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성경에 대하여

가톨릭의 미사는제사다.(하이텔'예수클럽'에서)

주방보조 2004. 5. 6. 12:20

이인규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카톨릭에서 미사란 제사를 말합니다. 야후검색프로그램을 보아도 카톨릭의 미사란 의미는 제사입니다.

# 야후프로그램의 검색: 가톨릭교회에서 거행되는 가장 중요한 전례의식으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 미사는 예수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한 것이다.

 

직접 카톨릭의 입장을 보겠습니다.
카톨릭 성당에서 미사는 분명히 제사라고 하는데, 권순님은 제사가 아니며 예배라고 말합니다.....본인은 카톨릭의 공식입장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변명과 사견에 대해서 비평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 산본성당: (성찬전례)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새로운 파스카를 세우시고, 그것을 통하여 교회 안에 <십자가 제사를 현존>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는 주님 친히 행하시고 당신을 기념하여 반복하도록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한다. 예물 봉헌에서 빵과 포도주가 물과 함께 제대로 운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것과 같은 것들이다. 감사기도 안에서 구원의 업적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 기도의 힘으로 <봉헌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하나의 빵을 쪼갬으로써 신자들의 일치가 드러난다. 신자들은 성찬의 참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성찬의 참여는 그 옛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던 것과 같은 모양으로 행해진다.

 

미사가 제사라는 더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 (성체성사를 이루는 미사 성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예식이 바로 미사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단순히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계시며, 사제를 통하여 미사를 직접 주재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체성사를 이루는 미사는 예수님께서 몸소 제관이 되시고 몸소 제물이 되시어 봉헌하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이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구원 사업을 기리는 <기념 제사>입니다. 또한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하느님께 바치고 이를 우리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보증하여 주기에, <찬미와 감사의 제사>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하느님께 예배 드리고 감사 드리며 속죄하고 기원하는 가장 <완전한 제사>입니다.

 

산본성당이 카톨릭 교회가 아니든지, 권순님이 카톨릭교리와 다른 것인지.....그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가하시면 됩니다.

 

트렌트공의회: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했다(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트렌트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했다(제6조).

제2 바티칸 회의도 동일하게 선언하기를,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했다(Eucharisticum Mysterium, Intro- duction C, Section 1, 2).

 

한국의 카톨릭 교리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


카톨릭의 미사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우리의 속죄는 이루어지며, 우리가 어떤 의식이나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더 이상의 제사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으로 영원한 대속이 되었습니다.

안상홍의 증인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요?

 

게다가 마틴루터가 카톨릭 사제였다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지요? 그것이 카톨릭의 유일한 무기입니까?
그는 카톨릭이 잘못되었음을 선포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카톨릭에서 미사가 제사라면 그리스도의 제사가 매주 마다 드리는 것이 됩니다.
카톨릭은 그 영성체(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봅니다......그렇다면 매주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단 한번으로 온전히 드려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때문에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매주마다 반복하여 드립니까?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8)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매주 바치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카톨릭의 주장은, 단 한번의 제사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약 이후부터는 우리, 믿는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야만 합니다.
카톨릭의 미사는 만인제사장을 부정하는 제도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5:10)

 

종교개혁자들에게 카톨릭의 화체설은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첫째로, 루터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 곁에, 그리고 그것들 밑에(in, under, along with)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임재가 실제로 함께 있다는 소위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편재성(遍在性)과 함께 주장되었습니다.

 

둘째로,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즙이 단지 상징물 혹은 기념물에 불과하다는 상징설을 주장했다. 성찬을 "기념하라"고 하는 단어는 누가복음22:19과 고전11:24-25에 언급되어집니다. 그러나 기념설은 개신교회의 전체의 견해는 아닙니다. 그는 성만찬이 영적인 진리나 축복들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거나 의미하는 단순한 표징이나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찬식의 의의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즙이란 물질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을 믿는 수찬자(성찬을 받는 자)의 이해(appehension)안에 임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셋째로, 칼빈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러나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소위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장로교회의 표준적 견해입니다. 성경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주의 몸과 피라고 불렀고 그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간주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7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은, 그것의 유형적 재료들에 외적으로 참여할 때, 믿음에 의해 내적으로,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그러나 육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 아니고,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의 모든 은택들을 받으며 먹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비록 그 때 그 빵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과 함께, 혹은 그것들 아래,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있지 않지만, 그 재료들 자체가 그들의 외적 감각들에 그러한 것처럼, 그 규례에서 신자들의 신앙에 실제적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있다."

 

감리교의 웨슬레목사는 성찬에 관하여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가?
웨슬레목사는 캘빈의 영적 임재설과 가깝고 또 쯔빙글리의 기념설과도 가깝다고 보여지는데, 그것은 캘빈의 신학에 가깝다기 보다는 오히려 영국 성교회적인 개념과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웨슬레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표적(sign)과 인증(seal)으로 보았습니다.
먼저 성찬은 주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쯔빙글리의 기념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단순한 기념과 상징으로 간주하였지만, 웨슬레에게 있어서의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것으로 재현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단순한 과거의 기념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 적용하여 확증케 하는 인증이 되어집니다.
또한 웨슬레는 또한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 이것이 내 몸이니라 . . . 이것은 나의 피니라.(마26:26. 28)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인가에 대해서 많은 견해가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는 말씀은 "이것은 내 몸으로 변한다"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회체설을 주장하는 카톨릭의 주장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또 성경은 "나를 기념하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카톨릭은 설명을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22:19)

 

-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4-25)

 

또한 성경은 그 떡이 곧 예수의 살로 변하거나, 그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포도주와 떡을 나눔으로 인하여 "참예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10: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