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일단 종목부터 정하자."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강다영과 장소명을 불러놓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줄다리기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
"줄다리기 할 줄이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못하는거지."
"몸으로 말해요는?"
"그거 할 시간이 없지 않을까?"
내가 질문을 던지는 족족 돌아오는 것은 강다영의 절망적인 대답 뿐이었다.
"지금 체육대회가 5일 남았는데 이게 말이 돼?"
"임재경 선생님이 대의원회의에서 나온 의견들 수렴하라해서 계획서 이렇게 쓴건데... 지금 보니까 답이없네?"
"......"
할 말이 없었다. 가망없는 체육대회에 할 수 없는 종목을 끼워넣고 성공을 시켜보라는 꼴인데, 내가 아닌 유재석이 와도 이 체육대회는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건 둘째치고, 지금 당장은 강다영이 옆에서 진짜 망한것 같아 오빠 라고 연신 한탄을 하고 있어서 머리가 더 터질것 같았다.
"종목도 못정했으니 운영방식을 어떻게 할지도 안정했겠네?"
"청팀 백팀은 분배했는데, 이제 어떻게 운영할지는 안정했지..."
종목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사 운영에 제일 기본적인 포지션 분배를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종목부터 갈아치우자. 상품비를 10만원으로 치고 35만원으로 할 수 있는 종목들."
나는 학생회 부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받아서, 최대한 저렴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종목을 추려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품들 다 정리해서 행정실에 말해. 내일 당장 시켜야하니까."
인터넷으로 급하게 필요한 물품들 가격을 알아보는데, 보면 볼 수록 절망만 커져갔다.
'귀신의 집도 거의 80만원이 들어갔는데, 체육대회가 45만원? 미션 임파서블도 아니고.'
결국 그렇게 나는 새벽 2시까지 체육대회 기획에만 매달려서 겨우 운영 방식을 만들 수 있었다.
......
"새로 만든 구체적인 계획서입니다."
다음 날 나는 퀭한 눈을 하고 아침부터 교무실로 가서 새벽까지 만들었던 계획서를 보여줬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또다시 호통이었다.
"미션 달리기, 계주, 축구...종목을 세개나 한다고? 안 돼. 분명 체육대회는 1시간만 하는거라고 했는데 이대로 하면 1시간 30분은 넘어! 선생님들 다 더워죽으라는 말이야?"
"아니, 종목이 3개 미만인 체육대회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어쨌든 안 돼. 어떻게든 시간 더 줄여."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취지로 만들었다고 해놓고, 선생님들이 싫어하는건 말이 안되는거 아닙니까?"
"말이 안되긴 뭐가 안 돼? 체육대회를 선생님들이 싫어하는건 그 사람들의 자유야!"
"......"
논리 따위는 없었다. 그냥 안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때마침 교무실에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그는 아마 내 편을 들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오 학생회장, 체육대회는 잘 준비하고 있나?"
"잘 준비하긴요. 망했죠."
"선생님들이 체육대회가 1시간이 넘을까봐 걱정하던데, 30분 정도만 하면 어떻겠나?"
"예에?"
"아무래도 덥고 하니까...뭐 어쨌든 선생님들이랑 잘 상의해보고 결정해봐. 나는 이만 일이 바쁘니."
뜬금없이 교장선생님이 등장하셔서 끓는 내 마음 속에 불을 붙이고 그냥 가버렸다. 그걸 지켜보던 임재경 선생님이 굳어버린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들었지? 저게 선생님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야. 쓸데없이 길게 할 필요 없잖아. 학생들이 하나도 참여 안하면 어때. 그냥 너네가 준비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되는거지."
"그건 또 뭔소립니까..."
이젠 슬슬 미친 소리까지 나오는걸 보니, 낮술을 했거나, 집안에 큰 근심이 있거나, 공황장애가 온 것이 확실했다.
......
체육대회 당일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사회자를 맡은 나와 신정화는 급하게 대본을 짰고, 나는 학생회 20명을 모두 총동원해서 운영을 준비했다.
리허설은 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전부였다.
'뭔가 불안한데. 뭔가 불안한데. 뭔가 불안한데.'
회장이 피곤한 이유는 무슨 일이 터질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뭔가 불안하고, 부족해보이고, 일이 터질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와, 나 초등학교 이후로 체육대회 처음해봐. 엄청 기대된다."
어떤 여학생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에, 나는 순간 일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아주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떡하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2시가 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1학년 1반부터 2학년 13반까지 순서대로 운동장 트랙에 앉히는데, 갑자기 나와 신정화의 마이크가 안나오기 시작하면서 질서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반 순서대로 앉아주세요! 제발 서있지 말고 앉아주세요!"
학생회 부원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안내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들 수다를 떨거나 일어나서 돌아다니다보니 도저히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져갔다.
"1학년 반 중에 4개 반이 안왔어요. 아예 아무도 안왔는데요?"
"뭐?"
"2학년 중에도 안온 반 있어요."
정말 답이 나오질 않았다. 청팀 백팀 나눠서 계주선수들 명단을 다 만들고 순서까지 맞춰놨는데, 갑자기 안와버리면 어떡하자는건가.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정말 이건 망했구나 하는 생각외엔.
......
내 마이크 소리가 다시 돌아오고나서야 비로소 체육대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안온 반들이 상당수 있어서 처음부터 대단한 차질이 생겼지만, 일단 엉망이라도 시작은 했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또 문제가 생겼다.
미션달리기의 첫번째 미션은 담임선생님과 학생3명의 4인5각 달리기인데, 담임선생님들이 거의 오지 않은 것이다.
"그냥 하고싶은 사람 와서 하세요."
나는 체념한 말투로 마이크에 대고 말한 다음, 신정화와 짜온 대본을 바닥에 던졌다. 이미 계획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대본 따윈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종목은 계주였다. 계주도 선수들이 오지 않아서 다시 인원을 조정하느라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었고, 그동안에 많은 학생들이 재미없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계주가 시작되고 나서 선수들이 달리는 동안엔 꽤 많은 사람들이 구경했지만, 곧 계주가 끝나자마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다. 이제 더이상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다음 종목 축구할 선수들이...없군요."
난 마이크로 거의 텅 빈 운동장에 대고 말했다. 8명정도가 축구를 하고싶다며 운동장 가운데로 왔지만, 이미 구경할 사람은 없었다.
"뭐...하고싶으면 하세요."
나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하고 학생회 부원들과 운동장에 세팅해놓은 것들을 전부 철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잔뜩 모여서 우리를 보고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에 대한 비웃음이 틀림없었다.
"아, 학생회 다 뒤졌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체육대회야. 동네 운동회도 아니고."
집에 가는 학생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그냥 시간낭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야 교신아, 그래도 이 정도면 체육대회는 성공한거야."
운동장을 거의 다 치우고 있을 때, 갑자기 임재경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선생님 밖에 없을겁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의 평온한 표정이, 나를 한껏 비웃는 것 같았다.
"이거 웃긴 새끼네 이거. 니가 회장이면 그런 말을 하면 안되는거 몰라? 니가 이렇게 생각이 부정적이니까 체육대회가 이렇게 된거 아니야?"
"개소리."
"뭐?"
"애초부터 잘못되어 있었어요. 극악의 환경을 주고 체육대회를 진행하라하는데, 그 누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죠?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갔는데, 누가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평가할 수 있죠?"
"지금 넌 선생님들 탓을 하는것 같은데, 선생님들이 오지 않은 것이나, 어떤 반 전체가 안온건 다 너네 잘못이야."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단축수업해서 일찍 끝나는 날에 누가 자발적으로 선생님들을 위해 남아서 체육대회를 합니까? 아니, 심지어 선생님들이 싫어하는데."
"그게 너네 잘못이라는거야. 너네가 제대로 준비를 못하니까 기대치가 떨어지는거지."
"아 네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젠 상대하는것도 귀찮아서, 난 한껏 비꼬는 말투로 그에게 말한 뒤 정리가 끝나서 운동장에 앉아있는 학생회 부원들 쪽으로 걸어갔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네. 미친새끼 아니야 저거? 체육부 선생님들도 자기들이 안해줘서 이렇게 된거라고 하더라. 너네가 하면 뭘 얼마나 잘하겠어?"
내 뒤에서 임재경 선생님이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젠 선생님한테까지 쌍욕을 들으니, 참 기분이 좋았다. 난 아마 장수할거다.
"교신아, 이거 먹고 진정해."
박기동이 내게 물병을 하나 건네주었다. 물병을 쥔 내 손이 가득 떨려왔다. 이것도 체육대회 소품이었는데, 거의 쓰지도 못하고 그냥 마셔버리게 되었구나...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임재경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나에게 미안해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단지 내게 화가 난 모습이었다.
"이런 개씨발 좆같은 새끼!!!"
결국 감정이 터져버렸다. 선생님들 전부 들으라고 있는 힘껏 고함쳤다.
나는 물병속에 있는 물을 거칠게 바닥에 뿌리고, 물병을 던진 후 정보관으로 들어갔다.
"김교신, 너 이새끼 일로 안와? 김교신!"
임재경 선생님의 성화가득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냥 학생회실에 올라가서 혼자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홀로 학생회실에 들어서고, 회장 자리에 앉아 나는 혼자 울었다.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학생회 부원들에게 미안해서, 선생들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서.
......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같은 반인 이평원이 내게 말했다.
"내 동생이 1학년인데, 담임이 체육대회 하지 말자고 하면서 다 집으로 가라고 했대. 그래서 그냥 안가도 되나보다 하고 간거라는데?"
아...차라리 학생들이 흥미가 없어서 안온거면 다행이었다. 이건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뭐 어떡하겠냐, 하기 싫다는데. 스승의 날이니 지들이 주인공이었잖아."
그러나 더 충격적인것은, 임재경 선생님이 체육대회 당일날 아침에 담임 선생님들에게 보낸 공문의 내용이었다.
-학생회 부원들이 체육대회를 준비하는데, 제가 보기에도 정말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스승의 날 행사니, 참여하는 것은 선생님들의 자유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체육대회에 참여하는 것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래도 참여해달라고 부탁은 한 줄 알았는데, 내용을 보니 그냥 오지 말라는 식이었다.
너무 화가 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젠 더욱더 자양고 선생님들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었다.
......
오늘 한 친구에게 응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나마 좀 살 맛이 나더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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