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복음서가 먼저 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중구난방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톰슨주석성경에는
마태복음:50-70
마가복음:67-70
누가복음:58
요한복음:85-90
이라고 추측해 놓고 있습니다.
뉴톰슨 주석성경도 가지고 있는데 장황하게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저작연대에 대한 학설은...40-140년에 걸쳐 다양하나
자신이 추측하기는 58-68년이다
마가복음:많은 학자들이 첫번째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확실치 않다. 55-65년으로 추측한다.
누가복음:60년대 초로 추측하지만 70년대이전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요한복음:60-90년으로 추측한다.
...
아 두권의 주석성경은 모두 마눌님이 시집오실 때 가져오신 것으로...
그냥 누구나 참고하여 볼만한 책들입니다.^^
저는 비싸서 살 생각도 못했던 것들인데...
...
토론을 하면서 항상 아쉬운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중에서
언제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되는 현상을 바라봄입니다.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입파리만 무성한 것의
무가치함에 대한 교훈을 덤으로 얻습니다.
그런데
토론은
그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사이에 왜 다르냐를 설명하도록 진행됩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도...고개를 곧추 흔들며 반발합니다.
그저 말만 무성하게 하자는 것이겠지요.
마치 이파리만 무성하던 그 무화과 나무처럼...
...
그런 토론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
모르면 배우고
의견이 다르면 ... 그 다름을 확인하고
명백히 틀렸으면 ... 겸손히 가르쳐 주고
그정도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더 있습니까?
02/28 성경... 26
>그러니까 성경도 쓴 사람에 따라...
또 그 관점에 따라 표현이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성령의 계시에 의한 유일무이하고 완벽한 표현이 아니란 뜻인가요?
-인간의 언어로 완벽이란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안에서는" 완벽하다 봅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끝까지 이르도다"(시19)
그러므로 복음서의 네가지 표현의 차이는 좀 더 완벽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봄이 옳겠습니다.
>그 속에 담긴 뜻이 중요하지 표현에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되나요?
-뜻이 가장 중요하고 표현도 어느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너무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겠지요.
>성경에 나오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심지어 저자의 실수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까요?
-성경을 전체로 묶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실수라는 것...그것을 증명하려고 바쿠스님이나 뵈뵈님이 계속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고, 저같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계속 설명하는 중입니다.
원필
02/28 어떤 사건과 어떤 사건에 대한 관점 24
먼저, 바이블을 편집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 합니다.
그런데 바이블의 여러 권들을 선별할 때, 소위 '사도성'이라는 귀귀 코코식의 관점이 동일
한 책을 선별하려고 애쓰긴 했습니다만, (사도성과 영감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발악까지
하며 바이블의 통일성을 기독교는 열심히 선전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쓴 책 임으로 관점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은 내용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무화과 나무 사건에서 관점이란...
바쿠스 : 예수는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지 않은 나무를 저주할 만큼 무식했다.
어떤 성도 : 예수가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속뜻을 지닌다.(물론, 예
수가 이스라엘을 저주했다는 말을 꺼리기 위해서 멸망 '예언'이란 완곡한 표현
을 씁니다만 그랬다면 무화과도 예수가 직접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예언'만 했
어야 합니다.)
게다가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봤다면 예수는 이스라엘을 저주한 셈이 되니 블랙 코메디라 말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역사학자 토인비는 기독교의 제멋대로 식의 바이블 해석을 보
노라면 역겨워서 구역질이 저절로 난다고 했겠습니까마는... 각설하고
무화과 사건에서의 마태와 마가의 차이
마태 : 예루살렘 입성 --> 성전에서 행패 --> 무화과 저주
마가 :.예루살렘 입성 --> 무화과 저주 --> 성전에서 행패
라는 사건의 순서는 관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마태나 마가의 편집자중 둘 중에 하나
^^^^^^^^^^^^^^^^^^^^^^^^^^^^^^^^^^^^^^^^^^^^
는 사건에 관하여 잘못 알고 기술했다는 것 이지요.
칼럼지기님은 관점에 따라 사건순서를 마음대로 바꿔서 진술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건에 대한 순서는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쿠스
02/28 칼럼에 대한 감상 27
>어느복음서가 먼저 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중구난방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톰슨주석성경에는
>마태복음:50-70 마가복음:67-70 누가복음:58 요한복음:85-90
>이라고 추측해 놓고 있습니다.
>뉴톰슨 주석성경도 가지고 있는데 장황하게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저작연대에 대한 학설은...40-140년에 걸쳐 다양하나
>자신이 추측하기는 58-68년이다
>마가복음:많은 학자들이 첫번째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확실치 않다.
>55-65년으로 추측한다.누가복음:60년대 초로 추측하지만 70년대이전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요한복음:60-90년으로 추측한다.
바이블의 기록시점은 학자마다 중구난방이지 아니합니다. 모두 같은 견해들이죠. 이것이
다른 견해처럼 보이는 것은 각권의 완성되지 아니한 각권의 원본에 대한 견해만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톰슨 주석성경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대체로 마태책을 두고 50-70 (또는 50
- 60)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마태의 원본이라 보는 두권 예수어록과 마가복음중에 '예수어록'
의 기록 시점이 그러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완성본 시점은 마가복음이 마태의 원본이 될만큼 빠르죠. 마가는 70년경에 완성되었지만
나머지 복음서들은 모두 70년 이후에 완성되어졌습니다. 학자들 마다 중구난방이 아니라
비슷한 내용의 책을 읽는 독자가 잘못된 관점으로 바라보니까 학자마다 중구난방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토론을 하면서 항상 아쉬운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중에서
>언제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되는 현상을 바라봄입니다.
이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지요. 지기님이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남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 생각은 이제 접으심이...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입파리만 무성한 것의 무가치함에 대한
>교훈을 덤으로 얻습니다.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나무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예수가 무화과 나무
를 저주했던 시기는 본래 잎파리만 있어야 하는 시기랍니다. 나무의 특성도 모르고 잎이
무성하니까 열매도 있을줄로 착각하고 다가갔다가 열매가 없으니까 열받아서 저주해 놓고
딴소리로 횡설수설하는 예수가 멍청한 것이지요.
>그런데 토론은 그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사이에 왜 다르냐를 설명하도록 진행됩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도...고개를 곧추 흔들며 반발합니다.그저 말만 무성하게 하자는 것
>이겠지요.마치 이파리만 무성하던 그 무화과 나무처럼......
>그런 토론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잎이 무성한 시기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 처럼 토론역시 어떤 사건의 정확한 내막을
알아야 그다음 관점도 나오는 것입니다. 사건은 횡설수설인데 관점만 동일????
>모르면 배우고 의견이 다르면 ... 그 다름을 확인하고
>명백히 틀렸으면 ... 겸손히 가르쳐 주고
>그정도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더 있습니까?
동의합니다. :)
바쿠스
02/28 무화과 나무의 교훈 17
칼럼 중 인용합니다.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입파리만 무성한 것의
>무가치함에 대한 교훈을 덤으로 얻습니다.
뭐 그런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추측에 의한 내가 복음식 해석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언제 이파리만 무성하면 무가치하다고 하셨습니까?
또한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하신 적이 있나요?
(이건 원필님의 주장은 아닙니다만.)
양 복음서에 무화과 나무 사건을 놓고 기록된 예수의 교훈은
"너희도 의심치 않고 믿고 구하면
이보다(무화과 나무 말리기) 더한 일도 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리 신실한 성도라고 해도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진다든지 저주해서 나무를 말린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하면 사이비 취급을 받죠.
예수가 하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추측해서 믿는 것이 옳을까요,
예수께서 하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요?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진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주로 전자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후자를 선택하면 말이 안되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속뜻이니 비유니 어쩌니 하는 변명을 하게 됩니다.
뵈뵈
03/01 Re:Re:Re:Re:무화과는요../철 없는 예수!/설마 18
철 없다는 말은
지배자들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며 부르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저항은 제사장 과 유대교의 지도자 입장에서 보면 철없는 짓일 수 있지요.
철없다고 조소하다가 심각해지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탄압을 하지요.
저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따위의 말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유대교와 그 지도자들을 직접 비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전쟁은 유대교에게도 큰 타격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유대인이 당한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예수님처럼 직접화법으로 대응하긴 어려웠을 거구요.
성전 숙정을 통해 예언한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제자들은 유대전쟁과 연관하여 표현하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첨가된 것이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였다고 생각합니다.
뵈뵈님이 안티인지는 모르지만(전 오히려 많이 배웁니다)
'철을 모르는 예수'라는 말은 사실 예수님에게도
기독교 공동체에게도 맞지 않는 비판입니다.
기독교인 중에 오히려 저의 의견에 반대하는 분이 더 많겠지만요.
성경을 멋대로 해석한다구 그러겠지요?
무루
: 안티분들께 이런 말 들을 까봐
: 제가 끝에쯤 잘못된 종교행위에 대한 질타를 올려 놨죠.
:
: 유대교를 비유하셨다는건..어제 이미 많이 나왔으니..구지. 한말을 또 하기 싫어서였죠.
:
: 열매의 의미를 곁들여 말하려는 것이었어요.
:
: 설마 그렇게까지 철이 없겠습니까?
:흐뭇
:
: : 무화과 나무는
: : 유대교 라는 종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
: : 요한 복음에 나다나엘에게
: :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것을 보았다'는 말도
: : 네가 유대교에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안다. 즉 네 믿음의 정도를 안다.는 의미로 쓰였지요.
: : 성서는 이런 비유와 상징이 무장 많아요!^^*
: : 철 모르는(?) 예수는 오히려 유대교(유대교는 타종교가 아니라 기존질서입니다)에
: :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과격함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안 될까요?
: : 그리고
: : 말라 죽은 것이 금방 인지 나중인지는
: : 역사적 사건에 관한 증언이구요.
: : 즉 유대전쟁으로 유대교와 그 상징인
: : 성전이 무너진 것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 :
무루
: : : 예수님이 시장하실때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 : : : 마태나 마가나..<시장>이란 말은 빼놓지 않았죠.
: : : :
: : : : 육으로나,영으로나..배고픈자에게..전혀 도움이 못되는 종교행위에 대한
: : : : 질타! 저주!
: : : :
: : : : 알았제?..느그들 잘하그래이!
: : : : 이런거 아니셨겠습니까.
: : : :흐뭇
: : :
: : : 글쎄요.
: : : 일단 예수께서 배가 고팠던 건 사실인 것 같고
: : : 배고플 때 도움이 안되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 : : 질타! 저주! 같은데요?
: : :
: : : 갑자기 종교 행위는 왜 나오는지?
뵈뵈
02/28 산이 들려 바다로? 19
말씀..특히 바이블은
한귀절만 놓고보면..이상한것 투성이지요.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산을 옮길수 있다는 말도 있구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분이므로..예수님 혼자만의 주장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자식이 무조건 사달라고 조른다고.
아무거나 다 사주는게 좋은 부모가 못되듯이..
그리고..진정한 믿음 이라면
뭐 타인에게 아무 유익없는 것을 구할리 없지요.
예수님이..일반 대중을 향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죠?
제자들에게 하신 말이니까..
제자라하면..그정도의 말은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을줄 아시고
앞뒤말 없이 고렇게 하셨을겁니다.^^
흐뭇
02/28 Re:산이 들려 바다로? 24
: 말씀..특히 바이블은
: 한귀절만 놓고보면..이상한것 투성이지요.
: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산을 옮길수 있다는 말도 있구요.
:
결국 그 말도 뻥~ ^^
(이라고 하면 너무 과격한 표현인가욤?
과장 내지는 은유법~)
: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 오신분이므로..예수님 혼자만의 주장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
: 믿고 구하는 것은
: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 하는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말려 죽인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모양이지요?
:
: 자식이 무조건 사달라고 조른다고.
: 아무거나 다 사주는게 좋은 부모가 못되듯이..
:
: 그리고..진정한 믿음 이라면
: 뭐 타인에게 아무 유익없는 것을 구할리 없지요.
: 예수님이..일반 대중을 향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죠?
: 제자들에게 하신 말이니까..
: 제자라하면..그정도의 말은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을줄 아시고
: 앞뒤말 없이 고렇게 하셨을겁니다.^^
:
:
네...꿈보다 해몽이 좋은 해석 잘 들었습니다.
무화과 나무 말려 죽인게
타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쩝...
뵈뵈
02/28 무화과 사건 26
무화과 사건
무화과 나무 사건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 토론을 통해서 파악한 내용이 지식의 전부이지만
처음 대하는 저에게는 사실 좀 충격적입니다.
저는 무화과 나무를 말라 죽게 만든 예수의 능력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바다를 가른 氣의 대가라면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氣의 작용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대신 자기 배를 채워 주지 못한다고 나무를 죽인 행동은
아무리 양보해도 옳은 행동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불자들은 실수로라도 미물을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나막신 대신 짚신을 신었다 합니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가 생명을 다르게 본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동식물을 무생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보다는
생명을 존중해 주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측정해 본 바로는 나무꾼이 잃어 버렸던 도끼를 찾아 메고 갈 때와
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를 메고 갈 때 같은 나무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합니다.
예수의 능력이었다면 그 무화과의 겁먹은 반응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
그걸 무시하고 죽였다면 좀 잔인했다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죽이고 보니 아차 실수했구나 싶어서 믿음을 가르치는 교재로 둘러대었다고도 보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빴고요.
처음부터 믿음의 힘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면 돌이나 흙도 있었을 텐데
애꿎은 나무를 택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고요.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닭이 달걀을 낳지 않는다고 죽여 버릴 사람이 있겠습니까?
배가 고픈 것은 내 사정인데 닭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꽃이 없는 게 죄라고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물을 욕했다면 하나님을 욕한 거지요.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 또한 저는 진실이라 믿습니다.
명을 내리거나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흙이 직접 날아가 쌓일 수도 있고 간척 사업이 벌어져서 중장비가 동원될 수도 있으며
전쟁이 나서 포탄이 산을 옮겨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달리 보이겠지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를 믿지 않는 듯한 말을 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갓바위
03/01 Re:무화과 사건/그건.... 19
동감합니다.
님께서 갖고 계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로도 설명이 안되는 거지요.
성경에서 나타내는 내용은 그런 의미에서 편집자의 의도와
글이 쓰여진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유대교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멸망은 자신의 동족에 대한 무참한 학살을 통해서 였습니다.
예언서에 이방인에 의해 멸망당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있지만
로마에 의해 수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성전 숙정이라는 사건을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있는 제자들이 유대전쟁을 유대나라가 아닌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무화과 나무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지요.
진보적인 학자들은 무화과 저주와 관련한
성서의 말씀은
후대의 첨가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하지도 않겠지만 혹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변명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성서에는 그런 모순된 귀절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를 제자들은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성서기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도
전기를 쓴다거나 사실의 기록에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게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신앙을 굳건히 하게 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배운 바 지식도 모자라고
예수님의 출현이 갖는 신학적 이해도 충분하지 않았던
그 들로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성경의 부족함은
교부시대에 와서 충분히 신학적 학습이 이루어진 사람들에 의해
변증되고 정경화라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성서를 고치거나 손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부활체험이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무루
02/28 Re:무화과는요.. 23
결론부터 말하자면 꽃이 없고 열매를 맺는 식물은 있을 수가 없죠. 무화과 나무역시 암꽃, 수꽃
이 모두 존재하며, 다른 나무들 처럼 벌들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 무화과 나무에 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무화과는 저주를 받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초여름 술안주로 나오는 작은 무화과를 열매라고 착각하는데 이것은 열매가 아니라 꽃입니다.
물론 넓은 잎파리 줄기 아래에 꽃이 생기고 잎처럼 초록빛 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열매
라고 착각하기는 합니다.
게다가 잘 관찰하면 잎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그냥 보입니다. ^^;
바쿠스
02/28 무화과는요.. 19
우리집에 무화과 나무가 있는데요.
잎파리만 무성하다가..꽃이 안피고..바로 열매 맺어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또 제일 먼저 낙엽되어 뚝뚝 떨어져서
제일 먼저..앙상한 가지만 남아 서있어요
근데..그 잎사귀 모양이 넓적하고 크면서
얼마나 무성한지..볼만해요.
꽃이 안피니까..우리는 무화과 열매 맺기만 목빠져라 기대하죠.
열매는 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익을때까지 기다리다..결국 우리 가족과 때맞춰 방문한 사람들의 입속으로 쏙..
열매의 사명과 운명을 다합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실때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마태나 마가나..<시장>이란 말은 빼놓지 않았죠.
육으로나,영으로나..배고픈자에게..전혀 도움이 못되는 종교행위에 대한
질타! 저주!
알았제?..느그들 잘하그래이!
이런거 아니셨겠습니까.
어제 이글좀 올려야 겠다고 맘먹었는데..
마태 마가의 연대 시비가 벌어지길래..
접었죠..
흐뭇
02/28 Re:Re:무화과는요../아하! 그렇군요.바쿠스님 23
아하!
이게 바로 바보 도트는 소리랍니다.
그렇군요.이상타 했어요.
어째 꽃이 안피나?
그래서 일명 무화과 인가 했지요.하하
하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흐뭇
: 결론부터 말하자면 꽃이 없고 열매를 맺는 식물은 있을 수가 없죠. 무화과 나무역시 암꽃, 수꽃
:
: 이 모두 존재하며, 다른 나무들 처럼 벌들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 무화과 나무에 벌이
:
: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무화과는 저주를 받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 초여름 술안주로 나오는 작은 무화과를 열매라고 착각하는데 이것은 열매가 아니라 꽃입니다.
:
: 물론 넓은 잎파리 줄기 아래에 꽃이 생기고 잎처럼 초록빛 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열매
:
: 라고 착각하기는 합니다.
:
: 게다가 잘 관찰하면 잎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그냥 보입니다. ^^;
바쿠스
02/28 꽃이 있는 무화과 나무 34
무화과 나무엔 꽃이 있습니다. 이름과 달리...^^
암수가 있지요.
그런데 흔히 열매로 불리는 꽃턱이 변화한 것 속에 작은 꽃이 있어
외부에서는 꽃이 보이질 않지요.
이 때문에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보여 무화과란 이름이 붙은 것이랍니다.
..............
3월 초순이 되면 작은 잎이 나오는데 이때에 아주 작은 열매가 열립니다.
이 열매를 아랍어로 <타크시>라고 부르지요.
이 열매는 3월 하순 종려주일을 기념할 때쯤 되면 엄지 손가락만큼 커지는데,
4월초가 되어도 조금 더 자라는 수준이랍니다.
좌우간 타크시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무화과라고 볼 수 없지요.
이것들은 4~5월 경에는 떨어지며 6주 정도가 지나서 새로운 열매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이 진짜 무화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3월 중 열리는 무화과는 <진짜 무화과>의 전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은 이 타크시를 먹어 시장기를 면하곤 했다는데
단맛은 거의 없지만 향긋한 냄새가 있답니다.
예수님은 타크시를 찾으려고 무화과를 보았으나 열매를 볼 수 없었다지요?
이는 곧 그 해 가을에도 진짜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과일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로
땅의 양분만 축내고 땅만 차지하는 무익한 나무인 것...당근이죠.
...............
예수님이 저주하신 것을
단순히 열매를 얻을 수 없어 분을 내신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너구리
02/28 Re:꽃이 있는 무화과 나무 (참고 2 ^^) 32
타크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4-5월 경에 떨어진다는 진술로 미뤄 수꽃을 이야기
하시는 것 같군요. 비단 무화과 나무 뿐만이 아니고 수꽃은 암꽃에게 수술만 전달하면
그 임무를 다 하고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암꽃 역시 수술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녀석은 그대로 유지 되고 수술을 받지 못해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녀석은 떨어집니다.
모든 꽃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냥 참고하시라 적었습니다.
물론, 철이 되지 아니하면 꽃도 피지 않습니다. 나무는 계절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죠.
바쿠스
03/01 오늘은 삼일절 19
초등학교때는 삼일절이 되면 유관순 누나 노래를 불렀다.
" 삼월 하늘 가만이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새앵각 합니다.
오옥속에 같혀도 만세부르며
파란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
이제는 유관순 누나라고 하지 않고 유관순 여사라고 한다.
그당시는 유관순 이라는 흑백 영화도 단체 관람하였다.
여학생들이 하도 울어서 시끄러워서 영화 대사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일본놈을 보면 찢어 죽이고 싶은 중오심을 어린 가슴에 심어주었다.
반공 이데로로기와 함께 반일 이데올로기도 합세하여 국민들의 증오의 대상을 확정해 놓았다.
그래서 그 당시는 국론의 분열이라는 것이 없었다.
지도자가 반공, 반일 하면 국민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않고 일치단결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 반공, 반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런 사람은 공권력에서 손대기 전에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때는 정치 하기가 편했다.
국론이 통일되고 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비록 야당이라도 반공 반일에 대하여서는 더 큰목소리로 외쳤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세상이 변했고 국론도 여러갈래가 되고 반미 이데올로기까지 등장하고 참으로 자유스러워졌다고 볼 수 있다.
삼일 운동(중학교때 농담으로 삼일운동일을 3-1 sports day 라고했다 ) 이 과연 순수 민족세력에 의하여 주도 됐느냐 하는 것은 면밀히 검토되어야한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민족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었었지만 직접 만세 운동에 동원된 인원들중에는 상당수의 사회주의 공산 세력들이 끼어 있었다고한다.
3월 1일 만세운동이 벌어졌을때 태극기와 함께 붉은 공산기가 많이 펄럭였다고 어릴때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랬었다.
그 때부터 독립 운동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같이 해온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당시 우리나라 지식인 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주의란 칼 막스의 이론에 불과 했으니 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른채 이상론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 백만의 인민을 죽인 스탈린과, 감옥같은 생활을 강요하는 김일성이나 이러한 실체를 몰랐으니 까 그당시 지식인들이 공산주라는 이념으로 독립 운동의 구심점을 찾은 것으로 짐작된다.
오랜만에 회사도 교회도 안가는 날이라서 늦잠자고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횡설 수설 삼일절 이야기를 쓰다보니 결론은 엉뚱한 데로 빠저 버리고......
지금 우리의 이 생활 집집마다 자가용 승용차 있고 개인마다 핸드폰 있고 아무리 가난한다 해도 굶어 죽는 사람없고 슈퍼 가면 1년 12달 항상 싱싱한 물건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아무 나라나 해외 여행 할 수 있고 하나님 믿는 사람은 자유롭게 교회 다닐 수 있고 이런 세상에서 살게 된 것도 다 우리의 선배들의 피나는 희생과 우리의 우방들이 피 흘려서 공산주의 의 침략으로 부터 지켜준 덕택이 아닐 수 없다.
삼일절을 맞아서 그나마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한 우리의 선배들의 피흘림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저항이라도 안했으면 역사를 어떻게 쓸려고 했는지 아찔할 뿐이다.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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