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1897년 한국침례교의 창시자인 펜윅(M.C. Fenwick) 선교사님이 주도한 소래교회 사경회는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약 300명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뜨거운 회개의 역사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보다 약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강사 목사들은 농어촌과 산간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찾아 나서서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강사 사례비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편리한 교통수단도 거의 전무했습니다. 버스를 못 타면 트럭을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파나 교회의 크기도 차별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기복 설교와 헌금 강요
부흥회의 본래 취지는 안일해지기 쉬운 신앙생활에 성경 말씀으로 새로운 격려와 활력을 주어, 보다 성숙한 신자와 교회가 되기 위함입니다. 또는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런 의도가 좋은 열매를 맺어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의 부흥회가 초기 부흥회처럼 순수한 '말씀 잔치'가 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돈 잔치'로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 부흥회를 한번 잘하면 목돈을 챙기는 이른바 '부자 목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경우는 집회 중에 걷은 헌금을 사전 약속에 의하여 부흥 강사와 교회가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가지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내도록 유도하는 강사가 일류 강사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부흥강사들은 담임목사들의 가려운 곳을 잘 알기 때문에, 담임목사 처우 개선이나 십일조 강요 등 평소 교인들에게 직접 요구하기 힘든 사안들을 대신해서 처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나고 나면, 많은 신도들이 시험에 들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부흥강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들을 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 우선 주요 직분자들인 장로나 권사들에게 노골적인 헌금 강요를 합니다. 이는 매우 상투적인 수순입니다. 웬만큼 억지를 부려도 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회 때가 되면 헌금 걱정으로 잔뜩 긴장하는 직분자들도 많습니다.
교회에 피아노나 비품을 새로 헌납하라거나, 담임목사 양복이나 승용차를 사 드리라고 강권하는 일 등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 건축 헌금 독려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입니다. 하여튼 돈을 요구하는 이유는 하도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 목적과 수단이 너무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이며, 그리고 저질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부흥회의 건전성과 분위기는 교단이나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다릅니다. 사경회 형식으로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나누는 건강한 부흥회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질된 부흥회는 주로 '복과 성공'을 노래합니다. 한국교회 초기 부흥회와는 달리 죄, 회개, 고난, 그리고 인내 등 신도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말은 가능한 생략하고, 달콤하고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주로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참된 은혜를 받기보다는, 헛바람만 잔뜩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여튼 많은 부흥강사들은 마치 복 받는 비법에 대한 전매특허라도 지닌 듯 전국을 누비며, '기복 신앙'을 아주 비싸게 팔아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세속적인 복'을 못 받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또한 어떤 부흥회는 웬만한 코미디보다도 훨씬 더 웃깁니다. '웃기는 자장면'으로 소문난 어느 유명 목사님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속적 복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부흥강사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세속적인 복을 전혀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부자 청년에게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제자 된 삶은 고생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흥강사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피하고, 주로 구약성경을 즐겨 인용합니다. 구약에서는 '세속적인 복'을 자주 긍정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구약에 표현된 '세속적인 복'이 장차 신약시대에 받을 '영적인 복'을 예표한다는 사실을 크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부흥강사들 중에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로지 '잘 먹고 잘살자'는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데에 도가 트신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울러 이런 복을 받기 위한 '헌금'을 매우 강조합니다. 따라서 입에 꿀을 바르고, "많이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무당처럼 열창을 하십니다. 물론 이런 무속적 논리는 성경을 크게 왜곡하는 허구적인 주장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많이 하고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의 돈 잔치
건전한 부흥회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 전도사'들은 오직 세 마디만을 말합니다. '은혜받고, 돈 바치고, 그리고 복받으라'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돈'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흥회는 기복 신앙을 이용하는 목회자들의 '돈 잔치'로 변질되었습니다.
중대형 교회의 경우, 부흥회를 한번 할 때마다 거액의 돈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물론 들어오는 돈은 모두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헌금이고, 나가는 돈의 상당 부분은 강사 목사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언제나 놀라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만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액의 헌금도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목회자의 주머니로 은혜롭게 수평 이동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계속 교회 종탑 위의 높은 십자가에 홀로 계시게 하고, 자기들끼리만 돈을 주고받고 매우 분주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돈 잔치가 화려하게 잘 끝나면, 아주 은혜로운 부흥회였다고 서로 자화자찬합니다. 해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입니다.
특히 유명 강사 목사들 중에는 이를 주수입으로 하여 대단한 축재를 하기도 합니다. 수십 억 부자님들도 많습니다. 물론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서로 두터운 강사 인맥을 형성하여, 상호 '교차 초청' 또는 '순환 초청' 등의 수법으로 상대방 교회의 두둑한 부흥회 예산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큰 비밀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기복 전도사들은 부흥회를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우선은 신자들을 자극하여 교회의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데 이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포장하여 기복화하고 돈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태생적이고도 숙명적인 이유로,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는 상습적인 주장은 이들이 몸 바쳐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필수 구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흥회는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되는 신바람 나는 장사입니다. 이분들은 신도들의 마음이 진정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단지 찬송하며 박수치던 손바닥만 잠시 뜨거워진 것인지를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무 데나 뜨거워지면 교세를 확장하는 데에 당장 큰 도움이 되며, 또한 헌금도 더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은 많은 교회들이 왜 부흥회에 그토록 열을 올리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크게 경계해야 할 '성령 체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부 부흥회 강사들은 성령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 목적은 물론 신도들을 더욱 신비적 신앙에 몰두시켜, 자신들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성령 체험 역시 '한국교회 사이비화와 미신화'에 큰 기여를 한 주범 중에 하나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령 체험은 대개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언, 예언, 병 고침이나 기타 신비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신학적인 논쟁이 적지 않은 매우 조심스러운 사안입니다. 특히 방언이나 예언의 경우,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미 중지되었다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더구나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보기 힘든지요. 또한 어쩌다가 통역한다는 이들 중에도 왜 서로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지요. 이를 보더라도, '거짓된 은사'가 만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타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초대 교부들인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은 물론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 그리고 청교도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반면에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은사 지속론'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로 특히 이단 종파나 사이비 교단에서 이런 성령 체험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된 목회자들로 인해, 성령 체험이란 용어가 너무 남용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흥회를 빌미로 신도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고난주의 또는 미신적 신앙으로 미혹케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신자들은 거짓된 은사에 한 눈을 팔지 말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차분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령 체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기 부흥회처럼 헌금을 없애자
한국교회 부흥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도들을 기만하여 기복 신앙에 빠지게 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돈을 거두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라도 좋으니 확실하게 해명을 좀 해 보십시오. 한국교회는 왜 모이기만 하면 돈을 걷으려고 합니까. 세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개신교는 돈에 환장한 교회'라고 감정적인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 성취를 위해 큰일을 벌이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의하게 돈을 많이 거두어 큰일을 하는 것보다, 신도들 믿음의 분량대로 걷어 작은 일이라도 정의롭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어떤 일도 교회의 성결과 공의보다 우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을 걷는 방법이 너무 치졸하고 무속적입니다. '복받으려면 돈 내라'는 헛소리 좀 그만 멈추고, 교인들에게 헌금의 필요성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르치고 '자발적인 헌금'만을 받으면 안 됩니까. 또한 그렇게 무리하게 걷은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전체 헌금 중에 겨우 3~4%만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합니다. 작은 교회들은 어쩔 수 없으니 예외로 하더라도, 중대형 교회들마저도 거의 다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흥청거린 셈입니다.
한국교회는 돈을 삼키려고만 하지 베풀지를 않습니다. 그저 베푸는 흉내만 냅니다. 특히 미자립 교회들을 쳐다보는 대형 교회들의 욕심은 흥부 형님이신 놀부보다 더 심합니다. 그냥 마지못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로 돕는 척만 합니다. 실제로는 소가 닭 보듯이 합니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부흥회 헌금'만은 꼭 폐지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부흥회를 변질시키는 근본 원인은 결국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반드시 제물을 바치거나 헌금을 하며 집회를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들의 초대 교회에서도 그런 '율법적 바침'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계선 목사님에 의하면,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 부흥회에는 별도의 헌금 순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교회가 점차 대형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일 때마다 알량한 잠자리채를 돌리며 돈을 걷는 못된 습성을 몸에 익히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과거의 좋은 전통을 버리고, 오히려 갈수록 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과거처럼 단순히 은혜만 받는 담백한 부흥회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돈으로 갚아야만 하는지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를 거저 나누면 안 됩니까. 그리고 헌금은 평시처럼 주일예배에 하면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아울러 한국교회는 모일 때마다 틈만 나면 돈을 거두는 '고약한 전통'도 함께 폐지하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못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어디에 무슨 근거로, 모일 때마다 헌금을 요구합니까.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종교업자들이 교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닙니까. 부흥회뿐만이 아니라 구역예배, 송년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대형 교회들은 수요 예배와 금요 집회까지도 온통 돈으로 모든 집회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설픈 개혁 교회들은 입술로는 개혁신학을 자랑스럽게 떠벌이지만, 하는 행동은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종파들의 간교한 돈 챙기기 수법들을 열심히 배워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직분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래도 우리 교회만은 건전한 부흥회를 하고 있다고 함부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요즘은 신도들을 기만하는 수법도 더욱 고도화하여, 집회 기간 중에는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유익한 설교를 매우 건전하고 은혜롭게 잘하시는 고수님들도 많습니다. 다만 이분들은 집회 후에 조용히 거액의 목돈을 챙겨 가실 뿐입니다. 이처럼 앞모습은 경건하나, 뒷모습은 추잡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감사함으로 하는 헌금이 왜 나쁘냐고 구차한 변명도 하지 마십시오. 그런 감사 헌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헌금을 더 걷기 위해 잔 수를 부리고 간교한 방법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조차 부흥회는 이미 크게 사이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세속화에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부흥강사들이 신도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교권으로 억압하는 것과 기복 설교를 통한 우회적인 헌금 강요를 당연시하고, 오히려 이를 '은혜스러운 부흥회'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기생하는 이런 거짓 목사들을 모두 몰아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런 교활한 핑계로 헌금을 강요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사례비를 듬뿍 챙겨 가는 그런 잡상인들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저들은 그저 목사 가운을 걸치고 있는 이리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잘 구별하여 초빙해야 할 장로나 집사 등 교회 직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책임을 더 이상 담임목사에게만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진심으로 건강한 부흥 집회를 원한다면, 먼저 부흥회 강사 사례비부터 실경비 수준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만일 사례비가 너무 적어서 나서는 강사가 없다면 뜻이 맞는 목회자들끼리 서로 강단을 교류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담임목사를 모시고 자체 부흥회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 강사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복되고 아름다운 집회 문화가 형성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부흥회가 한국교회 성장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건만 허락된다면, 말씀에 집중하는 건전한 부흥회는 얼마든지 바람직합니다. 참된 회개, 격려, 감사, 그리고 헌신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겁 주고, 억누르고, 속 뒤집고, 울리고, 웃기고, 기만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거액의 돈을 슬그머니 챙기는 그런 사이비 부흥회는 앞으로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이는 거룩한 교회를 장사꾼들이 설치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매우 부끄러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5~46)."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