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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26

주방보조 2005. 3. 9. 08:22
Love of Life (38): 우리 오치  

94년 5월7일, 오치가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슬링거랜즈 시절 중에서도 아주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원래 예정일은 5월 말이었지만 오치는 그걸 못참고 한 3주일이나 빨리 나와버렸습니다.
덕분에 정희씨는 코스웍 마지막 학기를 아주 어렵게 보내야 했습니다.
연일 밤새워 기말 논문을 쓰던 정희씨는 예정을 앞당긴 출산 덕분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쓰려져 버린 정희씨 이야기는
그 당시 알바니에서 유명해 졌더랬습니다.
정희씨를 다른 방으로 옮기고 정신을 차리게 하느라고 부산을 떨던 간호사들이
염려해 주면서도 키득거리던 모습이 제 기억에도 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
오치는 건강할 뿐 아니라 '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임신 중에 우리는 고민거리를 하나 갖게 됐었습니다.
임신 4개월 째에 가졌던 혈액검사에서
다운즈 신드롬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병원에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도록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위험부담을 지고 싶지 않으면
늦기 전에 유산을 할 수도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요.

그 경고 때문에 정희씨와 저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는 4형제였는데 제일 큰오빠가 정신지체였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열살 이상 많았지만 정신연령은 예닐곱 살에 머물러 있습니다.
큰오빠 때문이었다고 간단히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우리 집 분위기가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거기에 큰오빠의 존재가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었지요.
저 뿐 아니라 작은 오빠나 언니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족끼리 지내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저마다 조금씩 그늘을 갖고 살았습니다.
저만 해도 나이가 좀 더 들면서 큰 오빠도 이해하고
정신지체아를 자식으로 가진 부모님의 처지도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어린 시절을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보내야 했던 것은
그다지 즐거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오치에게 다운즈 신드롬의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아이를 지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지체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인 뿐 아니라 온 가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민거리를 교회의 구역회 식구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의견도 구하고 기도도 부탁했습니다.
물론 누구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함부로 조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구역 식구들은 모두 힘을 합쳐서 기도해 주셨고
구역회 때마다 합심 기도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정희씨와 저는 차근히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역회에서 함께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과 만났었습니다.
모든 선물은 귀한 것일 수 밖에 없지만
특히 자녀로 주시는 선물은 다른 어떤 것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조부라운 생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사 뭔가 모자라는 아이를 주신다 해도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그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그런 힘이 모자란다 해도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도 할 것이겠구요.

임신 육개월째 주치의는 태아의 다운즈 신드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양수 검사를 받아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이미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검사 도중 태아가 바늘에 찔려 잘못될 확률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양수검사를 통해서 다운즈 신드롬 여부를 조금 더 일찍 알 수는 있겠지만
어떤 아이이건 낳아서 잘 기르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 뒤에도 출산 때까지
시시때때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모자라는 사람이 믿음 있는 척 해 놓고서 불안해 하던 꼴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오치가 건강하고도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니
우리의 기쁨은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막 태어난 오치는 몸짓도 컸고 울음소리도 한결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오랜 슬럼프로 부진을 면치 못하던 야구선수가
간만에 만루 홈런을 때린 것처럼 가슴이 후련하고도 뿌듯했습니다.

오치를 안고 챨리네 집으로 돌아오던 날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날은 빛이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매닝 블러바드에 목련은 피기 시작했고,
웨스턴 애비뉴와 죤스톤 로드 길가 버드나무에는 물이 올랐습니다.
챨리네 집앞 라일락도 향기와 함께 피기 시작했지요.
본격적으로 봄이 온 것입니다.
병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길가에는 잔설이 쌓여 있었지만
불과 삼일 만에 겨울 그림자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챨리의 초청을 받은 아마츄어 화가들이 잔뜩 모여서
챨리네 집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자리를 잡고는 제각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위로 하늘로부터 따뜻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오치를 안은 우리는 마치 그 찬란한 빛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모여든 챨리의 친구들이 '아기 예쁘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습니다.
지금이야 그게 다 '부모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날 우리는 그 말들이 다 진짜라고 믿었더랬습니다.

오치를 키우면서 느꼈던 것은 우선 참 신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이 싹터서 자라나며 보여주던 신비스러움은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때로는 일상에 묻혀서 그런 신기함을 잊고 지낸 적도 많지만
한밤 중이나 새벽녘, 혹은 따뜻한 오후 햇살에 잠든 오치를 보면
살아있다는 것, 혹은 생명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느낌을 갖곤 했습니다.

그와 함께 '나도 한때는 이랬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생명의 향기를 내뿜던 저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런 기억이 내 머리 속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세포 하나하나에는 그때 주고받던 사랑과 생명의 빛이 살아있는 듯 합니다.
어쩌면 그때 받은 사랑과 그 때 채운 생명이 평생을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다 소진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지도 모르지요.

오치가 영악해 지고 반항도 할 줄 알게 되면서
'그럼 그렇지, 뭐'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몸이 커지고 마음이 여물어 가면서 점점 제게서는 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서글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오치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렸던 오치와는 주로 혼잣말을 해야 했지만
커가는 오치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대화가 필요해 진다는 말은
그만큼 마음과 마음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내가 오치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오치가 내 마음을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내 뱃속에서 있을 때처럼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던 시절은 이미 다 지난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 같은 느낌,
내가 오치를 다 모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꼭 서글픈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그대신 대화의 기쁨이 새로 생기기 때문이지요.
오치의 마음은 이제 내게 미지의 세계와도 같았습니다.
신세계를 탐험하는 사람처럼 때로 용기를 내야하기도 합니다.
물가에 처음 간 아이처럼 조심스럽기도 해야 했지요.

한 두 마디씩 늘어나는 대화를 통해서 오치 마음을 점점 알아가는 기쁨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던 시절의 일체감이 주던 기쁨 못지 않게 컸던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 만큼 큰 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온갖 갈등과 싸움의 기원은
부모 자식 사이의 몰이해와 소원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여덟살 반이 된 오치의 마음을 제가 다 이해하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치가 지금 제 마음을 어느 수준으로 헤아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아주 가깝습니다.
오치는 저를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르고
저는 우리 오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자리에 누워지내게 되면서부터 오치에게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제 침대를 지날 때마다 오며가며 제 손을 잡아보거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조그만 손이 내 손을 잡아 주면 그게 어찌나 따뜻한지
어떤 때는 '지나갈 때 안됐나?' 하면서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치에게는 슬픔도 있습니다.
오치가 그 작은 입술로 '슬프다'는 말을 한 것은 네 살이던 가을이었습니다.
자기는 봄과 여름과 겨울은 다 좋은 데 가을은 안 좋다고 하더군요.
왜냐고 물으니까 오치가 대답했습니다.
"나뭇잎들이 죽어서 떨어지잖아. 너무 슬퍼."
오치가 그 형용사를 정확한 의미로 사용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빠와 함께 입원실에서 한바탕 떠들며 이야기를 했었는데
정희씨와 이야기하느라고 잠시 뜸이 탄 사이에
어느샌가 오치가 없어졌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앉아 있던 커다란 소파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거기서 울고 있었더랍니다.
'왜 울었니?'하고 아빠가 묻자 오치의 대답이 그랬습니다.
'엄마 때문에 슬퍼서...'

오치도 벌써 슬픔을 느끼고 이해하고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불과 일곱 살이었는데...
그리고 그 최초의 슬픔이 저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 저 역시 슬픕니다.
그 작은 가슴에 접히게 될 첫 주름이 나 때문이라니....

오치는 정희씨와 저로부터 기쁨도 배우고 슬픔도 배웁니다.
기쁨과 슬픔을 잘 느끼고 다스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그저 오치를 꼭 끌어 안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만 해도 대개 문제는 없습니다.
금방 해해 거리고는 빠져나가려고 바둥대는 순간 우리는 다시 베스트 프렌드입니다.

열살이 되고 열두살이 되고 열일곱살이 되고 스무살이 되면
오치는 또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어떤 것을 배우게 될 지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희씨가 도맡아야할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정희씨는 그 숙제를 잘 해 내리라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거기에 동참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오치가 나중에 저를 어떻게 기억해 줄 것이지 좀 궁금합니다.
여덟살이나 됐으니까 아주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되도록 유쾌한 기억과 즐거운 추억들만 오치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훗날에 오치가 저를 생각하면서 슬픈 상념에 젖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런 오치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오치야, 넌 내게 샘물같은 기쁨이란다.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더 오래 같이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늘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나는 네가 항상 자랑스럽단다.
엄마의 아들답게 늘 당당하게 살아주기 바란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하지 못하더라도 정희씨가 자주 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시는대로 많은 분들이
우리 오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장미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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