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조원: 1000조원
이는 오늘 한국 경제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대한민국의 성적표다. 이 대차대조표는 한국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기도 한다. 이는 2015년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쌓아놓은 저축금(사내유보금)이 1,000조원인데 반해, 모든 가계의 빚이 1,000조원이 넘었음을 말한다. 대기업들의 사내유보금 1,000조 가운데 30대 재벌그룹의 사내유보금은 무려 710조원이나 된다. 이는 작년 한국 GDP 총액 1500조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다.
이런 결과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다. 지난 '60년대부터 형성된 우리 사회의 구조가 작동을 하다가, IMF이후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국민총소득 중 경제 주체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통계로 보면 그 진행 과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난 1990년부터 2010년대까지 국민총소득 중 정부가 가져간 소득은 거의 제 자리 걸음이다. 그러나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두드러진 대조를 보인다. 가계소득은 점점 준데 반대(1990년 71.5%, 2000년 68.7%, 2012년 62.3%), 기업소득은 점차 늘어났다(1990년 16.1%,2000년 16.5%, 2012년 23.3%).
가계소득이 줄어드는 동안 가계부채는 점점 늘어 이제 그 빚의 총액이 실은 1,100조원을 넘겼다. 가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동안 기업저축은 1,000조까지 쌓였다.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거둔 순이익 중 세금과 배당금을 빼고 남은 것을 쌓아둔 자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기업의 금고에 현금으로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설비나 공장 등 실물자산은 물론 각종 금융상품의 형태로도 잠겨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내유보금에는 현행 상법이 적립을 하도록 한 '강제 사내 유보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아무튼 대기업들 특히 재벌들의 배는 병적으로 부풀어 오른데 반해 가계들의 배는 등에 달라붙어있는 몰골이다. 이쯤 되면 기업이 가계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가계가 기업을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본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본을 위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소수의 독점자본을 위해 대다수 일반국민이 살고 있는 꼴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대기업 저축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에게 기이한 현상이 새로 생기고 있다. 소위 '기업금융'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긴 것이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계가 저축을 하고, 기업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생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대기업의 금고에 돈이 쌓이다보니 기업이 거꾸로 돈놀이에도 눈독을 들이고 열중하는 것이다. 생산 활동만큼이나 돈놀이에도 열심을 내는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 생기고 있다. 삼성전자가 좋은 사례다.
삼성전자는 최근 돈놀이로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지난 6월 말 현재 삼성전자의 자산 164조 가운데 현금을 포함한 갖가지 금융자산이 31조나 된다. 상당히 많은 비율이다. 이런 현상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지난 3월 말 현재 우리나라 10대 재벌들이 갖고 있는 금융자산은 무려 260조나 된다. 이쯤 되면 사내유보금을 잔뜩 쌓아놓은 대기업일수록 이제 생산활동에 돈을 투자하기보다 돈놀이에 더 재미를 붙여 그에 몰두하지 않을까?
1000조 : 1000조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국은 OECD국가들 중에서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에 속한다(2012년 3위. 참고로 미국은 1등).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공정한 자유경쟁이 있었는가? 공정한 분배는 어떤가? 기업가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데 반해, 일반 국민들은 게으르고 나태했는가. 아니면 그저 모두가 정직하게 열심히 땀 흘려 일한 결과인가. 가난은 저 못나 그런 거고, 부유함은 저 잘나 그런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부자, 가난한 자는 본래 타고난 것이고, 제 팔자를 따라 사는 것뿐이라는 철학을 가진 분들은 또 이 숫자를 어떻게 읽을까.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커피숍 숫자보다 더 많다는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세계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한다는 한국교회는 그동안 또 무슨 기도를 했나.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요, 부유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굳게 믿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이 결과를 보고 어떤 말을 할까?
여기서 몇 가지 통계를 떠올려 보자.
한국은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OECD국가들 중에서 1위이다. 임시고용 비율은 4위다. 연간 노동시간은 2위다. 2012년 일 년 동안 노동자 한 사람이 평균 일한 시간이 2,163 시간이다.
산재 사망율은 1위로서 해마다 2,000명 이상이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는다.이는 304명이 수장당한 세월호 사건이 일 년에 6-7 번이나 일어나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50%이고(약 900만), 그들이 받는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다.
중소기업 노동자의 숫자는 전체 노동자의 81%인데, 그들이 받는 평균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이다. 그리고 소위 원청과 하청의 임금 격차는 비참하게 크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원청이 100이라면 1차 하청은 그 60% ,2차 하청은 36%,3차 하청은 24%를 받는다.
우리나라 상위 10% 사람들이 일 년 동안의 나라 전체 소득 중 45%를 가져갔다(2012년).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50%에 이르고, 노인 자살율은 세계 최고다.
공정한 분배를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대하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활약하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기업윤리를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가계와 기업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큰 이유다. 그러나 이렇게 극심하게 불평등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가의 역할은 매우 편파적이었다. 이는 IMF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업국가'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과정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내렸다. 이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명분은 경기 활성화였으나 결과는 사내유보금만 늘려주었다. 투자는 줄고 오히려 기업저축만 늘었다. 경기활성화는커녕 대기업들의 곳간만 더 채워준 것이다. 낙수효과는커녕 골목상권까지 가로채는 재벌들만 늘었다. 뻔한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은 짐짓 그렇게 하였다. 참고로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만 보더라도 법인세 인하로 기업들이 본 혜택은 37조나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사내유보금에 대한 25% 과세 제도를 폐지한 정책이다. 2002년 폐지 이후 기업의 임의 사내유보금이 이제까지 폭증했다. 기업들은 그동안 조세회피 수단으로 유보금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정부 때도 국가가 기업국가로서의 역할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노동자가 구속된 숫자가 역대 어느 정권 때보다 많은 958명이었다는 사실은 그 증거 중 하나다. 이렇게 국가(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사이에 가계의 세 부담은 점차 늘어났다. 낫으로 풀을 깍듯 알게 모르게 일반 시민들의 돈을 걷어갔다. 우리 국가는 독점자본에게 수종 드는 한낱 집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출애굽기 12 장 35-36 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5-36)
이는 히브리 노예들의 애굽 탈출 역사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 번역(개역개정판)은 마치 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 같다. 성경 원문의 의미가 생생하게 전달되기에는 좀 미흡하다. 이에 비해 같은 구절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이 더 낫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일러 준 대로 에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내라고 하였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에집트인들에게 환심을 사게 하셨으므로 에집트인들은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내어 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에집트인들을 털었다."(공동번역성서 출 12:35-36)
구약성서의 중심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 이야기는 마치 교향곡의 주조음처럼 구약성서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 창세기도 어찌 보면 출애굽 사건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애굽 탈출 역사 과정에서 홍해가 갈라진 일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대목이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노예주들에게 금붙이와 은붙이와 옷을 요구한 일이다. 그들은 당당히 요구했다. 오랫동안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억압당한 입장에서 노예주들에게 떳떳하게 금과 은과 의복을 요구했고 받아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운 지도자 모세의 가르침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다.
그날 히브리인들은 금과 은(돈)을 빌린 게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훔치거나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자신들의 몫을 당당히 요구해 받아내는 행동을 했다. 그동안 노예로 살면서 받지 못한 임금을 받아낸 것이다. 신령하신 야훼 하나님은 지극히 물질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주 일상적인 임금 문제에 세심하게 개입하신다. 탐욕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라는 기초 위에 쌓아 올리는 사랑을 위하여. 세상의 진정한 평화(샬롬)를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씀(道, 로고스)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그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셨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정의 없이는 실현이 되지 않는다. 정의(Justice) 없는 사랑은 마치 뼈 없는 인간과 같다. 그런데 정의의 알맹이는 '경제 분배의 정의'다. 1000조: 1000조 현상은 불공정한(정의가 없는) 분배가 낳은 산물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의 성령께서도 역시 이 비뚤어진 현실(계급적인 사회는 노예제시대인 출애굽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슬이 보이느냐,보이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다) 에 개입하셔서 공정한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활동하신다. 물론 그는 사람을 통해 일 하신다. 제 몫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감동(깨달음)하사 그동안 받지 못한 금붙이, 은붙이를 받아내도록(회개하도록) 역사하신다.
이렇게 분배의 정의가 실현돼야 나라 경제의 체질이 바뀌고 강건해진다. 일반인들의 소비가 늘어나고 바닥 경제가 살아난다. 온몸에 피가 돌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제 세포들이 활성화되고 에너지는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이른바 ‘낙수효과’란 독점자본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건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도 없고 우리 경제에도 없다. 경제에서 윗목이 따뜻해지면 아랫목도 저절로 따뜻해진다는 논리보다 더 허구적인 것도 없다. 우리는 온돌에서 살아봐서 잘 안다. 온돌은 아랫목이 먼저 따뜻해진 뒤에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사실을.
아무튼 성령께서는 예배 때 집중적으로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물론 노동 현장이나 저잣거리에서도 활동하신다. 바람 같은 성령은 사람 속에, 사람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약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할 때 그는 더욱 역동적으로 역사하신다. 아무튼 불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소명을 따라 자기의 일터나 처소에서 성령을 좇아 활동하게 된다. 비둘기 같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배의 정의-사랑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견인하신다. 물 같은 성령께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세상에 확대되는 일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신다.
여기서 다른 길로 가면 미신이 된다. 미신에 빠지면 평안과 구원은 없다. 물론 ‘칭의’도 없다. 오히려 고통과 저주를 불러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 만약 출애굽 당시 어느 히브리인이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만 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미신이다. '주인이 알아서 줄 줄 믿습니다'하고 기도만할 게 아니라 당당히 나아가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저의 노예 신분을 노예주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애굽에 주저앉아 밤낮 부르짖으면서 기적이나 바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 말이다. 이는 애굽에서 탈출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그냥 개인적 신분상승의 기적이나 바라는 믿음이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말고 그냥 긍정하자. 그리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고 여기서 귀족이 되는 꿈을 꾸자, 하고 애굽에 안주하는 신앙도 허왕되기는 마찬가지다. 청춘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은 애당초 아픈 것이니 고통을 인내의 믿음으로 감수하자며 자위나 하고 있는 노예도 미혹된 거다.
금, 은은 영적인 것이라며 현실 도피하는 ,그래서 결국은 지배계급을 이롭게 하는 영지주의의 후예들도 미신 신자다. 금, 은붙이 요구할 생각은 말고 그저 노예의 양심을 갖고 선하게 살자던지, 노예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요 섭리이니 신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의 믿음도 헛된 믿음이다.
노예주에게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며, 금과 은을 요구하는 노예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기도 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도 미신 신자다 . 그와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예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칭찬하나 금과 은을 요구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세상 종말이 곧 올 텐데 웬 금, 은붙이를 요구하고 난리냐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교인도 미신 신자다. 그런가하면 좋지 않은 모든 현상의 배후엔 마귀(귀신들)가 있기에 귀신 쫓는 일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며 무슨 기압을 주듯 기도를 하는 목사들은 기독교 무당이다.
안전시설이 미비된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산재를 당해 반신불수가 된 노동자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우울증을 앓는 그 아내를 놓고 귀신을 쫓는다며 설치는 목사를 본 적이 있다. 한편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금가루를 받자며 , 예배당에서 두 손을 벌리고 기다리는 무리, 그러다가 쓰러지거나 종교적 엑스터시에 들어가기도 하는 무리, 황홀경에 빠져 넋두리 같은 예언이나 방언을 하는 무리, 그 옆에서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돈봉투를 들고 줄을 서는 무리 ,그들 목사나 교인들이 보여주는 믿음도 역시 미신이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표를 달았지만 속은 종교의 영(미혹의 영)을 받은 종교인일 뿐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주로 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해온 신학자들이 적당히 화합과 평화를 논하며 암호 같은 낱말들로 전개하는 신학이론도 결론은 미신인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 히브리 노예들에게 금과 은을 요구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내세나 바라보며 애굽의 체제에 잘 적응하라는 식의 논리를 피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대다수 회중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권력을 차지한 소수는 미신의 소리를 마구 해댄다. 교인들을 한쪽으로 몹시 기운 운동장 같은 현실에 무조건 순응하는 사람으로 길들이면서 부자들이 던져주는 돈(헌금)으로 배 불리는 일을 하늘이 준 사명으로 믿고 그들은 열심히 뛴다. 각종 헌금을 바쳐가며 그런 소리를 듣고 아멘을 연발하는 가난한 교인들도 미신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성경은 믿음의 성격을 문제 삼는다. “네 믿음이 능히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묻는다(약2:14). 진정한 평안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과 헛된 미신을 성경은 선명하게 분별하고 구별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을 제시했다. 칭의稱義-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믿음이다.(롬6:1-11) 이 믿음은 죄에 종노릇하는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 살게 만드는 능력이다. 노예주처럼 탐욕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노예처럼 착취당하며 사는 사람도 옛사람이다. 따라서 그 옛사람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남을 탐욕적으로 착취하는 삶도, 남에게 착취당하는 삶도 아닌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의 착취구조를 변혁하는 삶을 성령을 좇아 살게 된다. 이는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만 얻는 게 아니다.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게 더 본질적인 칭의다. 의(디카이오쉬네)란 본질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인(목사)이 만약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습관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 신분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 짐짓 육신적 욕심을 좇아 성령을 거스르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면서도 돌이키는 회개가 없는 사람은 그 신분을 상실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장에서 칭의-구원의 반열에 있던 신자가 중도에 탈락되는 사유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칭의는 방종한 삶을 허가하는 면허증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칭의의 은총은 연약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사랑의 이중 계명’을 이루도록 하는 능력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 현실을 보면 절망적이다. 그 현실의 속내를 알수록 무력함에 빠질 만큼 절망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쉼 없이 임하시기에 절망을 넘어서게 된다. 이 세상을 새롭게 빚고자 온몸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오래 굳어진 물신주의 현실은 마치 생명 길을 막아 선 큰 바위 같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하고 육중한 바위라도 쪼개지는 수가 있다. 정으로 바위 위에 구멍을 내고 , 그 구멍에 나무를 박아놓는다. 그리고 부드러운 물을 수시로 그 나무에 부어준다. 인내를 갖고 구멍을 연달아 내며 이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어느새 큰 바위는 뻐개지고 만다.
출애굽 같은 대대적인 변혁을 위해서는 바위에 구멍을 내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의 출애굽 은총의 목적은 돈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삶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오로지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생산관계 방식은 밀어내고, 사람들의 건전한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한 생산관계 방식을 채택하는 사회다. 구멍을 내기 위해 지금 우리는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
가령, 노조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조직률이 10%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을 더 높이는 일이다. 각자 자기의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북유럽 국가들(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노조조직률은 50-70%나 된다. 그리고 독일 같은 '노사공동결정제도'가 마련되도록 힘 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해고, 근무 규칙, 부서 이동 같은 사안들은 '직장평의회'에서 노사가 논의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 대표가 이사로 들어가는 감독이사회에서는 사장 선임, 구조조정, 기업전략 등을 협의하고 결정한다. 모든 이윤의 원천을 창출하는 노동자가 회사 경영의 한 주체로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은혜롭다.
한편 '협동조합공장'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도 고무적이다. 이 공장에서는 모두가 자본가이면서 모두가 노동자다. 또한 주식회사에서 '1인 1표 운동'을 일으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1원 1표'가 아니라 1인 1표 운동 말이다. 우리가 선거에서는 1인당 1표 행사를 하는데, 왜 경제에서는 1원 1표 제도를 당연시 할까?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습이다. 요즈음 세계 도처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기본소득운동도 새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일반 서민들은 철저한 계층 투표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치루는 선거의 결과를 보면 철저히 계층 투표를 하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계층이 있다. 대체로 부자들일수록 철저히 계층 투표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계층 배반적인 투표를 반복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철하게 일하는 정당이나 사람을 선출한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더욱 가난해지는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 만약 히브리 노예 같은 사람들이 노예주들을 위해 일할 사람이나 정당에 자발적으로 줄기차게 투표함으로써 노예의 신세를 면하기는커녕 자손 대대로 착취당하는 노예로 산다면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허물며 저마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찾아 누릴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지고 밝아진다 . 하나님 나라는 더욱 다가오고, 평화(샬롬)가 개인, 가정, 사회에 한층 깃들 것이다. 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가장 귀한 사명이다. 자신의 일터에서부터 그 일에 즐겁게 참여하자. 성령을 좇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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