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세습에 대한 신학적 비판
김명용(장신대 조직신학 교수)
서언
최근의 한국교회 안에 담임 목사직을 세습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 여러 교회에서 세습이 일어나니까 은퇴를 앞둔 많은 담임목사들이 자신의 아들 목사에게 자신의 목회지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고, 급기야는 담임목사직을 세습해서는 안된다는 상식마저 한국교회 안에서 퇴색되어 가고 있다. 근자에 일어난 서울의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바로 이와 같은 흐름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지도층에서부터 일반인들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한국국민 모두가 개탄하는 일이건만 해당교회의 지도층에서는 합법절차를 운운하면서 담임목사직의 세습이 정당함을 강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변명과 자기 중심적인 논리 또한 개탄스러움의 도를 더하는 일이다.
먼저 말하거니와 담임목사직을 세습해서는 안된다. 담임목사직을 세습한다는 것은 이미 해당교회가 상당부분 사유화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크나큰 죄악이고 불의이다. 물론 대를 이어 부자가 한 목회지에서 목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이 납득하고 한국교회가 그 일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에 가깝고, 국민이 개탄하는 일은 하늘이 개탄하는 일이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사유화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 교회가 어떤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 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아니다.
1. 목회자의 세습은 사도신조의 공교회 정신에 위배된다
사도신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서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서로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조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조금 잘못되어 있다.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번역하면 “거룩한 공 교회”를 믿는다 혹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고 번역해야 한다. 이 공 교회란 말의 뜻은 교회는 어떤 신분이나 어떤 인종이나 어떤 지역이나 어떤 집단의 교회가 아닌 만민의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인 이유는 구원의 보편성과 만민을 향한 선교의 요청 때문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인의 교회도 아니고 신분이 높은 어떤 집단의 교회도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종과 주인을 모두 차별 없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교회를 만민의 교회로 만들었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라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가히 혁명적이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로마제국은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이런 신분 사회에서 자유인과 종이 한 형제자매 되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민사상 때문에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취급할 수 없었다. 또한 여성들은 사람의 수효를 헤아릴 때 수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성차별이 심각한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만민이 한 형제자매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사도신조에 고백되고 있는 공 교회 곧 만민의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놀라운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선언한 깊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고백이었다.
교회는 공 교회, 곧 만민의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주인일 수 없고 만민이 교회의 주인이다. 이 세상 속에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있다. 땅 한 평, 건물 한 모퉁이까지 주인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교회만은 만민이 교회의 주인이다. 가난한 사람도 교회의 주인이고 장애인도 교회의 주인이다. 지위가 낮아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도 교회에서만은 그들이 주인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 값으로 그들을 교회의 주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세습은 목사가 교회를 상당부분 사유화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회는 목사와 그를 따르는 몇몇 장로들이 만든 사업체가 아니다. 영원토록 교회는 사유화할 수 없는 만민의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 값으로 만든 공 교회, 곧 만민의 교회를 어떻게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이 전횡을 일삼고 사유화할 수 있단 말인가! 사도신조의 고백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공 교회, 곧 만민의 교회를 믿는다고 예배 때마다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만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비로소 탄생될 수 있는 교회였다.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도신조를 위반하면 이단으로 규정된다. 그만큼 사도신조는 한국교회 내에서는 가장 큰 권위를 갖고 있는 신조이다. 한국교회 내에서 이단과 정통을 나누는 시금석인 이 사도신조의 정신에 목회자의 세습행위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을 담임 목사직을 세습하고자하는 당사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세계의 교회가 공인하는 가장 큰 권위를 갖고 있는 정통신조는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사도신조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인데 반해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최초의 정통신조이다. 이 신조 역시 교회에 관해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나는 믿는다고 되어 있다. 교회가 공적인 교회, 곧 만민의 교회라는 것은 사도신조 뿐만 아니라 동서교회가 공히 고백했던 가장 권위 있는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도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가 사유화될 수 없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도 예배 때마다 고백하고 있다. 교회의 사유화의 상징적 행위로 볼 가능성이 농후한 목회자의 세습행위는 동서교회가 공히 갖고 있는 교회에 대한 기본 신조에 충돌된다.
2. 목회자는 세습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부르시는 것이다.
교회의 성직은 성령의 부르심에 기초되어 있다. 그것이 목사직이든 장로직이든 감독직이든 집사직이든 성령의 부르심이 핵심이다. 교회의 담임목사직은 감독이 임명했던지 아니면 교회의 인사위원회에서 적법절차를 밟아 투표를 행하고 상회에서 허락을 받았던지 간에 이런 인간적인 행위와 방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부르심이다. 중요한 것은 담임목사를 모실 때에 담임목사를 모시기 위한 모든 인간이 행하는 절차들은 성령의 활동을 도와드리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몇몇 사람들이 인간적인 꾀를 내어 무리하게 자신들의 원하는 어떤 사람을 담임목사로 모셨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는 행위가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목회자를 세습한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정한 적법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삼천리 강산이 개탄하고 뜻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좌절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법절차를 운운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담임목사를 모시기 위한 교회의 적법절차가 과연 성령의 뜻을 받든 교회의 절차였는가 아니면 은퇴하는 힘있는 카라스마적 목사의 뜻을 받드는 절차였는가? 후자가 맞다면 그 적법절차는 이미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절차였을 것이다.
한국교회 내에는 훌륭한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잘 감당할만한 성령에 의해 길러진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있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죄악된 인간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그르쳐져 왔고, 지금에 와서는 대규모로 그르쳐 지고 있다. 자신의 친인척이나 자신의 집단의 인물을 넣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혈투를 벌렸던가. 바로 이런 못난 행위의 극치가 목회자의 세습이 아닌가!
한 교회의 흥망성쇠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교회가 성령께서 부르시는 인물을 담임목사로 모실 때 그 교회는 찬란한 빛을 발휘할 것이고 세계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게될 것이다. 담임목사를 모셔야 되는 교회는 모든 구성원들이 탐욕을 버리고, 죄악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목회자 세습이나 행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 사람 넣기에 몰두하면 21C의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는 교회가 될 것이다.
3. 목회자의 세습은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이 있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 안에는 이 한 분 주(主) 외에 다른 주는 없다. 교회 안에 이 한 분 주 외에 다른 주가 없기 때문에 교회는 만민이 주인인 교회가 될 수 있다. 이 한 분 주 외에 다른 인간적 주가 생기면 이미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고 그 인간적 주는 우상적 존재가 된다.
히틀러(A. Hitler) 시기의 독일의 국교회는 히틀러를 주로 받드는 교회였다. 당시의 독일의 국가주교였던 루트비히 밀러(L. Miller)가 주도했던 ‘독일의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은 “그리스도께서 아돌프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만고에 길이 남을 치욕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 됨을 그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성명이었다. 독일의 교회 안에는 이미 루트비히 밀러를 대리인으로 하는 히틀러라는 주인이 생겨났고, 그는 독일교회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칼 바르트(K. Barth)가 기초한 독일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은 히틀러와 루트비히 밀러에 저항하는 선언으로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가 없음을 선언하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암흑기의 독일교회의 빛나는 횃불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앙 받는 신학선언이었다.
담임목사가 교회의 결정을 전횡하고 자신의 아들을 세습시킨다는 것은 이미 그가 상당부분 교회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뜻이 자신을 통해 나타난다고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돌프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외친 독일의 국가주교 루트비히 밀러의 말과 큰 차이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힘을 사용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그곳에 교회의 참된 주님인 그리스도께서 계실 자리가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은퇴한 원로목사의 간섭 때문에 심각한 분란이 일어난 교회가 한 두 곳이 아니다. 원로목사는 은퇴한 그 순간부터 그 교회에 대한 자신의 직무가 끝난 것이다. 비록 그가 그 교회의 성장에 큰 공헌을 세웠다할지라도 그는 미련 없이 그 다음의 일을 후임 담임목사에게 맡기고 떠나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원로목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 교회를 자신의 교회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후임 담임목사를 압박하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했다. 원로목사와 후임 담임목사와의 갈등은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깊은 병인 동시에 한국교회를 죽이는 암적 요소이다.
이 한국교회의 깊은 병이요, 한국교회를 죽이는 암이 마침내 목회자의 세습의 형태로 오늘날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은퇴하는 원로목사는 자신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신의 아들을 담임목사로 세우고, 자신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는 은퇴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교회를 소유하겠다는 욕심의 발로인데, 이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안중에도 없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또한 과거 조선시대에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아들인 세종을 왕위에 앉히고 상왕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죽기까지 국정을 계속 장악했던 구조와 대단히 유사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목사도 주인이 아니고 장로도 주인이 아니다. 교회 안에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다른 주인이 없다. 교회의 많은 힘있는 목사들에게는 자신의 교회를 사유화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특별히 이런 교회일수록 목사직을 세습해서 목사 부자가 주인이 되고 현왕과 상왕과 같은 구조를 만들기 쉽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되기를 멈추고 특정 목사의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된다. 힘있는 카리스마적 목회자일수록 은퇴할 때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진정한 카리스마이기 때문이다.
4. 목회자의 세습은 성도들이 태만과 방임의 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눅10: 25-37에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다. 그러면 강도 만나 거반 죽게된 자를 방임한 채 그냥 가버린 레위인과 제사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마음에 큰 가책을 느끼지 않고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태만과 방임의 죄를 저지른 자들이다. 바른 일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될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태만과 방임의 죄이다.
로흐만(Lochman)은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라는 저술에서 교만의 죄와 더불어 태만의 죄를 언급했다. 인간이 자신의 가슴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거인이 되고 스스로 신이 되어 모든 일을 행하려 하는 것이 교만으로서의 죄라면 바른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할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태만으로서의 죄이다. 로흐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회는 교만으로서의 죄는 잘 알고 있지만 태만으로서의 죄에 대해서는 깊이 깨닫지 못했다.
목회자의 세습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고 한국교회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엄청난 심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세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일이 해당교회에서 심각하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을 심각하게 받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많은 성도들의 무책임성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다수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복을 받고 자신의 영혼이 쉼을 얻기를 바라고 있지 교회 일에 끼어 들어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교회의 지도층과 마찰이 일어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뒤에서 교회의 지도층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은 하지만 스스로가 문제 해결을 위한 일꾼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상당수는 교회가 잘못되면 교회를 떠나면 그만 이라는 지극히 주인 의식이 없는 성도들이다. 성도들의 절대수가 목회자의 세습은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심각한 저항 없이 세습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런 수많은 성도들의 무책임성에 기인한 태만과 방임의 죄가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바르게 교회를 이끌어 나갈 때 그 목회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자신의 탐욕에 기인된 잘못된 계획을 수립할 때는 당연히 이에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뜻이 목회자의 뜻에 앞서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불의가 일어나고 교회가 썩고 교회가 사유화되고 있는데도 목회자의 뜻을 따른다든지, 이를 묵인한다든지, 뒤에서나 투덜대고 욕하는 성도들은 모두 심각한 태만과 방임의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다. 바른 교회는 온 성도들이 깨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온 성도들이 깨어 있는 교회에는 태만과 방임의 죄는 없다. 목회자의 세습이 일어나는 곳에는 세습하는 목사 부자의 불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태만과 방임의 죄에 빠져 있는 성도들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5. 목회자의 세습은 하나님 나라의 거울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치명적으로 파괴시킨다.
교회는 미래에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 구체적 현실로 오늘의 역사 속에 나타나 있는 보이는 실체이다. 물론 오늘의 교회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당위성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하비 콕스(H. Cox) 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이고 몰트만(J. Moltmann)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 만들어 나가는 메시아적 공동체이다.
스텐리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에 의하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세상과는 대립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질서의 근원적 장소이다. 하우어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의 새로운 질서와 구체적 대안은 매우 중요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특정인에 의한 정치적 지배구조가 파괴되는 곳, 특정인에 의한 교회의 지배구조가 파괴되는 곳, 경제적 수탈과 인권이 짓밟히는 것이 멈춰지는 곳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왕조사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을 위해서는 파괴되어야 할 구조이고 형제자매 공동체라는 새로운 질서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세습이란 과거의 왕조사회나 있을 법한 일로 하나님 나라운동에 크게 역행하는 구시대적 질서이다. 그동안 한국 국민들은 북한에서의 세습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한심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북한의 세습은 물론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그 세습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역사 속에 보이는 실체로 보여주어야 할 교회에서, 그것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막힌 일이 아닌가! 오늘의 한국의 재벌기업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재벌기업들의 세습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와 시민단체와 온 국민이 힘을 기울이고 있지 않는가. 세습체제를 타파하고 진정한 정의의 질서를 앞장서서 만들고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앞장서서 세습체제를 만들고 이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은 눈물이 앞을 가리는 현실이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구조와 질서를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게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구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실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힘있는 자만이 잘 사는 세계가 아니라 장애인이나 가난한 자들도 잘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특권층이 없어지고 귀족이나 불의한 지배자가 없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구조와 질서를 바꾸기 이전에 교회는 먼저 자신의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모습을 나타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의 세습은 하나님 나라의 현현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치명적으로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6. 목회자의 세습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예언자적 메시지를 무력화시킨다.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은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의 교회가 깨닫게 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독일의 몰트만(J. Moltmann)의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과 메츠(J. B. Metz)의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ie zur Welt)이 출간된 이후, 1965년에 끝난 카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 전세계의 교회는 위의 저술들과 공의회의 영향을 받아 정의를 세우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세계의 인권은 획기적으로 신장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정의와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고 한국도 민주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교회는 선교적 사명과 더불어 예언자적 사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사야, 예레미아, 아모스, 미가서 등에 실려 있는 예언자들의 말씀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계층을 향해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이 예언자적 사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너무나 명백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런데 재벌의 모습을 규탄하고 정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교회가, 그것도 한국의 대표적 교회에서부터 전 국민이 규탄하는 세습을 행하고 있다면 교회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꿇어 엎드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질책하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교회는 오늘날 만연되기 시작하고 있는 세습 관행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7. 목회자의 세습은 교회성장에 큰 손실을 입힌다.
목회자의 세습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습하는 목사 부자의 욕심에 기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 목회자의 세습이 널리 퍼져서 관습화되면 힘없고 배경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훌륭한 목회자로 길러진 일꾼들은 임지를 찾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왜 한국의 재벌 기업들에 큰 문제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가? 왜 유능한 전문 경영인 체제를 확립하지 않으면 한국 기업들은 살아날 수 없다고 세계의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충고하고 있는가? 재벌 2세들도 충분히 유능하다고 재벌가에서는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설득력 있는 말인가?
이사회를 지배하는 재벌 가문에서 자신들의 2세를 최고 경영인으로 합법적으로 뽑았다고 강변할 때, 그 말이 사회가 납득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말일 수 있겠으며, 그 절차가 합법적이었다고 해서 뽑힌 재벌 2세가 최고 경영자로서 자격이 정말로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기업들이 족벌지배로 말미암아 모든 결정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가. 그리고 이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 때문에 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지금 온 국민이 그 부채를 갚기 위해 허리가 휘어지고 있지 않는가.
세습으로 인한 유능한 담임목사의 영임의 실패는 유능하지 않은 재벌 2세로 말미암아 기업이 어려움을 겪듯이 해당교회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것이다. 해당 교회의 성장이 멈출 가능성이 매우 높고, 해당교회가 급속히 쇠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힘을 다해 헌금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교회의 헌금 사용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최근에 와서 헌금에 소극적인 성도들이 상당히 많은데, 담임 목사직을 세습하면서 교회를 사유화시킬 때 과연 성도들이 과거처럼 힘을 다해 헌금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목회자의 세습은 결국 교회를 망칠 것이다. 그것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면 한국교회는 급속히 쇠퇴할 것이다. 세습하고자 하는 목사부자들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들의 욕심은 자신들의 교회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다른 교회들에 엄청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목회자의 세습은 교회 안팎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다. 세습하는 교회가 많아지면 그렇지 않는 교회도 사회적으로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교회의 선교와 성장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고 헌금과 선교실적은 눈에 보이게 나빠질 것이다. 담임 목사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목회자들은 담임 목사직의 세습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일생동안 이룩한 업적을 능가하는 손실을 한국교회에 입히게 된다는 점을 유념하고 이를 한시바삐 그만 거두어야 한다.
결 언
목회자의 세습은 불의이다. 그것은 사도신조가 규정한 공교회 정신과 충돌하고 있고 훌륭한 담임목사를 세워서 교회를 바르게 성장시키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이 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나라의 거울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금이가게 하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교회의 성장과 선교에도 치명상을 입힌다. 목회자의 세습이 명확하게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묵인이 태만과 방임의 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바르게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목회자의 세습과 같은 비난받을 만한 불의한 일을 없애고, 더 나아가서 교회를 사유화시키는 것과 관련된 일체의 일을 한시바삐 척결해야 할 것이다.
출처 : 기윤실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 자료집](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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