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주방보조 2009. 3. 13. 14:18

나는 분명히 말했다.

너 이번엔 회장같은 것 하지 말라고

녀석은 곁눈질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요?

 

그런 것은 여럿이서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은 것이니까

3,4,5,6학년동안 1학기 4명 2학기 4명이니 4*8=32

너같이 한번 한 친구들이 참으면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너희 모두가 회장 부회장을 한번씩 하게 되니 말이다. 

 

지난주 초에

난 녀석이 막내누나에게 이번에도 회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의 사상에 동조할 수는 없었나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배반을 말할 용기도 없었고,

나는 녀석을 불러 정말 마음에 없는 축하를 해 주었다.

 

다음날 여자 회장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고 우리는 고민을 시작했다.

작년엔 학교에 한번도 가지 않고 약간의 협조만으로 회장부모 노릇이 다행히 끝났었는데

이번엔 어려울 것같아서였다. 1학기에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자주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말씀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난 토요일에 걱정반 근심반 음료수를 사들고 학교에 갔다와서

엄마들과 담임선생님이 참 좋으신분들이라서 괜찮았다는 보고를 했다.

환경미화때 조금, 수련회 때 조금, 그리고 녹색어머니회 많이...협조를 부탁하셨다고.

 

나는 녀석에게 시간만 있으면 인상을 썼다.

영웅심을 버려야 한다고. 이번 임원수련회때 드는 돈 5만여원은 네 용돈으로 보충해야하는 것 아닐까 생각중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배반해서 기분이 좋냐고.

녀석은 임원수련회비를 언급할 때 난처한 얼굴빛을 잠간 비췄을 뿐 나머지 이야기들에 대해선 싱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8명이 회장 후보로 나섰는데

자기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떨렸고

아이들이 자기에게 16표를 주었을 뿐이라고. 영웅심 같은 것은 없고, 아버지를 배반한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고.

 

그러나

녀석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작년 9월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뿌요뿌요 80연승의 기록이 마침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녀석이 회장이 되어 나의 눈치를 보는 잠시간의 틈을 이용하여 11점 내기를 5점 먼저내기로 규칙변경을 했던 것이다.

시간 절약과 공부환경개선이라는 명목을 앞세워서.

그리고 마침내 나는 녀석을 5:3으로 쳐 부수고야 말았다.

녀석의 통곡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다만 철옹성이 잠시 흔들리고 있었던 것 뿐이다. 

앞으로도 녀석을 다시 이길 기회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력이 월등해져서가 아니라, 녀석이 잠시 정신이 산만해져 균열이 나 있을 때 일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벌써 4연패를 당하고 있다. 5:0, 5:1 정도의 스코어로.

녀석은 눈이 벌개지도록 정말 한참을 울었다.

그만큼 나는 고소했다.

그러면서 공부에 뒤졌을 때 저리 울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다.

 

,,,

 

녀석이 오늘 1박2일 임원수련회를 떠났다.

나는 아침에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24시간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사 가지고 녀석의 가방에 넣어 주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녀석의 가방과 실내화가방을 가지고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녀석이 떠났다고 알려 주었다.

 

그 소식에

순간...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

 

나는 벌써 그 배반자 녀석이 그립다.

 

아마 내일 오후까지 나는 칙칙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것이다. 

 

 

 

  • 김순옥2009.03.13 17:26 신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는 임원이 되었다고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하긴 소풍때는 선생님 점심을 챙겨야 했던 것 같네요.
    주로 남자회장 엄마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끌어 가는데 저의 경우는 그게 싫어서
    연락도 하지 않고 협조할 일이 있으면 그냥 알아서 처리하는 쪽으로 했더니 그것도 불만인 엄마들도 있더군요.

    중학생이 되니까 학급회장이 된다고해서 학부모의 역할은 없더군요.
    한빛이 학교는 학년초 학부모회도 없어서 담임선생님 얼굴도 모른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교신이가 인기가 많은가보네요. 반 전체에서 거의 반의 지지를 받았으니까요.
    한빛이는 초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했던 아이가 같은 반이라서 그 아이가 잘할 거라며 지지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5명 중에서 5표 차이로 1등을 해서 회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교임원을 꿈꾸는 아빠의 권유에 한빛이도 저도 전혀 협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급임원의 역할이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신이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주고 싶네요.
    허전하실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함께 게임경쟁을 하시는 모습도 귀엽습니다.ㅎㅎㅎ
    남편이 한빛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면서도 점수를 얻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교신이는 아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까요? ㅎㅎㅎ


    답글
    • 주방보조2009.03.13 20:41

      교신이의 두가지 정도 드러나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기싫어하는 것이 표가난다는 것이고(아직 공부는 아니고^^)
      다른 하나는 가끔 발끈!!!하고 터지는 다혈질적 호전성입니다.^^
      그래도 운동을 잘하고...예쁘고...하니 좀 인기가 있기는 한가봅니다.
      저는... 제 말을 안 들은 것을 녀석이 조금도 후회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이 사실은 좀 섭섭합니다.

      지는 법도 배우고 남들에게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해야한다 생각하거든요.

      한빛이는 그런 마음을 이미 배우고 잇군요. 다른 친구를 지지해 주었다니...진짜 지도자 자격이 있습니다.

  • malmiama2009.03.13 18:41 신고

    전혀 다른 사람의 글 같은데...내용은 같은 사람의 글이 맞군요.^^
    수련회 다녀왔을 때 안아 주세요. 꼬옥.

    몇 년 전 다 큰 정민이를 꼭 안아줬을 때..녀석은 펑펑 울고...난 외롭지 않던데요ㅋ

    답글
    • 주방보조2009.03.13 20:46

      ㅎㅎ...그냥 딱딱하게 써 본다고 썼는데
      원경이가 뭔가 글이 어둡다고...비판을 하네요^^

      아직 우리 교신이는 제 거친 수염이 싫어서 안아주고 볼이라도 비비려하면 몸을 뒤로 빼기 일쑤인 정도지요.
      엄마한테는 언제나 허용되는 뺨이...제겐 ㅎㅎㅎ 그렇다고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날이 오겠지요. 녀석이 펑펑울고 전 기분좋고...ㅋㅋㅋ

  • 이사야2009.03.13 23:18 신고

    참 잘하셨습니다.
    교신이를 힐책하신 일... 회장 되지 말라고 하신 일...
    아마 큰 공부가 되었을 겁니다. 지금은 아빠의 그 깊은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아아... 그러나...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학교 교육의 잔혹한 풍토 속에서 그 아름답고 천진한 얼들이
    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뉴스앤조이에 손모 장로 신유??집회 중에
    사망 사건이 있었단 기사가 떴습니다.
    손장로는 그 사망을 아름답다고... 했다는군요...
    퍼허...
    어이가 없습니다.

    답글
    • 주방보조2009.03.14 01:22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우리들의 악함을 대변해주는 증상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치유를 선포하고 안 나으면... 믿음이 부족하니 하나님이 그러셨느니...나았다고 하면 간증해라 떠들어라 하고...
      예언해 놓고 틀리면 ... 연기되었느니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느니...우연히 맞추면 책을 한권 써내고...

      그런 것에 열광하는 것...참 문제구요, 그런 것들을 청빙하여 집회를 열게 해주는 무리가 또 목사님들이란 사실이 기막히구요.

      ...

      저 어렸을 적엔 반장이니 부반장이니 하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자린 거의 공부 잘하는 녀석들의 차지였지요. 성적이 ...모든 것을 넘어선 권력이며 정의며 선함이었으니까요.
      요즘은 그때보다는 나아진 듯 합니다만...
      아직 멀었지요. 아이들에게 경쟁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평등을 가르쳐주는 것이 순서일텐데...하는 입장에서요.

  • 청랑2009.03.15 11:56 신고

    난 또... 웬 외로움? 그랬잖아요... ^^
    교신이 덕을 좀 보셨군요.
    샬롬~

    답글
  • coolwise2009.03.18 20:28 신고

    ㅎㅎ........... 소외되는 아이들에 비하면 큰 다행이지요.
    책임을 맡는 일은 소중한 경험이 되리라고 봅니다. 축하받을 일 !!

    우리집 꼬마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난생처음으로 임원이 됐는데..
    자기 소개할 때 할 말을 다 잊어먹어서 할수 없이 '재미있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 하는군요.
    요즘 애들은 진중한 사람보다는 재미있고 활달한 사람을 좋아하나 봅니다.


    답글
    • 주방보조2009.03.19 01:54

      첫째부터 세째까지는 초등학교 시절이 참 힘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따를 당하고 그래도 집에오면 동생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회상을 하곤 하지요.
      요즘은 다들 잘 지냅니다. 친구들도 적당히 있고...^^
      네째는 워낙 원만해서 적이 없고...선생님들이 한결같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니 문제없고
      막내는 오히려...좀 나서서 ...걱정입니다.
      지기 싫어하고...회장자리도 다른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대신 차지하려들고...정말 여러번 강조해서 말했었거든요. 나누어야 한다고...한번 해 보았으니 되었다고...

      ㅎㅎ...저도 고1때 처음으로 부반장이 되었었는데...전 체질에 맞질않아서 2학기 중간즈음 선생님께 반납하고 말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