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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25

주방보조 2005. 3. 8. 04:53

Love of Life (37): 목사님, 우리들의 목사님  

돈 까밀로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신지요.
그리고 대장장이 빼뽀네와 성당지기 여편네 안젤리나를 아시는지요.
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 실재 인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작가 죠반니노 과레스키가 쓴 소설의 등장인물들입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이라는 제목의 연작소설집에 나옵니다.

암 치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희씨는
알바니에 와주신 시부모님 편에 서울 집의 책을 대거 공수해 왔습니다.
치료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저를 위해서
소일 삼아 읽을 거리를 마련해 주려고 그랬던 것이지요.
그 중에는 제법 무거운 내용의 책들도 끼어 있었지만
대개는 가벼운 수필집이나 재미있는 소설책들이었습니다.

여섯 권이나 되는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도 그 중의 하나였지요.
사실 이 책들은 결혼전에 이미 한번씩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연애 시절 제가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 없느냐'고 묻자
정희씨는 서슴없이 그 책들을 권해주고 빌려주기 까지 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물론이고 제 언니까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잊어 버렸었는데 알바니까지 그 책을 공수해 와 읽게 되니
묘한 옛 생각도 나고 뭔가 좀 아련하더군요.

그 책은 이탈리아 포 강 유역의 작은 마을 이야기들을 담은 연작 소설이었습니다. 카톨릭 신부이자 기독교 민주당을 지지하는 돈 까밀로와
대장장이로서 공산당을 대표하고 마을의 읍장이기도한 빼뽀네는
서로 잡아먹질 못해서 안달을 내는 일종의 천적입니다.
미사나 선거가 있을 때 뿐 아니라 카드놀이나 주먹다짐을 할 때조차도
그 두 사람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합니다.

그 책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기상천외하고 배꼽 잡을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한참을 웃고 나서도 뒤에 남는 생각할 거리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 동안 제가 가졌던 선입견이 많이 깨지는 걸 느끼곤 했었습니다.

우선 공산주의자들도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에서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빼뽀네더러
"아이구, 내 귀여운 공산주의자야"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귀여운" 공산주의자라니....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볼썽 사나운 뿔 달린 도깨비 포스터만 보고자란 저로서는 공산주의자를 "귀엽다"고 서술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 속의 공산주의자들, 즉 빼뽀네와 그 부하들은 정말 귀여운 맛이 있습니다. 일자무식이면서도 우직하고 의리가 있고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신부님들에 대한 선입견도 여지없이 깨어져 나갔습니다.
신부님이라고 하면 항상 심각하고 경건하면서도 뭔가 음습한 이미지를 가졌더랬습니다. 그건 아마도 <유리알 유희>나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부님>에 나오는 돈 까밀로는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욱하는 성미의 다혈질인데다가 빼뽀네를 골탕먹이기 좋아하는 유쾌한 성격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모가 공산당원인 가난한 아이들을 보면 도와주질 못해서 안달입니다. 마을을 덮친 홍수의 피해를 막으려고 목숨 내놓고 나선 돈 까밀로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가깝게 느끼게 해 주는 신부는 난생 처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알바니에 살면서 '귀여운 공산주의자'를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게 해 주시는 목사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효근 목사님 내외분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유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제가 알바니에 온 이후로도 한참 뒤였지 싶습니다.
다른 미국 교회들로부터 설교 초청을 자주 받으시던 목사님으로서는
우리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오시는 것이 쉽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때 교회가 어려움이 처했을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팔을 걷어 부치셨습니다.
뚜렷한 소신과 원칙을 가지시고 얽힌 매듭을 풀기 시작하셨지요.
저희로서는 그때가 유목사님을 자주 뵙고 인사도 드렸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목사님의 첫 인상은 빈틈이 없으시고 다소 딱딱하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목사님의 겉모습에 불과했던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느니만큼 그런 원칙과 소신이 없으셨다면
교회의 어려움을 원만하게 수습해 나가기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저희는 유목사님 내외분을 더 자주 뵙게 됐고
두분의 자제 분들이나 그 가족들도 만날 기회도 생겼습니다.
따님 한 분은 바이얼린을 전공하셨는데 교회에서 연주하실 때마다
피아노 반주로 도와드릴 수 있었던 것이 더 좋은 인연이 됐습니다.
게다가 두분의 손자 죠수아는 오치와 동갑이어서
만나면 아이들 노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곤 했습니다.

유목사님 내외분께서 자제 분들과 손주들을 생각하시고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부러운 점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걸 배우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자제 분들의 어린 시절에는 신앙과 원칙으로 잘 가르치시지만
아이들이 장성한 다음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최대한 존중하십니다.
사실 자녀들이 다 큰 다음에까지 부모가 간섭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녀 교육을 그다지 잘 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반증이 되겠지요.

유한나 사모님으로부터 저는 직접적으로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수술과 약물치료와 방사선치료로 병원 약속이 빈번해 지면서
치료 약속이 정희씨의 강의 시간과 겹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저를 병원에 데려가 주시고 데려 오셨습니다.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무척 자상하신 것이어서 마치 친어머니같이 느끼게 해 주셨지요.

마음 편히 대해주시는 사모님 덕분에 저는
마음이 우울하거나 갈등을 느낄 때마다 사모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찾아 뵙곤 했습니다.
특히 오치가 트로이의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부터는 그럴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오치 학교가 사모님 댁에서 아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오치 등교를 시키고 나서 바로 사모님 댁으로 찾아가 수다를 떨곤 했었지요.
오치가 집 가까운 공립학교로 전학한 이후로는
그런 자연스런 기회를 잃은 것 같아서 조금 서운했었습니다.

사모님은 또 제게 음식을 마련해 주시는 데에 아주 열심이신 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혹은 차례를 정해서 제 음식을 해 주셨습니다.
유한나 사모님은 그런 분들 중에서도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치료 중에는 상시적으로 입맛이 없는 제가 그나마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모님의 맛깔스런 음식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생활이 오래되셔서 한국 음식 맛이 예전만 못하다고 연신 말씀하셨지만
제게는 어렸을 때 제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 맛이 가장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아무래도 이북 분이신 유목사님의 입맛을 맞추시다 보니까 그런 솜씨를 가지시게 됐고
그 덕을 제가 단단히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목사님 내외분을 생각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 암 치병을 위한 보험을 마련해 주시느라고 무진 애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희씨가 갖고 있던 학생 보험으로는 제 치료비를 대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얼마 후에 정희씨가 강사로 일하게 되면서 새로 다른 보험을 갖게 됐지만
그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치료비를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보험 가입 당시에 이미 밝혀진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보험적용이 안되는 규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목사님은 그 두꺼운 메디케이드 규정집을 샅샅이 뒤지셨고
마침내 제가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항을 찾아내셨습니다.
네 번이나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다섯 번째에야 간신히 그 보험에 받아들여졌는데
그것은 유목사님의 철저하고도 자상한 조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그 이후로는 치료비에 대한 큰 걱정없이 치병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유목사님 내외분께 새삼 감사드립니다.

스티븐 코비가 쓰신 <성공하는 가족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에 보면
스티븐 코비 씨의 따님 한 분이 쓴 짧은 글이 하나 나옵니다.
속이 상할 때마다 부모님과 상의하곤 했는데 두분의 반응이 정반대였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기는 하시지만 끝에 가면 '훈시'가 뒤따른다고 합니다.
대개 그 훈시는 맞는 말씀이고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그런 '옳으신 말씀'이 귀에 거슬린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면 속이 아주 시원해진다고 했습니다.
말끝마다 맞장구를 쳐주시면서 자기보다 더 난리를 피우시곤 했답니다.
"누가 우리 딸을 그렇게 섭섭하게 했단 말이냐?"
"너는 누가 뭐래도 내 딸이다. 앞장서라. 내가 가서 따져야 겠다"는 식이었답니다.
설사 자기 잘못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어도 어머니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답니다.
그러면 이내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사실 우리는 때로 옳은 말씀이 고깝게 들릴 때도 있고
그보다는 '무조건 내편'이 되어 주시는 분들에게 친근감을 갖는 적이 많습니다.
심지어 내가 틀렸더라도 내편이 되어 주시는 분들 때문에 인생은 살맛이 납니다.
물론 그런 '무조건 내편 들기'가 도를 지나치면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적절한 선에 머물 수만 있다면 살아가는 데에 큰 자신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편 들기"를 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야만
다른 분들의 '옳은 말씀'도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강충욱 목사님 내외분과 맺은 인연은 주로 '내편 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강목사님 내외분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아, 그랬군요" 하시거나 "저런, 그러신 것도 당연하지요" 하시곤 했지요.
목사님의 원래 하시는 일이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예배 때를 빼고는 개인적으로 저희에게 '설교'하신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 대신 저희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시고 맞장구 쳐주시기만 하셨지요.
따로 해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만남을 마치면서 함께 드리는 기도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식으로 하시곤 하십니다.

목사님 내외분과는 식사를 같이한 적이 여러 번 됩니다만
그것은 대개 외식이거나 목사님 댁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두분께서 저희 집을 찾아주셨을 때에는 식사시간을 비껴서 오시곤 했지요. 주로 예배를 함께 드리시거나 잠깐씩 기도해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가 준비해서 두분과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고 바랬었습니다만
두분은 한사코 그런 자리는 마련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기껏해야 녹차나 둥글레차를 한 잔 나누시는 정도였지요.

시간이 가면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저희에게도 참 마음 편한 자리가 됐습니다.
목사님을 대접한다는 부담이라면 부담이랄 수도 있는 절차를 생략하고서
오히려 마음 편하게 속을 털어놓는 대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대화에서도 두분께서는 대체로 귀를 기울이시는 편이지요.
간간이 맞장구를 주시는 것 외에는 경청하시는 것으로 일관하신 것이지요.
그런 만남을 통해서 저희는 목사님 내외분을 참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저러하게 해야 합니다" 대신 "아, 그렇군요" 하시는 말씀 때문입니다.
두분과 이야기 나눌 때에는 아주 가벼운 대화조차도 마음이 편합니다.
형식적이거나 훈계조가 아니라 진심과 이해 어린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분과 처음 만났을 때에는 버팔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서 여러 십년을 사셨기 때문일 겁니다.
두 분이 거기서 만나신 이야기며 이민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함께 하시던 이야기,
목사님께서 뒤늦은 신학 공부를 하시게 되면서 부딪혔던 어려움과 보람있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하실 때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때가 두 분에게는 '참 좋았던 그 시절'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의 의견이 처음 정착한 곳에 향수를 갖는 법이라고 합니다.
버팔로는 목사님 내외분이 처음 정착하신 곳일 뿐 아니라 삼십년 가까이 사신 곳입니다.
그러니 버팔로가 두분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도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면
아마도 알바니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 것이 뻔합니다.
제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제2의 고향을 떠나 알바니에 오신 두분의 결심과 각오는 각별하셨을 것입니다.
게다가 평지풍파를 겪고서 아직 후유증이 남은 교회에 부임하시는 마당에
마음에 조심스러움과 걱정거리가 왜 없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두분께서는 오히려 그런 걱정과 조심스러움을 인내로 잘 수습해 오신 듯 합니다.

저희는 베이글을 그다지 즐겨 먹지 않던 편이었습니다.
아주 급할 때만 간단한 아침식사로 먹곤 했었으니까요.
그것도 수퍼마켓에서 그냥 비닐 봉지에 든 것을 사다 먹었지요.
미국인 친구들처럼 맛있다는 베이글 가게를 일부러 찾아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베이글에 홀딱 반하게 됐었습니다. '부르거스 베이글'에 말입니다.
김찬옥 사모님과 이야기 중에 '베이글' 이야기가 나온 이후의 일이었지요.
사모님께서 '부르거스 베이글' 가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극구 칭찬을 하시는데
"너무 너무 맛있어요"하시는 사모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멕시코식 고추인 잘라피노를 잘게 썰어 곁들인 베이글을 먹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혹은 보통 베이글에 잘라피노가 섞인 크림 치즈를 발라 먹어도 일품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우리는 '잘라피노'를 맛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몰랐을 뿐이지요. 샌디에고로 여행했을 때 한 노천식당에서 매콤한 피자를 먹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 향신료(그때는 그게 향신료인줄 알았습니다)가 무엇인지 몰랐었지요.
종업원이 뭐라고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이상한 이름(?)이라 알아듣지를 못했었습니다.
사모님이 권하신 베이글을 먹어보다가 그게 바로 잘라피노라는 걸 알았습니다.
우연히도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그 베이글 가게가 알바니에도 많이 생겼습니다.
알바니 대학 업타운 캠퍼스에서 가까운 스타이브센트 플라자에도 큰 게 하나 생겼고,
다운타운 캠퍼스 인근의 매디슨 애비뉴와 퀘일 스트릿이 만나는 코너에도 생겼습니다.
특히 저희 집에서 교회가는 쪽의 웨스턴 애비뉴에도 하나가 생기는 바람에 주일날 아침이면 교회에 가는 길에는 한두 다스씩 사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보다 일찍 교회에 오시는 성가대원들과 함께 아침삼아 먹기 위해서였지요.
지금도 부르거스 베이글을 대할 때면
버팔로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련한 표정을 지으시던 목사님 내외분의 모습이 선합니다.

요즘들어 주일날에도 교회에 가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벌써 여러달 째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척추와 갈비뼈의 통증이 심해진 이후라 집밖 나들이를 거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교회 일정을 마치시자마자 저희 집에 오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와 제 간호 때문에 교회에 가지 못하시는 시어머님을 위해서
또 한번 주일 예배를 함께 드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잠시 저희 집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특별한 배려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내시면서 많이 피곤하실 텐데도 거의 매주일 그렇게 해 주고 계시지요.
두분께 새삼스럽게, 그리고 거듭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목사님과 강목사님 내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배려는
저희 가족이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도 그렇게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사랑과 배려가 저희만 누리는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께서도 저희와 같은 배려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다들 공감하시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서 한번 감사드리고 싶고, 그런 은혜를 입고도
그간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한 사과의 말씀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알바니에서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게 해 주신 목사님이 또 한분 계십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신 정경호 목사님과 그 사모님이시지요.
두분을 뵌 것은 저희의 슬링거랜즈 시절이었습니다.

저희가 챨리네 집에서 이사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서둘러 귀국하시게 됐었지요.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시던 목사님께서 공부를 채 마치시기도 전에
대구의 한 신학교의 교수님으로 부임하시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슬링거랜즈 시절에 목사님은 저희 집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사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왕래가 잦았지요.
물론 멀리 사시던 다른 분들도 목사님 댁 걸음을 자주 하시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목사님 내외분의 댁은 넓게 열려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모님이 저희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금 점심으로 라면이나 먹을까 하는데, 찬밥 좀 남은 것 있으면 가지고 와요."
마침 집에 있던 정희씨와 함께 서둘러 전기 밥솥에 남은 밥을 싸들고
냉큼 목사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떡국 떡 몇 개와 달걀을 풀어넣은 라면을 넷이서 맛있게 먹어치우고
사모님이 막 만드신 김치를 반찬삼아 찬밥까지 말아서 깨끗이 비웠습니다.
저는 그날 오후의 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두분께서야 워낙 그런 친근미 있으신 생활에 익숙하셨겠지만
목사님들이라면 항상 어렵게만 느끼곤 했던 저로서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는 한국에서도 내노라 하는 큰 교회였고
그런 만큼 목회자님들은 친근하다기 보다는 항상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희 결혼식 주례를 서 주셨던 그 교회 당회장 목사님은
결혼 후에는 한번도 만나 뵐 기회가 없습니다. 저희에게 따로 안부를 물어오신 적도 없고요.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이 주례 서신 부부만 해도 일년에 수십 쌍이 될 터이니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고 안부를 묻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찬밥 좀 가져와서 라면이나 같이 먹자"고 하실 수가 애당초 없으셨겠습니다.
점심으로 찬밥과 함께 라면을 드시는 분들인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제가 김치를 담가본 것은 알바니에 와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담근 김치를 작은 병에 싸들고 찾아간 곳이 목사님 댁이었습니다.
그 김치로 사모님과 함께 점심밥을 먹으면서 품평을 듣기도 했지요.
마치 새댁이 처음 해 본 음식을 싸들고 자랑스레 친정을 찾아가던 기분이었습니다.
(주일마다 듣던 목사님들의 설교 이야기는 기억에 가물가물 하면서도
함께 밥 먹었던 기억은 이다지도 생생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은 마침내 부임하셨던 신학교의 대학원장이 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분을 선생님으로 모신 그 학교의 학생들이 참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도 한 채 장만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몇 년 전 2-3분 거리에 살던 목사님 댁이 지금은 비행기로 열다섯 시간 거리입니다.
또 제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 만나 뵐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멀리서나마 이 글을 통해서
그 시절에 베푸신 은혜에 저희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알바니에 와서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참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목사님들과도 강단을 통해서 뿐 아니라
생활을 통해서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또 그런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과도 훨씬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제게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느끼게 해 주신 <목사님, 우리들의 목사님>들께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장미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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