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나는 평생 그리 기억력이 좋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초중고 시절 그리고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이유도 암기식 교육이 절정이던 시절, 기억력의 모자람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으리라.
특별히 기억력이 요구되는 사회과목 성적은 언제나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었다.
또 군에 들어가 훈련병시절에도 얼마나 공포에 시달렸던가?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동기들도 무슨 지침이니 정신이니 요령이니하는 것들을 척척 외우는데 나에게는 그것들이 암기할 것은 너무 많고 외워지지는 않는 대상이었었다.
게다가
교회학교선생을 대학1학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30여년을 꾸준히 해 오고 있고, 성경을 상당히 여러번 통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편1편이나 시편23편을 제대로 암기하여 완독하지 못한다는 이 참담한 기억력.
그렇다.
나는 기억력이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다.
...
그러나
요즘은 그 기억력이 차원이 다르게 더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역사적 인물, 작가, 운동선수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토록 단단히 기억해 놓았던 영어 단어들이 어느새 전혀 모르는 낮선 문자로 변해가는 것이다.
...
월요일 오후
교신이와 반디에 갔었다.
방과후 수업에 사용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
컴퓨터로 검색도 해보고 돋보기까지 끼고 둘이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결국은 담당직원에게
그 책이 다 떨어졌으므로 없고 저녁때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었다.
이틀이 지난 오늘
나는 아침에 교신이에게 그 책을 사놓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반디에 들러서 그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 책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수학이었는지 영어였는지조차 생각나질 않았다.
중학학습지들이 꼽혀 있는 서가를 돋보기를 끼고 아래로 위로 좌로 우로 훑어보았지만 그 어떤 책도 연상조차 되지 않았다.
검색용 컴퓨터로 중학수학을 검색어로 놓고 찾아보았더니 2천여개의 책이름이 떠서 눈이 아리게 400여개를 보다 포기하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없이...
직원에게 '자양중 방과후 수업 수학 교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담당자가 없어서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수학이 아니라 영어였나? 나 스스로를 의심하였다. 정말 점점 더 혼란만 가중되는 것같아 당황스러웠다.
나는 포기하려했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슬슬 살펴보다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런 일은 정말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같은 당뇨 고지혈 고혈압 치료를 받는 환자는 심장병이나 치매가 빨리 온다더니, 어쩌면 이미 진행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벌, 합병증 1순위가 치매를 포함한 뇌기능이다.
물론 2위는 눈, 3위는 신장...아, 철없는 생각이겠지만 다른 것들은 그런대로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런 생각을 하면서ㅜㅜ
...
그대로 돌아가자니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 그렇다,!!!!
나는 기억력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자존심은 정말 끝내주었었다.
공부? 암기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존심으로 했었다.
요즘은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다 털리는 그런 형편없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중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검색컴퓨터 앞에 다시 섰다. 자존심을 고추세우고!
영어인지 수학인지 모르므로
중학...이란 단어를 집어 넣었고
그 책의 가격이 9천원이라는 것이 기억났으므로^^(구두쇠생활이 가져다 준 선물일 것이다.) 고급검색창을 열고 가격란에 9000-9000...을 적고 검색을 시작하였다.
총 400여개...
이까짓것, 게다가 처음 검색을 했을 때 집단으로 몰려 있던 책이름들을 참고하여 하나씩 화면을 읽지 않고 서너개씩 화면을 건너뛰었다.
겨우 세번만에
그 책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싱크로X...이 짝퉁이름이라니...
...
중학교 영어 1-2 넓적한 문제집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쓸데없이 가지고 나간 우산으로 인도를 괜히 콱콱 찍으며
치매에 걸리면
죽었던 자존심이 이번처럼 살아날까?
ㅋㅋㅋ...혼자 생각하고 웃었다. 참 가관이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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