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다섯 아이 중 대장인 둘째 나실이는
영리하게 굴지는 않지만 책임감이 남다르고 성실함으로 무장되어 마치 든든한 기둥같은 아이입니다.
물론 몸집이 좀 있으므로 잠을 잘 잔다는 약점이 하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작년 녀석이 야자를 하겠다고 한 이래로
저녁 10시가 되면 저는 나실이의 학교 운동장에서 시장용 손수레에 녀석의 가방을 실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야자를 하는 날이면 저의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과가 되었고...또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이라 어떤 때는 제 하소연을 할 때조차 없지 않을 정도였지요.
요즘은 운동을 좀 할 요량으로 한강변을 돌아 녀석의 학교까지 속보로 걸어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를 택하여 약간 땀이 나게 다니고 돌아올 때도 되도록이면 한강변으로 돌아 녀석도 운동이 조금이나마 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공부에 전념하려면 체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어제는 비가 오고 난 뒤라서 한강변 야경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원경이와 다리에 쥐가 나도록 빨리 걸어 잠실대교를 올라가 광양고등학교로 갔습니다. 너무 빨리 걸은 탓에 학교 운동장에 10시 10분 전에 도착을 했습니다. 원경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운동장을 그래서 두바퀴를 더 돌았지요.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바람도 상쾌하고 땀도 적당히 나고 말입니다.
...
10시 정각 종합관 입구에 서 있으니 친구 둘 과 나실이가 나왔습니다.
친구 둘은 각각 어머니가 한분은 우리처럼 마중을 나왔고 한분은 야자감독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나오셨습니다. 어머니들 대화에 끼이기도 그렇고 하여 나실이에게 인사드리고 가자 하였습니다.
그런데...친구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는 나실이의 표정이 영 밝지를 않아보였습니다.
제 기분이 좋아서인지...딸의 표정에서 읽히는 어두움이 무척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성적이 별로 신통찮아서 그런가 물었더니...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친구와 다투었느냐고 물었더니...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야자시간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계속 묻고...녀석은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계속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우직할수록 그 표정이나 말투에 자기 속이 그만큼 많이 드러나 보이는 법입니다.
교활이라는 것 하고는 너무나 먼 인간 나실이는 ... 입으로는 계속 아니라고 하고 머리는 계속 흔들어 대어도..."나는 지금 무지 화나고 울고 싶고 신경질나는 일이 있다"고 바디랭귀지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두 답답해서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한테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으면...함께 사는 이들이 힘든 법이라고...가족이라면 그런 것 탁 털어놓아야 한다고...
그리고는 저도 더이상 말하지 않고 두녀석보다 조금 앞서 열심히 걷기만 했습니다.
...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자연학습장이란 곳인데요...나무도 많고 꽃밭도 잘 조성되어 있어 요즘은 제법 진한 장미향을 바람결에 음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셋이서 말없이 막 자연학습장 뒤 입구에 들어서면서...나실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캄캄한 밤 자연학습장이 주는 호젓한 분위기가 녀석의 마음을 열었는지, 아니면 제가 말이 없어지자 부담이 되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아빠한테 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이야기하면 아빠가 뭐라고 말하실지 뻔하게 알기 때문이예요
말해봤자 뻔한데 제가 뭐하러 말하겠어요. 속만 더 상하지"
일단 저는 이녀석의 발언에 엄청나게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아빠가 평소에 이야기해 준 것으로 미루어 자신이 답을 알고 있으니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임이 분명하지만...무시당한 기분이었거든요.
더 이상 자기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무의식적 표현이 분명히 거기 내재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자라면 부모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뻔한 소리나 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니까요.
제가 제 어머니께 그랬었고
나실이가 이제 다섯아이 중 처음으로 아버지인 제게 그리하는 것이지요. 인과응보라고 해야 하나요?^^
...
아침에 시편을 몇편 읽으면서...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웃었습니다.
부모가 되어서...자식이 그런 소리를 할만큼 큰 것을 기뻐하고 대견해 해야 마땅한 것을...
그러나 우울한 것은...이 세상의 모든 아비의 평균 수준에 훨씬 못미치는 저의 수준 낮음때문이리라...하고...
-
아빠는 아들이 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답글
이왕이면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어하지만...
그래도 아들은 긴 대화끝에는 결국 코드가 맞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언젠가 병원 앞에서 만나서 점심을 시켜놓고 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 없어서
혼자 병원에 가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이제는...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렌트카 문제로
의견일치가 되지 않았고 아들은 코드가 맞지를 않으니 떨어져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막상 곁에 와서 지내니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더 많더군요.
믿어주려고, 마음을 비우려고, 마음까지 공유하려고...발버둥치는 부모와는 달리
이미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아들은 딱 그만큼씩 멀어져 가는 것 같더군요.
누구랄 것도 없겠지요.
우리의 부모가 그랬을 것이고, 우리가 그랬고, 우리 아이들이 그렇고, 언젠가는 그넘들의
자식들이 또 그럴 것이구요.
나실이의 굳은 심지는 변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린 충신이에 비해 장남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때때로 그 무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지금은 그저 자식들에게 격려를 해주는 것이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설령 미덥지 않아도 너만 믿는다...뭐 그런거지요.
믿는만큼 믿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잖아요.
큰형부가 구이동에 살면서 영동여고에 다니는 딸 야자시간이 끝날 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렸다가 함께 왔었다고 합니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는 아버지...그 고마움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빛이가 무거운 가방 짊어지고 다니는 게 항상 안타깝기만 하답니다. 작은 어깨에...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보다 사랑의 강도가 훨씬 높다는 건 아시죠?
'수준'이라는 게 참 위험한 단어지요? ㅎㅎㅎ -
고민하는 나실이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그 모습위에
답글
어린 시절 제 모습도 겹쳐집니다.
부모로서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을 나실이의 충격 발언..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짐작도 갑니다.
저도 언젠간.. 겪게 되겠죠?
하지만.. 언젠간.. 나실이도.. 자신의 진심을 듣길 바라고.. 아버지의 조언이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때가 오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히려 부모님과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는데도..
불행히도 제 부모님은 가난과 질병에 찌들어 자식의 여린 마음까지 돌 볼 여유가 없으셨습니다.
제가 오히려 불편한 제 속내를 몸짓으로 뿐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도 귀담아 듣지 않으시던 분들이었지요.
하지만 철 지나서 생각해 보니 자식의 투정 하나 하나.. 담담히 들어주실 만큼의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오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집사님처럼 자녀의 아픔과 고민을 몸짓만으로도 눈치챌 만큼
세심하고 사랑많은 아버지가 있는 나실이가 깨닫지 못할까요..
나실이를 기다려 주시고.. 믿어주세요. ^^ -
나실이가 그렇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그만큼 편하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구요. 비록 그 말에 아빠가 상처를 받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기분이 좋잖았던 이유 또한 술술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
답글
그런데 저는 글의 주제 보담도.... 딸을 마중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너무 보기 좋게 다가옵니다. 늦은 밤에 딸과 함께 거닐며 얘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푸근하고 든든합니다. 다섯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참 쉽게 이해되어질 듯 싶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강하게 이루어질 가족분들 간의 화합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
아내는 아이들 얘기를 잘 들어줍니다.
답글
한심하고 맘에 안드는 얘기는 그냥 담아뒀다가 내게 넘깁니다.복받을 넘..운운하며..^^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교정은 하나님께 맡김이 옳습니다.
오로지 사랑이지요. 사랑...무쟈게 어렵지만 그래서 가치가 더하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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