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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장미혜님 글28

주방보조 2005. 3. 11. 07:47
Love of Life (40): 우리 시어머님  

오늘(7일)은 제 응급실 행차 때문에 여러 가지가 엉망이 됐습니다.
본의 아닌 일이기는 하지만 특히 시어머님께 죄송했습니다.
오늘이 시어머님의 생신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팔이 부러진 일이 없었더라도
제가 어머님의 생신 축하 준비를 해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저 때문에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제대로된 식사조차 못하고 계십니다.
요즘 집안에서 나는 음식 냄새 조차 제게는 너무너무 역겹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람구실 못한다는 자괴심이 좀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어머님 생신날 팔이 부러져 소동을 벌이게 되다니
그렇잖아도 죄송하기 짝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더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어젯밤부터 한국에서는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시동생들과 동서들과 친척분들과 친구분들이 생신 축하 전화를 해 온 것이지요.
서울에서는 어제부터가 어머님 생신이었으니까요.
옆방의 저를 의식해서 애써 목소리를 낮추시곤 하셨지만
전화 해 준 사람들과 즐겁게 덕담 나누시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그래서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어도
축하하고 축하받으시는 모습과 그 목소리가 너무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작년에는 시동생들 가족과 친척분들이 홍제동에 다 모였었답니다.
빠진 것은 알바니의 우리 식구와 시카고로 시집을 간 아가씨 뿐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모인 식구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었습니다.
우리 홍제동 집은 모든 경조사와 연락의 중심지입니다.
두분 부모님 사시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크기의 아파트지만
가족들이 다 모이면 북적북적해 집니다.
5-6년전에 오치를 데리고 잠깐 귀국했었을 때의
그 홍제동 집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집 자체 때문은 아닙니다.
시부모님 계시는 곳은 항상 그런 분위기가 납니다.
올해는 그게 바로 알바니인 셈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의 생신을 축하는 전화가 한국과 미국에서 알바니로 집중된 것이지요.

저 때문에 성대한 축하를 받으시지 못하시게 됐습니다만
그래도 연신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어머님은 행복하신 표정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올해 어머님 생신은 조촐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예민해진 제 청각과 후각 때문에 집안에서 요리를 하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픈 저만 집에 두고 외식을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아예 미리 선언을 해 두셨지요.
'올해 생일은 그냥 넘길테니까, 그것 때문에 조금도 신경쓰지 말거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정희씨도 아니지요.
정희씨는 응급실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가깝게 지내는 몇 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자기 대신 어머님 생신 준비를 해 줄 사람을 찾았던 것이지요.
준섭씨와 용수씨가 선뜻 나서 주었습니다.

준섭씨는 선뜻 커다란 모듬회 두 판을 준비해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용수씨도 선물과 카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제동 집에서 받으시던 생일상에야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그런대로 오붓한 생일상이 마련됐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어머님 생신 선물은 준비해 놓았었습니다.
김찬옥 사모님께 부탁해서 약소하나마 조그만 스웨터를 하나 사 놓았지요.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미리 준비해 둔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와주신 사모님께도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정희씨도 예쁜 생신 카드를 하나 준비해 왔습니다.
아침에 레드후크에 갔을 때 그 동네 책방에서 산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색의 조금 두꺼운 판지에 악보와 꽃이 새겨진 예쁜 카드였습니다.
거기에 생신 축하드리는 말씀과 당부의 말씀을 적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맏아들 내외 올림"

저는 말만 맏며느리지 맏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결혼한 직후에 잠깐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별로 며느리 역할을 못했습니다.
대학원 2년째를 다니느라고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혼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잔뜩 속만 썩여 드렸습니다.
미국으로 온 이후에는 더더구나 그걸 만회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동서들이 시부모님을 잘 모신다는 이야기는 자주 전해 듣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좀 질투도 납니다.
이러다가 며느리들 중에서도 '제일 처지는 며느리'가 되는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이상한 것은 제일 모자라고 속만 썩여드리는 며느리인데도
어머님은 여전히 '우리 미혜, 우리 미혜' 하면서 절 아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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