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일단^^윌리암 스크랜튼...프리메이슨 관련

주방보조 2013. 4. 29. 11:17

 

월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사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 메리 벤튼(Mary Fletcher Benton,1832-1909)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전통 있는 감리교 벤튼 가문으로 아버지와 오빠가 감리교 목사인 집안이었다.
16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스크랜튼은 뉴헤이븐의 명문인 예일대학과(1878) 뉴욕 의과대학(컬럼비아의과대학)을 졸업한다(1882).
그리고 그 해 유명한 회중교회 지도자이자 예일대학 이사인 암즈(Hiram P. Arms)의 손녀딸(Loulie W. Arms)과 결혼한다.
결혼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여 의사로서 활동하던 스크랜튼은 1884년 12월 미북감리회 해외 선교부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향한다.
스크랜튼이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두 살 아래의 같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한 것이 1885년 2월 3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지러운 사정으로(갑신정변등)  부녀자들의 입국이 어렵자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 두고 그해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서울에 도착한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을 도와 제중원에서 의료 진료를 하다가  1886년 6월 15일 정동에 병원을 개원하는데 이것은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민간의료 기관이었다.
미감리교 선교사들을 신임하던 고종은 병원 이름을 스크랜튼의 한국 이름인 시란돈을 따라 시(施)병원이라 명명하는데 베푸는 병원이란 뜻이다.
또한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하였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겨 본격적으로 한국의 민중들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과 함께 전도에도 힘써 상동 감리교회를 세운다.
이곳은 후에 조선의 민족 지도자들과 청년들 그리고 민중들이 모이는 민족 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그런만큼 일제의 혹독한 박해를 받으며 예배당을 닫아야 하는 아픔을  겪는다.
스크랜튼의 선교 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 밖에 한글 성서 번역 위원회 번역 위원으로서 성서 사업에도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스크랜튼의 선교 사역은 큰 위기를 맞는다.
1904년 미감리교 총회에서 조일연회 감독으로 선출된 해리스 감독의 노골적인 친일 성향과 그에 동조하는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1907년 6월 14일, 선교사직을 사임하며 20여년을 넘게 일한 감리교를 떠난다

...

 

프리메이슨 한양롯지 홈의 스크랜튼 관련글...

It is not definitely known who were the originators of the movement to
establish an independent Masonic Lodge in Korea, but we do know that several
meetings were held in Seoul during late 1907 and early 1908 at which steps
were taken to prepare a petition to the Grand Lodge of Scotland.
At one of those meetings, held in the home of Dr. William B. Scranton, a
medical missionary, it was suggested that the petition be given to Brother
Walter H. Aldridge, who was connected with one of the large mining firms, so
that he might take it to the mines on his next trip and there secure signatures
from Brethren employed by his company. How well Brother Aldridge
succeeded is shown by the fact that over one third of the signers of the petition
were mining men.

 

성경식당
^^
EDIT

덧글 18개 new | | 조회수 59
|
  • 2013/04/27 20:16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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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재미있는 시간관계가 나옵니다.
    한양롯지의 프리메이슨 한국역사가 진실이라고 가정하여도

    일단 스크랜튼은...감리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 프리메이슨 모임에 참여한 것이 되겠습니다.

    1907년 6월에 감리교를 떠낫고
    1907년 겨울에 프리메이슨모임을 가졌으니까요.

  • 한 분 빼셨습니다.^^+
    북장로회 선교사 올리버 애비슨도 프리메이슨이랍니다.^^ 그 분도 유명한 분인데.. 쩝.^^

  • 2013/04/27 20:39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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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제가 일단이라고^^ 했잖습니까?^^

  • 주방보조 우리나라 의료 선교 하면 떠오르는 분인데...
    그 분이 지명도에서 스크랜튼 부부에게 밀리면 안되죠.^^

    그 분은 현역 북장로회 선교사이면서 프리메이슨 단원이셨답니다.^^
    세브란스 의전 총장이기도 했죠. 즉, 연세대도 프리메이슨과 관련되어 출발합니다.^^

  • 2013/04/27 20:45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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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일단 이화학당과 관련된 오해는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뭐...프리메이슨이 음모론적인 무슨 엄청난 배후인 것도 아니고, 저는 그런 주장은 다 소설로 여깁니다만,

  • 주방보조 그런데 의외로 개신교 성도분들 중 교황청의 산하 조직에 프리메이슨이 있다는 둥,
    둘이 밀월관계로서 세계 정복을 꾀하는 양대 세력이라는 둥 하는 카더라 통신을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인용 목사'던가.. '밴드 오브 퓨리턴스' 카페 매니저가 그 음모설의 주된 생산자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 2013/04/27 21:19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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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극단적 세대주의로 분류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양식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런 카페엔 잘 안 갑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주방보조 글쎄요.^^ 그렇다면 양식없는 개신교 성도분들이 많다는 것을 한탄해야 하나요.^^;;

    카더라 음모론 제기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자니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는 게 문제이고,
    대응해주자니 피곤해집니다. 개신교 내적으로 교통정리가 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2013/04/27 21:24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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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연세대도 프리메이슨과 관련되어 출발합니다.^^(비전문가님)



    이시돌님이 나온 연세대가 프리메이슨으로 출발했군요^^

    세브란스의 시작은 1885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양롯지의 시작은1907년이군요.
    22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출발한 것은 아니지요?^^

  • 2013/04/27 21:24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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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많지 않은데...극성맞지요?^^

  • 주방보조 애비슨은 조선 정부로부터 북장로회로 제중원의 경영권을 이양토록 한 사람으로서
    선교사 알렌의 뒤를 이어서 광혜원의 이름이 바뀐 제중원의 원장(1893~)을 역임하였으며,
    세브란스로부터 건립 기금을 받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했고(1904),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를 세워서(1917) 초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물론 애비슨은 1907~8년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의 창립 멤버이기도 합니다.^^

    '세'브란스 의과 전문학교는 해방 후에 '연'희전문학교와 합쳐져서 연.세.대로 바뀌었지요.^^

    에비슨이 세운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나라 근대 서양 의학의 효시라고 할만하며, 특히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병원입니다.^^ 백정들의 형평 운동을 후원하여 신분제
    차별 철폐에도 앞장서는 등 프리메이슨이 좋은 일을 한 것인데, 굳이 비난할 이유가 있습니까?

  • 2013/04/27 21:49 답글

    수정|삭제

    비전문가 연세대학은 그 시작을 1885년으로 둡니다. 출발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 학교에서 1885년인가를 출발로 잡는데
    연세대학이 프리메이슨으로 출발했다고 억지소리를 해서야 쓰겟습니까?^^

    에비슨은
    프리메이슨 한양롯지의 기록대로라면 1907년의 프리메이슨 멤버가 맞습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이 좋은 일을 한 것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재미있군요^^
    이미 그는 프리메이슨과 상관없이 선교초기부터 조선을 위해 좋은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 주방보조 연세대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가 1957년에 합쳐진 것입니다.
    연희전문은 1915년에, 세브란스의전은 1917년에 그 문제의 프리메이슨, 애비슨 선교사가
    세브란스 병원 부설 학교로 세우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한 곳이지요.^^

    1885년은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세워졌던 연도로서, 광혜원 - 제중원 -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어지는 계승의 역사를 연세대가 자기네 창립 연도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사실상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 의전은 애비슨이 세웠다고 보더라도 무방합니다.^^+

    그의 정체를 프리메이슨 단원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북장로회 선교사에 중점을 두느냐는
    별 의미 없습니다. 애비슨은 현역 선교사로서 프리메이슨 단원이었고, 이는 프리메이슨과
    한국 초기 개신교 역사의 접점으로서 작용하니까요.^^

  • 2013/04/27 21:58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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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연세대가 잘못을 하고 있군요^^ㅎㅎ

  • 주방보조 이로서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가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셔야 할 듯.
    한국 개신교사, 아니 근대 역사에서 애비슨이 남긴 족적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연세대의 설립자에 대해서도 원두우(언더우드 -> 연희전문)와 애비슨(세브란스 의전)이
    공동 설립자로 소개에 나옵니다.^^

  • 2013/04/29 06:08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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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프리메이슨이 접근한 흔적이 있다...이정도로 정리해두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주방보조 비합리적입니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몰이해적인 결론이라고 보여지는군요.^^

  • 2013/04/29 11:05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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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글쎄요^^...

    그러나, 가톨릭과 프리메이슨에 대하여 이해를 높이도록 노력해보겟습니다.
    왜 이리 집요하신지 좀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