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호> 자유의지... 2002년 02월 08일
일전에 뜨거웠던
믿음에 대한 토론을 정리해보려고 그 수많은 독자의 한마디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전체 내용을 다 실어버릴까...생각하였고
하나씩 카피하여 붙여넣기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조정희님의 믿음에 대한 주장...에 대한 지지나 반대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이 너무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둘을 대비시킬 반대라는 것이 너무 지엽적인 것들에 매여서 그 굵기를 서로 대등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관련된 모든 한마디들을 카피해 올리다가...
이런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차라리 바쿠스님에게 한번 정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글도 잘쓰고 똑똑하고 시간도 제법 많으신 것 같으니까...^^
그러다가 그것도 그만 두기로 하였습니다.
비록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 부탁한다는 것은 크게 빚지는 것같아서 싫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오늘...이런 식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말자 생각했습니다.
...
이렇게 사과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제 의지의 작용이었습니다.
제게는 하거나 말거나 할 ...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하여 누가 비난하면 그 비난을 들음으로 책임을 감당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천부적인 자유의지로 비롯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자유의지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 그 어떤 말씀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명령이나 권고나 설득이나 약속따위가 전혀 쓸모 없을테니 말입니다.
...
저는 이렇게 믿지만
자유의지 그 자체의 심오한 이야기는 ... 잘 모릅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말을 다른 말로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아예 그런 것이 없다 주장함에 가벼운 코웃음을 보낼 뿐입니다^^
02/08 믿음에 대한 것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26
아마 앞으로도 정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요즘 워낙 독자의 한마디가 폭주하여
믿음에 대한 토론들을 찾아보시려면 꽤 많은 페이지를 넘겨야 합니다.
1월 10일에 조정희님이 쓰신 글과 1월16일 바쿠스님이 쓰신 ... 글을 퍼 올려 드려...다시 그 토론을 상기하는 것으로 가름할까 합니다.
앞으로는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을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 스스로 분수를 알아야지요...
...
01/10 *왜 "믿다"는 "설득 당하다"인가? 21
한국말 "믿음"의 영어 번역어는 페이스(faith), 트러스트(trust), 빌리프(belief) 등입니다.
"페이스"는 "종교적인 믿음 혹은 신앙(信仰)"을,
트러스트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 혹은 신뢰(信賴)"를,
빌리프는 "생각이나 주의에 대한 믿음, 혹은 신념(信念)"을 가리키는 말로
각각 구별하기도 합니다... 만,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페이스"는 라틴어 피데스(fides)에서 나온 말인데,
그 동사 피데레(fidere)는 "신뢰하다"(to trust)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라틴 어원까지는 페이스와 트러스트 사이에 뜻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피데스가 유래된 고대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의 뜻은
"진실에 대한 확신, 즉 신념"(conviction of the truth of anything, belief)이랍니다.
그래서 영어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다 합쳐서 말한다면,
페이스와 트러스트와 빌리프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용법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지 그 어원적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관련된 이 세 낱말의 근원적인 뜻이 무엇일까요?
연원이 가장 오래된 피스티스(pistis)는 동사 피스튜오(pisteuo)의 명사형인데,
피스튜오는 다시 페이쏘(peitho)의 파생어입니다.
이 페이쏘의 뜻은 영어로 다음과 같이 풀리어 있습니다.
1. persuade (i.e. to induce one by words to believe)
2. be persuaded (to suffer one's self to be persuaded; to be induced to believe)
3. to trust, have confidence, be confident ( http://bible.crosswalk.com/ )
그래서 헬라-라틴-유럽으로 이어지는 언어 전통에서 "믿다"는 "설득 당하다"입니다.
다음으로 한자문화권의 "믿다(信)"의 뜻을 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한자 문화권의 "믿다"도 "페이쏘"와 비슷한 뜻을 가졌습니다.
"믿다" 혹은 "믿음"은 한자로 신(信)입니다.
이 글자의 파자(破字)는 유명하니까 이미 잘 아시겠지요.
"사람(人)의 말(言)"입니다. 여기서도 "말"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信)의 새김에는 "미쁘다" 즉 "믿음직하다"가 있습니다.
자기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미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받아들이게 하기도 쉽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헬라-라틴-유럽 제언어의 "믿다"의 궁극적인 어원이 "페이쏘" 하나인 것처럼...
한자 문화권에도 "믿다"는 뜻을 가진 글자는 신(信)자 하나 뿐입니다. 동의어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자 문화권의 "믿다"는 오로지 "사람의 말"과만 관련되는 개념이라는 뜻이지요.
인류 역사상 연원이 길고 규모가 컸던 두 문명권의 "믿다"가
"말을 받아들이다" 즉 "설득 당하다"라는 뜻을 갖게된 것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히브리 문화에서도 "믿다"는 "설득 당하다"과 관련됩니다.
믿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에무나(emuwnah)"는
그 자체로는 "흔들림이 없고 튼튼하여 오래 지속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동사원형인 "아만(awman)"의 뜻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입니다.
1. to support
2. to make firm
3. to accept as confirmed (http://bible.crosswalk.com/)
"아만"의 세 번째 뜻인 "확인된 것으로 받아들이다"는 "설득 당하다"와 뜻이 같습니다.
설득 당하는 것은 결국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내친 김에 한국어 "믿다"의 어원분석도 해보고 싶었습니다....만...
자료가 너무 없어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됐습니다.
한글의 기록은 기껏해야 15세기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믿다"와 "미쁘다"가 어근 "믿"을 공유함을 확인하는 데 그쳤습니다. (미쁘다 = 믿 + 브다).
자기 글을 남겨 놓지 못하면 자기 말의 뿌리도 제대로 찾지 못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유럽 문명권과 한자 문명권이 공히 동의할 수 있는 "믿다"의 어원적 개념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로 설득하는 것을 받아들이다," 즉 "설득 당하다"입니다.
"설득 당하다"로서의 "믿다"는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이 보편적 개념은 개별 영역에 얼마든지 응용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혹은 무엇에 관한 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뿐이지요.
예컨대,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즉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믿음"인 것입니다. (Q.E.D.)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01/16 조정희님과의 믿음 토론에 관한 소박한 정리. 22
논쟁을 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주 높이 평가 드리고 싶은 것은...
>마침내 "맹신"과 "근거 있는 믿음"사이의 차이가 생각만큼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믿는 바이기도 합니다.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한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믿어졌던 기독교의 믿음은 (중세의 수백 년간),
>오늘날 바쿠스님이나 오강남 교수 같은 분으로부터 맹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지난 1백년동안 그 근거를 의심받지 않았던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다윈이나 그 후속학자들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점은 종교는 스스로 '완벽'하다는 '믿음'을 지닙니다만, 과학은 스스로 완벽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불합리할 수 있다는 자세로 연구하는 것 이지요. 다시 말해서
과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스스로 과학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창조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합리적이며 스스로 완벽하
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 풍미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까지 합니다.
기독교는 지난 2000년간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만드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해 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도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말꼬리로 인식하지 말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을 합리주의적인 이성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한때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서양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하지요.
사실 많은 나라에서 더 이상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합리주의에 공격 받은
이유는 폭력성을 동원한 배타성이었기 때문이지요.
**** 조정희님의 글 다음 부분은 너무 좋습니다. 모두 한번 음미했으면 합니다. ****
>그러나 "이성적인 근거 대기"가 한계를 가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의 지성(知性)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걸 내다 버린다는 것은 자원낭비입니다.
>우리의 감정(感情)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은 때로 명확한 사고(思考)를 방해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또 지성과 감정이 제 역할을 못할 때에는 의지(意志)가 그 자리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진 "마음의 활동이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를 모두 잘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한계가 있더라도....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대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찬성'합니다. :)
>이번의 "믿음"에 관한 토론이 이렇게 부드럽게 마무리될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처음 시작이 워낙 과격(?)했던 탓일 겝니다. 드잡이와 욕설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전 이번 토론이 어떻게 끝날지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여 '믿음'에 의지하다
보면 자칫 좋지 않은 선입견도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끝으로..
조정희 형제님에게 거울삼아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바쿠스
원필
02/08 베스트칼럼으로 소개되고 있는 "어느 무교회주의자..."에서 24
근사 체험(近死體驗, near death experience)에 관한 최근의 저술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레이먼드 무디(Raymond A. Moody)의 <Life After Life: The Investigation of a Phenomenon―Survival of Bodily Death>(1975 초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면 <삶 이후의 삶: 육체적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연구> 정도가 될 것이다.
레이먼드 무디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1969년 박사학위를 받고 3년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발간 당시 미국에서 수십만 권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던 이 책은 무디 박사가 150명가량의 근사 체험자들을 일일이 인터뷰한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낸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정우사, 1977)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자리에서 소개하려 하는 <죽음에서 새 생명에로>의 원제목은 <My Descent into Death and the Message of Love which brought me Back>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죽음에서 나를 되살린 사랑의 메시지>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노던 켄터키 대학에서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파리 여행 중 근사 체험을 한 하워드 스톰(Howard Storm)이 자신의 체험 내용을 서술한 책이다. 번역자는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진주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에 재직 중인 이헌근 교수이다.
스톰 교수는 1985년 6월 1일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던 중 갑작스런 질병으로 의학적 사망 진단(!)을 받았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극적인 경험을 한다. 결국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1992년 그리스도 연합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기에 이른다.
스톰이 근사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사랑의 본질을 배우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유 의지대로 사랑을 선택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살인, 폭력, 전쟁, 타인에 대한 지배를 얼마나 싫어하는 분인지에 대해 천사들로부터 이렇게 배웠다고 말한다.
“두 전쟁(1, 2차 세계대전)은 예방할 수도 있었고 절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 전쟁 동안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도 당하신다.”
스톰은 “하나님께서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당하시는지 우리가 알기만 한다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전쟁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인을 원하면 그것을 막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증명할 극적인 행위를 모든 사람에게 하시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압에 의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믿음을 강요하시지도, 믿음을 갖도록 협박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무관심하게 복종하는 노예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유 의지로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랑이 결여된 종교적 행위를 가증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교적 위선자보다는 오히려 진실한 불가지론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스톰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있을 만큼 선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가길 원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하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와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지 거부할지를 이곳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디의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 책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온몸으로 경험한 스톰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님은 나를 구하러 오셨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기쁨 위에 기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를 안으시고,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듯, 아버지가 돌아온 탕아에게 하듯 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동안 나의 삶에 믿음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절망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었고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는 또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이 위로를 느낄 수 있도록 제각기 상황을 다르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각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며 보살펴 주시는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나 같은 자에게 그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스톰에 의하면 ‘종교’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란 각 사람들의 말, 생각, 행위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한 다음의 말과 다르지 않다.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는 자신의 ‘교파’나 ‘교회’를 더 사랑하는데 이르게 되고, 마침내 모든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끝맺게 된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해야 하겠다. 실은 나는 엊그제 예기치 않게 이 책의 번역자 이헌근 교수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물론 나는 그분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다. 그분은 내가 최근에 번역한 책을 구해서 읽다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며, 그 책에 적인 이메일 주소를 보고 연락을 취해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헌근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책을 내면서 출판사 사장과 함께 독자들로부터의 많은 호응을 기대 했는데, 일부 보수적 목사들이 이 책에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심한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출판사 사장은 이 일로 고민하다가 일단 수거하고 그 항의 부분을 빼고 새로 출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이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짓밟아버리고야 마는, 이 바리새파 목사들의 꽉 막힌 태도를 보노라면 중세 카톨릭 교회의 종교재판관들이 생각난다.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그들도 ‘진리’보다는 ‘기독교’, ‘기독교’보다는 자신들의 ‘교파’와 ‘교회’,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바리새인과 카톨릭 종교재판관 등이 면면히 이어온 유구한 종교적 위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목사들은 지금도 자신들과 같은 교리를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이를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많은 진실한 영혼들이 가련하다. 그리고 가증스런 위선의 탈을 쓰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목사들의 영혼 또한 불쌍하다.
끝으로 사족 하나. 근사 체험을 한 사람은 의외로 많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로부터 조롱을 당할까봐 혼자만 가슴에 담아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종교적 체험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책으로 자신의 체험을 소상히 설명한다는 것은 저자로서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얼마간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을 잘 알면서 이 책을 소개하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독교에 ‘믿음의 신비’가 전혀 없다면 세상 철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그는 또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이 위로를 느낄 수 있도록 제각기 상황을 다르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각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며 보살펴 주시는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나 같은 자에게 그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02/08 이스라엘의 3가지 오해 23
이스라엘의 3가지 오해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성전건축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배를 드리는 처소는 필요합니다.
이 성스런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성전건축에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면-
이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는가?
이 책임을 누구에게 지워야 하는가?
성경에서 성전을 짓는 당위성만 보지말고
이런 시각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첫번째: 이혼 증서
*백성들이 원함
마19: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완악함을 인하여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두 번째: 왕을 요구함
*백성들이 원함
삼상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분노하심으로 주심
호13:10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세 번째: 성전을 원함
*다윗이 원함
역대상17:1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2 -나단이 다윗에게 고하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바를 행하소서
이처럼 다윗왕과 나단 선지자가 자신들은 화려한 궁실에 있음에 죄송스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거 하실 집을 건축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짓지 말라 하심
대상17:3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시며 그이유를 10절까지 주심.
*다윗의 오해
대상17:11 -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2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자비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며
:14 -내가 영영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11절의 말씀 때문에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14절에 말씀으로 인하여 앞으로 오실 예수님이셨다.
그로인해 지혜의 왕인 솔로몬도 이 오해를 풀지 못하였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성령이 알려 주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면 엄청난 댓가를 치름이다.
좀더 다윗과 나단 선지자와 솔로몬은
하나님께 더 묻고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께 간구 할 때 이점을 명심하고 구해야 한다.
*솔로몬의 오해
왕상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솔로몬이 전심을 다하여 성전을 지은 역사가 9장까지 나온다. 허나
하나님의 뜻은
역대상17:3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5 -내가 이스라엘을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성막에 계시기를 원하시면서 10절까지 설명을 주시면서 마지막 말씀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신약에 와서 스데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다시 한번 증명이 되었습니다.
행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50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말씀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 이셨습니다.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결국 성전을 모독한(?) 스데반과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율법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 주시겠다는 성전이 지어질 수가 없습니다.
율법 안에 있으면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어떤 자일지라도
모세 율법의 수건이 가리워져 있기에 절대로 이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다는 성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지어 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백성들의 떼쓰는 간구를 들어주셨을까?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간구는 하지 말라는 경고일까요?
이창호
02/08 자유선택과 책임이라... 27
>제게는 하거나 말거나 할 ...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하여 누가 비난하면 그 비난을 들음으로 책임을 감당합니다.
혹시, 정리하지 않으면 원필님을 불태워 버리겠다.. 라고 해도 자유의지에 따라
정리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바쿠스
02/08 공갈협박에... 18
굴복하는 것도 그것을 피하는 것도 또는 고발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제 마음의 문제이니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혹 누가 나를 불태워버린다고 했다 할지라도
나의 결정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요.
...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의지가 아니라
영향을 받지만 나에게 최종적인 결정권이 있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자유의지란...
원필
02/08 Re:Re:ㅜ.ㅜ/ ... 15
네... ㅜ.ㅜ
격려 감사드립니다~~~ ^^
바꿀 수 없으니 선하신 하나님 손에 맡기라...
정말 그렇네요... 자주 잊어버리는 일이라...^^
유샛다운앳더라이네스
: 힘내세요...
: 세상의 어떤 결정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과 통찰력의 결과인걸요...
:
: 바꿀 수 없는 결론이라면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고...평안한 마음되시기를 바랍니다.
:원필
:
: : 요즘... 정신이 없더랬습니다.
: : 좀 실의에 빠져 있다할까... 도전했던 일들에 다 실패해 있엇죠...사실 더 진지하게 도전했어야 하는 일들이었지만...
: :
: :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 : 당황스러웠죠.
: :
: :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면서도, 저는 어떤 결정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 : 그걸 결정해야 하나,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해야 하나...고민,고민하면서도 그 결정의 마지막까지 저를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 :
: :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 : 전 결정을 내렸는데....
: : 그러면서도... '안돼... 이건 후회할 결정이야...안돼안돼...'
: :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 :
: : 집에 돌아오면서 무지 후회가 되더군요.
: : 결국 후회할 결정을 내린 셈이었죠.
: :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을 내리게 하시냐고 하나님께도 따지기도 하고...
: :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느냐고 아쉬워 하더군요.
: :
: : 이 결정으로 인한 주변의 조소, 외로움 등을 감내해야 할 걸 생각하니...
: : 이게 정말 내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이구나..하는 생각도....들더군요...^^
: :
: : 그냥...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님이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주시길 기도하고...
: : 또 담에 이런 일이 있다면,
: : 이렇게 떠밀리듯 후회할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해봤습니다.
: :
: : 구체적으로 쓰지 못해 죄송하네요...^^
: :
: : ....
: :
: : 그냥 좀 답답해서요.
유샛다운앳더라이네스
02/08 Re:동치미 국수와 은대구 조림/^^ 15
정말 오랜만에 오셨군요^^
님의 믿음정의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쿠스님이 자유의지라는 말에 대하여 냉소적이었나 봅니다.
...
동치미국수하고 은대구조림은 어느식당이 잘하는 지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머님 생신에 거기에서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게요...제가 갈 수는 없고 누님에게 부탁하여야겠지만...
원필
:
:
: 제 칼럼 업데이트도 제대로 못하다가 오랜만에 들어와 보니
: 또다시 "믿음" 이야기가 나왔군요.
:
: 제가 믿음을 "정의"해 보려고 했던 것은... 뭐 심오한 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 지금까지 들어온 많은 믿음의 정의들은
: 그 쉬운 한국말을 더 어려운 말들로 설명하거나.... 아니면...
: "믿음이란 이러저러한 것이 아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면... 실상(實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잖습니까?
: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고 하면... 이번에는 증거(證據)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요.
:
: 또 "믿음이란 맹신이 아니다"라든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라든가...
: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다"는 식의 ".....이 아니다"는 주장도 많기는 합니다만....
: 믿음이 그런 게 아니라면....
: "그러면 쉬운 말로 믿음이 뭐냐?"하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잖습니까?
:
: 저는 그냥 그런 생각에서
: "믿음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는 식의 정의를 찾아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 김원필님께서 인용하신 그 글에만 해도
: 이런저런 어원과 어법 따지기가 골치 아프게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 그런 과정조차도 "쉬운 한국말"로 믿음을 정의해 보고자 했던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
: 그래서 도달했던 조그만 결론은
: "믿음이란 말을 받아들이기" 곧 "설득 당하기"라고 한 것이지요.
: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가 되는 셈이지요.
:
: 그런 뜻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자유의지"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 "생각 없이....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면.... 혹은
: "무서워서.... 무지몽매해서.... 속아넘어가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면...
: 그것은 "설득 당하기"가 아닙니다.
:
: "설득 당하기"는 최선을 다해서 검증해 보고 난 후에
: "받아들일 만 하구나"하는 결론에 도달해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 그래서 하나님은 협박이나 회유하시는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 "끈질기게 설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저는 봅니다.
:
: 그런 설득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 저는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하는 미국 친구들을 만나면 꼭 권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 한인타운에 가서 은대구 조림과 동치미 국수를 먹어 보라고 권하지요.
:
: 먹어본 친구들은 십중팔구 "고맙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권해 주는데도 그걸 안 먹어보고 오는 친구들도 꽤 있습니다.
: 이유야 많지요....
: 교통이 복잡해서... 한인 식당 찾기가 힘들어서... 한국 음식을 안 좋아해서... 등등...
:
: 조금만 시간을 내서 사먹어 보면 제가 왜 그다지도 열심히 권했는지 이해할 텐데...
: 설득이 잘 안되는 경우도 더러더러 있습니다.
:
: 은대구 조림이나 동치미 국수 먹는 문제 가지고도 설득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는데...
: 하물며... 사람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설득이 제대로 된다면....
: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기는 하겠습니다만.....
:
:
: 조정희 드림.
: (성경의 한국 개념)
02/08 Re:Re:자기 소신이 없는 기독교인들.../하하.../그렇죠? 20
뵈뵈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승복할 수 없으면 대들어야지요.
버리든 죽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요나의 머리위에 그늘이 제게도 있습니다.
무루
: 投射라는 말하고
: 鬪士라는 말이 겹쳐서 떠오르게 하는
: 문장입니다.^^
: 원필
: :
: : "투철한 믿음"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독교인들이지만
: : 막상 그들에겐 자기 소신이 없습니다.
: : 오로지 "하나님"의 소신, "성경"의 소신만이 있을 뿐이지요.
: :
: : 혹시 내 생각, 내 행동, 내 결정이 성경의 소신에 어긋나면
: : 어쩌나 늘 전전긍긍합니다.
: :
: : 그런 모습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 :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고민하는 아름다운 모습"
: : 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 :
: : 그 취지와 마음은 갸륵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하나님의 뜻이
: :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도 그대로 행하고 있는 사람도
: : 없습니다. 그 뜻을 인간의 머리로 다 헤아릴 수 없으니까
: : 하나님이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도 하지 않습니까?
: :
: : 결국, 자기 소신대로도 못하고 하나님 소신대로도 못합니다.
: :
: :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증권은 해도 좋으냐 하면 안되느냐
: : 부동산 투자는 좋으냐 나쁘냐, 술 담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 : 이런 질문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 : 바로 기독교인들이 모든 것을 부모님한테 물어보고 부모님이
: : 시키는대로 해야 안심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 : 교회는 그러한 질문에 뾰족한 답변을 제공해 주지도 못하면서
: : 신자들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게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들먹이며
: : 신자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 :
: : 특정 경전과 사상에 의해 사고가 제한 당하고 권위에 소신 없이
: : 굴종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 : 내 소신과 하나님 소신이 다르다면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 : 고 과감하게 따지십시오.
: : 그러는 것이 과연 불경이요, 불신이요, 지옥갈 죄일까요?
: :
뵈뵈
02/08 Re:자기 소신이 없는 기독교인들.../휴~ 33
뵈뵈님, 숨도 못쉬게 몰아치시는군요.
제겐 왜 뵈뵈님 같은 논리적 문장력의 재능을 안주셨을까.
마음만 굴뚝인데, 표현못하는 심정을 아십니까.
부탁드릴것은, 앞으로 기독교인을 통째로 묶어서 말씀하지 말아 주시구요.
비신자가 봐도 존경할만한 기독교인도 있지 않습니까.
소신이 없어서 말못하는분도 있겠지만,
내 말로 인하여 한사람이라도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서,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조심스럽게 하느라
반박도 따짐도 느릿 느릿 가는 사람도 있다는걸 생각해 주십시요.
반박과 따짐으로 지옥가다니요.
저도 교회안에 들어와 거의 몇해를 따지고 분석하다가, 한방에 아니 두방정도에 하나님께 두손 두발 다 들고 아멘! 했습니다. 지금 뵈뵈님 하시는 정도는 못했어도 비슷하게는 했었습니다.
흐뭇
02/09 기독교인의 "소신" 26
.
뵈뵈님께서
하고자 하는 애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소신, "성경"의 소신만이 있을 뿐이지요.**
이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소신대로도 못하고 하나님 소신대로도 못합니다.**
이 내용인 것 같습니다.
왜야하면 순교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믿음의 옛 선배들의 행적을 보면, 하나님의 소신를 따르려 (절대진리자의 모방) 했던 분들을 소신없었다고 애기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신과 하나님 소신이 다르다면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고 과감하게 따지십시오. 그러는 것이 과연 불경이요, 불신이요, 지옥갈 죄일까요?***
이 생각은 잘못이지요. 왜야하면 그분는 "절대진리자"이시므로 그에게 반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뵈뵈님의 주장은
현 기독교인의 자기 중심적인 그릇 된 믿음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즉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것은 자기 소신이 없는 행동은 아니죠. 뵈뵈님이 보시기에 "맹신"이요,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과거에
"가이드 등반"이라는 상업적 등반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불교는 단독등반이라면, 기독교는 "성령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느끼는 가이드 등반과 비교할 수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절대 선"이시요, "절대진리자"인 그분을 모방하고자 하는 것을 소신없는 행위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다만 그 방법에서 그릇됨이 있는 것이 지적되어야만 하는 오류이지요.
마치 뵈뵈님의
과거 기독인으로서의 신앙이 잘못이 있었고, 그것을 고치려 하기 보다는 "신 포도"로 인식하고 옷를 벗어버린 경험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뵈뵈님이
보시기에는 대부분의 신앙인이 "그런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겠지요.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 혹은 신앙은 극히 개인적인 하나님과 당사자와의 특수관계입니다.
나에게는 틀린 것도
다른 이의 것에는 맞을지도 모른다는 관념을 항상 가지려합니다. 왜야하면 우린는 절대로 그분을 통채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저 내 앞에 보이는 한 부분만(그것도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뵈뵈님은
타인의 신앙형태에 대한 평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에 더 힘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분수도 모르고 올렸습니다.
플씨
02/09 나 갔다가 얼핏보니 뵈뵈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진짜 마지막. 23
오늘 아침 궁굼해서 이곳을 얼핏 들셔보니 뵈뵈님이 탈퇴하고 없는 저에게 질문을 하셨더군요.
그것 하나만 답하고 물러갈가 합니다.
이 곳에서 이론 밝아진다고 믿음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안티들이 악악 댄다고 믿음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저 잘났다고 이론 자랑하는 것 같은데 백해 무익이라고 느꼈습니다.
나는 이론에 밝지 못합니다.
단지 여러분보다 인생를 좀더 살았기 때문에 경험이 좀 많고 인생을 좀더 안다는 것 뿐입니다.
이론으로 기독교를 믿은 것도 아니고 지금도 이론에 밝아진다고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 다는 소신은 변함 없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함은 이론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좀 모자라고 무식한 부보님도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박사학위 100개 갖은 사람보다 부모님을 더 존경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이니까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안티들은 안티만 하면 됩니다.
남의 신앙까지 오지랍 넓게 어떻게 믿어라 참견할 권한도 이유도 없습니다.
남이야 이론으로 믿던, 성경 귀절로 믿던 , 무식하게 그냥 믿습니다 하건 참견할 게재가 아닙니다.
남의 부부생활에 정상위로 해라 후배위로 해라 여성상위로 해라 하고 간섭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자문제에 대하여서
그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시대에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증권도 없었을테고....
따라서 지금같은 은행이라는 금융 체제도 없었습니다.
그당시의 은행이라고 해 봐야 큰 사채업자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채업자에게서 이자를 받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어쨋든 이자를 취하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는 금기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보증도 서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보증없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
저도 친구들에게 돈을 몇번 빌려준 적이 잇습니다.
돈이래야 1000만원 미만의 아주 작은 돈이었지만 이자는 한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린적도 있었지만 이자를 준 적도 없습니다.
다같은 교인들이었으니까요.
제 주장은 이자로 돈을 벌려고 하는 행위를 말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은행이라는 기업은 이자로 돈을 법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금융 후진성 때문에 더욱 이자 의존율이 높습니다.
세계적인 은행들은 이자 소득에 의존하기 보담은 주로 투자의 이익으로 은행이 운영 됩니다.
여하튼 믿는 사람들은 가급적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가급적 생산업을 하라는 것이 가르침입니다.
저는 그 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돈이 아주 많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리고 남의 교회의 목사님 실명을 함부로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것입니까 ?
안티들은 예의도 없습니까 ?
배규태
02/09 음냐..... 쩝 15
뵈뵈님
방가 방가^^
소신없음이라.... 음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신념이나 신앙이 말하고자 하는바를 더욱 알기위해 공부하고 적용하며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나가고(이런 것을 프락시스라고 하던가??? 맞나요?^^ )....
자신이 그 동안 배우고 깨닫는 과정에서
그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말하거나 표현할때 우리는 과연 그를 소신없는 사람이라 말할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면서 부화뇌동하는 이가 소신없다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뵈뵈님의 하시는 말의 내용은 알겠지만 그건 다른 표현이 어울릴것 같네요^^
예를 들면 '쟁이',나 '꼴통'(?), 우물안 개구리(?), 꽉 막힌 사람(?)등등 왜 많잖아요?
뵈뵈님이 늘 쓰시던 말들중에 골라봐요...^^
참/// 뵈뵈님
요즘 사막은 춥지 않나요^^
여긴 거의 봄이 오시려고 하는데^^(여기도 광야긴 하지만... 쩝)
소미산
02/09 벙어리 냉가슴 24
뵈뵈님은 맹신을 말씀하시는 걸로 압니다.
그부분에선 동의합니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냥 믿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라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해 이해 안갈때, 따지는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맘속 깊은곳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성적 사고 없이 그냥 따르는건,
믿음이 생긴후에 가능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신은 개인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사랑을 논리적으로 보여줄수 있다면 좋겠는데... 딸려서..참내..
흐뭇
02/09 "믿음 = 야훼에게 설득당하기"를 이젠 약간 이해합니다. :) 22
일전에 조정희 형제님이 야훼에 대한 믿음은 "야훼에게 설득당하는 것이다." 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싶다고 해서 한동안 의아했었습니다. 물론 어원을 까지 들춰가
며 조정희 형제님 나름대로 고집스럽게 풀어서 그렇다고 변명은 했습니다만, 워낙
엉뚱한 예라서 이해를 못했었는데, 지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정희 형제가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간혹 주님이 오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한다는 진술
로 미뤄, 조정희 형제님의 개인적 체험에 비춰 믿음이 야훼에게 설득당한다는 놀리는
그래도 좀 해괴하지만 왜 그런지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정희 형제님에겐 어째서 설득당하기 인지 여러 독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글을 발췌해 봤습니다.
-------------------- 조정희 형제님의 글 중에서.. 갈무리 시작.-----------------
"주님... 오늘은 그냥 집에 있고 싶은데요...."
"그래라..." 하시면 그냥 집에 있습니다.
"얌마, 그래도 가거라" 하시면 가야지요, 뭐.
"그래라" 하시는지 "가거라"하시는 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냥.... 압니다.
그리고....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제가 "교회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날 때"였는데도
예수님께서 "그냥 집에서 쉬어라" 하신 적도 몇 번 있으셨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 말씀을 어기고 교회가 갔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의 "뜻" 씩이나요?
사실.... 그렇게 거창하게 보실 것은 없습니다.
전 그냥... 제가 어렵거나 혼란스러우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지, 대개 "그냥... 알게" 됩니다.
시간이 걸리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저는 "주님께 맡긴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모든 책임은 주님이 진다"는 뜻으로....
설사 내가 잘못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주님 잘못이다.
컨설팅을 제대로 안 해 주셨다면... 말이지요.
그런 막중한 책임을 맡으신 주님이 일을 함부로 하실 리가 없을 겁니다.
"교회가 갈까 말까"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제가 결정해도 되지만...
때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연전에 당시 목사님이 반란을 일으켜서 가까운
곳으로 독립해 나가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시더군요....
"정희야... 오늘은 교회에 가지 마라... 심각한 일이 있겠구나... 녀석들... 참... 왜들 그러는지...." 하며 한숨을 푸욱 쉬시더라구요.
그럴 때는 왜 또 그렇게 교회가 가고 싶은지(?)....
"교회를 빼먹으면 되나..."하면서(어쭈?) 갔다가.... 뭐.... 휘말렸지요.
그때.... 예수님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갈무리 끝------------------------------------------
조정희 형제님한테는 예수가 예배당 출석여부 까지 컨설팅해 주는 정도이니...
믿음을 야훼에게 설득당하기로 하는 표현이야 애교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많은 기독교형제자매님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일 같아 보이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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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주님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
바쿠스
02/09 플씨님에게 질문드립니다. 19
플씨님의 글중에는 많은 모순이 산재합니다만, 그것을 모두 거론하는 것은 바쿠스나
플씨님이나 서로 피곤한 일이지요. 그러니 키포인트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질문드립니다.
>**내 소신과 하나님 소신이 다르다면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고 과감하게 따지
>십시오. 그러는 것이 과연 불경이요, 불신이요, 지옥갈 죄일까요?***
>이 생각은 잘못이지요. 왜야하면 그분는 "절대진리자"이시므로 그에게 반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두가지 질문하겠습니다.
1. 그분이 절대진리자 인줄은 플씨님은 어찌 아셨습니까?
2. 플씨님은 그 분의 뜻을 모르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그에게
반하는 명백한 잘못이라고 어떻게 아시는지요?
* P.S: 그동안 플씨님과의 대화로 미뤄, 우려에서 몇자 적습니다.
먼저 제 글은 플씨님의 "뒤통수 때리기"식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답변을 회피하고 "앗 두통수 맞았다" 라는 식의 불성실한 대답을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냥 침묵하십시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 성실하게 토론해서 제가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바쿠스
02/09 Re:道의 입장에서 본 자유의지 21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흐뭇
: 처음 한두 번 「자유의지」라는 말을 대했을 때는
: 뭐 그런 게 있겠지 하고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칼럼 제목으로 붙고, 조정희님과 지기님의 대화를 엿듣고는
: 상당히 중요한 개념임을 짐작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
: 믿음이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설득 당함이라면 자명해집니다.
: 일전에 나온 「판단하지 말라」하는 말과 통합니다.
: 「성경에 씌여 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얘기했기 때문에
: 마지못해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했을 때
: 그 결과가 성경이나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도록 자신을 닦는 사고 방식」
: 뭐 이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는지 모르지만 도의 원리로 보면 그렇다는 추측입니다.
:
: 사실 어떤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일상적 말의 뜻만 보면,
: 자기의 믿음을 근거로 하든 법의 테두리를 감안하든 부모의 사회적 입장을 고려하든
: 모두 자유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 누가 칼을 들고 옆에서 협박을 하니까 따라 간 것은
: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 주장하겠지만 이 경우도
: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요인이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 뿐입니다.
: 억지 논리 같습니까?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 그러나 도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 결정이나 결론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 하나는 생각하자마자 내리는 즉답이고
: 다른 하나는 지긋이(몇 시간이든 몇 날이든) 생각하는 중에
: 어느 순간 갑자기 뒤어 나오는 결론입니다.
: 전자는 일상적으로 하는 판단이고 후자는 수도자들이 하는 수련입니다.
: 라즈니쉬는 후자를 하나님이 내려 주는 결론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 아무튼 성경인가에 「판단하지 말라」 하였다면 전자를 경계함입니다.
: 후자의 전제 조건으로 불교에서는 「무심(無心)」을 강조합니다.
: 어느 쪽으로 「 판단」하지 말고 「무심」으로 지켜보다가(이게 觀)
: 「하나님의 결론」을 얻는 것 이것이 자유의지라 봅니다.
:
: 저의 해석은 좀 독특합니다.
: 전자의 결론은 어떤 두뇌 속의 프로그램을 한번 실행시켜서 내리는 결정이고,
: 후자는 인위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지긋이 생각하면
: 생각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이상이 모여서 프로그램 자체를 변형시킨 후
: 내려지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
: 자유의지는 그래서 결론적으로
: 즉답(성경에 써 놓은 대로)을 피하고
: 지긋이 생각함(사실은 생각을 멈추고 지켜 봄)을 전제로 합니다.
: 연관되는 요인들이 줄다리기하는 시간을 주는 겁니다.
: 보통은 이때 고민이 따릅니다.
: 줄다리기의 승부가 나면 자유의지의 결론이 나는데 믿음이 깊은 사람은
: 언제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되지요.
: 이것은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이며
: 자유의지의 결론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
: 안티의 말이었습니다.
: 참고가 안 된다면 무시하시고 반박하지는 마세요.
:
: 갓바위
02/09 Re:좋은말 배웠네요. 17
감따함다...
저야말로 스코토시스트네요.
유샛다운앳더라이네스
:
: 스코토시스는 '어둠'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Skotos 에서 유래한 말로,
: 인간의 상태를 속죄하는 내적 성찰로 이끌어 주는 학습에서,
: <인식의 착오>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
: 예를 들어, 우리가 한편으로는 스승이나 동료를 무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 평화와 정의를 장시간 토론하는 것이 바로 스코토시스입니다.
:
: 당파 싸움이 끊임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학문적인 논쟁을 벌인다든지,
: 체중이 너무 늘어 살빼기 다이어트 치료를 받으면서도 기아 문제에 대한
: 논쟁을 일삼는 것도 하나의 스코토시스 상태입니다.
:
: 하나님의 나라 운운하면서도 속된 세상의 문화에 심취하거나,
: 음란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일종의 스코토시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
: 버너드 로너간은...
:
: "스코토시스란, 긴박한 상황 의식이 결국 성가신 내적 성찰을 일깨우기 때문에
: 그같은 의식이 일어나지 못하게 차단하는 착오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 인간이란...
: 성가시기만한 내적 성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데 선수들이란 얘기죠.
:
: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스코토시스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겠지요?
: 이러한 양면성을 없애는데는...... 글쎄요,
: 개인적으로는... 기도와 묵상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
: 좌우간,
: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코토시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겠지요?
:
: .........................................
:
: 고향 가시는 분들 평안히 다녀오시고,
: 현재 사는 곳을 방어(?) 하실 분들도 마냥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
: ==============================================
:
: (일부는 새 시대의 사목이란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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