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려요?" | ||||||||||||||||||||||||||||||||||||||||||||||||||||||||||||||||||||||||||||||||||||||||||||||||||||||||||||||||||||||||||||||||||||
서점가 중심 번져가는 '하나님 음성 듣기' 현상의 진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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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신앙행위가 기독교 서점가를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섭리나 뜻을 찾아간다는 등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직통 대화라도 하듯 독특한 신앙행위다. 즉,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통해 잃어버린 열쇠, 펜 등을 찾는 것은 물론, 보행이나 자동차 주행 중 원하는 길을 제대로 찾아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적 예배를 위한 설교 준비도 그러한 방식으로 행할 수 있다며 그 적용 범위가 다양하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기독교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구체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 행위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이와 같은 식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한편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속신앙을 추구하는 것 같아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케 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주장을 담은 10여 권의 서적이 유명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출판되어 기독교 서점의 신간코너에 진열되고 있다. 또한 일부는 베스트셀러 진열장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다. 서적들뿐만이 아니다. 신앙 수련회와 훈련 집회 심지어 특별 강연회 등을 통해서도 그러한 신앙 행위가 계속 전파되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행위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생활에 구체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 현재 출판 판매되고 있는 서적들을 통해 실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봐요, 농담 좀 그만해요. 아니,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잃어버린 펜이 어디 있는지 실례로 말해주셨다는 겁니까?”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셨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다가 그 펜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온 데를 다 뒤졌다. 하나님께도 그것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고, 다 찾아 봤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전지하신 하나님! 당신은 그 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죠? 그리고 당신은 그 펜을 찾는 일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고 계시죠? 제게 그 펜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난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즉시 한 문장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사무실 화장실 안에 있단다.”] (조이 도우슨, pp.13~14)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예수전도단)이란 서적 내용 중 일부다. 잃어버린 펜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통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특별한 한 번의 경험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예들이 그의 책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앙 교제를 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간증(?)도 다수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 음성 듣는 행위가 당연한 것이고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 모양이다.
"하나님이 방금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교회에 위치한 곳에서 목사님들을 위해 말씀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의 친구 목사님이 그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는 길에 그는 내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부탁해왔다. 마침 그가 “제가 지금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시간 내에 도착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라며 난처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부분에 대해 나누려던 참이었다. ···나는 목사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을 세 살 난 아이로 생각하고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가서 머리를 아버지의 가슴에 묻고 편안한 가운데 “고마워요. 아빠 대답해 주세요”라고 말해보라고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목사님이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몇 단어의 분명한 인상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어요. ‘아들아, 넌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다’구요”] (조이 도우슨, pp.18~19)
조이 도우슨의 책을 처음부터 읽어나가는 독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마치 만병통치약과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행위만 할 줄 알면 일상의 모든 문제가 손쉽게 해결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예수전도단 출판사에서 발행된 브래드 저삭의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에서도 그와 같은 실례들이 잘 나타난다. 저자 이름만 다를 뿐 전체적인 내용은 흡사하다.
[어느 아침 나는 그동안 잘 가지 않던 한 북 카페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느꼈다. 그래서 즉시, 그곳으로 갔다. 마침 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나는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일기장을 펴고 주님께 물었다. “주님, 오늘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때 맞은 편 탁자에 한 젊은 여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님, 저 여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십니까?” 그때 주님의 응답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자는 만성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결심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도할 때, 아마 당신이나 또는 당신과 가까운 어떤 사람이 만성적인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치유 모임에 당신을 초대했으면 합니다” ··· 그녀는 그 치유 모임에 참석하였고, 또 계속해서 내적 치유 기도 모임에도 등록하였다.] (브래드 저삭, p.89)
예수전도단 출판 서적 중에 많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잃어버린 물건을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듣고 찾아내고, 또한 갈 길을 발견하고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의 병명까지 알아맞히는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모습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통력이라도 발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예들은 예수전도단 출판사에서 출판된 서적들 중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우리네 기독교 신앙생활이 과연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일부 외국의 저자들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외국 서적(번역서)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시기를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요즘 ‘하나님 음성 듣기’ 관련 국내 서적들도 유행처럼 출판되고 있다. 다음은 국내 서적들 주요 내용들이다.
[어느 날 나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너무나 부러워서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임종천 목사의 실례다. 그는 약 3년 전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계기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며 그 경험들을 모아 <하나님의 음성을 확실히 듣는 법>이란 서적을 출판했다. 그 내용의 질적인 면에서는 위에 언급된 국외 저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삼정 목사와 지종엽 목사도 자신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나님 음성 듣기 관련 서적을 출판했다.
[전도사 시절, 김천 월곡교회에 집회를 인도하고 가는 길에 상주 옥사에 있는 작은 외삼촌 댁에 잠시 들렀다. 그런데 두 살도 채 안 된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고 가족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무모한 기도를 드렸다. 아이를 살려 주실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기도한 것이다. ···기도 중에 내 귀에 “할렐루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보니 가족이 모두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파랗게 죽어 가던 아이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다음 날 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주님께 ‘이렇게 데려가실 것을 왜 그때는 살려주셨습니까?’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주님은 내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하셨다. “사랑하는 종아, 생명에는 내가 정한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하루 연장한 것은 너 때문이었다”] (서삼정, p.22)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만이 아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 모든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율법의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물며 성령의 시대에는 어떻겠는가? 성령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또한 들어야 한다. ] (지종엽, p.11)
저자들 마다 자신만의 '듣는 비법' 소개
하나님의 음성 듣기 행위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그 음성을 듣는 방법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저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비법(?)도 소개하고 있다.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택해야 한다는 것은 대체로 공통적인 요소들이다. 그런 가운데 각자의 독특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할 때 질문을 간단히 그리고 한 가지씩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질문을 하면 혼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한 응답들이 서로 혼동을 일으켜서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씩 천천히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1~112).
임종천 목사의 경우는 보다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도문까지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해 주세요’보다는 ‘나의 영과 눈과 귀가 열려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라고 하는 것이 더욱 효험(?)이 있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간절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책을 정독하고 연습을 꾸준히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언까지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p.235).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훈련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종엽 목사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은 편견이라며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방법이 각자 다르고 또한 상반된 모습까지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행위는 다분히 주관적인 체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또는 정형화한 신학이나 교리의 틀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러 모양으로 심지어 반대적인 결과로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기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직접 체험했다는 한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김수철 씨(가명, 26세 대학생)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잃어버린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며 또 자신도 그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신앙행위 체험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전도단이란 선교단체에서 진행한 수련회에 참석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수련회 기간 중 참석한 학생들이 여러 개의 팀으로 흩어져 지역 전도 순례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청년이 속한 팀도 한 방향을 정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팀장이 자신들이 그 다음 방향을 어디로 가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자며 모두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팀원들은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들이 어느 길로 가야할지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듣기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 후 각자 마음에 떠오르는 방향들을 말하게 했다. 그러자 특정한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위에 언급된 조이 도우슨의 책(예수전도단 출판)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비교해보자.
[미국 예수전도단 남서부 사무장인 나의 사위 존 빌즈의 이야기다. ‘제 아내 질(Jill)과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예수제자훈련학교(DTS)를 마치고 간사들과 학생들을 데리고 멕시코 남부의 어느 마을에서 두 달 간의 전도여행과 구제사역을 막 끝냈다. 그곳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길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간사들을 불러 놓고 어떤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께 함께 구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들을 결박하고 인간적인 생각과 욕구에 대해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영 가운데 동일한 인상을 받았다. “긴 코스로 돌아가라” ···우리는 매우 지쳐 있었고 몇몇 단원들은 아프기까지 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제대로 들었는지 하나님께 다시금 확증해 주시도록 구해야겠다고 느꼈다. 성령께서 나로 이사야 51장 10절을 펴도록 말씀하셨다.](조이 도우슨, 69~70).
이러한 현상은 위의 청년이 속했던 어느 특정한 팀이나 외국의 경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예수전도단에 속한 이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일들이다. 예수전도단에서 신앙훈련(DTS)을 받았으며 간사로 활동을 했고 현재 같은 곳의 출판사에 속한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이란 훈련을 받는다”며 위와 같은 신앙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주장했다.
일상적인 것까지 음성에 따라야 하는가
그 관계자는 자신들의 수련회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어렵지 않게 발생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잃어버린 물건 찾기 등 일상의 작은 일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미 주어진 지혜와 인격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갈등이 있을 것이다”라며 먼저 동정을 보냈다. 기자의 질문과 같은 종류의 문의를 여러 차례 받아본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한 것까지 포기하며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순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미 주어진 자유의지까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포기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기계나 로버트처럼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자신의 지혜와 인격 그리고 자유의지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도록 유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마치 훌륭한 신앙생활인 듯 말이다.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꼭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 관계자는 계속해서 “경험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신앙의 맛이 다르다”며 경험을 강조했다. 일단 경험을 해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만 되면 OK라는 식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하나님 음성 듣기’는 과연 옳은 것일까? 주관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그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 먼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주변으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는 사례들을 살펴보자.
<내 양은 ...>의 저자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의 음성을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괴상히 여기는 것을 보면 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자신들의 신앙 행위를 오히려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자신의 신앙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야가 있어 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쓴 지종엽 목사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며 “성경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즉 지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 밖에 있는 것일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벗어난 신앙행위에 대해 지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 목사는 그러한 지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적이 잘못이라고 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내 양은...>의 저자 브래드 저삭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성경 밖 계시의 개념은 의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사이비라고 여겨졌다”라고 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은 과거와 달리 성경 밖의 계시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행위를 성경을 통한 신앙 행위 안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닌, 그밖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자신들의 행위 중 상당수가 성경의 틀 안에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성경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속 좁은 책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듯했다. 성경의 틀에서 벗어나야 자신들의 행위가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의 틀 밖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들의 신앙 행위에 거부하는 의견을 오히려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행위와 성경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주장자들은 성경이 중요하다고 강조는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조이 도우슨의 성경 이해와 해석 접근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일상생활 중에 나타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열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어느 길로 가야할지는 물론 화장을 해야 할지, 특정인을 물질로 도와주어야 할지 등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경과 연결시켰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행위를 성경적으로 접근해 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 체험했다는 사례들이 구체적으로 성경의 몇 장 몇 절에 나타나 있다며 종종 소개하고 있다.
[16세된 여학생의 이야기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너무 눈 화장을 짙게 한다고 늘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엄마와의 다툼은 늘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학생이 내 강의를 듣는 중 모든 문제의 해답이 성경 속에 있다는 말에 하나님께 물었다. “좋아요, 하나님. 제가 어디 배운 대로 한 번 해볼게요. 제가 눈 화장을 너무 짙게 하는 것인가요?” 즉각적으로 어떤 인상이 떠올랐다. ‘예레미야 4장 30절’ ... 놀랍게도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혀 있었다. “네가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정말 그렇게 쓰여 있었다. ] (조이 도우슨, p.72)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화장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해답으로 특정 성경구절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현상을 통해 자신들이 행하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소위 ‘성경적이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성경 구절이 인용되면 모두 성경적인 행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받았다는 예레미야 4장 30절이 오늘날 눈 화장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성구인가 하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조이 도우슨이 주장하는 성경 구절 활용 방식이 옳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오늘날의 여성들은 예레미야 4장30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표현에도 주목해야 한다. “붉은 색의 옷을 입어서도 안 되고, 금장식으로 단장해서도 안 된다”는 표현이다. 즉, 여성들은 눈 화장은 물론이고 붉은 색 옷과 금으로 만든 귀걸이, 목걸이 등도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이것이 그때의 16세 소녀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고 해명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식의 조이 도우슨의 성경 연결하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책에서 수시로 나타난다. 성경을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자신의 경험을 위한 보조 재료와 같은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내 강의 테이프를 들었던 어떤 부인이 내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온 데를 다 뒤졌고 집에 있던 가족들까지 동원해서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제 열쇠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는 법석대거나 걱정하는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영 가운데 말씀하셨다. “네 성경책에서 레위기 14장 47절을 펴라” 거기에는 이와 같이 쓰여 있었다.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니라” ···열쇠를 찾는 소동이 있기 전에 그녀는 빨래를 해서 개킨 뒤 식탁 위에 올려 놓았었다. 그러다가 식사하려고 그 위에 있던 것들을 침대 위에 갖다 놓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역사하는 말씀이 말하는 대로 침대에 가서 그 개켜 놓은 옷들을 다 들춰보았다. 바로 거기 열쇠가 있었다. 할렐루야. 과연 하나님이시다! ] (조이 도우슨, p.73)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성경을 숨은 단어 찾는 수수께끼 책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과연 구약성경의 레위기 14장 47절이 ‘빨래감 속에 열쇠가 있다’는 의미로 주어진 성구인가? 앞서 언급한 방식을 다시 적용해 보자. 즉 지금처럼 성경을 사용하는 방식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 성구에는 ‘식탁 위’라는 어구도 있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가 식탁 위에 열쇠를 올려놓은 것을 잊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역시 같은 성경 구절이 떠올려지게 된다는 말인가? 조이 도우슨은 자신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실패로 돌아간 사건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결과가 그 음성대로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즉, 친구의 불치병을 살려달라고 한 자신에게 ‘고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결국 그 친구는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불치의 병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실지 말씀을 통해 알려달라고 부지런히 구했다. 성경 구절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명확히 주어졌는데, 그분의 응답은 “고치리라”였다. 그 친구가 죽었을 때 난 크게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다.] (조이 도우슨, p.151~152)
그는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놓고 혼란스러워했다. 여러 개의 특정 성경 구절까지 머리에 떠올랐는데 결과는 실패였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를 이해하기 위해 또다시 그 행위를 반복했다. 그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그 이유에 대해 다시 구했을 때 “내가 네게 말한 이후 네 친구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는 알지 못하잖니”라는 음성이라는 것이 다시 들려왔다고 한다. 그의 방식대로라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들은 이후, 그 음성의 내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고치리라’라는 음성이 아닌 ‘고칠지 모르겠다’, 또는 ‘친구의 상태 봐서 고치겠다’는 음성이 들렸어야 정확한 것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잘못 들었든지 아니면 그 음성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성경중심 신앙행위 강조하는 이들도
성경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같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주장하는 이들 중에서도 성경 중심으로 신앙행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행하는 이들 대부분이 성경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성경 중심적으로 신앙행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라도 이미 주어진 성경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엄격하게 성경이라는 기준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음성>의 저자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은 모세와 에스겔 바울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며 그러나 이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말했다(p.74). 그는 잃어버린 펜과 열쇠 등을 찾는 등 인생의 매순간 할 일을 알려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 증거로 성경 인물의 베드로와 바울을 예로 들었다. 즉, 성경의 인물들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 등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예수님의 경우의 예도 들었다. 즉, 그는 “예수님조차도 매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지시를 받았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며 철저히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세부사항의 결정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하신 것처럼 “자신의 성숙한 뜻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pp.80~81). 그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란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훈련한 바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의 저자 찰스 스탠리는 성경 말씀의 묵상을 강조했다. 묵상을 통해서 일상의 염려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의 성경공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매일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묵상은 오늘날 잃어버린 예술이다”라고 주장하며, “묵상이란 하나님의 역사와 방식과 목적과 약속에 대하여 아는 여러 가지 일들을 회상하고 생각해 보는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의식을 갖고 행하는 일종의 거룩한 사상 행동이라는 것이다.
환청으로 들리는가, 마음의 깨달음인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관해 한 가지 더 접근해 보자.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어떠한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의 육신의 귀에 환청과 같은 형식으로 무슨 소리가 외적으로 들린다는 말인가, 아니면 마음의 깨달음이나 감동과 같은 내적인 소리를 말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이들 간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단지 내면의 소리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 외적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전도단측에서는 ‘내면의 음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전도단 간사 출신인 윤미정 씨(가명)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은 우리 단체에서 사용하는 언어”라며 그때의 음성의 성향에 대해서는 “내면의 음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외적인 귀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느낌과 같은 내적인 감동을 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외적 음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동 지역 등 복음이 급박하게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외적 음성이 일어 날 수 있다며, 외적 음성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내 양은 ···>(예수전도단 출판, p.66)의 저자 브래드 저삭도 내적 음성을 주장했다. 그는 “대부분 생각이나 언어, 문장으로 된 내면의 음성을 의미한다”며 “깊은 내면에서 누군가가 마음에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국내 저자들은 내적, 외적 모두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성령의 음성을···>의 저자 서삼정 목사는 많지는 않지만 자신이 직접 외적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p.36). <하나님의 음성···>의 저자 임종천 목사도 직접 외적인 귀로 들을 수도 있고, 내적인 마음으로도 들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외적으로 음성을 들은 경우도 많다며 특히 신체적인 위급한 상황에서 초능력적인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한 적도 여러 번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말씀을 100%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하나님과 더욱 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경만으로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외적으로 듣는 것과 내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면에서는 귀에 들리는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든 어떠한 것이라도 불가능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만약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러한 체험들을 허락하실 때,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서 체험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된 것인 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음성 듣는다는 것은 사적인 계시 추구 행위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학장, 조직신학 교수)는 오직 성경만이 기준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자체가 개혁교회 입장에서는 옳지 못한 것”이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사적인 계시를 받으려는 행위”라고 일축했다. 일부 신비주의 계통의 사람들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라며 한 마디로 옳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승구 교수는 계속해서 일상의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용어조차도 사용하지 않기를 권면했다.
박일민 교수(칼빈신학대학원장)의 지적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성경의 예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박일민 교수는 “그러한 성경의 사례들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특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일 뿐”이라며,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구원에 대한 지식이 온전히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주어진 성경 이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조차도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박일민 교수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성도들의 심리를 사탄이 악용하는 사례들이 많다”며, 성경을 성령의 조명함을 통해서 끊임없이 묵상해 가는 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을 대하는 자세라고 언급했다. 하나님의 음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성경 자체라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달라스 윌라드도 우리가 하나님을 졸라서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아가면 된다
정훈택 교수(사당동 총신대신대원 신약학 교수)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며, 하나님 음성 듣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가치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정 교수는 계속해서 “선지자들이 도끼를 찾아냈으니까 나도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며, “‘하나님 안 보여주시면 안 되요’라는 식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 인간다워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슈퍼맨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장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다운 삶은 성경을 통해 주어진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했다.
만약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유행하는 것들 중 하나라면, 아마도 다음에는 ‘하나님의 얼굴 보기’나 ‘하나님 손 만지기’ 등도 등장할 것 같다. 경험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지나치게 표현한다면 ‘물위를 걷기’, ‘물로 포도주 만들기’ 등의 신앙행위도 나타날지 모르겠다. 그 동안 우리 주변에는 환상, 환청, 영서, 입신, 쓰러짐, 소리 지름 등의 여러 체험이라는 현상들이 스쳐지나갔다. 일부에서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기도 한다.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리라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의 새로운 체험이라는 것들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이 현재 행해지고 있고 또 앞으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복잡 다양한 신앙 행위들에 대해 성도들이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더욱 성경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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