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사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 메리 벤튼(Mary Fletcher Benton,1832-1909)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전통 있는 감리교 벤튼 가문으로 아버지와 오빠가 감리교 목사인 집안이었다.
16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스크랜튼은 뉴헤이븐의 명문인 예일대학과(1878) 뉴욕 의과대학(컬럼비아의과대학)을 졸업한다(1882).
그리고 그 해 유명한 회중교회 지도자이자 예일대학 이사인 암즈(Hiram P. Arms)의 손녀딸(Loulie W. Arms)과 결혼한다.
결혼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여 의사로서 활동하던 스크랜튼은 1884년 12월 미북감리회 해외 선교부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향한다.
스크랜튼이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두 살 아래의 같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한 것이 1885년 2월 3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지러운 사정으로(갑신정변등) 부녀자들의 입국이 어렵자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 두고 그해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서울에 도착한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의료 진료를 하다가 1886년 6월 15일 정동에 병원을 개원하는데 이것은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민간의료 기관이었다.
미감리교 선교사들을 신임하던 고종은 병원 이름을 스크랜튼의 한국 이름인 시란돈을 따라 시(施)병원이라 명명하는데 베푸는 병원이란 뜻이다.
또한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하였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겨 본격적으로 한국의 민중들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과 함께 전도에도 힘써 상동 감리교회를 세운다.
이곳은 후에 조선의 민족 지도자들과 청년들 그리고 민중들이 모이는 민족 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그런만큼 일제의 혹독한 박해를 받으며 예배당을 닫아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스크랜튼의 선교 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 밖에 한글 성서 번역 위원회 번역 위원으로서 성서 사업에도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스크랜튼의 선교 사역은 큰 위기를 맞는다.
1904년 미감리교 총회에서 조일연회 감독으로 선출된 해리스 감독의 노골적인 친일 성향과 그에 동조하는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1907년 6월 14일, 선교사직을 사임하며 20여년을 넘게 일한 감리교를 떠난다
...
프리메이슨 한양롯지 홈의 스크랜튼 관련글...
It is not definitely known who were the originators of the movement to
establish an independent Masonic Lodge in Korea, but we do know that several
meetings were held in Seoul during late 1907 and early 1908 at which steps
were taken to prepare a petition to the Grand Lodge of Scotland.
At one of those meetings, held in the home of Dr. William B. Scranton, a
medical missionary, it was suggested that the petition be given to Brother
Walter H. Aldridge, who was connected with one of the large mining firms, so
that he might take it to the mines on his next trip and there secure signatures
from Brethren employed by his company. How well Brother Aldridge
succeeded is shown by the fact that over one third of the signers of the petition
were mining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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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보조 애비슨은 조선 정부로부터 북장로회로 제중원의 경영권을 이양토록 한 사람으로서
선교사 알렌의 뒤를 이어서 광혜원의 이름이 바뀐 제중원의 원장(1893~)을 역임하였으며,
세브란스로부터 건립 기금을 받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했고(1904),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를 세워서(1917) 초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물론 애비슨은 1907~8년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의 창립 멤버이기도 합니다.^^
'세'브란스 의과 전문학교는 해방 후에 '연'희전문학교와 합쳐져서 연.세.대로 바뀌었지요.^^
에비슨이 세운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나라 근대 서양 의학의 효시라고 할만하며, 특히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병원입니다.^^ 백정들의 형평 운동을 후원하여 신분제
차별 철폐에도 앞장서는 등 프리메이슨이 좋은 일을 한 것인데, 굳이 비난할 이유가 있습니까? -
주방보조 연세대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가 1957년에 합쳐진 것입니다.
연희전문은 1915년에, 세브란스의전은 1917년에 그 문제의 프리메이슨, 애비슨 선교사가
세브란스 병원 부설 학교로 세우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한 곳이지요.^^
1885년은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세워졌던 연도로서, 광혜원 - 제중원 -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어지는 계승의 역사를 연세대가 자기네 창립 연도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사실상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 의전은 애비슨이 세웠다고 보더라도 무방합니다.^^+
그의 정체를 프리메이슨 단원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북장로회 선교사에 중점을 두느냐는
별 의미 없습니다. 애비슨은 현역 선교사로서 프리메이슨 단원이었고, 이는 프리메이슨과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의 접점으로서 작용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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