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이는 요즘 열심히 학교 도서관에 갑니다.
진실이와 충신이가 원경이의 자양고등학교 선배입니다.
진실이가 몰래 만화만 그리고, 충신이가 가방만 놓고 튀거나 소설만 읽던 그 도서관에서
원경이는 끝나는 시간 밤 11시까지 공부를 합니다.
진실이가 고1부터 야자한다며 도서관에 갈 때,
그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뒷문 입구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다, 피곤해 보이는 녀석의 가방을 제 어깨에 짊어지며 매일 집으로 돌아가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첫 아이가 이 아비의 소원대로 스스로 공부를 하는구나 믿고 즐거워하던 제 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녀석의 마각이 드러나고 가방에서 만화 그린 노트가 후두둑 떨어져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배반감 이후
야자금지...도서관 출입금지...
한강 변에 멀리 떨어진(집에서 약1800보)광양고로 배정이 된 나실이는 충실한 아이라서 그런지 가방도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시장볼 때 가져가는 캐리어카?를 끌고 갔었습니다. 녀석의 가방을 싣고 가끔은 친구의 것도 같이 올리고 그것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 행복했었습니다. 특히 깜깜해진 한강길을 둘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있습니다.
충신이는 야자로 도서관을 이용한 것이 노골적으로 놀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혹 이마트에 늦게 다녀오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있던 녀석을 가끔 발견한 것이 전부...
그리고
원경이가 야자에 실패한 진실이와 충신이의 그 도서관에 다니는 것입니다. 만화를 그리지도 아니하고 책가방을 놓고 쌩까고 돌아다니지도 아니하고 오직 힘 닿는대로 공부에 전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니들의 전례에 따라서 원경이를 데리러 갑니다.
좀 미리 가서 운동장을 걷다가보면 학교를 관리하시는 아저씨에게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듣게 되고
원경이가 나오기까지 10분 정도(감독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끝나는 시간이 10여분 차이가 납니다)를 아파트와 학교 사이 도로에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이 유일한 약점입니다.
어제는 다른 때와 다르게 요즘 선생님이 11시에 거의 시간을 맞추어 끝내주시는 것을 파악하고
미리 한강에 나가 운동삼아 한바퀴 돌고
11시 11분 전에 원경이의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고, 항상 제일 늦게 나오는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좁은 학교 앞 인도를 계속 왔다 갔다 기다렸습니다.
도서관에 불이 꺼지고
키가 약간 큰 대머리 선생님^^이 차를 타고 나가시고
관리 아저씨가 철문을 닫기 까지,
그리고 혹시 화장실에라도 들러 나오며 다급하게 아저씨 문열어주세요 하는 원경이를 볼까 11시 5분이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세번이나 혹시 하고 뒤 돌아보며 집에 돌아오니
이미 원경이는 집에 돌아 와 있었습니다.
집에 전화를 해도 안 받고요
왜 전화를 했는데
10시45분에 나와야 했거든요.
왜
요즘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아서 자리가 없어서 입구 자리에 앉았었기 때문에요.
그랬구나
아빠는 어딜 다녀오셨어요?
난 10시49분에 학교 앞에 갔었지
핸폰도 안 가지고 나가셨죠?
응
걱정할 아이도 아니건만 솔직히 겁많은 아비인지라 혹 무슨 일이 있나 하던 염려가 다 스러지자 ...슬그머니 장난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100% 농담으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던졌습니다.
야, 너 그래도 그렇지 좀 기다리는 게 맞지 않니?
항상 제일 이뻐하는 사람한테 배반을 당한다더니
아빠는 말야 혹시나 하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꺽어지는 데서 다시 한번 돌아보았단 말야.
그런데 넌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와서 앉아있다니
아빠가 없으면 다시 돌아가 봤어야지
난 물론 아무도 없는 깜깜한 길가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어도 괜찮지만 말야...ㅋㅋㅋ
너 배반자라는 단어는 아니?
비트레이어요
반역자는?
모르겠어요...
너, 요즘 공부를 어떻게 하길래 그걸 몰라?
공부는 말야, 큰 사이클의 공부를 계속 해나가야만 해. 중간고사니 학기말 고사니 하는 작은 사이클에 매여서 큰 사이클의 공부가 끊어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발전도 더디게 되는 거야
그때였습니다.
원경이가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겁니다.
누군가 보다는 낫지만 역시 농담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이이므로...
아...그때부터 저는 모든 장난기를 다 버리고 놀라서 원경이의 그 흐느낌을 멎게 해 주려고 온갖 말을 다 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
장난이었는데
울지마라
너도 여자구나
큰일났네
힘드냐
오랜만에 우네
이젠 키가 크겠다. 울지 않으면서 그만 컸었는데
...
풋^^
아들들은 제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프게 찔러 대니까...
원경이는 그 반대편이지요.
너무 모범적이라 이런 글밖에는 쓸 것이 없을 정도로...
요즘은
정말 호주에 가 있는 두 딸 아이들이 절실하게 보고 싶습니다.
아들들과 원경이 그 사이에 자기들의 영역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 그래서 우리 칠스트레일리아를 조화롭고 질서있게 해주는 아이들...
두달 반이나 남았습니다.
-
알 수 없는 사용자2012.04.22 09:09 신고
배반자와 반역자의 영어단어,
답글
한글로도 확실히 서로 다른 의미의 두 단어를 오늘에서야 생각해보았네요.
큰사이클에서의 공부...
그러고보니 그런 얘기 해주는 사람도 없었구요.
되돌아 생각해보니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강압적으로 주입하고 요구하시던 공부는 작은 사이클에서의 공부법이었다는 거...
그게 오히려 공부에 대한 의욕을 빼앗아가 버리곤 했던 거 같아요.
제가 공부 못한 거에 대한 핑게거리, 구실 좋은 거 하나 생겼네요.^^*
근데요...
저는 엄청 많이 울어서 애들 적엔 할머니께서 "우지"라고 부르실 정도였는데 키가 하나도 안컸어요???
이렇게 다 커서도(어른이 되어서도) 곧잘 질질 짜는데 키는 하나도 안 커요???
제가 칠스트레일리아 백성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원경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이뻐요...
주방보조님 좋겠따~~~~ -
-
원경이의 순하고 성실함 거기다 효녀로서 나무랄 게 없는...많이 부럽습니다.
답글
저는 많이 비우는 연습이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하는 말이 칭찬보다는 꾸짖는 내용이 많은지라 말 거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물론 예민해진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문명의 이기에 참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없이 작아지는 부모의 역할, 어찌보면 의무만 커지고 권리?는 상대적으로 작아졌다는걸 실감합니다.
원경이의 여림이 사회의 강함으로부터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애틋함으로 원경이의 미래를 위해 격려와 응원을 보냅니다.-
주방보조2012.04.23 14:05
세대가
저희 세대와 다르다고 하더군요.
어떤 정치전문가가 가라사대
저희 세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세대이며 그래서 권리보다는 의무에 충실하고
아이들의 세대는 이기적으로 커서 의무보다는 권리주장에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세대라더군요.
그러니
우리만 억울한 세대이지요^^
원경이는 나실이하고 ... 더불어 꼴통 충신이에게^^비난 받는 이유가
요즘 세대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일 겁니다.
권리주장은 거의 하지 않고 책임감은 투철하니까요.
상처...받겠지요. 그래도 변함없이 꿋꿋하기를 ...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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