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쓰러짐은 성령의 사역인가?(이인규권사)

주방보조 2009. 8. 25. 07:24

쓰러짐은 성령의 사역인가?

 

소위 빈야드운동,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집회에 직접 참석한 일이 있었다.

인도하는 목사는 쓰러짐과 같은 어떤 특별한 현상들(진동, 웃음등)에 대해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경우라고 설명했으며, 한사람씩 앞으로 나오게 하여 안수를 해주었다. 필자와 일행은 강한 호기심으로 줄을 섰다. 갑자기 바닥에 두터운 담요를 여러 장을 깔더니,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들이 두 명씩 서 있었다.

안수가 시작되자, 몇몇 사람들이 고목나무가 쓰러지듯이 뒤로 넘어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필자의 차례가 되었는데 안수자는 나의 머리에 손바닥을 대더니 느리지만 제법 강한 힘으로 뒤로 밀었다. 약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지만 필자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랬더니 안수자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성령에 맡기라고 충고를 하면서 좀더 강한 힘으로 필자를 밀었다. 미리 예상을 하지 못하였거나, 발걸음을 고정하고 물러서지 않았으면 분명히 뒤로 넘어졌을 것이지만, 필자는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자리로 돌아가면서 "언제부터 기독교가 이렇게 유치한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라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안수를 하는 목사는 2명이었는데 다른 목사가 안수를 하는 곳은 두터운 담요가 깔려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갑자기 담요를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한 교인은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부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 주저앉아 버린다. 즉 넘어갈 수 있는 곳을 미리 확인하고 그대로 넘어가면 다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다. 반면에 담요가 깔려있는 곳은 정확하게 담요가 있는 곳으로 넘어지고 있다.

필자는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는데, 두터운 담요가 여러 장이 깔린 곳은 넘어지는 사람이 많았고, 담요가 없는 곳은 뒤에 붙잡아주는 사람이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지고 있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필자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약속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잘 넘어지지 않았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를 강권하지 못하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본인들이 자기의 의지로 쓰러지고 있었으며, 쓰러지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안수를 받으면 쓰러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쓰러지게 되어있다. 그런 암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을 대지 않아도 쓰러진다.

 

과연 쓰러짐이 성령의 역사인가?

그렇다면 넘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말을 바꾸자면, 쓰러짐으로 성령의 내주를 확인할 수 있는가?

 

필자는 텔레비전에서 태극권을 익힌 사람이 간단한 동작으로 여러 사람을 동시에 쓰러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씨름선수 출신인 사회자를 손가락 하나로 넘어뜨리고 있었으며, 여러 사람이 함께 깍지를 낀 상태에서 동시에 일곱명까지 쓰러트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타종교와 이단집단에서도 이러한 쓰러짐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며,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관점에서 이 쓰러짐의 현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쓰러짐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으며 쓰러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2) 쓰러짐은 성경적인가?

(3)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1) 이러한 집회를 하는 목사들은 쓰러짐을 “안식”이라고 불렀다. “성령 안에서 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쓰러짐을 안식이라고 표현한 성경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어떤 신사도운동을 하는 목사는 입신이라고 하여 쓰러질 때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혹간 천국과 지옥을 다녀올 수도 있다고 주장을 한다.

필자는 예배시간에 예배당 바닥에 누워서 안식을 하는 것보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쓰러져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쓰러짐이 유리에게 유익한 점도 하나도 없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쓰러짐을 왜 예배시간에 받고 있는가?

 

(2) 성경에 성령을 받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는가?

성경은 그러한 경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귀신이 아이를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엎드러져 구르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막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귀신이 사람에게 나오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였던 적이 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4:35)

 

빈야드운동을 하는 목사가 몇가지 쓰러짐의 경우를 성경적으로 인용하는 글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격한 사람들(모세, 이사야. 요한등)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외함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땅에 엎드린 것이지, 성령을 받았거나 혹은 성령의 충만한 사역으로 쓰러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졌다(요18:6)고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권위 때문에 뒷걸음을 치다가(went backward) 넘어진 것이며, 무엇보다도 군사들은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 경우(마28:4)를 말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우덤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무서워서 기절하였다(죽은 사람과 같이 되다, like dead men)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땅에 엎드린 것이라든지(행9:4), 요한이 밧모 섬에서 쓰러진 일(계1:17)등을 비유하는데, 그러한 것들은 성령에 의하여 쓰러짐이 아니라, 본인이 두려움과 놀라움에 의하여 땅에 엎드린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쓰러짐을 인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성경의 억지 해석의 경우가 될 것이다.

 

(3) 성령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성령을 파송하신 이유는 개인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효과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하여, 구원을 보증하고 인치심을 주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시고, 구원의 날까지 성도를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파송하신 본질적인 이유가 된다.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쓰러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만일 쓰러져야만 구원을 받는다거나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이단집단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다면 쓰러지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예배시간에 안식하기 위함인가?

성령이 도대체 왜 사람을 쓰러지는가? 솔직히 아무런 이유도 없다.

쓰러지면 믿음이 더 강해지는가? 구원을 빨리 받는가?

성경에 성령이 충만하거나, 혹은 성령을 받으므로 쓰러진 경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쓰러짐이 아무런 효과나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가정하여 보자. 만약이라도 그럴 경우에는 그 집회는 참석하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타종교나 이단집단에서도 그러한 쓰러짐 사역이 행하여 진다는 것은 그러한 집회가 성령의 사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성령을 기껏 손바닥에 가짜 금가루나 만드는 분으로 축소시키지 말고, 아무런 이유도, 유익도 없는 쓰러지는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설명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줌으로서 자신들의 집회와 사역이 성령이 충만한 사역에서 비롯된 것임을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유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왜 이러한 집회를 하는 목사들은 놀랍고 큰 기적과 표적은 보여주지 않는가? 성령의 능력이 유치한 것만 가능하게 하고 큰 기적의 역사는 보여주지 못하는가?

 

예를 들면 가짜 금가루 대신에 벽돌이 통째로 순금으로 변하거나, 마14:29의 베드로와 같이 물 위를 걷거나, 왕하6:6의 엘리사와 같이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거나, 죽은 시체를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기적은 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살렸다는 기적을 직접 보여주는 집회는 한번도 없었다. 다만 어떤 목사가 “죽은 자를 몇 명 살렸다더라”는 소문만 있을 뿐이며,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다.

 

우리는 쓰러지지 않아도 예수를 믿음으로 충분히 구원을 받으며, 그러한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가 없이도 충분히 구원을 받는다.

아무런 현상과 표적이 없어도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요20:29)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쓰러짐이나 이상한 현상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과장하는 집회가 아래에서 언급한 내용과 동일하다고 판단이 들면, 여러분들은 그 집회를 더 이상 참가하지 말고 나오는 것이 좋으며, 그 시간에 기도를 하거나 성경구절을 하나라도 더 읽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본다.

 

1. 비본질적인 사역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절대화시켜 포장하는 경우

2. 성령의 사역을 이유로 헌금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

3. 전혀 유익하지 않은 무질서한 예배의 형태(쓰러짐, 진동, 구역질, 웃음, 짐승소리, 유치한 표적과 현상)를 계속 강조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