신앙고백을 정리하여 그의 사후에 102개 조항의 신앙고백, 「참 기독교에 관한 제안과 결론」을 발표하였다.

  존 스마이드가 자신이 창립한 최초의 침례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본연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고, 세속정치인이 영적 공동체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과감하게 반대하는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 ‘각 사람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믿도록 내버려 두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와 양심의 입법자다!’ ‘세속 정치인은 단지 세속적인 범죄들에만 관여하라!’ 는 등의 주장은 17세기 초 상황으로서는 전통과 기존질서에 도전하는 이단적인 발언이였겠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적인 보장을 받고 있는 당연한 주장인 것이다.

  토마스 헬위즈는 스마이드를 추종하는 게인즈보로 성도들 가운데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였고,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순례를 위해 제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존 스마이드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베풀었던 뱁티즘에 회의를 느끼며 교회를 해체하고 메노나이트 교회로 들어가자고 했을 때, 헬위즈는 그의 지도자 스마이드의 태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헬위즈는 침례교회를 떠나려는 스마이드와 대다수의 성도들을 징계 처분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리고 헬위즈는 1611년 혹은 1612년에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을 이끌고 영국 땅으로 다시 돌아와 런던 테임즈 강 북쪽에 위치한 스피탈필드 지역에서 게속해서 모임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영국 땅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토마스 헬위즈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런던에 정착한 헬위즈는 1612년에 매우 중요한 글을 발표하였다. 「불법의 신비에 관한 간략한 선언」 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당시의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드린 것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이 글로 인하여 결국 헬위즈는 같은 해에 투옥당했고, 1614년까지는 살아 있었으나 1616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헬위즈의 탄원은 ‘왕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된다. 그는 사람인 왕이 하나님이 주장해야 할 영적인 일에 세속적인 권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교회의 개념에 있어서 헬위즈는 당시 영국 국교회나 대륙의 관료적 종교개혁가들의 교회와는 구별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란 ‘기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적인 동동체였다. 하나님을 향한 반응은 사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영적인 왕국은 세속적인 무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권력의 도움을 입고자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영적인 무기를 결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려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헬위즈는 침례교인들에게만 신앙의 자유를 줄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를 요구하였다. ‘이단자든, 터키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지상의 권력으로 영적인 문제에 관해 그들을 벌 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물론이요 모슬램인들이나 유대인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에게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절대자를 섬길 자유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드 부셔가 1614년에 출판한 책, 「교의 평화 : 양심의 자유를 위한 탄원」은 종교의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셔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반응의 문제이지, 단지 출생에 의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운명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적인 출생, 즉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이란 죄인이 복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예수 영접의 결단을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셔에 의하면, 종교적인 핍박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 분의 자비에 상반되는 것이며, 왕과 국가 모두에게 위험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수단이 되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확대시키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그는 핍박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이단자들을 뿌리 뽑는데 전혀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역설하였다.

  부셔에게 있어서 종교의 자유는 왕의 기분에 따라 자의적으로 허용되거나 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천부적인 것으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존 머턴(1583-1626)는 분리주의자들이 모여 살았던 게인즈보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존 스마이드가 담임하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네덜란드 피난길에 동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1609년 스마이드가 신자의 뱁티즘을 베풀었을 때 토마스 헬위즈와 함께 뱁티즘을 받고 최초의 침례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로의 가입 문제로 스마이드와 헬위즈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때 헬위즈 편에 가담하여 침례교회를 지키는데 일조하였다.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머턴은 두 개의 글을 남기고 있다. 1615년에 쓴 「대화의 방식으로 답변한 반대 주장들」과 1620년에 쓴 「겸손한 간청」이 그것이다. 전자의 책은 1662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에 새로운 제목, 「정죄받고 저주받는 종교에 대한 핍박」으로 출간되었다.

  머턴은 책 서문에서 ‘잔인한 핍박으로 남자들과 여자들을 강요하여 그들의 영이 가고자 하지 않는 예배 처소로 그들의 몸을 끌고 가는 것은 주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왕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자신의 종교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는 안된다.’ 「대화의 방식으로 답변한 반대 주장들」 역시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명시하고 있다. ‘지상의 권위는 지상의 왕들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는 한 분이신 영적인 왕, 즉 왕 중의 왕에게 속해있다’

  1620년에 빛을 보게 된 「겸손한 간청」 역시 머턴의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대표적인 글이다. 종교문제와 관련해서는 강제가 시행되기 전에 먼저 설득이 시행되어야 하며 ‘어떠한 인간적인 법도 내면적인 은혜 없이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4) 결 론

  침례교인들은 특별히 자유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신앙인들이다.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확신은 침례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인들은 이러한 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오늘날 대다수의 민주국가의 헌법에 구체화되어 있다. 이처럼 헌법적인 보장을 받기까지 무수히 많은 신앙인들이 눈물과 피를 흘렸는데, 저자는 존 스마이드, 토마스 헬위즈, 레오나르드 부셔, 존 머턴 등 이들의 피눈물이 섞인 호소가 침례교인들의 영혼 속에 지금도 잠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3. 로저 윌리암즈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그의 기여

  종교의 자유를 위한 로저 윌리암즈(1603-1683)는 당대는 물론 오랜 세월 동안 이단자로 인식되었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영국과 영국의 국교회를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청교도주의를 넘어선’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당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회중교회의 국교체제에 항거하며 개인 영혼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그는 메사츄세츠만 식민정부로부터 1635년 10월에 추방명령을 받았다. 추방한 이유로는 윌리암즈의 분리주의 사상은 극단에 치우쳤으며, 세속적인 일에나 교회적인 일에 이단적인 사상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정부가 그에 대해 무관심해 있기에는 적절치 않았기에 추방명령은 불가피하게 내려진 것으로 주장한다.

  로저 윌리암즈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영국 국교회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국 국교회의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의 목회직을 수락할 수 없는데에는 유년시절의 이단자들을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당했던 사람들의 실제로 처형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또한 청소년기에는 법관 서기로 일하면서 피소된 이단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과정에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심각한 사색을 하였다.

  로저 윌리암즈는 결혼을 할 당시 이미 청교도를 넘어서서 투철한 분리주의자가 되었다. 신약성서와 당시의 영국 국교회의 현실 사이에 큰 괴리를 발견한 그는 점점 더 성경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탐독하며 연구하였다. 그는 신약성서에 비추어 볼 때 영국 국교회는 거짓교회요,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1630년에 신대륙으로부터 목회 초청이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먼 곳으로부터의 초청에 당황하였으나 점차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영국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아내와 함께 1631년 2월 5일에 보스턴 항에 당도하였다. 당시 영국인들의 이민사회에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보스턴 교회는 로저 윌리암즈에게 성경교사의 직분을 맡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윌리암즈는 교회의 호의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교회가 청교도들의 공동체이긴 했지만 윌리암즈 자신의 신앙과 비교할 때 충분히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의 명령에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1631년 4월 12일에 보스턴 북쪽의 근교인 Salem 교회의 담임목사로 세워졌다. 그 교회는 투철한 분리주의 사상을 가진 목회자를 환영하였다. 보스턴 시 당국은 그러한 목회자를 청빙한 Salem교회에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윌리암즈는 그 해 여름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1633년에 Salem 교회를 다시 담임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인 민주주의 사상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았다.

  1635년 10월 윌리암즈는 보스턴 법정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다. 그가 평소에 주장해 왔고 가르쳐 왔던 네 가지 내용에 대해서 해명하고 법관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소된 윌리암즈의 네 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가 영국 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 토지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토지의 참 소유주들이다. 우리는 전매특권에 의해 토지를 받은 것에 대해 회개하여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로써 사악한 사람들이 맹세를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로, 영국에 있는 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리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넷째로, 세속정부 관리들의 권력은 단지 육체와 물질에, 그리고 인간의 외부적인 것에만 행사되어야 한다.” 로저 윌리암즈는 이상의 네 가지 내용을 평소에 교인들에게 가르쳐왔음을 인정하였다.

  윌리암즈의 확신에 찬 답변들은 당시의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나 회중교회 지도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안정된 현상태를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적인 이단사상이며, 반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결국 보스턴 법정은 이러한 이단자가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에 거주하는 자체를 금하는 명령을 내려 추방하였다. 윌리암즈와 약 20여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남쪽 광야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들은 겨울에 추방되어 동상과 죽음의 위기에 있었지만, 윌리암즈가 사귀어 놓았던 인디언들이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

  로저 윌리암즈에게 추방은 새로운 땅을 개척할 기회였다. 그는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의 관할이 미치지 않는 남부지역 그 곳을 Providence라고 이름지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은 땅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윌리암즈와 혹한의 ‘도망’에 동참했던 추종자들은 아직 영국으로부터 새로운 식민주의 개척을 허락받기도 전, 1636년 6월 16일에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한 약속들과 협약들은 더 많은 수의 가족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적용되어 질 것이며 ... 그리고 그들은 오직 민사적인 문제들에만 적용되어진다”고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식민정부는 민주주의, 종교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근거하여 세울 것을 다짐하였다.

  1639년 3월 16일 이전에 신대륙에서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로저 윌리암즈는 Catherine Scott이란 여인의 인도를 받아 신앙고백을 하였고, 평신도 지도자 Ezekiel Holliman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곧 이어 윌리암즈는 Holliman과 추종자들에게 역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교회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뱁티즘 베푸는 것을 거부했으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지는 원리에 따라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침례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윌리암즈 자신이 개척했던 침례교회에 몸을 담았던 것은 몇 달이 되지 못했다.

  윌리암즈는 자신이 받고 주었던 침례에 대해서 신뢰감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침례의 방식보다는 그것의 권위에 대해서 의심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식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도들에게까지 끊어지지 않은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연속성이 단절되면 의식의 효력은 상실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로저 윌리암즈는 침례교회의 창설자로서의 의미보다는 Rhode Island 식민정부를 개척하고 그 곳의 주(州)지사로서 그가 민주적인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한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와는 다르게 Rhode Island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초의 주가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4. 미국 남침례교 총회의 형성 과정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미국 동북부 지방에서 두 번째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대각성운동과는 달리 이번에는 감정적인 흥분과 심령의 부흥보다는 보다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헌신된 삶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들 중의 하나는 복음을 조직적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각종 기독교 교단이나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례교회는 미국 내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단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영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에서 침례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전 했기 때문에, 새 공화국 건설에 공헌함으로 사회적으로도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교회가 침례교회였다. 영적인 부흥과 함께 교인수와 교회수가 급증하였다. 그리하여 1814년에는 침례교회들이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전국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반선교총회는 10번의 총회를 가진 후 1845년에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는 비극을 맞았다. 미국 침례교도들 가운데 최초로 큰 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침례교회의 남북 분열의 이유를 근원적으로 고찰해보면 미국 남부와 북부지방 간의 현격한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1800년대 초는 1789년 연방헌법의 채택으로 모든 지역들이 새 나라, 새 정부의 정착을 위해 적응을 해가던 시기 였다. 그 당시 미국은 동부 13개 주(州)가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연방 정부를 구성할 것을 동의하였다. 미국 처음부터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출발하였다. 일찍부터 남부지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소수의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과 엘리트 정치인들이 서로 권익을 보장해 주면서 상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북부 지역과 비교할 때 남부 지역은 반봉건적 사회를 기본적인 골격으로 형성되었다.

  J.Wayne Flynt는 북부지역의 침례교회와 비교하여 남부지역 침례교 신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개인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이었다. 남부 지역교회는 현실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목회를 위해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복음의 메시지를 개인 영혼의 구원에 목표를 두었다. 둘째로, 남부 지역의 침례교회는 중.하류계층의 일반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대중적인 신앙이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침례교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친화력을 느낄 수 있었던 교회였다. 셋째로, 19세기 초반의 남부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부흥회 운동이었다. 특히 천막 집회를 통해 통회 자복, 중생, 심령부흥, 헌신 등이 강조되었다. 넷째로, 백인 우월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는 남부지방 기독교의 약점이자 또한 특징이었다. 남부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백인들만 출석하는 교회와 흑인들만 출석하는 교회로 엄격히 나누어져 있었고, 목회자까지도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 침례교의 남북 분열의 원인을 명료하게 규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남북의 문화적인 차이가 배경이 되어 있었고, 그 외에 침례교 최초의 전국총회였던 일반선교총회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들이 있었다. 분열의 간접적인 원인으로써는 총회 조직에 대한 기본 개념의 차이와 국내 선교에 있어서의 불평등한 차별 대우를 들고 있다. 즉, 남부에서는 지역교회들이 기본단위가 되어 총회를 구성하고 총회가 국내, 해외, 신학교육, 출판문서 등 모든 목회 및 선교사역을 중앙집권적으로 관장하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에 북부에서는 지역교회의 자치성과 독립성을 보호라기 위해서 모든 목회 및 선교사역이 각 사역의 주체 기관들에 의해 주관되어 지고 개인이나 단체들이 자원하여 헌금하고 참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전자는 총회체제를 후자는 협회체제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일반선교총회는 이 양자를 적절히 타협하는 선에서 총회 조직을 이루었기 때문에 처음부터rkfemddml 소지를 안고 있었다.

  1826년 총회의 본부를 필라델피아에서 보스턴으로 이전하면서 총회 지도부를 북부 지역 침례교 지도자들이 장악한 후 총회를 협회체제로 전환시켜 버렸다. 또한 국내 선교사 파송이나 선교비 지급에 있어서 남부보다 북부지역 출신 선교사이 우선적으로 선출 파송되었고, 자금 지원도 북쪽 개척교회에 많이 지원되었다. 이러한 차별대우가 남부 침례교인들에게 불만과 분노를 낳게 되었는데, 이것이 분열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침례교 분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그 당시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문제이였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시기적으로 약간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830년 이전에는 단지 경제적인 체제로 이해되었고, 1830-40년의 도덕적인 개혁의 시대에는 도덕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고, 그리고 1840년 이후에는 정치적인 양상을 띠게 되면서 결국에는 남북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노예폐지운동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영국 침례교인들의 반노예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았다. 1833년에 영국 의회는 1838년까지 영연방에 속한 모든 나라에서는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때 그 법안 제정을 위해서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침례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영국과 그 연방제국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노예폐지운동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1833년 12월 31일에 미국 침례교인들 앞으로 장문의 권고문을 보내왔다.

  영국 침례교 지도자들의 권고에 찔림을 받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예폐지운동이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단체 구성과 단체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국 침례교 노예제도 반대총회를 구성함으로써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2개의 선언문이 채택되었는데, 하나는 북부 지역의 침례교인들을 향한 선언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부 지역의 침례교인들을 향한 선언문이었다.

  노예제도를 묵인하거나 옹호했던 남부 침례교회들과 그것을 철폐하고자 했던 북부 침례교회들 틈에서 일반선교총회와 국내선교협회는 지도자들과 교회들 간의 분열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견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전자는 1840년 12월에 헌장에 근거한 중립을 선언하였고, 후자는 이듬해 2월 16일에 회람 공문을 발송하였다.

  위기는 1844년에 찾아왔다. 조지아 주의 침례교인들은 국내선교협회의 중립 선언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수용할 수 없었다. 그 당시 국내선교협회에서는 노예 소유자는 국내 선교사로 파송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 조지아 주 침례교인들은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방도를 찾았다. 1844년 4월 조지아 주 침례교 총회 실행위원회에서는 노예 소유주인 James E. Reeve를 조지아 주 탈라포사 지방회의 선교사로 임명해 줄 것을 국내선교협회에 요청하였다. 그런데 국내선교협회 이사회는 이 요청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심의를 거절하였다. 결과적으로 Reeve는 국내 선교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를 추천했던 조지아 침례교인들은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위기는 알라바마 주에서 발생하였다. 알라바마 주총회는 1844년 11월 25일에 해외선교와 관련하여 일반선교총회에 몇 가지 가정적인 질문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만약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다면 총회로 보낼 그들의 해외선교 헌금을 유보시키겠다고 결정하였다. 6가지 질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두 번째 질문의 요지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성도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성도와 똑같은 자격으로 해외 선교사로서 파송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844년 12월 17일, 일반선교총회 이사회는 알라바마 결의에 대한 회신을 보내왔는데, 그 입장은 매우 단호하였다. 이 회신문의 마지막 문장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듯이 암시하는 사람들의 편에 결코 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라는 문장은 북부 침례교 지도자들이 스스로 견지하겠다던 중립의 원칙을 깨뜨린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예 문제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여 남부 지역의 침례교회들이 일반선교총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는데, 새로운 총회 구성을 결행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지도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침례교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던 사람은 윌리암 존슨(1782-1862)이었다.

  조지아 침례교도들과 알라바마 주총회가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국내선교협회와 일반선교총회 지도부의 대응은 남부지역 침례교도들과 지도자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에 총회 지도부를 향해 거센 항의와 비판을 가한 사람들은 버지니아 침례교인들이었다. 총회 지도부의 결정은 헌장 위반이요 지난번 전국 총회에서 채택했던 “타협 조항”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요 동시에 총회에 협력하고 있는 남부 지역 침례교인들은 불공평하게 차별 대우하는 결정이라고 버지니아 침례교 선교협회가 선언하였다.

  버지니아 침례교인들의 항의와 결의는 많은 남부 침례교인들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그들의 공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그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총회장 직분을 보유하고 있었던 윌리암 존슨의 마음 속에도 점차 확신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버지니아 침례교 선교협회가 제안했던 대로 1845년 5월 8일, 새로운 총회의 발기 모임을 위해 남부교회의 침례교 지도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 등 239명의 사신들이 Augusta에 모여 들었다. 발기 총회는 새로운 총회의 헌장 전문과 헌장 내용을 작성하도록 위임하기 위해 16명의 헌장 기초 소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다. 헌장 기초 소위원회는 존슨이 작성해 온 초안을 검토하여 토의하였고, 약간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새 헌장을 작성하였다.

  남부지역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던 윌리암 존슨은 새로운 침례교총회를 ‘총회 체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모든 지역 교회들이 한 총회 산하에 회원 교회로써 상호 협력함으로써 목회 및 선교사역에 능률성을 높이도록 하였다. 발기 총회의 제3일째날인 5월 10일 토요일 오전에 헌장 기초 소위원회가 제출한 전문 13개조의 헌장이 총회를 통과됨으로써 남침례교 총회는 정식 출범을 하였다.

  미국 침례교의 남북 분열의 이유가 오직 노예문제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이 가장 핵심적이고 직접적인 이유였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문화적인 차이와 사뢰, 경제적인 이해도 필요하다. 특히 신학적 요인으로써 총회와 개교회들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북부 지역 침례교회들은 개교회가 총회 조직으로 인하여 속박을 받는 것을 매우 예민하였다. 즉, 그들은 개교회가 교단 정치에 휘말리는 것에 경계하였고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인 개교회가 순수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에 착념하였다. 이에 비해 남침례교회들은 사역의 능률에 치중하였다. 개교회가 독립성과 자치성에 약간의 제약이 있다 하더라도 종합적인 차원에서 사역을 주관하게 하여, 수많은 지역 교회들의 에너지를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착념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남침례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오늘날 남침례교 총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근본 보수주의자들과 온건 보수주의자들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여 하나된 마음으로 협력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체제 정비와 함께 남침례교 지도자들이 하루 속히 풀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이다.


  5. 협동프로그램(Cooperative Program)의 기원과 발전

  침례교인들은 근본적으로 기구화된 조직과 그 조직에 대한 강요된 순종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침례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만나는 체험의 신앙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침례교인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지만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체험을 침례를 통해 고백함으로써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침례교인들은 개인과 개교회의 자유를 사랑하고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회중정치체제, 다양성과 융통성등을 존중하기 때문에 조직의 결성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찍부터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개교회의 자치권과 독립성을 보장받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다른 침례교회들과 연합하고 협동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해 왔다. 자유와 협동 서로 상반된 두 가치를 어떻게 하면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침례교인들의 고민이요 갈등이었다. 이러한 협동 프로그램의 정착과정을 영국과 미국의 초기 침례교인들은 교회들 상호 간에 어떻게 협력을 이루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는 개교회와 지방회 혹은 총회와의 관계에 관하여 그 견해를 뚜렷이 달리하였다. 일반침례교회는 지방회나 총회의 권위를 개교회의 자치권보다 위에 두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과 교회들 간의 연합사역을 위해서라면 개교회의 자치권이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는데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특수침례교회는 개교회의 자치권이 침해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지방회나 총회는 어디까지나 교회 상호간의 교제를 위한 조직일 뿐 그것이 개교회 위에 군림하는 상부기관이 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경계하였다. 또한 특수침례교회에서는 지방회나 총회가 교회적인 기능에 해당되는 주의 만찬, 침례, 안수, 징계 등의 예식을 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교회적 기능은 오직 개교회의 목회사역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침례교회에서 ‘해외선교’를 위하여 본격적인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1792년 윌리암 케리와 Andrew Fuller에 의해 창립된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이다. 윌리암 케리는 1792년 5월에 Northampton 지방회 석상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이란 설교로 목회자들에게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10월에는 Kettering에서 있었던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해외선교의 시급함을 강조했지만 지방회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냉담한 반응만을 모일 뿐이었다. 그래서 윌리암 케리와 Andrew Fuller는 자신들이 속해 있던 지방회나 총회를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해외선교를 위한 독자적인 선교단체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침례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총회나 총회에 속한 교회들에 의해 해외선교가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도와 헌금에 의해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선교운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윌리암 케리의 선교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운용되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러한 선교방식을 ‘협의체제’라고 정의하고 있다.

  윌리암 케리의 인도선교 개척사역과 침례교선교회의 헌신적인 활동은 영국교회뿐만 아니라 갓 독립을 이룬 미국의 교회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과 도전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제2차 대각성운동을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갱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제2차 대각성운동의 결과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각 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전국적인 교단을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각종 기독교 단체들을 탄생시켰다.

  미국 최초의 초교파적 해외선교단체인 미국해외선교위원회가 1810년에 구성되었다. 이 기관에 의해 첫 번째 해외선교사로 파송된 사람들은 Adoniram Judson 부부였다. 이들은 미국을 떠날 때는 회중교도였으나 선교지 Burma를 향하던 배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유아세례가 성서적이지 못함과 신약성서는 신자의 침례와 침수침례를 가르키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Burma에 도착한 후 윌리암 케리의 제자요 동역자인 윌리암 와드에게 침례를 받았다.

  미국에서 최초의 전국적인 침례교 총회가 구성된 것은 1814년이었다. 윌리암 케리의 간절한 호소도 있었지만 Luther Rice와 뜻을 같이 하는 침례교 지도자들은 의기투합하여 해외선교를 위한 전국총회의 결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1814년 5월 18일, 33명의 침례교 대표들이 필라델피아 제일침례교회당에서 역사적인 첫 모임을 가졌다.

  매 3년마다 총회를 가졌기 때문에 3년차 총회로 통칭되는 침례교전국총회는 그 목적이 해외선교였다. 따라서 일반선교총회는 오늘날 미국 남침례교총회나 기독교한국침례회와는 그 조직이나 사역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총회이었다. 즉 해외선교라고 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전국적인 침례교 조직이었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침례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총회체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반선교총회의 조직을 ‘협의체제’라고 불리운다.

  협회체제는 목적 중심적이다. 에를 들면 해외선교, 국내선교, 신학교육, 장애인선교, 인디안선교, 출판 및 문서선교등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 관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목적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참여하는 체제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협회체제에서는 개교회들과의 직접적인 관련을 배제한다.

  남침례교총회의 전체적인 윤곽은 총회체제를 구축하였으나 여전히 협회체제적인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다. 총회를 매 3년마다 개최키로 한 것이라든지 총회가 열리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총회 사무를 관장할 상설 집행기관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라든지 해외선교부와 국내선교부, 두 기관의 본부를 각각 다른 도시에 두게 한 것 등은 일반선교총회의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초창기 남침례교 총회가 안고 있던 조직상의 문제 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침례교단 내에는 총회적 차원의 협동운동에 대해 교회들간에 신학적 반발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즉 남침례교 총회가 주도하고자 했던 선교운동에 대해서 조직적인 반대를 일삼았던 무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반선교세력으로는, 첫째로, 지계석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침례교 고교회운동으로써 침례교회만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하였고 침례교회 회중이 바로 신약성서적인 참 교회의 모습임을 주장하였다. 지역의 침례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는 기본단위이며 예수를 믿고 신자의 침례와 침수 침례를 받은 자들만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이다. 그 당시 적지 않은 침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베푸심에 대하여 온건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가서는 극단적인 형태의 칼빈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중 예정설을 주장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선교단체나 총회, 신학교 등을 만드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요 더욱이 선교를 위한 협동기관을 발족 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권위에 도전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과도한 개인주의 이다. 자기 중심적이고 고립되기를 선호하는 형태의 지나친 개인주의가 그 당시 일부 침례교인들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었다. 특히 광활한 농촌지역이나 서부의 개척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환경적으로도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협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총회적인 차원에서의 협력을 전제한 선교운동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조가 팽배해 있었지만, 남침례교 지도자들은  선교와 구제활동을 위해서 범교단적인 협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중국 본토 선교사로 활동중인 Lotte Moon 선교사를 돕기 위한 선교헌금 캠페인이다. 1887년 말 그녀는 버지니아 주의 여선교회 지도자에게 편지하기를 여성 침례교회 교인들이 엄청난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위해 크게 일하지 못하는 것은 조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전국적인 조직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여선교회 전국연합회가 남침례교총회의 보조기구로 결성되었고 같은 해에 중국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특별선교헌금을 모금하였다. 이 영향으로 남침례교 남자 평신도들이 헌금의 최소기준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자고 하는 평신도 운동, 즉 Laymen's Missionary Movement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남침례교총회의 조직개편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던 것은 1917년에 총회 직속의 실행위원회의 발족이었다. 그 때까지 총회는 연차총회가 개최되는 몇칠 동안만 존속할 뿐이었다. 따라서 별도의 총회 사무실이나 상주하는 직원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 실행위원회는 연중무휴로 총회전체의 사역을 보살피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총회의 예산, 예산배정, 정책수립, 등 남침례교총회의 최고 집행기관으로써의 권위를 갖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각 교단에서는 재건과 부흥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러 교단에서 재정적인 핍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범교단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침례교인들은 1919년에 7천5백만불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것은 1919-1924, 약 5년 동안 범교단적 선교사업을 위해서 7천5백만불을 모금하자는 운동이었다. 침례교 지도자들의 큰 관심 가운데 승리의 주간에 남침례교 전체 교회들에서 작정 헌금액을 적어내도록 하였다. 그 결과는 대승리였다. 목표는 7,500백만불이었는데, 작정은 92,630,923불이었다. 1,700만불이나 상회하는 금액을 성도들이 작정해 준것이다. 그러나 실제 헌금액은 58,591,713불이었다.

  침례교 지도자들은 7,500백만불 모금운동의 준비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경험적으로 소중한 교훈을 받았다. 침례교 특유의 개교회 자치와 독립을 견지하면서도 교단적으로 대규모적인 근 사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앞으로 총회 산하의 각 기관의 사업을 총회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운용해 나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체험한 것이다. 1923년 연차총회에서는 7,500백만불 모금운동의 게속적인 확대를 위해서 미래프로그램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헌금을 매년 정례화하는 방안을 연구 검토하도록 위임하였다.

  1925년 테네시 주 멤피스 총회는 남침례교 역사에 있어서 두 가지 결정을 낳은 획기적인 연차총회였다. 첫째는, 당시의 침례교인들의 신앙을 요약 정리한 남침례교 최초의 신앙고백의 채택이었다. 둘째는, 협동 프로그램의 출발이었다. 대의원들은 미래 프로그램위원회 보고와 동의안에 대해 수정없이 원안대로 가결하였다. 총회는 이것을 “남침례교인들의 협동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하기로 결정하였다.

  1979년도 남침례교 연차보고서에 의하면 협동 프로그램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의되어 있다. “협동 프로그램이란 주총회들과 남침례교 전국총회 간의 재정적인 협동채널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침례교인들은 주총회와 전국총회가 펄치는 선교사업, 교육사업, 그리고 각종 자선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그들의 소속교회를 통해서 비작정 헌금을 드린다.

  협동 프로그램은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사랑의 고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도 한 사람과 개교회와 주총회와 전국총회와 총회내의 각 기관들과 그리고 선교 대상자들 모두가 사랑의 고리로 엮어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위에 펄치는 것이다. 철저하게 이것은 강요받지 않은 자발적인 드림에 근거하고 있다. 전국총회가 주총회나 개교회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없고 몇 %의 헌금을 보내라고 강요할 수 없다.

  협동 프로그램은 개교회나 소수의 몇 개 교회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선교, 교회개척, 신학교육, 대량난민구제 등의 대규모 사역을 전체 침례교회들의 결집된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협동 프로그램의 최대의 매력이다.


  6. 21세기를 대비한 남침례교 총회의 조직 개편

  1845년 5월 조지아 주 어거스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을 당시 남침례교 교회 수는 4,126개 였으며 교인 수는 351,951명이었다. 그 후 약 150년 동안 남침례교는 미국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 기적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단일교단으로써는 세계 최대 교단이 되었다. 1992년 2월 12일 Baptist Standard지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 수는 38,221개, 교인 수는 15,238,283명으로 집계되었다. 국내적으로는 37개의 주총회와 1,218개의 지방회가 있고, 국외적으로는 약 116개국에 약 3,800여 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다.

  남침례교 총회 실행위원회는 지난 150년 동안의 남침례교의 역사를 반성하고 방만한 조직으로 말미암은 낭비와 비능률은 없는지를 성찰하여, 서기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보다 능률적인 체제로 맞이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휴스턴 총회에서 “프로그램과 조직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1세기를 대비하는 혁명적인 체제정비 계획을 동 위원회에 위임하였다. 1995년 2월 이 조직 개편안은 총회 실행위원회에서 절대 다수로 채택되었고, 같은 해 아틀란타 남침례교 총회에서 1차 인준을 받았다. 이 개편안은 1996년 뉴 올리안즈 총회에서 두 번째 인준을 받아 채택되었으며, 약 3년의 준비와 조정의 과정을 거친 후 2,000년부터 조직 개편 효력이 발휘되었다.

  먼저 “프로그램과 조직연구위원회”에서는 그 동안 남침례교 총회 산하에 너무나 방만한 기관들이 프로그램 위주로 발생 존립해왔으며, 부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업무의 중복과 혼선이 상당히 있어 왔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그래서 기관 중심이 아니라 사역중심으로 남침례교 목회 및 선교사역을 5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선교사역, 교회비옥사역, 선교교육사역, 기독교윤리 및 종교자유사역, 그리고 목회촉진사역 등이다.

  세계선교사역은 지금까지 해외선교부의 명칭이 “국제선교부”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까지 미국이 중심이 되어 해외선교를 주도해 왔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선교현장과 동족그룹에 많은 비중을 놓인 것이다. 국내선교부난 “북미선교부”로 바꾸고, 지리적으로 가까이 인접해 있고 언어와 습관 생활방식이 유사한 캐나다 지역의 선교는 미국 내의 선교와 함께 북미선교부에서 관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선교부와 북미선교부 간에 선교사역의 효과적인 수행과 업무의 조정 협력을 위해서 “지상명령협의회”를 둔다는 것이다. 선교정책의 입안이나 선교자원의 효율적인 qnsqo 등을 논의하기 위하여 두 기관의 대표들로 구성된 협의회를 정례화하게 된다.

  “교회비옥사역”은 주일학교부의 고유한 업무이다. 지역교회의 성경공부을 위해 출판, 훈련, 교사양육 등의 사역을 담당한다. 기존의 6개 주요사역, ‘성경교육, 제자훈련, 교회음악, 교회행정, 교회미디어와 도서관, 그리고 교회오락 등의 사역이 상호 협력하에 이루어져, 지역교회들의 목회사역을 비옥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신학교육사역”은 총회 산하의 6개 신학교들이 신학교육을 통해 지역교회들과 기관들이 요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배출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요망한다.

  “기독교윤리 및 종교자유사역”은 기존의 ‘기독교생활국’에서 ‘윤리 및 종교자유국’으로 개칭되어 본 기관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더욱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 기관의 사역은 세상을 향하여 성서적인 가치관이 무엇인지 일깨우며, 정치, 경제, 해정, 교육, 가정, 여성 등 사회 각 부문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교정하는 것이다.

  “목회촉진사역”은 남침례교 총회와 산하 교회들의 목회사역을 격려하고 목회자들의 권익과 은퇴 후의 생활보장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위한 언약”의 내용을 요약하면, 남침례교 총회를 조직이나 프로그램 중심으로 기관화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들을 능률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능분화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침례교 총회의 목회 및 선교사역을 5가지로 대별하여 변화와 도전 앞에 적절한 준비와 반응으로 새로운 도약을 기하고자 한것이다.


  7. “침례교회와 역사” 독서 소감문

  침례교회와 역사는 침례교의 역사를 통해 신약성서적 교회를 이루어 가려는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고백을 보는 것 같다. 이번 3학기차를 공부하면서 침례교의 모든 것을 배운 것 같아 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 교수님의 강의와 ‘침례교회와 역사’ 교제를 정독하면서 침례교에 대한 주요 논제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러한 논제들을 통해 내 마음속에 있는 의문점이 하나 하나 해결되어 나갈 때 학문의 자유함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독서보고서를 통해 침례교회의 기원과 영국 침례교 지도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로저 윌리암즈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그의 기여, 미국 남침례교 총회의 형성과정, 협동 프로그램의 기원과 발전, 21세기를 대비한 남침례교 총회의 조직개편등을 통해 침례교회가 가장 신앙적 자존심으로 여기는 ‘신앙의 자유’와 이를 이루어 가는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심층적 연구를 하고자 한다. “감사합니다”

출처 : I Surrender All
글쓴이 : 진배나 다름없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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