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성경에 대하여

월경잉태론 시비에 대하여(성희경목사)

주방보조 2012. 3. 28. 13:49

배는 산으로 갈찌라도 교회는 진리의 포구로 가야 한다

                                       (부제: 월경잉태론에 대한 소고)

                                                             

                                                                                                                                     동해초원교회 성희경목사


얼마전 최삼경목사의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에 대해 “이단이다,  아니다” 하며 말들이 많았다. 통합측에서는 지난 2010년 9월 9일 제95회 총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최삼경 목사 측과  그 반대측이 심각하게 격론을 벌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최근에 한기총과 합동측에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감리교측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어떤 분이 2012년 1월 12일 국민일보를 비롯해서 불신자도 보는 주요 일간지들에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양태론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는 이단적 사상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다른 신의 개념이다. 양태론은 하나님을 일인 삼역으로 설명하는 잘못된 신론으로 결국 하나님을 일위일체의 단일신으로 보는 이단적 교리이다. 신문에 난 내용을 보면 이렇다.


『4. 삼위일체 신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삼위일체(Trinity) 교리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인격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피조물 인간의 두뇌로 창조주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다 무리가 있고, 모순이 있다. 그렇더라도 설명해본다면,
나는, 부모에게 아들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된다. 그러나 나는 한명이다. 물은 액체와 고체와 기체로 변한다. 그러나 H2O 원소는 변하지 않는다. 물이 바다나 호수에 액체로만 가만히 있다면 물의 구실을 못한다.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어야 온전한 물의 구실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부, 성자(중보자), 성령(우리각자의 심령 속에 들어오심)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국민일보 2012년 1월 12일자 신문)


삼위일체를 설명하겠다고 하고선 하나님을 양태론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아주 조용하다. 양태론은 기독교회가 배격해야 할 이단적 사상으로 결코 조용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기총에서도 말이 없고, 감리교단 측에서도 별 말이 없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교인이 10만명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 담임 목사라서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그렇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나는 그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 이유는 양태론은 많은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으면서도 설명은 양태론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따라서 나는 단지 그 분이 한국의 영향력 있는 큰 교회 목사인 만큼 신문 지상을 통해 전도의 일환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알리고 싶다면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성경의 진리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신중함이 있었어야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새었다. 다시 최삼경 목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최삼경 목사를 한기총과 합동 측에서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합신 교단이 현 한기총 집행부의 행태에 대해 비록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아직 한기총에 가입되어 있는 만큼 한기총의 결정에 대해서는 그 결정이 정확하고 바른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우리 교단 나름대로 분명한 입장은 있어야 하리라 본다. 만일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한기총의 결정에 동의한다는 뜻이 되리라.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나는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교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싶을 뿐이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는 삼신론과 월경잉태론 이 두  가지이다. 그런데 삼신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지면상의 문제도 있지만 삼위일체 문제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이미 결론이 난 사항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이단을 제외하고는 이의를 제기하는 기독교 교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목사가 그것도 신학을 제대로 한 목사가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 아니요, 세 분이시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신 나간 소리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 말은 이제부터 유일신교를 버리고 삼신교로 가자는 소린가?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분이 삼신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혹여 누구라도 정말 이런 주장을 개신교 목사가 하고 있다면 실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최삼경 목사가 정말로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고 삼신론을 주장하고 있는지 아니면 본인은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하게 믿고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적절치 못한 단어나 어법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실수를 하였는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본인은 이런 용어를 사용한 적도 없고, 이런 비슷한 사상도 말한 적이 전혀 없는데 자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고의로 만들어 터무니없이 모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마 이 셋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첫 번째 라면 그는 이단의 소리를 듣더라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장로교 간판을 내리고 새로운 교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장로교 교리를 거부하면서 장로교 간판을 단다는 것은 비양심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만일 두 번째 라면 본인의 실수로 빚어진 오해이니 본인이 해명을 하고 사과를 함으로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라면 모함자들의 행위는 신앙인으로서 실로 행해서는 안 될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위로 관련 단체나 기관은 여기에 대해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모함자들을 단죄하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셋 중 어느 것이 되었던 한국적 상황에서는 해결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튼 삼신론 문제는 관련 단체나 교단에서 알아서 할 일이요, 내가 언급할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문제는 “월경잉태론”이다. 실로 참 해괴한 용어이다. 나는 이런 말은 신학교에서도 듣지 못했고, 목회 30년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사도신경에 보면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게 늘 듣던 이야기이고, 말해온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하기 짝이 없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인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와 동일한 몸을 가지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며, 하나님의 기적으로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냥 “성령 잉태”라 하여도 이런 의미의 뜻이 전해 온다. 그런데 월경잉태론이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냥 들어서는 무슨 소린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인들처럼 남녀에 의한 보편적 방법으로 출생하셨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라면 월경 잉태론이란 말을 쓸 것이 아니라 보통 잉태론 혹은 일반 생육법이란 말을 써야 할 것이고, 이런 사상은 불신자들이나 반 기독교 사상가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께서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였듯이 월경이 처녀 잉태에 무슨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인가? 월경하는 처녀라고 해서 저절로 임신을 할 리도 없고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용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과 월경이라는 말은 결코 대비하여 쓸 수 없는 말이다. 어쨌건 이 용어는 매우 불경스런 용어로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고 신학적 용어로는 적합하지 못한 말이다. 나는 이런 용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이 의심스럽다. 그래서 화난 마음에 여기에 대해 인터넷을 통하여 조사하며, 사건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결과  이 문제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실 때 마리아가 일반 정상적인 여인처럼 월경을 하는 여자였는가, 아니면 무 월경의 여자였는가? 였고, 두 번째는 마리아의 육체적 요소 즉 피와 살이 성육신에 필연적 기여했는가 아니면 마리아의 피와 살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완전히 별개로 성육신 하셨는가? 였다. 그래서 이제 이 두 문제에 대해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한번 면밀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당시 마리아는 일반 보통 여인들처럼 정상적으로 월경하는 여자였는가 아니면 월경을 하지 않는 임신 불가능한 여인이었는가?


나는 이 문제가 뭐가 그리 중요한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마리아의 월경이 성육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적도 없고, 또 이 문제로 고민해 본적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고, 관심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무엇인가?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말하며, 성경이 강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강조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께 침묵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였던 마리아에게서 죄 없이 탄생하셨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이다. 마리아의 월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리아의 월경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말이다. 월경의 유무가 성육신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능력은 온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전능하신 능력인데 한낱 여인의 월경 유무에 의해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상식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이슈가 되어 목사들끼리 두 패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왕지사 이 문제가 이슈가 되었으니 한번 생각해 보자.   


먼저 나는 만일 누가 마리아가 월경이 없는 여자였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 주장할 만한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 또 그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하며,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이다. 내가 보기에 성경에는 마리아가 무 월경의 여인이었다고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의 말씀도 없다. 오히려 그녀가 육체적으로 지극히 정상이며, 평범한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만한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그 증거들을 말하겠다.


<마리아는 자신이 무 월경의 불임 여성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오히려 예수 탄생 후 자녀들을 낳음으로서 자신이 지극히 정상적인 여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성경을 보라!


[눅1: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말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한 말이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처녀인 자신으로서는 선뜻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유를 말한 것이다. 마리아는 수태 불가능의 이유를 말할 때 자신이 무 월경의 석녀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아직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남자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처녀인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의아해 반문 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정말 무 월경의 석녀라면 이 사실을 분명히 천사에게 고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는가? 정상적인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셉과도 정혼한 것이다. 더군다나 마리아가 무 월경의 임신 불가능한 여인이었다면 마리아가 이 사실을 요셉에게 숨긴 채 요셉의 청혼을 받아드렸을 리가 없다. 금방 밝혀질 일을 가지고 그녀가 요셉을 속였겠는가? 그녀가 그런 어리석고 교활한 여인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그녀가 그런 악한 여인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잉태할 성육신의 대상으로 선택 하셨겠는가? 이처럼 마리아가 생리를 하지 않는 여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들을 애써 외면하는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바보로 만드는 불경한 짓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모든 여성은 자라서 때가 되면 누구나 사춘기를 겪고 다들 생리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이치요, 섭리다. 일반 여성으로서 성장과 함께 사춘기를 지나지 않는 여성은 없다. 마리아 역시 사춘기를 겪었을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가 되자 요셉과 정혼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가 월경을 하지 않는 여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더러, 자연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다음 구절을 보라.


[막6: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누이들 이들은 누구인가? 마리아와 요셉의 자녀들이 아닌가? 마리아는 예수님 외에도 최소 6명은 더 낳았다. 그런데도 마리아가 월경을 하지 않는 여인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물어볼 것도 없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에게 물어보라. 아니면 교회 다니는 모든 자매들에게 물어 보라. 마리아가 월경하지 않는 여인이었다고 말하는 당신을 의아하고 이상하게 쳐다 볼 것이다. 나는 마리아의 월경 문제에 별 관심이 없지만 마리아의 월경을 문제 삼는 분이 혹이라도 여인의 월경은 더럽다든지, 월경은 죄의 결과라서 혹시라도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손상을 줄까 하여 염려되어 이런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싶다. 구약에는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부정하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겔36:17).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여인이 생리를 한다고 해서 여인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설명한 곳은 한 곳도 없다. 오히려 신앙심이 깊었던 여인들을 향해 거룩하다는 표현은 보았다(벧전3:5). 뿐만 아니라 월경을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보는 성경과 내가 보는 성경은 분명 다른 책일 것이다. 나의 성경책에는 그런 구절이 한 구절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로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 할 것이라는 구절은 나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창3:16). 그러나 생리가 죄의 결과라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무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1:28). 나는 생리를 죄의 결과로 생각하여 마리아의 무 월경을 주장하는 분에게 되묻고 싶다. 만일 생리가 죄의 결과라면 무죄했던 하와는 생리를 하지 않는 여인이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하시고 그런 무리한 명령을 하셨다고 보는가? 아니면 생리가 없이도 얼마든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대답을 잘 못하시겠다면 가까운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속으로 당신을 비웃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미안하지만 내가 질 수가 없다. 이제 이런 이상한 주장은 더 이상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도 여기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이 옳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사실도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의 현실인데 성경이 말하지도 않고, 강조하지도 않는 사실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이상스럽게 포장해서 말해서야 되겠는가?  


둘째, 마리아의 육체적 요소 즉 피와 살이 성육신에 필연적 기여를 했는가 아니면 마리아의 피와 살의 요소는 전혀 기여하지 않았는가?


옛날 지금부터 약 1700여년 전에 삼위일체 교리 문제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다나시우스 파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가 두 패로 나뉘어 심각하게 싸웠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문제로 두 패로 갈려 때 아닌 논쟁을 뜨겁게 벌리고 있다. 한 쪽은 마리아의 피와 살이 성육신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쪽은 마리아의 피와 살은 성육신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일반 신자들은 별 관심이 없겠지만 우리 목사들은 이런 문제가 나오면 죽기 살기로 싸운다. 이는 교리 문제요, 진리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창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주된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궁금하면 얼마든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어떤 사상이 성경적인 바른 교리이고, 어떤 사상이 비 성경적 잘못된 교리인가를 개혁주의 입장에서 밝힐 뿐이다.   


먼저 마리아의 피와 살이 성육신에 일절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마리아의 피는 한 방울도 예수 그리스도께 전달되거나 성육신에 기여하지 않았다. 만일 마리아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전달되거나 성육신에 기여하였다면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우리처럼 죄의 오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죄인이 죄인을 구속하는 구주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따라서 마리아의 피와 살은 성육신에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되며, 어떤 기여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우리처럼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그래서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모에 의한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인인 마리아의 몸에서 피 한 방울, 세포 하나라도 취하셨다면 아담의 원죄를 우리처럼 물려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원죄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통로 역할 만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잠시 빌렸을 뿐 마리아의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으나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권능에 의해 죄 없으신 몸으로 마리아의 태중에서 창조적으로 잉태된 것이지 죄인인 마리아하고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탯줄로부터 받은 산소와 영양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인간의 더럽고 오염된 피를 받아 태어나셨다고 말해선 결코 안 된다. 이는 신성 모독이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만 말해야 한다. ‘성령 잉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얼핏 들으면 매우 그럴 듯하고 타당한 말처럼 들린다. 또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정말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교회 내에 많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이런 사상은 개혁주의 사상도 아니고,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으며 비성경적인 이단적 사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제 그 이유를 개혁주의 입장에서 말해 보려 한다.


<마리아의 육체적 요소 즉 피와 살은 성육신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가? 또 개혁주의는 이 둘 중에 어느 쪽 견해를 지지 하는가>


본 소고는 이것을 주요 신학적 주제로 삼고 나의 개인적인 신학적 입장,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의 내용,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순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Ⅰ나의 개인적인 신학적 입장


일단 나의 신학적 소견부터 말해 보겠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함에 있어서 마리아의 육체적 요소 곧 피와 살을 취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마리아에게로부터 온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마리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하늘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예수님은 인류의 진정한 일원이 아니시라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옹호하는데 쉽게 도움이 될런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현재의 인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인류로 만드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니라 마리아의 태중에서 나왔으니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하고 우길 터인가? 한번 물어보자. 대리모가 나은 아이는 대리모의 아이인가? 수정체를 제공한 부모의 아이인가? 대리모로부터 산소와 영양분만 제공 받았을 뿐 대리모의 피는 고사하고 대리모의 유전자 하나도 받지 않았다. 당연히 수정체를 제공한 부모의 아이인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야기 해 보자. 백인 부부의 수정체를 흑인 여성의 대리모가 낳는다면 출생한 아이는 백인일까? 흑인일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다. 만일 마리아가 단지 대리모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피가 한 방울도 썩기지 않은 현 인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DNA를 지니지 않은 외계인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계인을 구원해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아담의 후손이며, 죄인된 우리를 구원해 주시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인류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을 보자.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개역개정 성경)


[히2:14]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입니다. 예수께서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습니다.(현대어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피와 육체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따뜻하고 붉은 피를 소유하셨다. 예수님의 혈액형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 A형, B형, O형, AB형 네 중 하나일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와 근본이 전혀 다른 새로운 인류이시거나 천상의 몸을 취하셨다면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소유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와 살을 마리아에게로부터 취하신 것이 분명하다. 성경 말씀을 조금 더 보자.


[히2:16-17]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개역개정 성경)


[히2:16-17] 예수께서는 천사를 붙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면에 형제인 우리와 같아지셔야 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는 자비롭고 하나님께는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실 수 있었습니다.(현대어 성경)


예수님은 천사의 본질을 취하시지 않으셨다. 왜인가? 천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본질을 취하셨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인류 가운데서도 유대인의 몸을 취하시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인가? 그렇다. 예수님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그 분이 어떻게 유대인들과 형제가 되며,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보라.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개역개정 성경)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현대어 성경)


[요4: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개역개정 성경)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유대인과는 전혀 이질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할 만한 구절이 없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자라시고 사실 동안에나 예루살렘 거리를 걸으실 때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지 외국 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인식하였고, 자신들과 동일한 유대인으로 생각하였다. 성경을 보자.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개역개정 성경)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런 외모적 모습은 어디에서 왔을까? 당연히 마리아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마리아의 태중에서 타락한 인류와는 상관없이 새롭게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나 외모는 유대인을 닮도록 창조하셨다는 식으로 무리한 사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하셨으되 성령의 권능으로 죄의 오염이 전혀 없이 잉태되고 태어나시게 하셨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의미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설명도 없이 그냥 대충 “성령 잉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말자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성경 마태복음 1:16을 보겠다.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개역개정 성경)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았다. 사도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누가 누구를 낳듯이 마리아도 평범하게 보통 어머니들이 하듯이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에게는 대리모의 개념도 없을 뿐더러 그런 개념을 가지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성령의 권능으로 되어진 일이지만 마리아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낳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마태가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육신과는 무관하게 태어나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발견을 할 수 없다. 그러면 더 근본으로 올라가보자. 다음 성경을 보라.


[눅3: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개역개정 성경)


[눅3: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개역개정 성경)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누가 복음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마리아의 족보로 본다. 다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적 족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록 요셉과 무관하게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으나 혈통적으로 분명히 다윗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함께 호적 하러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간 이유도 마리아 역시 다윗의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조상 다윗의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데 메시아의 자격 중 하나인 다윗의 자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마태나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12: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개역개정 성경)


[롬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개역개정 성경)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것은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마태복음과는 달리 그 최고의 조상을 인류 공통의 시조인 아담에게까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단지 아브라함까지만 기록하는데 누가는 왜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을까? 그 이유는 복음서를 읽는 최초의 독자들이 서로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최초의 독자가 유대인이었다. 즉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였던 것이다. 유대인은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이며,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려오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마태는 구약의 많은 성구를 인용함으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약속의 메시아임을 분명히 밝히려 했던 것이다. 반면 누가복음의 경우는 독자가 유대인이 아니라 성경을 잘 모르는 이방인인 “데오빌로 각하”로만 되어 있다. 즉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였던 것이다.


[눅1: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개역개정 성경)


따라서 마태의 기록 방식과 누가의 기록 방식에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누가 복음을 보면 누가가 스스로 구약을 인용하여 기록한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냥 있었던 사실을 목격자들에게 들은 대로 시간적으로 기록할 뿐이다.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을 지나 아담에게까지 연결하는 의도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구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를 인류의 공통 시조인 아담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만일 예수님에게 인류의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다면 그 분이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는가? 될 수 없다. 이는 구원자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류 중 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자.


[빌2:7-8]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죄인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오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참 사람만이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유전자분석기술의 발달로 친자 확인을 쉽고 빠르게 할 수가 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일 예수님의 혈액과 마리아의 혈액 그리고 다윗의 혈액 마지막으로 아담의 혈액을 분석 비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유전자가 일치하는 같은 한 인류임 곧 바로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을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8:40]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다음 성경 구절을 보라.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개역개정 성경)


[Mark10:45]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NIV 성경)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자주 표현하셨다. 즉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그냥 단순히 사람이라고도 말씀하실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단순히 표현상의 어색함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표현상으로 보면 그냥 자신을 가리켜 “나(I)"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지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의 씨에서 나셨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류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존재시라면 어떻게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불려질 수 있겠는가? 아담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따라서 아담은 사람이지만 자신을 결코 인자라고 부를 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당당하게 인자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인간 마리아를 어머니로 하여 마리아의 태중에서 잉태되고 출생하셨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325년)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성자께서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니케아 신조 일부)


니케아 신조에서도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켈케톤 신조(451년)는 표현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 그는 만사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의 신성은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그의 인성은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 (theotokos)이시다.』(켈케톤 신조 일부)


위에서 보듯이 켈케톤 신조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란 말 외에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라는 구절을 첨가하여 넣었다. 왜 그랬을까? 이는 마리아는 결코 대리모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실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예수님의 친 어머니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피와 살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단지 예수님께서 죄 없이 잉태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은 메시아의 탄생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표적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신 참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사7:14). 그래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는 표적이라고 말을 한 것이다.


[눅2: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님의 무죄성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남녀에 의한 보통 생육법으로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원죄로부터의 오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처녀 잉태를 택한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처녀 잉태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메시아에 대한 확실한 표적으로서의 기능이 훨씬 강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보장한 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고 출생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성령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의 죄에 오염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막으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나의 신학적 결론이다. 그러면 이제 개혁주의적 입장을 살펴보자.


Ⅱ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의 내용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개혁주의 신조들이나 신앙고백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으며, 그녀의 피와 살로부터 인성을 취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2항을 보자.


『2. 삼위(三位) 중에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또한 동등하신 분이시며,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요1:1,14; 요일5:20; 빌2:6; 갈4:4).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연약함들을 아울러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히2:14,16,17; 4:15).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나셨다(눅1:27,31,35; 갈4:4).  그러므로 두 개의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본성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전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었다(눅1:35; 골2:9; 롬9:5; 벧전3:18; 딤전3:16).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되, 한 분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롬1:3,4; 딤전2:5).』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분명하게 예수님의 인성이 ‘천상에서나’ 혹은 ‘무에서 유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로부터 직접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난자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어느 한 세포로부터 왔느냐” 등등 이런 쓸데없는 질문과 부질없는 상상은 할 필요가 없다. 성육신의 신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문제이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성육신을 설명한답시고 어설픈 과학적 사유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하시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사역들을 과학과 초과학을 넘나들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신들 그것을 우리의 작은 두뇌가 제대로 이해는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떤 신학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상호 모순이나 성경과의 충돌 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정확하면서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3세기 신학자 사벨리우스의 경우이다. 따라서 그렇게까지 깊게 사유할 필요는 없다.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다는 사실이며, 그 인성은 부패한 죄성을 빼고는 우리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35문을 보겠다.


『문 35.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즉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아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에서 인간 본성을 취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참 다윗의 자손이 되셨으며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눅1:25; 갈4:4; 빌2:2-11; 히4:1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역시 성육신에 대해서 애매모호하게 두리 뭉실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인성은 마리아의 살과 피에서 왔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리문답이 사도신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렇게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구세주이심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는 별개로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이 과연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또 다윗의 자손도 아니요, 우리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라면 과연 그 분이 어떻게 인류의 죄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인류의 구주가 될 수 있겠는가?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요리문답은 이런 불필요한 의문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 대해서는 이쯤하고 이제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Ⅲ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죤 칼빈의 견해를 보자. 칼빈의 경우에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음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2권 13장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음”(기독교 강요 상, 원광연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583)을 보면 이렇다.


『사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순전함은 오래 전에 이미 마니교도들과 마르키온주의자들이 부인한 바 있었다. 마르키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저 그렇게 보였을 분이라고 상상했고, 마니교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상적인 육체를 부여받으셨다고 꿈꾸었다. 그러나 성경의 수많은 강력한 증언들이 이 둘을 모두 반대하고 있다. 하늘의 씨나 유령 같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에 축복이 있을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창12:3; 17:2,7; 18:18; 22:18; 26:4). 뿐만 아니라 허공에 뜬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요 그의 허리에서 난 자에게 영원한 보좌가 약속 되고 있는 것이다(시45:6; 132:11).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육체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신 것이다(마1:1).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그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인 것이다(롬1:3).


이상에서 보듯이 칼빈은 마니교의 그리스도의 천상적 육체설과 과 마르키온주의자들(=말시온파)의 가현설(도케티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 가운데 말시온파의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마니교의 ‘천상적 육체설’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교회사를 보아도 한 번도 정통교회가 받아들인 적이 없는 반 성경적 사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단이란 게 어느 날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새롭게 불쑥 튀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가 과거에 이미 있었던 이단이 옷만 약간 다르게 바꾸어 입고 다시 부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동일한 적그리스도의 영이 대상만 바꾸어 역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이비나 기독교 이단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과거 이단들의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좀 더 알아보자.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오류를 위장하기 위하여 - 그리스도께서 무(無)에서 그의 몸을 취하셨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 여자들에게는 씨가 없다는 식의 오만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의 원리마저 뒤집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p588)


칼빈은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무의 상태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여자들에게는 씨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은 무지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현미경도 없고, 의학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통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사람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은 남자에게만 씨가 있고, 여자에게는 없으니 그리스도는 당연히 무에서 창조된 것이고, 마리아는 배만 빌려준 통로에 불과했으니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무(無)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자연의 이치마저도 부정하는 억지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이 이같은 주장을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마리아로부터 취하였다고 말하게 되면 마리아 역시 죄인이고 아담의 후손이니 그리스도 역시도 원죄의 오염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잉태되고 탄생하셨다. 그리스도는 비록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타락 이전의 아담이 가진 완전한 순결한 상태로 탄생하셨다. 이는 보통 생육법이 아닌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셨고, 결정적으로는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령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를 죄의 오염으로부터 지켜주신 것이다. 정리하여 말하면 성령 잉태는 처녀의 기적적 잉태와 마리아로부터 올 수 있는 부패성 차단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동정녀 탄생은 원죄의 오염 방지와 그리스도의 인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신 마르키온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마리아의 혈과 육을 그리스도의 인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주장하였으나 이는 비성경적이며, 오히려 더 많은 신학적 오류를 유발하는 실수는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신 마르키온주의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그들이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러운, 오염된 피를 통해서 나셨다고 하면 안 된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령 잉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 하나 못 하시겠는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감리교 김모 목사)


“인간은 누구나 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죄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심은 이러한 정자와 난자의 결합식이 아닌 혹은 난자만이라도 빌려서 오신 것이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한국교회 개혁시대란 블로그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믿는 믿음의 말 같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의 혈과 육과는 무관하며, 마리아는 단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통로에 불과했다는 신 마르키온주의자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가 여자로 말미암아 나셨다고 말씀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갈4:4). 그런데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방자하게 묻기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월경의 씨에서 발생되었다는 뜻이냐고 한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어머니의 피와 연합하지 않으셨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들도 이 점은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나셨으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며, 이는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말하는 것과(마1:5) 유사한 생산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마태는 여기서 동정녀를 그리스도를 나오게 한 하나의 통로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고 진술함으로써 그 놀라운 생식의 방식을 일상적인 생각과 구별짓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589, 590p)


이상에서 보듯이 칼빈의 주장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에게서 직접 취하신 것이며, 마리아는 단지 통로가 아니라 인성에 있어서는 실제 어머니시라는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위해  “그 어머니의 피와 연합” 이라든가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이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쓰고 있다. 나는 개혁 교회 목사로서 칼빈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마리아의 씨(난자)가 기여했는지, 아니면 혈과 육의 어떤 한 세포가 기여했는지 알 수도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의 혈과 육으로부터 왔으며,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셨기에 우리와는 다르게 죄가 전혀 없이 탄생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옹호하기 위해 혹은 예수님의 보혈에 누가 될까 하여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첫 범죄에 아담 안에서 동참하였기 때문이지 부모의 오염된 피를 물려받기 때문이 아니다. 죄가 피 속에 있는가? 죄가 물질인가? 그렇다면 극악무도한 짓을 하는 사람은 피가 심각하게 더러워져서 그런 행동을 저지르는가? 만일 사악한 연쇄 살인범의 피를 수혈 받게 되면 수혈 받은 사람이 그 즉시로 사악하게 돌변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역으로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거룩하고 성결하게 사는 경건한 사람의 피를 수혈 받으면 별다른 노력이 없이도 갑자기 선하게 되어 거룩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나는 그런 경우를 여지껏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따라서 피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로 창조된 물질일 뿐이다. 피 자체가 죄로 오염되어 더러워졌다는 사상은 전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며, 그런 표현을 쓴 구절도 성경엔 전혀 없다. 더러운 것은 죄이며, 그 죄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더럽힐 뿐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죄가 더럽히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지 물질인 육체가 아니다.

    

[렘17: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딛1:15]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마15: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눅6:45]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피가 더럽혀졌으며, 그 더러워진 피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통일교이다. 이런 이상 망측한 사상은 이단인 통일교에서나 주장을 하지 개혁주의에는 피가 더럽다 혹은 깨끗하다 하는 그런 사상이 없다. 따라서 개신교 목사로서 사람의 피가 죄로 더러운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통일교 사상에 100%로는 아니더라도 일부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피는 못 속이다” “천하고 더러운 피 운운” 등의 피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은 모두 유전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원죄는 부모로부터 유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하였기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하는 모든 인간은 타락된 죄악의 본성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 교단에서 교리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확인하는 것으로 칼빈의 견해는 매듭을 짓겠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문16. 모든 인종은 아담의 첫 범죄 중에 타락하였는가?

답   아담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운 것은 저만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그 후 자손까지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그로부터 일반 생육법으로 출생하는 인종은 모두 그의 안에서 그의 첫 범죄에 참여하여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

 (창2:16-17, 롬5:12, 고전15:21-22)


칼빈의 견해를 보았으니 다른 개혁주의자의 말도 들어보자.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뻘콮은 그의 저서 “기독교 신학 개론”의 “(3)그리스도 二性의 必要性”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속 사역에 있어서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인류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하였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모든 본질적인 특성 뿐만 아니라, 타락 후에 떨어지기 쉬운 모든 연약함을 갖고 인성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인류의 고뇌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갖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이러한 참 인간적 중보자만이 인간의 모든 경험과 시련과 유혹에 동정할 수 있었으며(히2:17,18; 4:15-5:2), 또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인간적인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마11:29; 막10:39; 요13:13-15; 빌2:5-8;히12:2-4; 벧전2:21)』(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68p)


뻘콮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 2가지를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1.그리스도가 인류의 한 사람이 아니라면 죄인을 대표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인류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스도에게 인류와 동일한 피가 흐르는가? 뻘콮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그리스도의 혈통적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인류 공통의 조상인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분명히 알리기 위함이었다.


[눅3: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으신 것은 천상적 육체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우리 죄인들과 같이 일반 생육법이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 처녀에게 잉태되어 출생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간인 마리아의 죄성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권능으로 막아주셨기 때문이다. 


2.그리스도는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시다. 그 분은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과 시련과 유혹에 대해 동정할 수가 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적 특성 뿐만 아니라 죄의 오염을 제외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연약성 즉 타락 후에 떨어지기 쉬운 모든 연약함까지도 취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인류의 한 사람이 되셔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우리의 속담에도 과부의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뇌와 슬픔을 아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불평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시면서 질고를 겪으셨기 때문이다.


[사53: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또한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감히 주님처럼 죄 없이 잉태하신 분을 본받아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변명할 수도 없다. 이는 주님께서도 우리가 가진 연약성을 그 분의 인성과 함께 취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으로 죽을 만큼 힘들어하셨다.


[마26:38]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따라서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는 가장 완벽한 모범이 되시는 것이다. 벌콮은 이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Ⅳ결론


이제 결론을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초대교회 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해 사도들은 인성을 부정하는 자는 단호하게 적그리스도라 하였다(요이1:7). 그리고 그 후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가 나타나자. 니케아 종교회의(325년)를 통하여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다. 교회는 그 후 대체로 인성보다는 신성을 강조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신성과 인성은 균형 있게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에서 보듯이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기독 신앙은 신비적 경향으로 기울며, 반면 인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땐 기독신앙은 유교와 같은 십자가 없는 도덕적 종교로 기울기 쉽다. 오늘날의 기독 신앙은 인성에 비해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편향적 경향은 기독 신앙을 윤리적인 면보다는 기적, 은사, 축복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을 띠게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기복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한 것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 마리아의 혈과 육을 그리스도의 인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겉으로는 보수적이고 안전하게 보이지만 실상 그리스도를 천상적 존재로만 만들어 오히려 기독교의 윤리성을 더욱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엄연한 역사적 존재로 역사의 한 때에 유대 땅에 유대인으로  태어나시고, 유대인으로 교육 받으시고, 유대인으로 자라고 사셨으며, 동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중에 동족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 속에 한 분이시다. 또한 우리처럼 시험도 받으셨으며, 어느 때에는 당신께서 넘어야 할 시험을 이기기 위해 밤새 고민하시며 기도하시기도 하셨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그 분의 삶을 본받으려 해야 한다. 그 분을 천상적 존재요, 구세주로만 인식할 때 그 분의 33년간의 치열한 삶은 우리에게 별의미를 주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만 부각되어 보이고, 그 분의 겪으신 인간적 고뇌와 시련, 또 회당에서든 빈들에서든 우리의 선생으로서 가르치신 교훈의 말씀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등 모본을 보이신 그 분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이유는 첫째는 대속적 목적이지만 또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하게 삶을 살도록 하는데 그 두 번째 목적이 있다.


[벧전2: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롬8: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한국교회는 이제 주님께서 유대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교훈하신 그 분의 가르침에 눈을 돌려야 한다. 바울 사도께선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다.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월경잉태론을 이야기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월경잉태론은 용어 자체부터가 잘못되었다. 마리아의 혈육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여하였는가 혹은 아닌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월경잉태론이란 이상한 용어를 만들어 쓸 것이 아니라 구지 쓴다면 “마리아 혈육 기여 잉태론”이란 용어로 바꾸어 써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이상한 논쟁이 생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것은 교리적 문제로 이는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밝히 들어내는 진리에 대해서만 오직 성경에 입각하여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월경을 논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학적인 접근이 아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상상과 소모적인 논쟁만 일으킬 뿐이다. 바울 사도도 이런 점을 지적하여 쓸데없는 논쟁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딤후2:23]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딛3:9]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따라서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사변적 논쟁으로 교회를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마리아의 혈육에서 취하였는가? 아니면 천상적 존재로 창조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진리 문제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월경 문제는 진리 문제도 신학적 논쟁의 대상도 아니다. 따라서 이단이 아닌 이상 이런 문제를 마치 성경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이슈로 삼아 교회를 사변적 논쟁의 장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중세 교회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는 침묵을 깨고 단호하게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 통합측에서는 마리아의 혈육이 성육신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최모 목사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모 목사의 이단 시비 문제에 대해 지엽적인 문제이니 더 이상 논쟁을 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총회가 잘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진리 문제를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덮어 버림으로 진리를 바로 지켜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 이를 외면하고,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는 태도는 진리 수호의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교단의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 문제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고 박윤선 박사께서는 “소수보다는 다수다. 그러나 다수보다는 진리다” 하고 가르치셨다. 진리가 사라지면 교단도 의미가 없다. 나는 우리 교단이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진리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이는 합신 교단답지 못한 태도이다.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는 진리라면 그 어떤 것이든 침묵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닌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복음주의로 가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합신 교단이 오직 진리만을 위해 존재하며, 성경의 진리를 굳게 수호하고 전파하는 교단이 되기를 희망하며, 본 소고를 마치려 한다.

 

기독교개혁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