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신 24:22)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풍족하고 별다른 고난이 없이 산 사람은 한 가지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바로잡을 '기억할만한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억할만한 고통은 곰감의 기준을 형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소시적의 고생이 성인이 되어 타인에 대한 공감대를 폭 넓게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것이 사회생활에 있어 대인관계나 문제 해결능력을 결정짓는 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3대까지 가기 어렵다'는 말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책없이 부를 대물림 하는 고생을 모르는 이들에겐 거의 진리에 가까운 말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 힘들었던 기억을 자기연민의 도구로 삼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가난한 부모를 만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거나 군대에서 겪은 고통을 국가에 대한 원한으로 여기는 이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고난에 대한 기억은 성실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더욱 영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에서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번영을 누릴 이스라엘에게 과거 수백년간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승화 시켜 그를 자비로운 하나님처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통하여 배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종이었으니 종들의 처지를 알고 가난했으니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리라 명하십니다.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들을 잘 보살피고 학대받는 자였으니 학대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통하여 배운 마음가집이며 하나님의 심정으로 행할 도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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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악한 인간의 본성은 약한 자들을 오히려 학대함으로서 보복이나 미러링?을 통한 쾌감을 선호합니다. 학대받은 며느리가 나중에 학대하는 시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은 이 악순환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 세상의 많은 불행의 근원이며 바로 마귀가 탐닉하는 인간의 악한 보상심리에 기원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악한 본성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와똑같은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우리도 그리스도 주와 같이
우리들의 고난에 대한 기억을 지금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