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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29

주방보조 2005. 3. 12. 00:25

Love of Life (41): 사랑하는 이에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습니다.
그렇지만 번번이 만족스럽게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잘 써 보려고 벼르면 별러 볼수록
글쓰기가 점점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 중단하곤 했습니다.

그건 우리 정희씨에 드리고 싶은 감사의 글 입니다.

정희씨에 대한 제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정희씨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진할수록 마음만 앞서고 글은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마냥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희씨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우선 지난 5년간 제 삶을 가능하게 해 준 사람입니다.
사실 지난 5년간 암과 싸운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희씨입니다.
정희씨가 없었다면 저는 벌써 어떻게 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알바니 병원의 캔서 센터에 마련된 간이 도서관을 깡그리 뒤진 것도 정희씨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국립 암센터에 편지를 보내고 인터넷을 뒤지고
세계 곳곳의 대체의학 정보를 긁어모았던 것도 바로 정희씨였습니다.
사전을 찾아가며 의학 서적과 의료 학술지 논문들을 읽고,
잡지에 실린 암 관련 기사를 찾아 읽고 스크랩한 것도 정희씨였습니다.

강의가 겹쳤을 때를 빼고는 정희씨가 제 병원 약속을 건너뛴 적이 없습니다.
알바니 병원의 암센터와 방사선과에 약속이 있는 날이면
제가 정희씨와 함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뉴스거리였습니다.
병원 사람들은 정희씨를 '미스터 챙(Mr. Chang)'으로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사람은 부부라도 성(姓)이 다르다'고 고쳐주던 정희씨도
나중에는 그냥 '미스터 챙'으로 불리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남자 간호사분은 정희씨를 보고 '노예'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수술을 받기 위해 외과에 갔을 때 만난 인도계 간호사 분이셨는데
수술 당일 서류를 작성하면서 정희씨에게 그렇게 묻더군요.
"당신은 환자와 무슨 관계입니까? 노예(slave)입니까?"
정희씨가 "그렇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그건 그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정희씨는 마치 노예처럼 저를 위해서 병간 이상의 병간을 했습니다.

의료보험이 없어 암담하던 초기에는 이리뛰고 저리뛰어서 결국 그걸 얻어냈습니다.
자동차가 부서져서 병원 다니기가 어렵게 됐을 때도 그는 차를 마련해 냈습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울 때에는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에게 주저없이 도움을 청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사회학과와 동아시아학과의 도움을 많이 얻어냈습니다.
제 치병에 필요하기만 하다면 정희씨는
누구의 도움이건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결국 해 내곤 했습니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정희씨에게는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강해서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던 정희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희씨는 제 치료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기꺼이 자기 자존심을 접었고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했습니다.

한마디로 정희씨는 지난 5년 동안
제 통역자이고 대변자이고 간호사이고 해결사이고 조언자였습니다.

어떤 때는 그냥 정희씨를 따라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불편하고 불만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내고 보면 정희씨의 생각은 제 생각보다 깊었고
미리 멀리까지 내다보곤 했다는 것을 알게되곤 했습니다.

정희씨는 한때 병원의 소셜워커나 보험회사와 의견 대립을 일으켜가면서까지
큰 도시에 있는 병원에 가서 조언을 얻으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뉴욕과 보스턴의 유명한 암센터를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저는 정희씨가 왜 그렇게까지 무리를 했는지 좀 의아했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뉴욕과 보스턴을 여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그러나 정희씨의 그런 열성 덕분에 저는
미국에서도 최상급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알바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슬로안 케터링 암센터와 컬럼비아 대학 암 센터, 데이나 파버나 앤더슨 암 센터 같은
미국의 최상위 암센터의 의사들과 상의해가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희씨는 그 의사분들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제 치병을 위한 일종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예후(prognosis)는 아주 암담했었습니다.
5년간 살아 있을 확률이 불과 17퍼센트 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 5년을 거의 채워갑니다. 오는 1월5일이면 만 5년입니다.
저 혼자서는 이나마도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치병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얼마 안되는 '암 동기생'들 중에 가능성이 제일 낮던 제가 끼인 것이지요.
정희씨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오는 1월5일을 살아서 맞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제한된 범위내에서나마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거의 이루어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오치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만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치는 벌써 3학년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오치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보고 싶지만
그거야 말로 정말로 욕심이겠지요.

5년 간의 희생어린 간병이 아니더라도 정희씨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제 목숨의 은인일 뿐 아니라 의미있는 삶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정희씨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그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칠줄 모르고 '의미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옳거나 의미있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도 많지만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정희씨에게는 '적당히 산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려웠습니다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대학시절에는 '당연히'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앞장을 섰습니다.
졸업후에도 뜻있는 사람들과 시민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정희씨는 찬송가와 운동 가요를 모두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에는 그런 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만
정희씨는 그 두 음악 중에서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희씨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탄생시킨 창단 멤버였으면서도
같은 시기에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도 알바니 대학의 한국어 강좌를 늘리는 데에 앞장 섰고
결국 한국학이 도약할 수 있는 받침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적당히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봅니다.

결혼 할 때만 해도 정희씨가 그렇게까지 치열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별 생각없이 살아오는 데 익숙했던 저로서는
정희씨의 그런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정희씨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희씨의 그런 '의미 증후군'을 경이롭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이나마 거기 감염될 수 있게 된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정희씨에게 감사할 일이 어디 한 두가지이겠습니까만
특별히 고마운 거리가 있습니다.
제게 글쓰기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저는 글쓰기에 대해서 공포에 가까운 기피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친구나 가족에게 보내는 생일 카드 쓰는 것 조차 어려워했었습니다.
생각이 아무리 많더라도 마구 엉클어져서 글로 써내지 못하곤 했지요.

그런 제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정희씨는 제게 글쓸 기회를 자꾸 만들어 줬습니다.
지나가듯이 '그걸 한번 써보지 그래?' 하곤 했지요.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짧은 글이라도 하나 써 낼라치면 자기 일처럼 좋아했습니다.
여러번씩 읽고 감동하는 '척(?)'도 해 주고 자세히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 글솜씨는 조금씩 늘었고
부족하나마 '신앙고백'난에 사십 개나 되는 글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다 자란 성인끼리는 더구나 그렇고, 형제나 부부 사이에서는 더더우기 그렇습니다.
자꾸 핀잔을 주게 되고 기분을 상하게 되고 결국 싸움에 이르는 경우도 많찮습니까?
저는 오치에게조차도 피아노 가르치기를 그다지 오래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희씨의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교묘합니다.
배우는 줄 모르게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과 얼마전에야 저는 정희씨에게 글쓰기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정희씨는 무지하게 좋아하더군요.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으니까...."

사실 그때 그말을 듣고서 많이 미안했습니다.
저는 제가 제일 잘 하는 걸 가지고 정희씨를 기분좋게 해 준 적이 있는지
생각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정희씨는 오르간 보다 피아노 음악을 좋아합니다.
모차르트 콘체르토를 제일 좋아하기는 하지만 베토벤 소나타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한번도 정희씨에게 그런 곡을 쳐서 들려준 적이 없었습니다.
정희씨가 몇 번 피아노 좀 쳐 달라고 직접 부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탁을 받고도 피아노 앞에 앉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쑥스럽기도 했고 뭔가 자꾸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후회가 됩니다.
하다 못해 '아이네 클라이네...'같은 곡이라도 한번 쳐 주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 그 좋아하는 찬송가라도 좀 쳐 줄 걸 하는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런 걸 기대하는 눈치를 채고도 저는 번번이 그냥 넘기곤 해었지요.
정희씨의 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 하나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는 셈입니다.
이제는... 해 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을 힘도 없는 데다가 팔까지 부러져 버렸으니까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 주기.
제가 정희씨를 통해서 배운 소중한 교훈이었습니다.
그 교훈을 써 먹을 시간과 기회가 별로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장미혜 드림.
12/7/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