쩜쩜쩜/독자 참여글

삶 사랑...장미혜님 글24

주방보조 2005. 3. 7. 08:14
이름:장미혜
2002/12/17(화) 06:07 (MSIE5.5,AOL7.0,WindowsNT5.0) 64.12.96.104 800x600
Love of Life (36): 찰리네 은방울 꽃  

한동안 기업 연수회 같은데서 유행하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연수생들이 주욱 늘어선 한 가운데에다가 관을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관에 들어가 있다고 상상을 해 보라고 합니다.
실제로 한 사람씩 관에 들어가 누워보게까지도 합니다.

그 프로그램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죽을 때 후회없는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내가 저런 관에 누워야 할 때가 오더라도 뉘우치거나 한탄할 것이 없는 삶...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하자"는 것이지요.

그 메시지 자체는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미리 생각해 볼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죽음의 의미는 거꾸로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법입니다.

하지만 기업 연수회가 제시하는 메시지는 방향이 좀 어긋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죽을 때 후회없이 열심히 '일'하자"고 재우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연수생들이 열심을 내면 물론 본인들에게도 어느정도 이득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프로그램을 베푸는 회사에게 더 큰 이득이 돌아가겠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저로서는
자꾸 과거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짧지 않은 삶의 구비구비마다 뉘우침과 회한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 중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어리섞은 말이
"그때 거기서 그렇게 했어야 하는건데...." 혹은
"그때 거기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건너뛰었거나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해버렸을 때 우리는 그런 말을 씁니다.

저도 그런 후회나 회한의 순간이 아주 많습니다.
일일이 늘어놓자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후회나 뉘우침이 전혀 없는 시간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간은 티 한점 없이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거나
혹은 온갖 행복이 뒤따랐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앞으로의 전망까지 불투명했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어려움과 부족함 속에서도
해야할 일을 충실히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금 더 어려움을 견디면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 행복한 시절은 바로 제가 알바니에 온 첫해였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슬링거랜즈(Slingerlands)의 챨리 집에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그 시절을 "챨리네 집 시절," 혹은
"슬링거랜즈 시절"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저는 이전 글에서 '챨리네 집'에 대한 추억 이야기를 한두번 꺼냈었습니다.
언젠가 그 시절 이야기를 한번 쓰고 싶다고 했었지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마음으로만 자꾸 되새길 뿐 글을 쓰지 못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걸 말이나 글로 옮기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은 아마도 말이나 글보다는 그림이나 영화로 표현하기가 더 쉬울 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림이라면 한 폭의 수채화여야 할 것입니다.
화면 구석구석까지 빛이 담뿍 배다 못해서 화폭 밖으로 뿜겨 나오는
맑으면서도 투명스러운 그런 그림 말입니다.
그 시절을 영화로 만든다면 스타워즈 식의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현란한 화면과 고도의 촬영 테크닉이 동원된 영화가 아니라,
정적이면서도 차분하게 정리된 장면들이 이어지는 영화여야 하겠지요. 굳이 예를 들자면,
히로카수 코레에다 감독의 '마보로시(Maborosi)' 같은 영화여야 되지 않을까 싶군요.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서론이 유별나게 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게는 그 행복했던 시절을 특별대우 하고 싶은 생각이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하면서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챨리네 집부터 소개해야 합니다.
챨리네 집은 슬링거랜즈의 어떤 숲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슬링거랜즈가 알바니와 길더랜드를 옆으로 끼고 넓게 펼쳐져 있지만
챨리네 집은 알바니와 길더랜드가 만나는 지점과 거의 맞닿은 슬링거랜즈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가 않습니다.
차로 가면 한 3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지요.

옥스퍼드 아파트를 나서서 죤스턴 로드(Johnston Rd.)를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비더 로드(Veeder Rd.)라는 작은 길이 나옵니다.
좌우로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들이 줄지어 선 그 길을 따라 2-3백미터 구불구불 더 들어가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그 길 이름이 바로 슈탈 로드(Stahl Rd.)입니다.

그렇습니다. 슈탈은 챨리의 성(姓)이지요.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집이 세 개 나옵니다.
우선 길이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 챨리 여동생 내외의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10미터 쯤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 깊숙히에 자리잡은 챨리 형님네 집,
그리고 슈탈 로드 제일 안쪽의 챨리네 집이 그것이지요.

비더 로드에만 들어서도 웨스턴 애비뉴가 풍기던 도시 분위기가 사라집니다.
울창한 숲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지요.
게다가 슈탈 로드로 들어서면 여기는 아예 울창한 숲속입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다란 길은
챨리의 픽업 트럭 바퀴자국을 따라서만 맨땅이 드러나고
나머지는 여전히 잡초와 이끼들이 자라는 그런 길입니다.
그리고그 길 양쪽으로는 하늘을 찌르는 미루나무 몇그루가 늘어서 있고
그 길 한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흡니다.
오른쪽으로 산을 끼고서 빙 휘돌아 내어진 그 길을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갑자기 양과 염소 우리가 딸린 헛간이 나오고
그 너머로는 나무 울타리가 쳐진 넓은 초지에 말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넓은 초지를 말 운동장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실제로 챨리는 거기서 말을 운동시키거나 승마를 즐기곤 했습니다.
웃통을 벗어제끼고 안장도 없는 말등에 올라탄 챨리의 천진한 웃음은
수줍으면서도 천진한 어린아이의 웃음이었지요.

그 말 운동장이 끝나는 곳에는 다시 개울이 흘러 웅덩이를 이루고
그걸 건너면 다시 언덕입니다.
그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 숲으로 뒤덮인 인근의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아마 웨스턴 애비뉴에서 불과 5분도 안떨어진 곳에
이런 선경이 있는 줄을 짐작하실 수 있으신 분들이 별로 없으실 겁니다.

초지와 산기슭이 만나는 약간 도드라진 언덕 위에 세워진 챨리네 집은
자그마하고 아늑한 검붉은색 벽돌집입니다.
말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아래 위층의 두층인데 아래층은 온통 넓게 터서 스튜디오처럼 만들어 챨리가 사용합니다.
윗층은 주방과 식당과 거실이 말 운동장 쪽으로 나란히 나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세 개의 베드룸과 화장실겸 욕실이 하나 있습니다.
챨리는 바로 이 윗층을 우리에게 세를 내 준 것이지요.

모든 방과 공간들이 조그마하고 아기자기 합니다.
제일 넒은 거실조차도 우리 교회의 유치부실만이나 할까요?
그래도 그곳은 고풍스런 소파와 탁자와 갓전등으로 한껏 멋부려져 있습니다.
25인치쯤 되는 오래된 티비 한 대가 그나마 지금이 현대라는 걸 알려줄 뿐이지요.
그밖의 나머지 가구만 보면 꼭 빅토리아 시절의 영국 시골 귀족의 집이나
미국 콜로니알 시절의 소규모 농장 주인네 집처럼 보입니다.

그 거실의 하이라이트는 바깥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입니다.
한쪽 벽 전체를 완전히 유리창으로 만들어서 밖이 훤히 내다보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치 내가 비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됩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마치 내가 눈발 속에 앉은 기분입니다.
젖거나 춥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식탁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 아늑한 식당 공간도 분위기는 거실과 같습니다.
전면을 유리창으로 만든 것 까지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식당의 유리창을 커다랗고 편편한 판유리로 끼운 것이 아니라
보도블럭 만한 크기의 작은 판유리를 잇대어 프랑스식 창을 만든 것 뿐입니다.
그 식탁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집 앞 잔디밭 중간쯤에 챨리가 아틀리에로 쓰는 작은 집이 하나 있고
(챨리는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하는 아마추어 미술가입니다.)
그 너머로는 말들이 초원을 거닐고 양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초지 건너편은 울창한 전나무 방풍림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잘 살펴보면 그 나무들 사이로 챨리네 형님 댁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우리가 빌어 살았던 베드룸도 아주 작습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실 보다도 훨씬 작은 그 방에는
침대와 작은 책장 하나만 놓아도 꽉 찬 느낌입니다.
게다가 침대는 트윈 사이즈로 둘이서 쓰기에도 모자라는 크기지요.
그래도 우리는 그 침대를 1년이나 함께 썼습니다.
그때 우리는 참 "가까운" 부부였지요.

그 작은 방에도 창문이 세 개나 있습니다.
그래서 봄여름이나 낮동안은 마치 바깥이나 다름없이 환합니다.
반면에 가을이나 겨울 밤에는 깜깜하면서도 그 창밖으로 별들이 다 보입니다.
집 안에 있어도 자연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입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지은 집이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자연하고 가깝도록 집을 지었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챨리네 집에는 입구가 삼면으로 나 있습니다.
진입로 쪽에서 바라보이는 면에는 문이 없지만
나머지 세 면에는 모두 문이 나 있습니다.
헛간과 말 운동장이 내다보니는 쪽의 현관은
거실로 바로 들어서게 되는 문이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 집 앞 현관을 지나서 건물을 빙 돌아가면
부엌으로 들어서게 만들어 놓은 작은 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그 문을 썼지요.

그 주방쪽 현관 바로 앞에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라일락 나무가 무성히 심겨져 있습니다.
봄이면 희거나 보라색인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에 정신이 아뜩할 정도입니다.
온 집안은 물론 집 주변이 온통 라일락 향기로 가득합니다.

아래층에 사는 챨리의 스튜디오에도 현관문이 따로 있습니다.
집이 언덕을 두고 경사지게 지어져 있어서 아래층의 현관도 바로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아래층은 일종의 지하층이고 세 면이 벽이기 때문에 조금 어두침침합니다.
그러나 문을 낸 한면에는 커다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그 너머로 보이는 정원과 뜨락이 넓게 다 내다 보입니다.

그 정원은 챨리가 아주 아끼는 정원입니다.
챨리는 거기다가 손수 꽃나무를 심어서 시시때때로 돌보는 데다가
조그만 벤치와 탁자를 만들어 놓고 해먹까지 걸어 놓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여름이면 챨리는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하면서 종일 거기서 지내곤 합니다.

그 정원의 맞은 편에는 숲이 끝나가는 지점에 조그만 연못이 있습니다.
지하수가 자연스레 솟아나와 만들어진 연못인데
여름에 비가 많이 와도 넘치지 않고
가물어도 물이 아주 없어지지 않는 그런 연못입니다.
봄이면 그 연못 주변에 은방울꽃과 수선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서
그 아름다운 색깔과 은은한 꽃냄새가 사람의 정신을 빼놓습니다.

납득이 가실지 모르겠지만 이제 60대에 접어든 챨리는
집앞 연못가에 심긴 은방울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은방울꽃의 영어 이름이 "릴리 오브 더 밸리"(Lily of the Valley)라는 것을 안 것도
챨리에게서 설명을 듣고 나서 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골짜기의 백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찬송가 중에서 예수님을 "저 산 밑의 백합"으로 비유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꽃 이름은 비교적 제게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을 직접 본 것은 챨리네 집에서가 처음이었습니다.
막상 은방울꽃을 보니까 꽃망울들이 자그마 하면서도 꽃잎 색깔이 새하얀 것이
요염하게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귀엽고 친근한 꽃입니다.
그리고 은방울꽃은 사람들이 사는 집 주변에 아무렇게나 잘 자란다는군요.
아뭇거나 '백합'이라는 말 때문에 크고 아름다운 꽃인줄 잘못 알았던 저는
아기자기하고 친근한 실물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게 되었지요.
그 뒤로 내 마음 속의 예수님은
나 보란 듯이 자태를 뽐내는 장미나 백합 같은 꽃이 아니라
수줍은 듯 다소곳한 은방울꽃으로 더 잘 자리잡게 됐습니다.

한 때 읽었던 소설 중에 "골짜기의 백합"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작가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아마도 18세기나 19세기의 프랑스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수수하게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골짜기의 백합"으로 비유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챨리네 집에 와서 챨리와 아래 위층으로 살게 된 이후로 제게는
"골짜기의 백합" 즉 은방울꽃 이미지가 챨리 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고 느낍니다.
남자를, 그것도 노년의 남자를 꽃에 비유하는 것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시겠지만
챨리만은 예외입니다. 지금도 챨리를 생각하면 은방울꽃이 떠오르고
은방울꽃을 보면 챨리가 생각날 정도로 그 둘은 분위기가 아주 비슷합니다.

챨리네가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챨리네 증조 할머니때부터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한 1백20년 전쯤 되나 봅니다.
챨리는 이곳에서 나서 자랐고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챨리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바로 지금 오치가 다니는 웨스트미어 초등학교입니다.
그때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니곤 했는데
지금의 비더 로드와 죤스톤 로드는 숲속 오솔길에 불과했다는군요.

챨리는 군복무를 위해서 1년 정도 집을 떠난 것을 빼고는
슬링거랜즈의 그 집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다 결혼한 후로 지금까지 줄곧 혼자사는 챨리는
사람이 저다지 순진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수줍고 순수합니다.
자기 말로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게된 가장 큰 이유가
여자만 보면 너무 수줍고 얼굴이 빨개져서 데이트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렁저렁 세월이 가다보니까 그냥 혼자 사는게 훨씬 편해졌다는 이야깁니다.
믿어지실 지 모르겠지만 챨리를 한번 만나보면 그게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챨리는 그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순수하고 순진하실 뿐 아니라
그 생활하시는 모습이 여간 성실하고 열심이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집 정원이 넓다는 것은 일거리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름에는 사흘이 멀다허고 잔디를 깍지 않으면 안됩니다.
겨울에는 그 넓은 마당의 눈을 치워 길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집 앞에서 비더 로드까지 눈을 치워놓지 않으면 차가 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챨리는 그 일을 거르거나 미루는 법이 없습니다.
집 앞 잔디는 언제나 반듯하고 단정하게 깎여 있었고,
우리가 사는 동안 폭설이 그렇게 많이 내렸어도
정희씨가 눈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웬만하면 제설 회사에 용역을 주고 부탁할 법도 하건마는
챨리는 돈을 아껴야 한다면서 그 일들을 손수 해 치워 버립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쏟아져서 바깥 일을 못하게 되면
챨리는 자기 스튜디오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씁니다.
챨리는 연필 데상을 즐기는데 때로는 유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대개는 정물화를 그리지만 때로는 스컹크와 니키를 그리기도 합니다.
(스컹크는 점잖은 콜리, 니키는 앙증맞은 스파니엘인데, 둘다 챨리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겨울만 아니면 밖에 나가서 집 주변의 풍경화도 그리지요.

특히 봄과 여름에는 챨리네 집에 인근의 아마추어 화가들이 모이곤 합니다.
십 수명이 모여서 집 주변 여기 저기에 흩어져서 그림들을 그리는데
모두 챨리의 오랜 친구들입니다.
기웃기웃 구경하곤 하던 저로서는 그들의 그림이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과 태도는 챨리 못지 않고 진지하던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슬바람 부는 가을이나 온통 눈덮인 겨울이 되면 챨리는
자기 아틀리에에 목탄 난로를 피워놓고서 데상이나 조각 연습을 합니다.
한창 조각 배우기에 열이 올랐을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
뉴욕시의 한 미술학교에 가서 강의도 듣고 실습을 하고 돌아오곤 했었답니다.
한번은 정희씨의 옆모습을 연필로 스케치해 주기도 했는데
그게 아주 마음에 든 정희씨는 거기에 액자까지 해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림 그릴 때가 아니면 챨리는 글을 씁니다.
챨리는 스스로 자기가 창의적인 글쓰기에 별로 소질이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자기 글이 아닙니다.
그대신 자기가 읽은 책이나 잡지의 글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모아 놓았다가
그것을 깨끗한 종이에다 정성스럽게 옮겨 적습니다.
그때는 대개 펜과 잉크를 사용하고 필체도 멋들어진 필기체로 씁니다.
우리로 치면 서예를 하는 셈입니다.
한번은 에머슨의 시구절을 써서 보여주기도 했고
어떤 때는 성경의 몇 구절을 옮겨 쓴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로도 한참동안
저 역시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친구들에게 안부 엽서 쓰는 것 조차 '무서워' 하곤 했지요.
그래서 아예 모든 종류의 글쓰기를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챨리는 자기 글을 쓰지 못하면서도 좋은 글 정서하는 취미를 개발했습니다.
그 멋들어진 글씨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표현을 해 가던 챨리의 모습은
제게는 너무너무 감동스런 것이었습니다.

챨리는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별장같은 집에서 사는 대가로 그가 요구한 것은
한달에 4백60달러 정도의 렌트 뿐이었습니다. 전기와 난방비를 전부 포함해서 말이지요.
(어쩌면 그게 챨리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했던 첫번째 이유였을까요?)

챨리를 기쁘게 해 주는 일도 아주 간단합니다.
선물로 반 갤런들이 아이스크림만 한 통이면 챨리는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아이스크림도 아무 아이스크림이면 안되지요.
챨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뉴스코틀랜드 애비뉴에 있는 "톨게이트"가 바로 그곳이지요.
덕분에 아이스크림을 별로 즐기지 않던 우리도 그곳을 자주 애용하게 됐고
챨리에게 감사의 선물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그곳을 먼저 찾곤합니다.

혼자 살면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챨리가 안되어 보일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 때문에 근심띤 얼굴을 하는 때도 있었지요.
수입은 거의 없는데 부동산을 넓게 갖고 있어서 세금때마다 걱정도 많았고요.

한번은 잔디를 깍다가 어떻게 허리를 좀 다치신 적이 있는데
혼자서 가료하면서 버티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보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어디 취직을 해서 돈을 번적이 없는 챨리로서는
소셜 시큐리티나 메디케어 혜택도 잘 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비싼 돈을 들여서 개인 보험을 살 형편도 아니라더군요.
그래서 정희씨가 어떻게 가지고 있던 '호랑이 기름'을 주었더니
발라 보고서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좋아하던 일도 있었습니다.

챨리가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프거나 화가 나더라도 그걸 밖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처럼 지내던 스컹크가 숨을 거두었을 때는 정말 슬퍼했습니다.
니키가 하루종일 슬픈 소리로 낑낑대는 울음을 울었는데
챨리도 니키와 함께 침식을 잊더군요.
옆에서 보던 우리가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 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슬링거랜즈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되새기는 것은
챨리의 집 자체도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은방울꽃 같은 챨리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세 식구가 챨리와 함께 그 집에서 산 기간은 모두 다릅니다.
저는 그 집에서 약 1년 남짓 살았습니다.
저보다 일찍 알바니에 온 정희씨는 2년을 살았고요.
챨리네 집에 사는 동안 태어난 오치는 거기서 일주일을 살았을 뿐입니다.

식구가 많아지게 되자 (한명에서 두명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세명으로)
챨리가 난색을 보였습니다.
남달리, 혹은 유별날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좋아하는 챨리는
우리의 출산을 앞두면서부터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더군요.
아기까지 있으면 자기 집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질 것 같다고...
특히 아래층에 사는 자신이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권하더군요.
그렇잖아도 그동안 먼 곳에서 정희씨를 만나러 오는 손님이 많았던 것이
챨리에게는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눈치를 우리가 모르던 바 아니었습니다.

좀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챨리와 친해지면서 챨리의 성격과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혼자서 조용히 살아온 챨리로서는
아주 작은 소음도 참아내질 못했고 잦은 손님치레를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챨리에 비하면 엄청 사교적이고 친구가 많은 우리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그 집에서 이사나오기로 했지요.

막상 우리가 이사하기로 결정하자 챨리는 온갖 편의를 다 봐 줬습니다.
가구 하나 없이 이사를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자기가 잘 간직해 두었던 가구들을 가져다가 쓰라고 내주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식탁과 책상, 그리고 의자들은
그때 챨리에게서 받아 온 것들입니다.
정희씨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면 돌려 주고 가기로 약속 했었는데
우리가 아직까지 이러고 있으니 챨리에게 미안한 생각이 참 깊습니다.

이사를 나오고 난 뒤에도 우리는 자주 챨리 집을 찾았습니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거나 라일락 봉오리가 필라치면 반드시 찾아가곤 했습니다.
봄이 오는 것을 거기만큼 확실하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얼음물 녹은 연못에 오리 몇마리가 꽤액꽥 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치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좋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온 언덕을 휩쓰는 라일락 향기....

오치가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챨리의 눈이 점점 따뜻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생각뿐이었는지 모르지만 마지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 눈빛 같았지요.
그래서 때로 챨리에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다시 들어와서 살아도 되느냐'고 말이지요.
챨리가 허락만 해주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다시 이사들어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물어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육십이 다 되시도록 몸과 마음에 밴 생활 습관과 호불호가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슬링거랜즈 시절을 돌아보면
좋은 경치와 아담한 집 (설사 우리 것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좋은 사람들 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챨리와, 챨리네 집과, 우리의 슬링거랜즈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런 시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참 고맙습니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아 준 정희씨와 오치와 챨리,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장미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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