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할 최대의 적중 하나입니다.
그 위선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고의적 위선으로 자기를 높이고 경건한 체 하는 일은 스스로 그것이 죄인줄 알고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자기기만으로 이루어진 위선은 자신은 경건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죄인줄 모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신애가 신앙을 갖게 되어, 가르침에 따라 박도섭이란 자기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을 찾아가서 용서하려는 장면입니다.
신애의 신앙적 정황이 어떤가하는 문제는 따지지 않고 박도섭만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유괴살인범입니다. 교도소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애의 용서하려는 시도 앞에
당당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감사하게도 저 같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미 그는 신애의 용서는 필요가 없으며 마음은 평화롭기 그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기만적 위선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처절한 반성과 뼈아픈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만 누리려 하는 짓은 바른 믿음이 아니며 참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말미안아 고통받는 신애에게 그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음에 대한 참담함으로 애통해 하여야 옳은 것입니다.)
...
참된 경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이다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정의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의 선포가 참된 경건일 수 없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들이 참된 경건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어느 목사 어느 교회와 관련짓는 따위의 일이 참된 경건일 리는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말씀을 잘 가르친다고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내면 될까요?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선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정직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삶입니다.
저는 이 단락의 본문들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모든 종교적 행위들을 넘어선 삶에서의 실천.
네, 종교는 신앙을 바르게 돕기도 하지만 자기기만의 위선을 조장하는 독소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를 경계하여 구별하고 환란중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경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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