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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22

주방보조 2005. 3. 5. 00:41

Love of Life (34): 생명, 그 영원한 누림  


생명이라는 건 참 신기합니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얼마나 큰 차이를 내는 지 모릅니다.

지난여름 언젠가 한차례 심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때문에 집 앞 주차장에 면한 나무 한 그루가 줄기 중간부터 부러졌습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줄기에 반쯤 붙어서 주차장 쪽으로 구부정하게 늘어졌지요.
덕분에 가을 내내 그 자리에는 차를 세울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아파트의 일꾼들께서 지금까지 그 죽은 나무를 그냥 두셨습니다.
겨울이 되면서 모든 나뭇가지가 앙상해졌습니다.
더구나 눈까지 덮이고 나니까 부러진 나무와 다른 나무 가지들이 똑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죽은 나무와 산 나무의 가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봄이 되어보면 우리는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산 것은 "자라기" 때문이지요.

오치를 보면 생명의 신비함을 새록새록 느끼곤 합니다.
조막 만한 핏덩어리였던 것이 이제 구구단을 욉니다.
저는 솔직히 그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뒤집거나 기기 시작할 때에도 오치는 그걸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일년이 훨씬 넘도록 일어서서 걷지도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진아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빠하고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조르기도 하고
수영장을 왔다갔다하는 기록을 세우겠다며 덤비기도 합니다.
한국 비디오를 보고 배운 뒤부터는 액센트가 전혀 없는 한국 발음으로
"웬일이니, 웬일이니" 하는 유행어도 흉내냅니다.

오치와 함께 산 팔년 반의 세월이 제게는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오치를 배면서 겪었던 기쁜 일과 어려웠던 일들,
낳고 난 이후로 하루 이십사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보았던 오치의 울고 웃던 모습들,
애써 몸을 뒤집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아장아장 걷게 되던 그 분투의 모습들,
껴안아 주고 가벼운 간지럼을 태워주면 자지러지게 웃으며 행복해 하던 모습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의 신기함과 가녀린 팔다리를 저어가면서 수영하던 앙증스러움,
삼촌이나 고모를 만나 기쁨을 참지 못하던 모습과 헤어지면서 짓던 슬픈 표정들,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당장 만나러 가야겠다며 떼를 쓰던 고집스러움과
제 장난감을 아낌없이 친구들에게 내주곤 하던 제법 어른스러운 넉넉함....

그런 것들이 바로 생명 현상이지 싶습니다.
생명이 자라가면서 우리에게 안겨주는 아름다운 선물이지요.
게다가 한 이십년만 지나면 또 저같은 생명을 나아 기르면서
지금 제가 느끼는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저도 느끼게 되겠지요.

허드슨 강 건너 이스트 그린부시에 사시는 베찌와 폴리 존즈 부부는
아주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제 지긋한 나이가 되신 두분은 우리가 처음 만난 2-3년 전부터
저와 오치와 정희씨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시는 분들입니다.

그 부부와 저희가 알게된 것은
베찌가 정희씨의 한국어 수업을 듣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간호사로 오랫동안 일해오셨고 선교일에도 열심이신 분인데
한국분을 며느리로 맞으신 이후로
한국말 배우기에 더 열심을 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두분은 프린스턴 대학과 보스턴 칼리지에서 학부를 마치시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하신 인텔리들이기도 하십니다.
두분이 만나 결혼하신 것도 바로 컬럼비아 시절의 인연때문이라고 합니다.
폴리 존즈 박사는 지금 트로이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계신데
틈틈이 한국 문헌을 영문으로 출판하는 일도 돕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베찌는 젊은 시절부터 간호학 공부와 실천에 열심이셨는데
최근에는 풀타임 간호사일을 그만두시고
세이지 칼리지에서 간호학 강의를 하시는가 하면
사설 간호사로서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돕고 계십니다.
그밖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어 공부하는 일과
어려운 처지에 계신 분들 돕는 일에 바치고 계십니다.

베찌와 폴리 존즈 부부와의 인연과 만남에 대해서만도
이야기하고 싶은 거리가 참 많습니다만,
오늘은 오늘은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분들의 친구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베찌와 폴리 부부는 요즘 션과 트로델이라는 친구 부부와 가깝게 지내십니다.
남편이신 션이 직장암으로 1년 조금 넘게 치병을 하고 계신데
부인이신 트로델을 도와서 베찌와 폴리가 힘을 보태드리고 있습니다.

션과 트로델 부부께서는 최근 2-3년 동안 인생의 어려움을 겹으로 겪고 계십니다.
3년전 쯤 고등학생이던 아들이 한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로 깊은 받은 상처를 받은 션과 트로델은
한동안 주체하기 어려운 실망과 좌절, 그리고 한탄 속에서 지내셨답니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아들을 추억하면서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셨답니다.

저같으면 여덟살 먹은 오치가 감기에 걸려 열이 높아지거나
발목을 다쳐서 절뚝거리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 앉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십육년을 다 키운 자식을 잃으셨으니.....

그런데 두 분은 그렇게 몇 달이 지내시면서 좌절과 한탄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평생 의지하며 사신 신앙의 힘이 컸다고 하시는 말을 들었습니다.

두분은 아들을 죽게 만들었던 젊은이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직접 찾아셔서 일일이 악수하고 어깨를 안아주셨습니다.
"내 아들은 또 다른 좋은 생명을 누리고 있느니 너무 죄의식 갖지 말라"면서
오히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여섯살난 아들을 하루 아침에 잃은 부모님의 슬픔과 좌절이
어디 쉽게 이겨내어 지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전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션과 트로델 부부는 그런 비통과 한탄을 이겨내신 것이지요.
그런 비통과 한탄을 가져다 주었던 젊은이들을 용서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남편이신 션이 암 진단을 받으신 것이지요.

누구나 션과 같은 입장이 되면 굉장히 큰 마음의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래 믿고 의지했었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저절로 들 것입니다.
하지만 션과 트로델은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오히려 그런 불행한 일을 기회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정희씨는 가끔식 베찌-폴리 부부의 집을 방문해서
션과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5년 동안의 제 간병을 통해서 이제는 거의 암치병 전문가(?)가 된 정희씨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트로델과 션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정희씨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왔어."

션의 암치병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선 션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이후,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찬송과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는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 치병 방법을 션과 트로델은 일부러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병원이나 의사를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를 낫게 하실 거라는 신념 때문도 아니랍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두분의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분은, 특히 션은
사람의 생명은 굉장히 무한한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생명의 시작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만,
일단 시작된 생명은 이 세상에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고 나서도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으신답니다.
죽음을 통과하면 오히려 우리 생명이 한차원 더 높게 승화된다고 믿으십니다.

사실, 어찌보면 당연하신 믿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더 무한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배우고 또 그렇게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까먹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생명이라는 게 우리 몸이 태어나면서 생기고
몸이 죽으면서 함께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곤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 혼란과 좌절에 빠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제 자신도 그렇습니다.
사실 암 진단을 받고 치병을 하던 초기에는 아주 무서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싫었고 또 죽음을 생각하는 것 조차 싫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발버둥에 가까운 법썩을 떨기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고
심지어 여러 가지 이유로 정당화시킬 수 조차 있었습니다.

"우리 오치는 어떻게 하나...."
"우리 정희씨는 또 어떻게 하나...."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모든 일들, 누리고 싶었던 것들은...."
"나를 염려하면서 지켜보며 기도해 주시는 많은 분들의 기대와 염원은 또...."

그런 바램과 걱정과 욕심은 그다지 심하거나 도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이기조차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던 것인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브리서 9:27)

그 뒤에는 심판이 있고, 그 뒤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몸의 죽음 뒤에 또 다른 생명이 있음을 깜빡깜빡 잊곤 합니다.
그것은 사춘기를 넘어 성인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으리라고 봅니다.
사춘기 전의 내 생각이 그것을 넘긴 후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듯이
몸이 죽기 이전의 내 생명이 그 이후의 생명이 어떤 것이지 가늠해 보기가 어렵겠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을 넘어서도 성장하는 것이지요.

몸이 죽음을 맞는 것은 물론 슬픈 일입니다.
더더구나 저같이 평균수명도 누리지 못한 사람이 죽음을 앞둔다는 것은 더더구나 슬픕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제 생명이 더 자라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란 생명이 어떤 모습일는지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조막만 하던 오치가 스스로 여덟살 반의 지금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듯이,
역시 조막만 했었을 제가 삼십 후반의 '아줌마'로 성장한 것을 생각해 보기 어렵듯이,
조그만 새순이 어엿한 꽃나무로 자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듯이
가녀리고 이파리도 별로 없는 "바클리 조" 나무가
그늘 드리우는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한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듯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진 안목과 생각의 모자람 때문에
그런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좀 어려울 뿐이지요.
지금의 제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그 어떤 모습으로,
혹은 지금의 내 생명과는 차원이 굉장히 다른 또 다른 생명으로
제 자신도 자라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션과 트로델이 연습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들은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시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시지도 않으며
가능한 한 멀리 미루어 보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암세포가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면 나는 따라 가리라.
그리고는 더욱 의미 있는 생명으로 옮겨가리라.
내 아들이 누리고 있을 그 차원 높은 생명을 나도 누리게 되리라.
죽음은 그리로 가기 위한 하나의 관문,
그것을 통과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미루려고 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바로 두 분의 마음가짐이라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그런 차원 높은 신앙의 자세를 흉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병원 치료도 부지런히 받았고
"살려주세요"하고 하나님께도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제 노력과 열심만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아서 부지런히 기도 부탁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션과 트로델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생명의 설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더 자라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이십년 가까이 더 오래 사시면서 터득하신 삶에 대한 지혜때문이실까요?

션과 트로델은 죽음이 저절로 승화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죽음과 그 너머의 생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준비는 주로 내 영혼에 대한 작업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영혼의 세계라고 보시기 때문이지요.

션과 트로델을 생각하면서 저 역시
내가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새삼 깨달은 바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몸과 마음을 다듬고 가꾸고 성장시키는 데에는
참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위해서는.... 부끄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돼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혼 혹은 넋에 대해서 가장 신경을 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면 남는 것은 바로 넋이요 영혼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승화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실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 "더 자라게 되는" 바탕일 것입니다.

이제 저는 그것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지금보다 훨씬 덜 부끄러운 모습이 되려면
지금 저는 제 영혼을 준비시켜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저는 지금 "몸"이 무척 아픕니다.
오치와 정희씨를 생각하면 "마음"도 무척 아픕니다.
그러나 제 영혼은 몸과 마음의 고통에 영향을 받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생명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설 때에 몸과 마음의 고통은 잊혀지겠지요.
더구나 그 새 생명을 누리기 시작할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도 다소 푸근해 지고 심지어 몸의 통증도 가라앉는 듯 합니다.

우리는 더 자란 생명으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오치도 만나고 정희씨도 만나게 되겠지요.
서로 밥상을 나누고 기도로 함께 하셨던 많은 분들도 다시 만날 것입니다. 만나서
짧고 어려웠지만 즐겁기도 했던 세상에서의 삶도 이야기할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사실은
길고 영원한 생명의 여정에서 얼마나 짧은 것인지도 새삼 깨닫게 되겠지요.

정희씨는 이런 제 생각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저를 아껴주시고 염려해 주시는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이시리라 믿습니다.
오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정희씨를 닮아서 생각이 깊어지고 마음씀이 넓어지게 되면
지금의 제 심정과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이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저는
부족하나마 이런 글을 남기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횡설수설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위로 올라가서 고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지만 제 진심을 썼기 때문이지요.

절 사랑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한번 더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생명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더 나은 생명도 한껏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더 잘 자라도록' 준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생명도 훨씬 값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장미혜 드림.

211.249.46.157 요리왕: 一日一生...우찌무라 간조선생의 책 제목입니다. 바울사도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혹 '하루'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몇년 몇십년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루'가 전부인 것...입니다. 내일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정희씨가 날자를 세실때에 은근히 그것이 싫었습니다. 하루의 생명을 매일 누리시기를... [12/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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