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가짜방언과 교회

주방보조 2010. 10. 12. 08:54

 


우리나라의 방언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를 따라하면서 만들어지는 단음절의 반복을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로 생각하는 오류, 통역도 없는 집단 통성방언기도의 심리적 고조를 성령 충만으로 여기는 착각, 이젠 버려야 할 때입니다.


방언을 거짓으로 하는 집단에선 예언도 도입됩니다. 방언을 거짓으로 하니 당연히 예언도 거짓말투성이입니다. 그런 거짓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게 한다면 과연 마귀의 승리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선 거짓의 아비 마귀가 한몫하고 있습니다.




거짓예언자들은 거짓 기사와 이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농락합니다. 심리적 치유를 마치 성령의 치유처럼 선전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들이 보여주는 기적들은 기적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습니다. 오직 목사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사기 말입니다.


목사들은 알면서 사기를 치는 교활한 자와 그것이 하나님의 일로 알고 사기를 진짜로 알고 진지하게 행하는 어리석은 자도 있습니다. 정신 있는 목사들은 궁지에 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꼬여들게 하는 것을 목사의 일이라고 믿는 평신도들 때문입니다.


평신도를 안티들이 병신도라고 부르는 것은 틀리지 않은 표현입니다. 겁쟁이들이며 기회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하기 일쑤 입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매우 고강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강한 척 하려고 허장성세로 위장합니다.


위선적인 목사들에게 넘어가는 성도들은 결국 목사의 종이 되고 맙니다. 목사의 종이 되면 그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며 더 이상 보통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거짓 방언이나 예언이나 치유 같은 수단으로 더욱 그 자기 권력을 보강합니다.


극도로 권력이 보강된 목사들이 펼치는 다음 수순은 세습입니다. 성직의 권위주의나 은사과시를 필두로 하여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들은 '자식이 너무 찌질하여 못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세습을 당연시합니다. 병신도가 된 이들은 그것을 좋아하구요.


병신도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영적 권위가 무엇인지 모른 채, 구약의 제사장들에 대한 공경심만 잔뜩 부풀린 사람들입니다. '목사에게 감히~'가 그들의 주된 반응이며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왕 같은 제사장적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목사들은 평신도들이 바보가 되면 될수록 편하고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성속을 둘로 나누어 자기들은 성, 성도들은 속으로 구별합니다. 그런 목사들이 성공을 하고 있으니 교회의 타락과 교회의 부흥이 비례하고 있다는 희한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일 것 같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교회들이 몇 안 돼 보이는 데 어떻게 교인들이 늡니까? 그런데 이상한 교회들은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괴이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괴이한 기적의 배후엔 마귀가 있습니다. 덜 떨어진 목사들은 사이비에 중독 되어 흥하는 듯 보이고 똘똘한 목사들은 교만으로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면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마지막 날에 완전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만 작금의 대한민국 교회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눈과 귀로 접하면서 그 일부분만이라도 시행되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며 길인지 눈치라도 좀 채고, 정신을 가다듬도록 말입니다.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예언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면 거짓된 하나님의 뜻을 쫓느라 시간과 정열을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저들은 더욱 광신적 열정에 몸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와 남을 속입니다.


속이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속이고 속는 사람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속습니다. 거기엔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 자기만족을 위한 몸부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종교를 위한 신앙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위한 신앙이 맞습니다. 그러나 요즘 나도는 가짜방언과 가짜예언과 가짜치유는 전부 종교의 탈을 쓰고 종교를 위한 잔치를 벌이며 이웃에겐 하등 그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아이들은 가짜를 좋아합니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느끼고 싶은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진짜는 느낌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엔 그만큼의 대가가 지불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듯이. 가짜는 느낌부터 줍니다.


그 충만한 호기심을 자기들의 교세확장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신사도운동을 비롯한 신비주의 운동 목사들의 행태입니다. 가짜방언을 양산하고 거짓 예언을 남발하고, 자기들만 할 뿐 아니라 아이들도 하도록 강권하는 요지경 세상이 작금의 대한민국 교회입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기한 방언이나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한 삶입니다. 노골화된 거짓 신비들이 아이들의 삶을 다 죽여 놓고 있습니다. 순수한 열정들이 단기선교나 음악집회나 거짓 영성의 수련 따위에 다 빨려 먹히고 있습니다.


삶과 동 떨어진 신앙은 결국 목사들의 배만 불려주는 역할에 머무릅니다. 목사님들도 먹고 살아야하는 존재이니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온통 거기 집중하게 한다면 그런 짓은 일종의 사기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삶과 경건한 교회생활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교회가 혹 텅 비어도 이 세상이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가득 찬다면 그것이 옳습니다. 교회에만 오글거리며 모여 거기서만 뜨거우면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염증입니다.


염증이 뜨거워지면 자연적으로 곪고 터지지만 교회의 염증은 종교조직이라는 딱딱한 껍질에 쌓여 쉽게 터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갈 때까지 가고 나서 대 폭발이 일어나고야 겨우 방향이 잡힙니다. 그러나 그 후 온전히 개혁이 이룰 때까지 그 폐해는 성도의 몫입니다


가짜에 휘둘리는 성도들은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중독이 되고 문제가 생겨도 계속 가짜만 찾아다니는 행태를 보입니다. 이 목사에게서 저 목사에게 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이를 찾아갑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으로서 '목사무시하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무시하기란 좀 과격한 용어 같지만 매우 좋은 말입니다. 인간목사는 뒤로 돌리고 오로지 그의 말씀과 인격을 통하여 예수만 볼 줄 아는 분별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목사우상화가 지나치게 대중화 일반화 상식화 하여 있습니다. 죕니다.


목사우상화는 교회를 기업으로 만들고 세습꺼리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게다가 거짓은사들까지 가미된 목사우상화는 모여든 무리의 수만큼 많은 개인적 사회적 희생을 치르게 만들고 맙니다. 거짓열광 속에서 망가져 가는 자신을 볼 줄 모르는 봉사들일뿐 이구요.


교회가 자라가며 건물이 커가고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모두들 환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진짜냐 가짜냐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커지느냐 마느냐만 중요해 집니다. 그래서 커지면 진짜가 되고 줄면 가짜가 됩니다. 한국교회의 진면목입니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제시합니다. 돈도 지원하고 인력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교라고도 하고 후원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을 통하여 작은 교회들은 젊은이들을 결국 큰 교회에 빼앗기고 맙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은 큰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란 먹이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반세기만 더 지나간다면 공룡 몇 마리만 남고 허허벌판이 되겠지요. 그 공룡들도 멸종할 것이 틀림 없구요.


작은 교회들의 꿈은 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정도가 보이지 않는 그들의 구호겠지요. 그래서 무수히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 주검을 통해 빠져나가는 생명들이 큰 교회를 이룹니다. 그런 식으로 꿈은 이루어지지요. 죽어야 하는 꿈


재미있는 것은 일부 큰 교회들은 작은 교회가 자기들의 밥이라는 것을 진즉 깨닫고 '작은 교회 만들기'의 일환으로 '신학교'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작은 교회들을 대신할 새로운 작은 교회 즉 그들의 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신학교들이 만들어 내는 목사들은 질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그들은 몰려다니며 '성공하는 교회'를 배우려고 합니다. 전모, 또 다른 전모. 윤모, 장모 등이 인기 있는 이유는 이들 때문입니다. 그런 목사가 성도들을 이끌고 그런 류의 목사들을 따릅니다.


허접한 신학교를 나온 그들이 추종하는 인물들이 바로 거짓 은사들을 양산해 내는 핵심인사들입니다. 가짜방언, 가짜통역, 가짜예언, 가짜신유... 그렇게 가짜들을 통해서라도 먹고 살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한국교회가 건강할 리가 있겠습니까?


신사도운동이란 그런 먹고살기 위해서 가짜라도 널름 주워 먹을 부류의 목사들에겐 복음처럼 들릴 가짜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뻔한 거짓인 죽은 자를 살리고, 미래에 대한 덕담어린 거짓 예언을 쏘아대는 신사도들, 미친 듯이 광란하여 얼을 쏙 빼놓는 기술들...


요즘 아이들이 신사도에 현혹되어 장난이 아닙니다. 자기들 끼리 언니동생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신사도의 거짓 열풍에 몸을 맡깁니다. 삶을 도외시하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사도운동이 바로 그러합니다. 아이들이 큰 일 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와서 죽은 사람들을 무수히 살렸고 교회를 무수히 세웠다고 하면서 헛소리를 거기 더하면 예언이 되고, 그 예언을 사주한 목사는 세기적인 영적 스승이 되고 영웅이 되고, 아이들은 거기서 열광하며 거짓 방언으로 내장을 다 토해 놓습니다.


예수의 이름 뒤에 숨는 목사가 큰 교회의 뛰어난 목사들 중엔 참 보기 힘듭니다. 자기 조상들의 자랑이 넘쳐나고, 조부가 교회에서 뭘 했고 어머니가 기도를 어찌했고 따위, 학벌이 찬란하고, 그것도 아니면 사람 웃기는 재주라도 과시해야 직성이 풀려합니다.


잘난 목사들이 많아질수록 교회환경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스타들은 예수를 자기들 등 뒤에 감추고 교인들은 예수보다 스타목사를 더 따르지요. 예수와 상관없는 목사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짜들 아니겠습니까? 허위와 과장과 위선들 그리고 뻥.


가짜를 그러므로 대적하는 일은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으로 가짜로부터 진짜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야 가능하겠습니다만 ...일단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은사들은 소거시켜야 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 검증되지 못하는 통역, 이 두 가지가 제일 먼저 소거되어야할 거짓 은사입니다. 모여서 방언으로 기도하려면 반드시 통역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혼자 골방으로 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짜이므로 함께 힘을 모아 진짜처럼 행세합니다.


앞에서 방언으로 리드하고 다 함께 방언으로 동참하는 기도는 전형적인 가짜방언의 행태입니다. 하나님께 하는데 ‘사람들은 모른다.’ 그 확신 가운데서 모인 무리들을 모두 머리가 텅 빈 바보로 만들어 놓는 것이 바로 그 작업입니다. 좋은 말로 마음을 비우는 작업.


가짜방언으로 마음을 비운 바보들이 되고나면 가짜설교에 골 빈 듯이 아멘을 따라하게 되고 손들라면 손들고 넘어지라면 넘어지고 웃기면 웃고 울리면 웁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성령 충만 하다고 하고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골이 비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믿어집니다.


성도들을 골이 빈 상태로 만드는 기술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이교도적인 것이며 원래 바알적인 것입니다. 거짓방언, 박수, 밴드, 고성능스피커, 목쉰 고성...이런 것이 동원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골이 비어갑니다. 맹목적으로 인도자를 따릅니다.


맹목적인 교인이 많아질수록 사기꾼 목사들은 더욱 용기백배가 됩니다. 헌금을 과도하게 걷어 들이며 건축을 빌미로 교인들의 고혈을 짜냅니다. 그렇게 확장된 교회와 부속기관들을 얼굴한번 붉히지 아니하고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세습왕조들이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유명하다는 모 목사님이 설교 중 방언을 하고 그것을 통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통역을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하였지요. 그 방언과 통역이 진짜일까요? 틀림없는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방언으로 메시지를 주셨다며 그 쇼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방언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방언은 성경을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오직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통역해주어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언으로 계시를 하시다니 명백한 사기 행위입니다.


모 오순절교단은 바뀐 지도자가 전 성도 방언하기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은사란 각 사람에게 교회에서 유익한 역할을 감당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모두 다 방언하는 자겠느냐? 라는 명백한 바울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방언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뒤집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들이 하는 방언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종교적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방언은 성도 전부에게가 아니며, 함께 시끄럽게 그리고 오래 그것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역 없이는 골방에서 하라는 것이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방언으로 떠들려면 통역을 해야만 합니다. 가짜방언이니 결국은 가짜 통역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본인과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맹목적이 된 평신도들은 그 감추어진 가짜에 열광하고 가짜들의 향연에 서로를 우러르며 가짜 신비들을 고조시켜 갑니다. 거기서 거짓 천사들이 동원되고 착시현상이 나타나고 무당의 신통력과 같은 짓들이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이름으로 버젓이 활개치고 다닙니다.


신비현상들은 사람의 이성이 잠시 작용을 멈췄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진맥진했을 때 보이는 허깨비들이라든지 잠잘 때 꾸는 꿈도 일종의 신비현상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과도한 열정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신비한 것을 보게 하고 말하게 합니다.


이단에 빠졌던 이들이 정통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단에서 느꼈던 이성마비의 쾌감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정통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거짓 은사들의 향연도 사람들을 옥죄고 머물게 하는 악한 목사들의 전형적인 도구들인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평신도지배도구 하나가 '가계저주론 또는 가계축복론' 입니다. 현재 잘 되고 잘못되는 것을 과거 조상들의 행적 특히 교회에 얼마나 잘 했느냐 또는 잘못 했느냐로 복과 저주를 가르는 억지주장입니다. 교회에 충성케 하는 겁나는 올무중 하납니다.


오모 목사는 조부가 교회 건축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에 2000억이 넘는 교회를 지금 짓고 있고, 김모 목사들은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이 심대했기에 모두 대형교회 목사를 하고 있고, 살펴보라 왜 네가 찌질한지--이따위 잡소리를 강대상에서 하는 무리들


강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어야 하는 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당잡설 똥물로 범벅을 해서 전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꿀물인지 똥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교인들은 가짜 방언을 하기 위해 벌린 입으로 그냥 그 혼합물을 받아먹고 있는 형국이구요.


감리교의 젊은 문모 목사는 청소년집회에 많이 초청을 받습니다. 그의 방언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습을 많이 하면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연습하여 만들어낸 가짜 방언까지 동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여 탈취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방언과 그 파생상품들은 가짜목사들의 재산을 두둑하게 해주는데 기둥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기 방언을 '검증된 통역'으로 검증한 경우 외에는 골방에서만 하든지 금하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짜는 단호하게 떼어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방언하지 않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마냥 헛되이 중얼거리는 그 거짓된 말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혼을 빼며 주머니를 터는 원흉이 방언입니다. 스스로 성령 충만하다고 착각하게 함으로 거룩한 삶을 시작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짜방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