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은 성경에 외경을 포함시키며, 개신교는 외경을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이와 같이 외경을 포함시키는 것이 교회사적으로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을 문헌적으로 살펴보면서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를 공부하여 보려고 합니다. 카톨릭이 공식적으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은 트랜트공의회인데, 다음은 트랜트공의회에 대한 문헌입니다.
- 트랜트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에 걸쳐 열린 교회 회의였다. 이 회의는 예수회 출신의 학자들인 라이네즈와 살메론이 중심이 되어 교령과 교칙을 작성한 공의회였다. 교황 바울3세에 의해 트랜트에서 소집되었는데 그 목적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중심으로 한 신교를 배척하려는 것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중요한 사항들을 보면 성서와 전통은 동등하게 진리의 근원이며, 교회만이 성서를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등이다. 이렇듯 이 결정들은 철저히 반종교개혁적, 즉 반신교적인 성경들을 갖고 있었다. 이 회의는 로마카톨릭 교회와 신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25회기에 걸쳐 개최된 이 공회의 중 특별한 결정을 한 회기들을 간추려보면 제4회기에서는 성서와 성문화되지 않은 전승을 대등한 위치에 두도록 하는 결정을 했는데, 이는 성서만이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신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또한 이 회기에서는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교회의 결정에 땅라야만 한다고 못박았다. 다음으로 제6회기에서는 신교의 견해와 비슷하게 율법에 의해 새롭게 되지 못한다고 결정하기는 했지만, 이는 카톨릭 교회의 공로에 의한 의인사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회기결정문 14장에는 고해의 4단계, 즉 참회, 고백, 사죄선언, 그리고 보상의 단계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도 신교로써는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7회기에서는 일곱성례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23회기에서는 교회의 일곱성직을 확인했으며, 모든 신자가 사제라고 하는 신교의 주장을 부정했다. 마지막 제 25회기에서는 연옥, 성인을 향한 기원, 성인숭배, 성인의 유물, 성상, 면죄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단지 올바르고 신중하게 사용할 것만을 가르쳤다. 특히 면죄부의 오용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지나치게 편법화하지말고 그것 때문에 교회의 규율이 약화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결정은 면죄부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신교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트랜트에서 개최된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는 신교의 개혁적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으며 신교와의 차이점만을 다시 한번 확연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교의 공격에 동요한 일부 가톨릭 신자에게는 자신들의 위치를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TBC 성서연구, 교욱목회협의회, 612-613쪽)
트랜트공의회는 신교의 종교개혁이후 그 비난에 대해서 가톨릭이 자신들을 방어하고 변명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비난을 입막음하기 위하여 교리를 임시로 제정한 것이며, 그 교리를 위하여 고의로 합법성을 제공한 것입니다. 즉 교리적인 필요에 따라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칠십인역에 있는 외경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일부만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외경이 자신들의 교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키려면 모두 포함시키든지, 그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리를 입막음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기 위하여, 정경에 일부만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즉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 - 성경을 교리에 짜깁기로 맞추는 행위 - 인 것입니다.
- 외경서의 14권이 모두가 트랜트공의회에서 승인받지 못한 것을 보면 트랜트공의회의 행동강령이 분명히 논쟁 위주였을 뿐 아니라, 편파적이었음도 엿볼 수 있다. 에스드라 1서와 2서(천주교는 에스드라 3서, 4서)와 므낫세의 기도는 제외되어졌다. 에스드라 2서를 제외시킨 것은 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제외시킨 이유라면 그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기도를 강력히 반대하는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에스드라2서 7:105) 실제로 중세의 서사(서기관) 중 몇사람은 에스드라 2서의 라틴어 필사본에서 이 구절을 삭제시켜 버렸으며, 이 사실이 로버트 벤틀 리가 1874년 프랑스 아미엔에 있는 한 도서관에서 라틴어로 된 것을 다시 찾았을 때까지는 그것이 아랍어 필사본으로 알려 졌던 것이다.(성경의 유래, 노오만가이슬러, 생명의 말씀사. 113쪽)
또 카톨릭은 외경이 어떻게 정경에 포함될 수 있는가라는 신교의 질문에 대해서 발견된 칠십인역의 사본에는 원래 외경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외경은 시대마다 또 발견되는 사본마다 모두 달랐습니다. 칠십인역은 발견되는 사본마다 외경이 서로 다르게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모두 후대의 칠십인역입니다. 그리고 제롬이 외경의 삽입을 강렬히 반대했던 불가타역의 외경은 지금의 카톨릭의 제2경전과 그 목록이 또 다릅니다. 발견된 칠십인역 사본은 주후 4-5세기의 것입니다. 그리고 BC 2세기에서 주후 1세기의 칠십인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는가하는 것은 오히려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2경전(제2 정경이라는 뜻)이라는 용어는 트랜트공의회에서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아래는 대한성서공회의 자료입니다.
-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 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제1경전 에스더기의 추가부분)’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바룩서’ 안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장으로 편집되어 있고, ‘다니엘서의 추가 부분’에는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영어개역표준성서(Revised Standard Version)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 ‘므낫세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이러한 책들은 본래 유대교가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인 ‘칠십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2경전에 속한 책들이 제1경전과 합본된 것은 기독교의 작업이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사와 관련된 것이다. 히브리어구약성서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 기독교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구약을 읽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 있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고대 라틴어역 성서(Old Latin Version)는 바로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에는 없고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에만 나오는 책들에 대한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문제삼기는 하였으나,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는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경에 들어 있는 39권 책과 동일하게 영감 받은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게 된다. 히브리어 구약에 들어 있는 39권의 책은 이미 경전으로 전해져온 것이므로 이것을 ‘제1경전’이라고 하였고, 그리스어 구약에 들어 있는 나머지 책들은 늦게 경전이 되었다고 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논의의 편의상 여기에서 ‘제1경전’ ‘제2경전’이란 말을 쓰지만, 이런 용어는 16세기 트렌트회의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의 기도’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는 불가타역 성서에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전으로 인정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불가타역은 이 세 책을 부록으로 취급하여 별도로 편집하였고, 나머지 책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 적절히 재배치하였다. ‘토빗트’와 ‘유딧’은 ‘느헤미야기’ 다음에, ‘에스더기 추가 부분’은 ‘에스더기’ 안에, ‘마카베오상’과 ‘마카베오하’는 ‘에스더기’ 다음에, ‘지혜서’와 ‘집회서’는 ‘아가’ 다음에, ‘바룩서’는 ‘애가’ 다음에, ‘다니엘서 추가 부분’은 ‘다니엘서’ 다음에 각각 편집해 넣었다.(대한성서공회)
예를 들자면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에는 "바나바서, 헤르마서의 목자를 제외한 외경이 실려 있고,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a)에는 클레멘트 1서, 2서와 솔로몬의 시편의 외경만이 실려 있습니다. 또 에브라임사본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전도서 두개의 외경이 실려 있었으며, 바티칸사본에는 일부 삭제된 외경들이 실려 있습니다. 외경이 전혀 없는 칠십인역 사본도 발견됩니다. 이렇게 발견된 사본들마다 외경이 모두 달랐다는 증거들은 외경이 동일한 목록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며 정경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거하여 줍니다. 그리고 더욱 특이한 것은 시대마다 다른 외경이 트랜트공의회에서 결정한 지금의 카톨릭 외경과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카르타고 회의에 대해서 카톨릭은 어거스틴이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히포지역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참석하였던 히포회의(A.D. 393)와 카르타고 회의(AD 397)에서 어거스틴이 말했던 외경은 지금과 달리 바룩서를 생략하고 위경 에스드라 전서를 삽입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회의는 구약정경 목록을 결정하는 회의가 아니었고, 신약정경을 확정하는 회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제롬의 불가타역은 다른 사람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제롬의 불가타역을 비난한 것은 외경이 포함되어있는가 아닌가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 번역본의 내용이 전통적으로 읽어온 본문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 제롬은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어 칠십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제롬의 라틴어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이 칠십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 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서, 오히려 라틴어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어거스틴 같은 지도자는 제롬의 라틴어역 성서가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를 갈라지게 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결국 제롬의 새 라틴어역의 우수성이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8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 교회의 성서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상당 기간 동안 고대 라틴어역과 제롬의 불가타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서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버리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와전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약 8천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히 실패하다가, 1546년에 트렌트회의에서 불가타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거기에다가, 15세기 중엽부터 발달된 인쇄술은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식스타인판(Sixtein edition, 1590)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교황 클레멘트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로마 교회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대한성서공회)
- 제롬은 히브리어 본문을 존중하였으나, 교리적인 난점이 있는 곳에서는 기독교를 위하여 가끔 칠십인역을 따르기도 하였다. 루피노스는 이 개정판을 이단적이라고 하였고, 어거스틴은 불필요한 번역이라 혹평하였으나, 그레고리에 의하여 공인되었다(구약개론, 구관덕저, 대한기독교출판사 69쪽)
위의 두 문헌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제롬의 불가타역은 칠십인역을 번역한 것도 아니라, 일부만 번역한 것으로서 내용 분문상의 문제로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 즉 제롬의 불가타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증거로는 그 당시 칠십인역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며, 특히 불가타 역의 저자인 제롬 자신은 “외경은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카톨릭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제롬의 불가타역은 외경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합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지금과는 다른 몇 개의 외경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외경을 정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거스틴은 마카비서에 대해서 선지적이 아님을 말한 적이 있으며, 유딧같은 책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그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정경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그것을 역사가의 부지런함이 있는 자라면 쓸 수 있는 것이요, 정경은 신적 영감을 받은 선지자가 기록할 수 있는 것이요, 전자는 지식증가에 속한 것이요 후자는 종교의 권위에 속한 것으로 그 권위로 정경이 유지된다" 고 말하였습니다. (Augustine, De Civitate Edi, xviii, 26.)
또한 주후 600년경의 카톨릭의 교황 그레고리는 마카비전서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정경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책들로부터 증거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류가 없다고 하는 교황권의 주장이 오류였다고 말할 것인가요?
또한 추기경 시메네스는 "Complutensian Polyglot" (교황 레오 10세에게 증정되고 그에게 인정되었다) 서언에서 "여기에 포함된 '외경서'는 '정경'은 아니지만 덕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 진술하였습니다. 카톨릭의 많은 학자들은 외경이 정경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파문을 당하거나 이단이었던가요?
이제 과연 초대교회 교부들과 문헌들이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켰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신약성경에서 볼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는데,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는 “성경에 이르되” 혹은 “기록하였으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는 외경의 구절을 인용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2) 오랫동안 구약성경을 유일한 정경으로 간주했던 유대인들은 외경을 성경이라고 하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유대인의 성경목록이 열거되어지는데, 12 소선지서를 하나로 묶고,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역대기서 상하를 한권으로 계산하여 22권으로 열거하였습니다.
(3) 사데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가 쓴 주후 170년경의 성경목록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지금의 성경과 동일하며 단지 에스더서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후 170년 경에 사데교회의 감독 멜리토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인의 구약정경목록입니다. 그 내용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있는 내용(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2권, 1:393)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동쪽에 와서 이와 같은 것들이 전파되고 행해진 장소에 와서 구약의 책들을에 관해 정확히 배웠을 때 그것을 기록하여 너희들에게 보내었노니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모세의 오경인 칭세기, 출애굽기, 레위가, 민수기, 신명기, 눈의 아들 여호수아, 사사기, 롯기 왕국에 관한 책 네권, 역대상, 하,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잠언과 지혜서, 전도서, 아가서, 욥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하나로 된 열두선지서, 다니엘서, 에스겔서, 그리고 에스라.”
주후 170년경에 멜리토는 단 하나의 외경도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후 170년경에 외경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면 당연히 멜리토는 서신에서 그 목록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4) 유세비우스 자신도 오리겐을 인용하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열거하면서(에스더서 포함) 외경 중에 어느 하나도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매우 특색이 있는 내용은 “마카비서는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그밖에는 마카비서가 있다)라고 기록한 점입니다.
(5)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리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AD90년경에 유대인이 받은 22권의 책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유대인들은 이런 성경을 바꾸거나 부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것이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마카비서(외경)는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언급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히브리아 알파벳 22글자와 같은 22권의 성경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6) 주후 367년에 아타나시우스는 유월절 편지를 쓰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약성경과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유딧, 토빗등의 외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들은 정경에 속하지는 않지만, 새로 입교한 사람과 경건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기 원하는 자들이 읽도록 교부들이 지정한 책들”이라고 말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의 서신 39)
(7) AD 90년경에 유대인들은 잠니아 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 회의에서 기독교인을 증오하는 유대인들이 칠십인역에 포함된 외경을 정경에서 분리하여 배척하였으며 그것을 발표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회의는 전도서와 잠언에 대해 정경성을 의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문헌을 보아도 이 회의에서도 외경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그 회의에서는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 이른바 잠니아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기록서의 제3부분이 정경화되었다는 주장은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만 학자들의 모임이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의에서는 권위를 인정할만한 인물도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경을 인정하고 논할만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잠니아회의는 정경에 관한 어떤 논의도 없었다.(노오만가이슬러, 성경의 유래, 97쪽)
카톨릭이 왜 잠니아(얌니아)회의를 자꾸 주장할까요?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배척하기 위하여 외경과 정경을 분리시켰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인들은 얌니아회의가 기독교를 배척하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경의 배척을 논의하였다는 문헌적인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문헌적인 증거는 다른 책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얌니아회의에 대한 이해에도 설명이 필요하다. 루이스(J. P. Lewis)는 주장하기를 (1) 얌니아회의 유대교 교권자들의 회의가 아니라 학파 혹은 회증들의 집회이고 (2) 거기서 경전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증거는 B. Yadim 3:5 이다. 랍비 가마리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랍비 엘르아살, 벤 아자리아를 지도자의 자리에 앉히기 위하여 72인의 장로들이 모여 전도서와 아가서를 성서로 선포하였다. 이 두 책은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교의 저명한 학자 힐렐학파와 샴마이학파간에 있었던 논쟁 문제를 종결 짓기 위하여 내린 결정이었다.(구약개론, 구관덕저, 대한기독교출판사 37쪽)
(8) 사해사본에서 일부 외경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종말론을 주장하던 공동체적인 엣세네파였습니다. 또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에서는 성경을 모세와 선지자라고 표현하고 있었지만, 외경을 성경이라고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쿰란동굴에서는 외경뿐 아니라 위경도 발견되었고, 공동체 지침서와 다른 문서들도 발견되었습니다. 만일 쿰란에서 발견된 일부의 외경이 정경에 포함된 증거라면, 위경과 공동체지침서도 정경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쿰람사본에서 주류를 이룬 사본은 칠십인역이 아니라 맛소라본문계열의 본문이었으며, 약간의 칠십인역도 발견되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맛소라계열의 본문과 다른 본문도 결국 동일한 맛소라본문 원문에서 파생된 본문이었으며, 주후 1000년의 맛소라 본문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하였던 것입니다. 즉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은 외경이 포함된 약간의 칠십인역은 그 주류가 아니며, 주류는 맛소라본문이었다는 것입니다.
(9) 제롬은 주후 404년에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가 외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이 카톨릭에서 자주 외경의 정당성으로 주장하지만, 막상 제롬 자신은 외경은 교회의 책은 될 수 있지만 정경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을 덧붙혔던 것입니다.
- 70인역으로 라틴어 불가타역을 번역한 제롬 자신도 성경에 외경을 포함시켰으나, 제롬은 이 외경이 “신자들에게 유익한 교회의 책”이지 “정경의 책”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AD 90년에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구약성경이 22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리겐도 250년경 외경을 제외한 성경목록을 3부분으로 22권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레어드 헬리스, 성경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말씀사, 57-60쪽)
(10) 최근에는 바로코치오 사본(Codex Barococcio, AD 206년)이 발견되었습니다. 신약의 초기성경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육십권서”라고 일컬어지는 한 사본에서 비롯됩니다. 이 60권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성경에서 잘알려진 66권의 정경 중에서 실제로는 64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에스더서가 제외되어있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본에는 외경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1) 카톨릭이 말하는 소위 “알렉산드리아 정경”이라는 것은 주전부터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후 4세기에 발견된 칠십인역을 말합니다. 즉 오리겐의 헥사플라 이후의 것입니다. BC에 만들어진 헬라어 칠십인역은 히브라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즉 최초의 70인역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었기에 히브리성경과 다른 내용이 아니었음이 명백합니다. 다시 말하여 처음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번역상의 오류, 필사의 오류, 철자법의 오류, 혹은 교리적 차이등에 의하여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오리겐이 여섯 개의 사본으로 된 번역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성경과 칠십인역이 다른 곳에는 표시와 주역을 달아놓았다고 전해 집니다. 그 헥시플라의 칠십인역도 현재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성경사는 정확히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발견되지도 않은 칠십인역을 카톨릭은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정작 헥사플라를 집필한 오리겐 자신은 성경을 22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잠깐 언급하였지만,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을 보면 오리겐(185-254년)을 언급하면서 외경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헌적인 증거는 카톨릭의 추측을 여지없이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세비우스가 누구인지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황제의 측근 교부입니다. 그가 황제의 명령으로 오리겐의 헥사플라에서 칠십인역을 50권 필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온전히 보관되었다고 하는 칠십인역이 바티칸사본(B사본)인데, 그 바티칸사본이 50권의 칠십인역 중에서 한권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오리겐은 구약의 목록을 22권이라고 확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세비우스가 필사한 50권에서부터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바티칸사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것이 시내산사본보다 조금 전의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어느 학자들은 이 두 사본이 본래 콘스탄틴황제가 유세비우스에게 명해서 기록하게 한 50권의 성경 사본중에 있었다고 믿는다. 대영박물관의 스키트는 “바티칸사본은 유세비우스의 정경표에서 빠져있고, 여러 서기관에 의하여 많이 교정되어있으며 그리고 앞에서 말한 50권 중에서 불합격된 것”이라고 현재의 작가에게 말했다. 그러나 불합격되었든 합격되었든 간에 거기 있는 본문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아주 훌륭한 신약의 알렉산드리아 본문형태의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브루스 M 메증거의 사본학 63쪽)
이와 같이 후대의 칠십인역에 외경이 포함된 것을 카톨릭은 외경이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외경이 성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증거만 발견될 뿐입니다. 또한 더욱 우스운 것은 후대에 발견된 칠십인역들은 서로 포함된 외경이 동일한 목록이 아니라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에는 "바나바서, 헤르마서의 목자를 제외한 외경이 실려 있고,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a)에는 클레멘트 1서, 2서와 솔로몬의 시편의 외경만이 실려 있습니다. 또 에브라임사본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전도서 두개의 외경이 실려 있었으며, 바티칸사본에는 일부 삭제된 외경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사본들마다 외경이 모두 달랐다는 증거들은 외경이 동일한 목록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며 정경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특이한 것은 트랜트공의회에서 결정한 지금의 카톨릭 외경과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12) 동방정교나 성공회등에서는 외경이 예배의 의식에서 사용된 적은 있다고 할지라도, 정경에 속한다고 정의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동방정교가 주장하는 외경은 카톨릭과 다릅니다. 외경은 트랜트공의회에서 카톨릭이 그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삽입시킨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단 한번도 트랜트공의회의 외경목록과 동일한 성경목록은 없었으며, 인위적인 성경목록이 된 것입니다. 카톨릭은 일부 교회사를 조작하고 거짓으로 만들면서 그 당위성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비롯하여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전승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교황권을 수호하기 위한 인위적인 제사장 집단으로서 만인제사장인 성도들을 미혹하는 곳으로서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교회들 중에는 이들 카톨릭보다 이단성이 훨씬 적은 곳이 더욱 많습니다. 자신들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선택한 외경을 정경이라고 부르고, 또 전승을 성서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곳은 기독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구원과 심판의 공동 사역자로 만들어버린 카톨릭, 모든 성도들 위에 제사장의 위치로 군림하며, 자신들 사제를 통한 일곱성례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주장은 오류가 없다고 공언하는 사제들...... 카톨릭인들은 그러한 가증스러운 집단에서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카톨릭인들과 토론은 외경이 무엇인지 정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저분한 덧글 토론이 아니었다면 더욱 좋은 내용의 글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외경의 오류: 지혜서 11: 17 무형의 물질로부터 세계를 만들어 내신 주님의 전능하신 손이 곰과 사나운 사자들의 무리를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형의 물질(형태가 없는 물질)로부터 세계를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닙니다. 무(無)로부터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 집회서3:30 물은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
자선이나 구제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룩3:4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지었고 그들의 주 하느님이신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난을 당하게 되었읍니다.
죽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 지혜서가 솔로몬이 저자라는 것은 조작이며, 지혜서의 기록시기는 주전 2-3세기로 봅니다. 솔로몬의 명의를 도용한 것은 위경적 성격을 나타내고, 지혜서의 시리아역본 표제에는 솔직하게 솔로몬의 명의 도용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제롬과 루터는 필로의 것이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벤시락의 것이라고 했습니다.(구약개론, 하권 356쪽 참조)
유딧과 토빗트는 역사적, 연대적, 지리적 오류가 있으며, 거짓과 술수를 정당화시키고 구원을 개인의 공적과 행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마카비 1서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들이 상당히 있다.(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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