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기간에 더 공부를 적게 하는 이상한 수험생 덕분에
야자 끝나는 밤 11시30분마다 데리러 가며 걷던 5천-7천보의 하루 걷기 양이 비었습니다.
사흘을 그렇게 하였더니 자그마치 1만5천보가 밀려버렸습니다.
늦은 시간, 아니 너무 이른 시간인 오늘 새벽 두시 10분전 작정하고... 한강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자양나들목을 지나 한강 자전거길에 접어들어 왼쪽 잠실대교 쪽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낚시하는 양반 하나 둘 저 아래 앉아 물고기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고
둘 씩 짝진 젊은 이들...아주 드물게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조금 전 충신이의 불만을 호통으로 정리하고 ...찜찜해진 마음을 가눌길이 없었습니다.
시험 성적이 별로라서 기분이 나쁘고, 친구들과 놀았으나 정말 재미없었고, 피씨방에 들어 갔지만 담배연기 때문에 20분만에 나와야 했다고...그래서 밤 10시에 블로그 좀 보렸더니 엄마가 '공부 못하는 것들이 놀 궁리만 한다'고 운운...
이 녀석은 자기 잘못은 모두 어디 두고 오직 나무라는 사람에 대한 불평 뿐이니...들으며 분기가 치솟아 올라 자꾸 호통을 치게되었습니다.
주일 저녁, 바로 시험 치기 전날 ... 아버지의 노트북에 바이러스 크리에이터 라는...기막힌 프로그램을 풀어놓고 시치미를 뗀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컴퓨터 전체에 수백개의 바이러스가 드글거려 부팅도 제대로 되지 않게 만들었던 잘못은 다 어디 가고...
친구들과 6시간을 놀고 돌아와서 그래도 컴퓨터를 못했는데...게다가 원경이는 블로그에 글을 쓰게 하면서 자기는 왜 컴퓨터를 하면 안되느냐는...눈물어린 하소연을 듣자니...이런 아전인수가 어디있나 싶어...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의 마음도 그냥 호통으로만 녀석의 잘못을 조목 조목 지적해 내고 ... 참아내느라 부글거리고...
그 기분으로 고개를 숙인 채...터벅터벅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한숨을 쉬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거기
잠실대교 바로 위에 정말 오랜만에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참 반갑고...벌써 별 자리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구나 새삼스러웠습니다.
...
마음을 가다듬고...
잠실대교를 향해 걸으며 기도해 주어야 할 긴급한 사람들을 떠 올렸습니다.
얼마전 아들 창근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친구를 하나님이 위로 해 주시기를...
식도암으로 성모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는 친구를 위하여...
이 친구는 20여년 전 백혈병에 걸려 골수 이식 수술을 받고 그 병을 이겨낸 아주 강한 놈입니다. 그 후유증으로 눈물 샘이 말라버려 20여년을 인공눈물로 살아온 녀석이며, 몇년전에는 입술 주위에 상피암이 발병하여 아랫입술 일부를 절단하여야 했고, 최근엔 신장기능이 떨어져 그 힘든 투석을 2년간 받아 감당하고 있다가...올해 초 갑자기 체중이 줄기 시작하여 검사한 결과 식도암...
전 이 친구에게 좋은 친구는 못 됩니다. 저는 아둔하고 이 친구는 명민하니...
지난번 문병을 갔을 때, 암과 싸워 이번에도 이겨내겠다고 , 자기 정도면 가히 병에 대하여 용사라 할만하지 않겠냐고...
눈치도 없이 저희 부부는 그 녀석이 피곤해 할 정도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녀석의 손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블친 한분의 아들 한얼이를 위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병상에서 보내 포기해야할 만큼 큰 병을 치루고 회복되어
그래서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미국에서 2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편입시험을 준비하면서 옹골찬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심전도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고 염려하고 그래서 슬픈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 하시기를...혹 싸워야 할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시기를...
...
잠실대교를 건너기 직전 만보계를 리셋 시켰습니다. 12265보...엇 그제의 목표치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텅빈 잠실대교 인도를 홀로 걸었습니다. 자전거족도 연인족도 전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잠실 한강공원으로 빠지는 자전거도로가 있던 오른쪽 그러니까 강하류쪽 인도는 확장공사로 출입금지 된지 꽤 되었고, 강 상류쪽 인도는 잠실대교 남단 쪽에 임시로 만든 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임시 계단 위에 붙어 있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 보니 앞으로 그곳에 버스 정류장이 들어설 모양입니다. 참 멋진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한강으로 진입하는 불편이 많이 줄어들것이라는 ... 나이가 들어가니 무엇이든 편하게 해 주면 좋습니다.
...
임시로 만든 양철?계단의 위태로운 느낌을 끝내고 잠실대교 남단 아래 에서
저는 영동대교를 향해 방향을 잡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는 간혹 그렇게 다녀 본 적이 있었지만 걸어서 그렇게 길을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강북쪽을 바라보니...한강은 오늘처럼 달이 없는 밤에는 역시 강북이든 강남이든 다 불빛때문에 예뻐 보였습니다.
낮에 보는 한강은 물론 강북쪽에서 보는 것이 강남쪽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납니다.
그것은 빛과 관련되어 있는데...강북쪽에선 남쪽에 떠 있는 해가 물위에 비춰주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 황홀한 빛을 듬뿍 받을 수 있지만 강남쪽에선 오직 한강의 푸루숭숭한 물결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달도 마찬가지...
자동차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고...자전거 족도 가끔 있었으며 ... 달리기하시는 분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실 한강 공원이 끝나가는 부분...가로등이 좀 떨어져 약간 어두운 그곳에 꼭 달라붙은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때는 한 사람처럼 보였고...제가 곁을 지나가는데도 꼭 붙어 있었으니...어쩜 지금까지도 그렇게 붙어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조금 지나 불빛에 만보계를 비춰보니...4172보
...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 근처의 다리를 건너 오래전...아이들을 데리고 자전거로 누비던 청담동 토끼굴 근처에 이르자 서서히 저혈당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엔 이마트 갈 때 쓰는 달랑 백원...걷는 속도를 늦추고 ... 마침내 영동대교로 올라가는 자전거 도로 바로 아래 벤취에 앉아 쉬었습니다.
만보계는 5996보
...
5분 정도...지나 기운을 차리고
붉고 긴 완만한 경사의 자전거길을 올라...영동대교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밤에 이 영동대교 중간즈음에서 남산쪽을 바라보면 그 그림이 참 장관이었는데 그 시간엔 남산 타워의 불빛도 사라지고 다른 불빛들도 많이 죽어 있어서인지 그리 볼만하다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선지 저 자신에 대하여도 불꺼진 듯...
노래도 나오지 아니하고, 시도 읊어지지 아니하는 ... 지친 늙은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동대교 북단의 인도는 그 난간이 겨우 제 배꼽 정도의 높이입니다. 술 취한 이들이 실수로 그 난간을 넘어 저 시퍼런 강물에 빠져드는 일은 없을지...그런 생각과 동시에 겁이 덜컥 나는 순간...
그래도 살고 싶어 하는 내 속에 도사린 생명 본능에...픽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100원짜리 사탕이라도 사 먹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존심이 저혈당이 위협하는 그 꿀꿀한 기분을...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하게 불켜진 공원의 매점들을 그냥 통과하고 말았습니다만...
영동대교를 내려서서 뚝섬 한강 공원의 끝인 익숙한 수크렁 풀밭에 도착했을 때...만보계는 7178보
그리고 뚝섬 유원지역 근처 인도에 큰 개 두마리를 끈도 없이 데리고 놀고 있는 놈을 피해 ... 길을 돌아 ... 집에 도착하니 새벽 4시...
만보계는 10050보...
만보계를 리셋하기전 걸은 몫까지 쳐서 약 1만3천보를 걸었습니다. 두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래도 여전히 2천보 정도의 빚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저혈당을 잠재우려고...급하게 참외 하나와 포도 한 송이를 먹어 치우고...냉동실에 있는 호두를 한 줌 집어 먹었습니다.
...
삶이 그렇습니다.
자식도 자기 몸도 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그러나
밤 하늘에 별은 여전히 빛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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