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다원사회의 신앙언어(서공석 신부, 지금여기)

주방보조 2013. 6. 13. 06:17

다원사회의 신앙언어[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3]

서공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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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10  1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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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우뇌(右腦)를 많이 사용하는 민족이다. 냉철하게 합리적 사고를 하기보다는 감성(感性), 곧 느낌과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은 어림잡아 하는 일을 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 젊은이들은 양궁 시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특히 국궁(國弓)은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한국인의 장기이다.

한국인의 감성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신명이라는 단어의 사용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광버스 안에서 춤을 추는 신명, TV 방송으로 중계되는 노래자랑에서 출연자와 청중의 신명을 볼 수 있다. 한국에 들어와서 성공한 노래방 영업도 한국인의 신명이 다른 민족에 비해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최근에 외국에서까지 인기 있는 한국인의 연예 그룹들이 있고 세계적 가수가 된 싸이가 있다.

한국은 불교적 유산과 유교적 유산에다 무교적(巫敎的) 유산까지 지니고 있다. 불교는 출가(出家), 수행(修行), 금욕(禁慾) 등을 높이 평가하는 종교다. 따라서 한국인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수도생활과 독신생활에 종교적 가치를 쉽게 부여한다. 유교적 유산으로 한국인은 신분 서열(序列)을 잘 따지고 그것을 존중한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호칭에 많은 신경을 쓰고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내어서 서열을 정한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상위권자들의 횡포가 쉽게 수용된다.

무교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대단히 기복(祈福)적이면서 신명 혹은 신바람을 좋아한다. 이 신바람은 망아지경(忘我之境, extasis)을 지향한다. 이북 사람들이 과거 김일성에게 혹은 김정일에게 보이던 숭배가 망아지경에 이르는 신바람이었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일부 신앙인들 사이에 만연된 성령운동도 그런 망아지경을 지향한다. 성령운동은 병 고침이라는 기복과 심령기도라는 망아지경을 동시에 제공하면서 한국인의 무속적 심성과 신명에 영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에게는 무엇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근본주의적 성격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흥부와 같이 바보스럽게 선한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고, 놀부와 같이 철저하게 질이 나쁜 사람도 없다. 한국인은 이렇게 두 인물의 인품을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놓고, 선과 악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 국회가 민주주의 방식인 합리적 토론으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동원하는 현상을 우리는 심심찮게 본다. 합리적 사고를 하는 좌뇌(左腦)가 뇌사(腦死) 상태에 이르러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 특히 주자학(朱子學)을 중국에서 수입하여 본고장에서보다 더 철저히 그 논리를 발전시켰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국가는 중국에도 없었지만, 이조(李朝) 오백년이 인류역사에 나타난 유일한 유교국가였다.

한국 그리스도 신앙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유럽에서 전래되었다. 한국 교회는 그 시대 유럽 교회의 신앙언어를 수용하여 그것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고집하고 있다. 한국인의 어림잡아 대충대충 하는 성향에다, 기복적이면서 신바람을 잘 내고, 유럽 중세적 교계제도가 남긴 신분서열에 철저하면서, 그것을 근본주의적으로 몰고 가는 한국의 가톨릭교회다.

외국에서 전수(傳受)된 형식의 의미를 냉철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대충대충 이해하여 극단으로 발전시키면서 그 형식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은 모든 분야에서 확인된다. 북한이 레닌-스탈린의 공산주의 형식을 근본주의적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가 금주(禁酒)와 금연(禁煙)을 복음적인 것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안의 신심 단체들, 곧 레지오마리애, 꾸르실료, 네오까떼꾸메나또 등이 모두 한국에 유입될 당시의 형식을 대충대충 받아들여 그것들을 근본주의적으로 고수하고 있다. 그런 신심 운동들은 한국인의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을 빙자한 소집단주의와 근본주의적 성격이 가미되어 배타적 성격까지 지니고 발전하면서 신명을 내고 있다.

   
ⓒ강한 기자

더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독선적 신앙언어

과거 사회에는 다스리는 자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 다스리는 자의 땅에서 황공하게 살았다. 그 다스리는 자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생존권을 잃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최고 통치자를 대리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 통치자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럽 중세 사회가 11세기부터 공들여 세운 고딕 성당들의 모습이 잘 말해 준다. 그 성당에 사람이 들어서면 위만 쳐다보게 되어 있다. 사람은 위를 쳐다보고,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윗사람을 섬기듯이 하느님을 섬기고, 윗사람의 성은(聖恩)이 망극하다고 생각하듯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어 죽게까지 했다는 사실도 그저 망극하게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 산다. 민주적 사고방식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유롭게 그 사회에 기여하면서, 스스로의 품위를 보존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산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각자는 임금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살고, 정부의 수반도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며 국민이 뽑는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집단의 일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기여할 수 없으면, 현대인은 그 집단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동시에 그 집단의 실효성도 저하된다.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기업에서는 구성원들의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최근의 연구 보고도 있다. 따라서 오늘 현대인을 위한 신앙언어도 인간 각자의 자유와 창의력을 존중하여야 하고, 인간에게 더 큰 자유를 주는 신앙이라는 사실을 조명하며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오늘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면서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예수로 말미암은 신앙언어를 복음이라고 과거의 사람들이 불렀듯이, 현대인에게도 신앙언어는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기쁜 소식은 어느 시대에나 살려내어야 하는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상징성(象徵性)이다.

오늘 우리는 또한 과학적 사고를 하며 산다. 이제 우리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하느님의 노여움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병고(病苦)는 귀신을 불러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료기관에 가서 좋은 의료인을 만나서 고친다. 현대인은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현대인은 검증(檢證)이 되지 않는 일이나, 그 일이 발생한 과정(過程)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일은 모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의 신앙인을 위해서는 과거 신앙의 교리언어들(하느님의 아들, 삼위일체, 하느님의 어머니 등)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고, 그것이 발생 단계에서 무엇을 전달하려는 언어였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 예를 들어 개인고백을 동반하는 현행 고해성사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1215년 채택한 양식이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엄청난 보속을 하고 있어서 1년에 한 번은 본당신부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 고해성사에서 보속을 주는 것은 그 시대 항간에 떠돌던 ‘보속차림표’대로 보속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13세기에 발생한 고해성사인데 16세기 개신교가 분리되고, 그들이 모든 성사를 버리자, 개신교 분리의 후유증을 수습하기 위해 소집된 트렌토 공의회(1545~1563년)가 성사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일곱 개의 성사를 세우셨다”고 말하면서 고해성사도 그 일곱 안에 넣어서 선포하였다. 그 후부터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오늘 현대인은 정보사회에서 산다. 타인을 긍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정보가 흘러들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는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수신자이면서 모두가 또한 발신자이다. 인터넷망에 들어가 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현대 사회는 자기와 다른 이를 긍정하는 다원(多元) 사회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하나의 신앙언어가 모든 진리를 전하지 않는다. 독선(獨善)적 신앙언어는 오늘 어떤 명분으로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유대인 최고 회의에서 베드로는 말하였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12) 이 말씀을 오늘과 같은 종교다원사회 안에서 타종교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고 유일한 이름이라는 말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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