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
우리집에서 이제 어린이날이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막내 교신이의 6학년 어린이날.
충신이는 '고3이 공휴일이 어디있냐'고 하는 아비의 눈치를 보다 점심을 먹고 학교 간다며 사라졌고
진실이는 일산 호수공원을 친구들과 구경간다며 충신이와 비슷한 시간에 떠났습니다.
그 전날 저녁 교신이의 마지막 어린이날 선물로 장난감 미니탁구대를 사왔었는데 불량품이라 남은 다섯식구 모두 이마트에 가서 반납했고 대신 꽤 비싼 샌달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간만에 아내가 고른 것에 저는 토를 달지 않고 계산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통닭, 김밥과 군것질 거리를 좀 넉넉히 사왔습니다. 한강에 나가서 먹자 하고 말입니다. 마지막 어린이날이므로...
우리 착하고 영리한 교신이는 마지막 어린이날이라는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듯 보였습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왔으나 닭다리와 김밥 간식등을 그냥 먹어버렸고
머뭇머뭇거리다 오후 햇빛이 겨우 3할쯤 남았을 때에야 돗자리 하나 달랑들고 한강으로 나갔습니다.
직장일이 아주 편치 않은 아내는 얼굴이 거의 반쪽이 되었고, 누워서 책만 읽으려는 것을 억지로 끌고 나왔는데, 일단 밖으로 나오자 무척 즐거워 하였습니다.
먼저 장미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한강을 구경하고 바람을 즐기며 잠시 킬킬거리며 수다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출출해져서 교신이와 원경이에게 거금 만원을 주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영 못 미더워 나머지 셋도 돗자리를 접어 들고 그 편의점 가까이에 가 보니 사람들이 많아 녀석들은 어정쩡하게 헤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농구장 바로 앞 벤취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야외식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마지막 어린이날 마지막 기념 행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들 서로 다른 컵라면을 먹었는데, 저는 왕뚜껑?을 먹었습니다. 서로 조금씩 나누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돗자리를 들고 원래 자리보다 조금 더 들어간 숲 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사이 해가 더 기울고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기 때문입니다.
돗자리 하나 달랑가졌다는 것...우리를 얼마나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5얼6일
22주년 결혼기념일입니다.
아내는 출근하기 전에 축 늘어진 가냘픈 어깨를 애써 펴고, 저는 주름진 얼굴을 애써 펴고, 서로에게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나실이가 쉬는 날인데
녀석이 제게 테크노마트까지 운동삼아 걷자고 하였습니다.
먼저 들른 곳은 두란노서원. 카드도 사고 가벼운 악세사리도 사고 나실이의 권유로 아내에게 줄 책도 한권 샀습니다.
그리고는 테크노마트. 나염물감을 사려 했지만 파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 버스정거장 앞 제과점. 케잌 하나를 사들고 나왔습니다. 원경이가 이곳 케잌을 먹고 싶어 했다면서 말입니다.
더 살 것이 있다는 나실이에게 저는 먼저 집에 가겠다 하고 녀석이 산 것들을 억지로 뺐어 들고 자양골목시장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장을 지나다 성실하고 착해 보이는 중년 부부가 만드는 왕만두 가게를 문득 눈여겨 보게 되었고 열개나 샀습니다. 반찬가게에서는 나물들 몇개를 샀습니다. 비가 올 듯하여 가져간 우산까지 짐이 되어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오십견이 된 오른쪽 어깨와 팔이 여전히 거북하고 쑤셨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케잌은 제발 가까운데서 사거라 권하였습니다.
저보다 좀 늦게 도착한 딸 셋과 교신이 넷이서. 청소를 한다, 설겆이를 한다, 난리가 났고
마침내 반짝 반짝 빛나는 탁자 위에는 그 케잌과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에겐 마우스를, 아내에겐 보석함을 ...그리고 예쁜 카드나 꽃무늬 편지지엔 편지들이, 그리고 하트모양을 한 하트모양의 이파리를 가진 식물의 화분 하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내는 카드를, 저는 책 한권을 나실이의 도움^^으로 서로에게 주었습니다.
저녁8시쯤 기다려도 오지않는 충신이를 데리고 오라, 고등학교 독서실 양현제로 교신이와 원경이를 보냈으나 녀석은 거기 없었습니다.
우리는 9시가 조금 못되어 아이들이 마련해준 결혼22주년 파티를 시작하였습니다.
직장에서 거의 탈진하다시피 하여 돌아온 아내의 얼굴도, 제가 사 온 만두와 아이들의 준비한 파티분위기에 환하게 밝아져 갔습니다.
비록 맏아들이 빠진 잔치였지만 무척 즐거웠습니다. 편지를 바꿔가며 읽을 때마다 킬킬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마침내 케잌을 자르고, 케잌에 있던 22라는 숫자로 된 초를 화분에 꼽음으로서...22주년 결혼기념파티는 끝이 났습니다.
(충신이는 11시가 넘어 들어와서 공부하느라 깜빡 잊었다며 뻥을 쳤지만 그냥 못들은체 하였습니다...나쁜놈...)
5월7일
아내가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제일 먹고 싶으냐고.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게는 함께 먹을 수 없으니(아내는 매운 음식과 돼지고기를 싫어합니다.) 그 다음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제가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육계장이 두번째로 먹고 싶은 것이라고. 먹어도 잘 질리지 않는 음식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이마트에 가서 육계장거리를 사왔습니다.
결혼기념일에 뭔가 못 해 준 것이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혹 임플란트 3개를 완전히 마무리한 날이라 그것을 기념하고자 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충신이는 학교에서 영 돌아올 기미가 없었고, 딸들은 뭔가를 또 꾸미고 있는듯 ...저를 볼 때마다 두터운 볼 속에 애써 감추고 있는 미소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5월8일
아침 일찍 아내는 육계장을 제일 큰 들통에 끓이기 시작했고
저는 오랜만에 맛있는 주일 아침식사를 하였습니다. 고기가 좀 무르고, 고사리가 적게들어가서 향기가 적고, 숙주도 좀 부족했고 하면서 평소보다 맛이 덜하다는 둥 늘어놓는 쓸데없는 변명을 들으며, 저는 정말 맛 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갔고 어버이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후에 아이들은 우리에게 어버이날 선물을 내 놓았습니다.
아내에게는 빨간 카네이션모양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핀을, 제게는 키보드를^^(결혼기념일엔 마우스, 어버이날엔 키보드? 하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꽤 고급스런 수건 두장을 우리 부부 각각에게 전달했는데 "어버이날" 아빠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고 그 아래 BY 오남매라고 수 놓여 있었습니다. 울컥...하는 것을 참느라 애를 썼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돈도 없고, 능력도 없어, 원하는 것 하나 변변히 해 준 것도 없는 부모인데도 ... 그런 것을 전혀 생각지 않는,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아이들의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없어서 못 만든 것이 있다며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여자 넷의 얼굴은 흰 셔츠에 나염물감으로 얼굴을 그려 넣었는데, 남자 셋은 참 어렵다며 말입니다. 녀석들이 단체복을 계획하고 어버이날 기념으로 단체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못했다하였습니다. 그려진 여자들의 얼굴은 정말 실물과 비슷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
올해의 결혼기념일과 어버이날은 정말 오래전에 계획된 일이었답니다.
일년에 딱 한번, 설날, 모두 합해 십만원 내외의 세뱃돈 받는 것 말고는 우리 아이들은 거의 가외의 수입이 없으므로, 받은 세뱃돈에서 진실 나실 원경이는 5만원씩, 충신이는 3만원, 교신이는 2만7천원을 미리 나실이가 갹출하여 한푼도 쓰지않고 가지고 있다가 마침내 두번에 걸친 부모를 위한 선물들을 장만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세러모니들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아이들의 정성이 대단하여 3만원을 군소리 없이 미리 냈다는 충신이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워졌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내의 기쁨과 즐거움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말 요즘 계속하여 우울하고 침울하고 무기력하고 슬프던 아내의 얼굴이 꽃 피고 목소리가 생기가 돌아 아이들의 맑고 높은 소리와 조화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시간들을 보내고
딸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아내는 아이들을 불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다. 그리고...엄마를 위해 기도를 좀 해 줘...엄마가 너무 힘들거든...(한줄기 눈물이 어느새 흐르고 있었지요)
'마지막 어린이날'부터 22주년 결혼기념일을 지나 어버이날까지, 우리 아이들이 이번에 특별히 보여준 사랑은
이젠
우리가 이 아이들의 보호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이 아이들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아내로 하여금 느끼게 해 준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엄마 힘내세요,...
과연 이 아이들이야말로 아내가 당하는 모든 굴욕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며 응답이라...생각했습니다.
-
아쉽게도 내년부턴 어린이가 없군요.
답글
어버이 날...아이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부모 살아 생전 잘하는 것...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게
그리스도인이지요. 돌아가신 다음 제삿상 아무리 잘 차려봤자~~
가장 큰 효는 믿음의 자녀로 잘 자라는 것이겠습니다.
결혼 22주년 축하합니다.^^ -
어버이 날 유민이의 장문의 감사편지를 받았습니다.
답글
빼곡히 적혀있는 글...글을 참 잘썼다는...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좋고..^^
할 말이 참 많은 아이..ㅎㅎ
정민이의 매우 감동적이고 뿌듯한 편지도 받았고요...늦은 오후엔 안산 처가에 갔습니다.
두 분의 불편을 덜어 드리고자 외식을 계획했었는데,
이것 저것 이미 준비해 놓으셔서...무산 되었지만,
대화시간이 많아 더 좋았습니다.
오늘 새벽예배 없었으면 1박 했으면 했는데...아내가 반주를 해야하므로 9시쯤 출발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가져 간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받아 들고 말이지요. -
우선 결혼 22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어버이날 저희 아이들은 달랑 꽃 화분 1개씩...사내 아이들이라 이벤트는 생각도 못합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셔서 아버지께 가야되는데 저와 아내의 임직식이 있어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조용한데 가서 차 한 잔 마셨습니다.
답글 -
응어리진 가슴에 아예 불을 지피십니다.
답글
가장 아름다운 가정의 본보기를 보는듯합니다.
보석같다는 말 실감납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지요.
값비싼 것들이 얼마나 오래가는 것들일까 생각하면 답은 나오지요.
부모님의 노력의 결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대단합니다.
오래오래 두분 건강하시고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 손주들의 재롱까지 누리시는 그 날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저희들이 산증인이잖아요.
결혼기념이 축하드립니다.
미소가 아름다우세요.-
주방보조2011.05.11 04:15
하이고...그러게 말입니다.
이글을 감춰놓을껄 그랫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효도는...이런 세러모니가 아니니까요.
성실하게 성장하여 부모의 짐을 덜어주고 가문을 빛내는 것...이 진짜이잖습니까?
우리 큰 딸아이들은 아마 이제 곧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고 돌아오면 곧 졸업하고 등등...생각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으라고...이런 짓을 했지 싶기도 합니다.
나실이의 카리스마가 한몫 단단히 했구요.
18만원이나 들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 알면 당장 그만두라 할 것이라서...다섯 모두 입을 봉한채 석달을 견딘 것이구요...^^
딸이 있어 재미있다는 점은...딸없는 분들에겐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지 싶습니다. ㅎㅎㅎ^^
항상 이쁘게만 봐 주셔서...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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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오전부터 눈물 빼고 있습니다.
답글
티셔츠에 직접 나염한 저 그림..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정말 닮았습니다. 진실인가요? 나실인가요? ^^;
참 기특하고 예쁜 아이들이예요.
오전부터 제 눈가에 기쁨과 감동의 눈물짓게 만드는 착한 아이들
행복하실거고
힘든일도 아이들 때문에 잘 이겨내실거라고 믿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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