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볼라벤이 서울 가까이 왔다는 28일 오후 2시
종일 거실 구석에 앉아 게임삼매경에 빠져 헤롱거리는 충신이는 본체만체하고
갑자기 학교를 쉬게 된
겁먹은 원경이에게는 거절 당하고
교신이를 꼬드겨 한강으로 나갔습니다.
바람은 상당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나들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한 아저씨가 나들목에서 나오며 저희를 보고 "경찰이 다 나가라는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동네 한강에 대하여는 통달한 제가
경찰이 지키고 있지 않을만한 입구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교신이를 끌고 더 아래로 내려가 영동대교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 가볍게^^ 다리밑 쉼터에 도달하였지요.
계단밑에서 장기를 두는 어른 두분, 웃통을 벗은채 바람욕을 하고 계신 노인분 한분, 그리고 각각 다른 벤취에 가만히 앉아 계신 두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15호 태풍 볼라벤을 맞이하였습니다.
몇년만에, 이런 큰 바람을 맞으니 가슴이 퍼엉하고 뚤리고 그 기운이 세차게 내 몸 속으로 치고 들어노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곧 생명의 호흡이고 생기입니다. 과연!
그리고 한강물 위에 세차게 부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찰라의 하얀 포말들이 멋있었습니다.
엄마는 결단코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교신이도 이런 모험을 저만큼이나 즐거워 하였습니다.
그러다 우리 눈에 띈 것이 새들입니다.
먼저 비둘이가 바람을 따라 미끄러지듯 날아 자기 집에 도달하더니 곧 다시 날아 바람을 거스려 어딘가 다녀오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참새들도 바람을 아랑곳 하지않고 이리 저리 떠들어대며 날고 있었습니다.
갈매기도 두 마리 강위에 잠시 쉬고는 바람을 거스려 날아가고 있었고
곧 이어 가마우지도 한마리 다른 녀석들에 비해 힘들어 보였지만 강물 바로 위로 바람을 거스려 날아 갔습니다.
매 한마리도 왔다리 갔다리 바쁜 비둘기에게 잠간 시비를 건 뒤에 날렵하게 바람을 거스려 올라가버렸구요.
살아있는 것은 바람을 사랑한다...
바람이 부는대로 수천번이라도 몸을 굽히지만 다시 펴 원래대로 돌아오는 풀잎들
바람의 엄청난 하중을 받는 이파리들을 억세게도 강한 모성애로 붙들고 있는 나무가지들
바람을 거스리는 것이 즐거워 날 뛰는 나의 아들 교신이
바람만큼 가벼운 몸에도 그 바람을 역행하여 날아가는 새들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것은 마른 낙엽이나 구름같이 생명 없는 것들...
바람을 외면 하는 것은 두려움으로 똘똘뭉친 콘크리트상자안의 인간들...
바람은 생명을 구별한다...
...
저녁 식사 후 여전히 뒤끝이 긴^^ 태풍 볼라벤은 거세게 바람을 불어대었고
낮의 그 즐거움을 다시 맛 보려고
딸 셋을 꼬드겼습니다. (여전히 헤드폰을 끼고 게임중인 충신이는 안 건들었고, 같이 가고 싶어하는 마눌님은 후환^^이 두려워 커트했습니다.)
진실이는 완고하게 거절하였고
나실이와 원경이는 흔쾌하게 동조해 주었습니다.
나실아 저런 똥꼬집 언니 데리고 1년을 살았으니 너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는 말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세찬 바람 가운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져서 나실이는 비옷을 입고 저와 원경이는 분홍색과 빨강색 어린이우산을 집어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른 우산 두개가 바람에 망가졌으므로 튼튼한 어린이 우산을 썼습니다.^^
나들목을 지나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진실이를 안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ㅎㅎ
우리 셋은
장미공원 한강전망대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지붕이 있는 벤치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가운데 나실이는 비옷의 모자로 얼굴을 조이고 양쪽엔 저와 원경이가 분홍색과 빨강색 어린이 우산으로 바람과 비를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다가 원경이가 우리 한강아래로 내려가요...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우리 셋은 아악! 하면서 찰싹 달라붙어 우산 뒤로 얼굴을 모아 움추렸습니다.
그리고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정말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유도 모른채 그냥 폭발하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본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생기가 끓어오르는 웃음을...
몸조차 가벼워지는 듯 했습니다.
...
집으로 가다가
원경이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실이와 저는 이마트에서 쇼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녀석이 사 달라는 바지 두 벌을 군 말없이 사주었습니다.
태풍처럼 통이 큰 사람이 되어버렸는지...ㅎㅎ
-
어제 태풍이 서울에 가장 근접한 그 시간에 병원을 다녀 오느라 미사대교를 탔는데....차가 휘청거리더군요.
답글
저녁에 아내와 바람맞이를 하고자 밖에 나가서 정자에서 쉬는데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정자의 기둥이 기울길래
혼비백산하고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
-
대단한 바람...청소 효과도 컸지 싶습니다. 거리도...마음도.
답글
그 날..저는,우산이 대번에 꺾여 버린 날이었습니다.
강한 바람, 빠른 속도였기에 잠깐이었는데..오늘 태풍은 느린 속도로 비 피해가 우려 됩니다. -
신문지도, 테이프도 붙이지 않았는데 잘 넘겼어요.
답글
비바람에도 거뜬하게 외출을 감행하는 부녀는 행복하다...웃음으로 자랑하시네요.
항상 부러움을 주시는 가정이라는 것 아시죠/ -
아빠가 이렇게 모든 시츄에이션에 동참하는 가족이 어디 또 있을가요?
답글
사진이 태풍에 씻겨 더 말갛습니다. 행복해보여요.
이담에 귀중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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