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예수와 안티예수

안수기도...

주방보조 2007. 3. 7. 01:15

 <제347호> 이주일씨에게 안수기도를... 2002년 03월 07일
코미디언이며
전직 국회의원인 이주일 전의원이
폐암투병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이주일씨 기독교 귀의!] 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뭔일이야...하고 내용을 들여다 보니

옛날 대성교회 목사가
그의 치유를 위해 안수기도해주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 대성교회가 간판을 바꾸었지요...

평강 제일 교회...

...

대성교회가 평강제일교회로 바뀌게 된데는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단전문가...탁명환씨 피살사건...

많은 이들이 대성교회목사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추측했지만
살해자는 사법처리가 되었어도...그 교회와 목사는 도덕적 데미지 외에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구로구 오류동으로 교회를 이전하고
대성교회란 이름을 ... 평강 제일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

왜 탁명환씨에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는 지와
그의 피살사건에 어떻게 교회가 관련되었는지는
인터넷에서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라구요...

저는 이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자체 정화는 정말 어렵다...는 것 말입니다.

성도들이 너무나...깊이 환각상태에 빠져있어서

벌거벗은 임금님 칭송하기 여념이 없는 그런 꼴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단순한 사실에 반해

권력과 두려움에 오염되어 그 단순한 사실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어른들처럼...말입니다.

...

그 정도 도덕성 상실이면...제 상식으로는 벌써 문을 닫았어야 하는 교회인데...계속 부흥을 하여...허허...그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버티고 서있고
이제는 이주일씨에게 안수기도 해준다는 것과 더불어 얼마나 더 큰 헛 영광의 소문을 덛붙여 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교회따위에 있어서도 그러니
얼마나 더 세습교회들이 더욱 번창하며
이재록과 같은 이단들이 쉬지않고 활동의 범위를 넓혀가겠습니까?

오히려
기독교내부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언론들에 대하여
이교단 저교단 이단체 저단체 할 것없이 모여
언론대책위원회와 같은 따위의 전위부대나 만들고 자빠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평신도들이...그 눈을 부릅뜨고 ... 기독교회를 힘껏 노려보지 않으면

정말...
우리나라 교회에 희망이란 게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주일씨 폐암이 기왕지사...빨리 낫기를 바랍니다.

그 헛된 ... 안수기도 받지 마시고...

 

 


 

 

03/07 Re: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게....../종교심과 신앙심 20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것이나 붙잡는것을 종교심이라고 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붙잡는 것을 신앙심이라고 구분해도 괜찮겠습니까?

이런 제멋대로의 정의를 가정하고 말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종교심은 매우 큰 반면 신앙심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고난이 왔을 때...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종교심의 힘이란 것은 두번의 기회를 주지는 못합니다.

남정임씨같이 스스로를 철저히 속이고 사는 수 밖에 없지요.

신앙의 특징은 ... 어떤 상황이 재발되더라도...견고히 붙들어 놓지 않는 것입니다...죽으면 죽으리라...하고...

...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속에 크게 잠재해 있는 종교심이...
수많은 사이비 안수나 사이비치유를 양산해 냅니다.

...

그런 목사의 안수보다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바닥의 온기가 더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필



: 나는 이주일씨의 안수기도 승락에 대하여 그렇게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 안수기도 해 준다는 목사가 좋지 않은 사람이지 이주일씨는 자연스러운 것 입니다.
:
: 암으로 죽어가던 나의 사촌 매형이 있었습니다.
: 누군가가 굼벵이를 날로 먹으면 좋다고 한다고 옛날 초가지붕을 뒤적여서 굼벵이를 여러마리 잡았습니다.
: 꿈틀 꿈틀하는 굼벵이를 그냥 날로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 생명의 애착이라는 것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생명을 더 연장하고 싶은 생물의 본능은 무엇으로도 막지 못합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을 가능한한 끝까지 버티라는 유전자를 주입 시키셨다고 생각 됩니다.
: 그럼으로 우리 생태계의 번식과 생존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 생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없었다면 좀 귀찮으면 생을 포기해 버리고 했다면 생태계는 아마도 이렇게 번성하고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
: 제가 대학교때 사귀던 음악대학생이 있었는데 25년이 지난후 재상봉 행사에서 만났습니다.
: 개척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되었드라구요.
: 그런데 재상봉 행사에서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고 안수 기도에 대한 이야기만 하드라구요.
: 그 사모님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목사님 사모님은 핸드폰으로 안수기도 신청이 오면 밤중에라도 아무리 험한 데라도 달려가서 안수 기도를 해 준답니다.
: 안수기도를 받은 환자들은 마음이 편안해져서 편한 잠을 잔답니다.
: 그래서 환자들이 편한 잠을 자게 하기 위해서 안수 기도를 해주러 다닌다고 한답니다.
: 개중에는 정말로 병이 나은 사람도 있답니다.
: 그 사모님 친구의 말로는 그냥 날때가 돼서 나은 것이지 안수기도 땜에 병이 나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
: 그런데 세월이 좀 지나고나서 그 사모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요즈음 그 사모님이 타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 돈있는 집만 안수기도 가 주고 돈없는 집은 잘 안가고 돈을 받고 받은 돈으로 딸래미 해외 유학 비용 대주고 완전히 타락했다고 열을 올렸습니다.
: 교회에는 보태지않고 딸래미 유학비용과 자기들 잘먹고 사는데 돈을 쓴다고 흥분해서 전화기에대고 떠들어 댔습니다.
:
: 그래도 그 사모님은 학생때 내가 좋아했던 여자이고 사귀었던 여자기 땜에 나는 그 사모님 편이었습니다.
:
: 그 친구의 말은 단지 헐뜯는 말로만 들렸습니다.
:
: 그들 목사님과 내가 사귀었던 그 여자 사모님은 최근에 목사님의 결단으로 필리핀으로 선교활동 나가셨답니다.
: 거기서도 안수기도 해주고 돈을 버는지는 잘 모릅니다.
배규태

 

 

03/07 Re:Re:한 사람의 영혼이.../--; / ^^ 16
사람의 병이 낫고 안낫고는 절대적인 문제는 아니라 여겨집니다

문제는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가 그런 교회(?)를 통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면 더할나위가 없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중심에 서서 그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저는 일반(?)교회를 지극히 존중하며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방법과 과정을 넘어서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우리의 일들이 오히려 그 분의 일을 제한하고 더욱 어렵고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부분들이

지극히 많으리라 여겨지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회가 제할일을 다했더라면...

안티분들에 대한 타도(?)는...하하

타도한다고 타도될일도 아니요 사랑으로 만나야 할일이겠지요

그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다만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만큼은 아닌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음이 있을 뿐...

어떤 타협은 있을수 없겠지요 ^^

사람과의 다툼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소미산


: 이런 고민스러움이 있습니다.
:
: 소위 문제있는 교회를 통해서라도 ...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 아예 예수를 모르고 살게 놔두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
: 문제없는? 교회들이...그들의 활약을 ... 거짓과 허풍이라 할지라도... 대책없이 반대만 할 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
: ...
:
: 그러므로
: 이단타도보다는...이단설득이 어렵지만...가야할 길 아닌가...합니다...
:
:원필
:
: : 가슴이 아픕니다
: :
: :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 합일을 이루기가 이리도 멀고 험난한지...
: :
: : 세상의 미물보다 못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알게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중에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 :
: : 그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소미산

 

03/07 짧은 글 ^^ 28

저는 짧은 글과 짧은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지기님을 좋아합니다. ^^)

짧은 건... 바쁜 요즘 사람들 대부분이 선호하는 경향이긴 하지만,
바쁘기 때문에, 긴게 귀찮아서 제가 짧은 글과 말을 좋아한다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짧은 것만을 선호한다는 게 아니라 <핵심이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이나 말은 짧아도 생각은 긴...뭐 그런거라 하면 되겠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글 중에 그런 글이 많습니다.
그 분의 글 중에 오늘 이곳 칼럼을 읽고 소개하고픈 짧은 글이 있지요.

마음에 안 들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

*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지 마십시오. 옳은 일을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

기도할 때도... 말이(만) 많을 필요는 없겠지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

<안수기도>... 들어주시는 하나님?
글쎄요... 그럴수도 안그럴수도 있지요. (그거야 하나님 맘이지요?)

글이 길어지겠군요. ...... 건강하시길...*^^*


너구리

 

 

03/07 북한의 기독교 탄압 실태-1 19
총살당하고 있는 북한 지하성도들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지하성도들은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죽음의 공포에서 신앙생활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범수용소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갖은 고초를 당하고 있으며 때로는 종교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공개처형을 당하기도 합니다.

탈북자들이 발생하는 95년부터 시작하여 97년 본격적으로 북한사역이 시작되면서 북한 내의 기독교 조직이 미약하나마 형성되었고 해방이전의 그루터기 성도들이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는 99년 한해에만 400명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당했다고 보고했으며 200여 곳의 노동수용소에서 적어도 10만명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고통 당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 예랑선교회 소속된 현지사역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97년 중순 함경북도 온성군 안전부 구류소에서 김명덕과 그 가족을 포함해서 7명이, 98년 초 회령시 보위부 구치소에서 조영중이라는 청년이, 98년 여름 은덕군 보위부 구치소에서 허태성외 2명이, 99년 초 무산시에서 3명이, 99년 말 청진시 보위부 구치소에서 2명과 2천년 2월 10일에는 무산시 장마당에서 리영희성도의 장렬한 순교가 있었으며, 9월경에는 회령보위부에서 13명의 기독교인들의 처형되었으며 심지어는 13세된 소녀와 8세된 어린아이까지 예수쟁이라는 죄목으로 공개 총살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총살의 방법은 두부 종(鐘) 같은 작은 종을 처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처형이 있음을 알리고 사람들이 모이면 처형당하는 사람들이 어떤 죄로 인해 처형당하는가를 남녀 당원1명씩이 연극식 대사를 외우면서 인민들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죄범들(죄수들)을 기둥에 목과 가슴, 허리를 새끼로 묶고 3명의 사격수가 각기 실탄 4발을 사격합니다. (일반 사형수는 3발씩이나 예수쟁이는 사상이 나빠서 머리통에 1발을 더 가격함)

2천년 9월까지는 모든 인민들에게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공개 총살하던 것을 인권단체의 여론과 국제적인 비난 때문에 이제는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재판절차도 없이 때려죽이거나 정치범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참혹하게 죽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랑 선교회 보고서

배규태

 

 

03/07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북한-2 18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한 끼의 밥이 그렇게도 그리운 사람들,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사는 우리 선교사들이 보내온 편지입니다.

예랑 선교회
문서선교부
~~~~~~~~~~~~~~~~~~~~~~~~~~~~~~~~~~~~~~~~~~~~~~~~~~~~~~~~~~~~~~~

인도의 간디는 위대한 만큼 일화도 많습니다.
그가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철로에 떨어졌습니다.
주울 수도 없는 간디는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마저 던졌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이 의아해하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헌 신발이라도 짝이 있어야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조금만 마음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북만주 연변 땅,
두만강 변에는 눈도 많이 오고 춥기도 합니다.
으슥진 동네마다 먹을 것을 구걸하러 오는 탈북자들,
그들이 내민 때묻은 손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모습,
초조함과 두려움의 쫓기는 눈빛,
그들은 불법월경자라 쫓기고
우리는 선교사라고 쫓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쫓기고 함께 삽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이 쫓기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같이 먹고 같이 삽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가난한 자들 앞에서 같이 가난해주고 아픈 자들 앞에서 같이 아파 줄뿐입니다.

배고 푼 자들에게 배고픔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외감입니다.
가난한자는 부자 앞에 설 때 비로소 가난의 고통을 느낍니다.
자기들만 배고프고 자기들만 가난하다고 느낄 때 슬퍼집니다.

배고픈 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꼭 필요할 줄 알지만 그 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위로입니다.
사랑입니다.
더욱이 자기들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에 참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감격해합니다.
배고픈 자가 병든자를 위해 먹을 것을 남겨주는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춥고 굶주린 자들, 병들어 버려진 자들 곁에 우리 선교사들은 다가서 줍니다.
주님은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려 주셨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 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들은 부자들을 보고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말라하시고 시장해 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는 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 목숨이 희생되어 많은 사람의 영혼을 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2년 1월 두만강 변에서
김영식 목사 드림

배규태

 

 

03/07 무루님의 변명을 읽고 ... 21
마태 복음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해 쓰다가
구약 성경 예언서 중 인용하고
그런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는 말이 무척 많이 나옵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많이 삽입했습니다.

일개(?) 평신도(?)인 무루님도
무화과 나무 사건에서 예레미야서를 연상하는데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쓰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변명은
더욱 이상하군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전하는데
두려움도 부족함도 없다면서요?
성령의 감동 받은대로 기록했다면 두려울게 없겠죠?

만일 성령이 그런 감동을 주신 것이 아니라서 기록하지 않았다면
무화과 나무 사건은 이후 예루살렘의 함락 사건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봐야지요.

물론 그렇게 연결시켜 생각하고 싶어 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


==무루님 글 인용================================================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은 전율같은 것일 수 있었습니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그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처절하게 싸웠는 지...

그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쓴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요.

유대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행했던
예수님의 저항과 비판의 정당성만 전하면 되고
바른 신앙을 고취하면 되는 것이지요.

일일이 성서의 예화를 달을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뵈뵈님과 제 생각이 틀릴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삶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데
두려움도 부족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도 아닌 사람은 아니었지만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이
그리스도인에겐 새로운 신앙 공동체,즉 그리스도교의 출현의 증표였지만

유대교 입장에선 법통이 사두개인에서 바리새인으로 바뀐 것이지요.
뵈뵈

 

03/08 Re:무루님의 변명을 읽고 .../변명이라니요 19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누굴 위해 변명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요?
마태복음 기자를 위해서요?

그 분들의 위로를 받거나
아니면 저 같은 자를 위해 애쓰시는 사랑의 변명을 오히려 제가 받지요.

한 분은 진리를 위해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리신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저 같은 무지한 자를 위해
자신도 짐짓 감추고 '오직 예수'만을 설파하신 분입니다.

물론 님의 말씀처럼
마태는 구약의 인용이 다른 복음서 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마르리라'는 예언이 있다는 사실을 마태 복음 기자도 알았을 겁니다.

저의 추론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제 생각에 예레미야 8장 13절(이하 예레미야)의 인용은
바벨론 시대 때 멸망한 유대나라의 상징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타락한 유대교의 임박한 종말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나 가르침을 통해 예레미야를 인용하실 수도 있고
그 집단들도 자신이 꿈 꾸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유대교는 옛 선지자의 말씀처럼 말라 없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예언서와 같은 상황이 나타나면
성경의 예를 통해 오래 가지 못한다고 설교하는 것과 비슷했겠지요.

지금 저의 추론이 허황됩니까?

그런데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사형당하신 겁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형은 말도 안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제자들에게 새로운용기를 줍니다.

전 예수의 부활이 육체적이다 혹은 영적이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고
그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일치했던 예수의 삶을 총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전 바울선생이 말씀하신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는 고백이
예수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선포하고 바랐던 메세지를 바꾸어 버립니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에서
'너희가 죽인 그리고 우리가 죽인 그 예수가 그리스도다'로 말입니다.

그들은 실재했던 예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생전의 예수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을 거구요.

거기에 그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드이 선포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구약에서 찾아 인용하고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도 자연 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 증거에 맞추어 걸맞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요한복음의 로고스론과 같은
신학도 출현했을 겁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 이미 그들에겐 익숙했지만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예수님과 그들의 꿈(?)의 실현을 보게된 겁니다.

그런 표현을 문학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서
로마의 침략으로 피폐한 유대의 민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겠습니까?
아니면 성전 숙정 전후로
예수님의 배고픔(어찌 육체적인 배고픔만이 배고픔이겠습니까?)을
해결하지 못하는 유대교(무화과 나무)를 말려 죽이는 상징적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믿음이 무엇입니까?
철옹성 같기만 했던 그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혹은 진리를 업수히 여기는 것은 무너질거라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귀절입니까?

작금의 기독교가 아무리 위용을 자랑하더라도
진리에 닿지 않으면 무너지리란 것이 믿음 아닙니까?

그런 기독교에 대해서 형제애를 느끼는 사람은 안타까워서 회개를 촉구하고

미운 사람은 기독교엔 진리가 없다고 말하겠지요.

저의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전 기독교를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일개 평신도가 아니라 진리의 한 편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분의 진실한 제자들을 변명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입니다.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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