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참 멋진 지도자였습니다.
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얼마나 멋있는 신사의 향기^^를 지녔는지 잘 보여줍니다.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권위주의에 쩔은 지도급 우두머리 목사님들 같지 않게
스스로 지극히 낮아져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지킴으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켜야할 도리를 다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혹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그들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골로새에 사는 빌레몬은 부자였고 그에게 종이 있었는데 그이름이 오네시모였다.
오네시모가 무슨 연고로 그리하였는지는 모르나 빌레몬을 배반하고 그의 집에서 탈출하여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고 회심하고 바울을 돕는 자가 되었다.
바울은 도망노예인 그를 보호하고 친구처럼 대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낼 때 그의 손에 쥐어 보낸 편지이다.<<
당시대에 도망노예는 상당한 현상금이 붙어 있었으며 아무나 죽여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그 신분으로 보지 아니하였습니다. 겉 껍데기란것은 알맹이를 가리는 외피에 불과한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듯, 바울도 그 사람의 중심을 보고 그를 기꺼이 동역자로 친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 보호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침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즉 도망친 오네시모가 직접 돌아가서 주인에게 자신의 복귀를 신고함으로 당당한 회개를 이루게 하려 함입니다. 이런 과정이 오네시모에게도 합법적인 활동을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목숨이 혹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이라고 운을 떼고 말입니다.
명령하지 아니하고,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반복하여 간구합니다.
이 장면에서 언뜻...제자들의 발을 씼기시는 예수가 겹쳐지는 것은 저만의 상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자,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빌레몬은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잘 해 주었을까요? 아니면 돌아온 노예로서 용서하고 편하게 대해주는 정도였을까요? 잡아 가두고 다시 종을 삼았을까요?
정확히는 잘모릅니다. 첫번째...였을 것임을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만...
그리고
이그나티우스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의 주교로 불리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전해질 따름입니다.
그 주교 오네시모가
바로 빌레몬의 종 되었던 그 오네시모라면 ...그렇다면, 정말 멋진 결말이겠습니다.
그리고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잘보여준 주인공들이겠습니다.
그런 주 안에서의 친구 하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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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글
고대에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지적한 지식인은
중국의 '묵자'...
제 얕은 정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정도 뿐입니다.
바울이 계급보다 인간의 중심을 우선시했다는 것은 당연히 동의합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그렇게 신분의 차별을 내면과 태도에서부터 깨면, 사랑의 관계를 이룰 것이고, 그건 결국 실질적으로 주종관계를 넘어선 사이가 되겠지요. 이것은 제도를 혁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정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오네시모를 왜 다시 종으로 보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주님이 받아들이시고 주님을 받아들인 세리와 창녀들은 다시는 창녀와 세리로
답글
돌아가지 않았겠지요.
물론 빌레몬은 바울의 신뢰를 받는 주 안에서 형제같은 사람이었을테니까
그래서 바울도 믿음을 갖고 간절한 편지를 동봉해서 오네시모를 보냈을 거라고 짐작은 해봅니다.
그 일로 빌레몬이 시험에 들 것을 걱정한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노예제도... 빌레몬서가 성서적 해결법을 제시한 것 같아 큰 영감을 얻은 기억도 있지만...
여전히 못난 저는 가슴 한쪽에서 찜찜한 생각을 지우지 못합니다. 고백입니다. ㅎㅎ...-
주방보조2012.10.29 21:23
그렇네요, 세리와 창기가 본업으로 돌아갔을리는 없겠네요.
혹 있었더라도, 그런 경우는 참된 만남이 아니었겠지요.
당시대의 노예제도...왜 기독교가 앞장서서 타파하지 않았을까, 저도 고민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제도에 대한 수동성은
인간의 본질성 회복....하나님의 자녀가 됨의 가치가 외형적 제도의 모순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주님의 예지 때문이었을까요?
기대에 못미치는 인간의 늦은 반응으로 인하여 2천년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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