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레노바레(관상기도)운동 연구보고서(96차총회, 합신)

주방보조 2011. 10. 24. 14:36

합신측 96회 총회 ‘레노바레 운동’ 연구보고서
2011년 10월 24일 (월) 07:44:57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2011년 장로교단 9월 총회, 이단사이비 관련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는 관상기도였다. 예장 합동측이 관상기도에 대해 “어떠한 교류도 삼가며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결의한 데 이어, 예장 합신측 역시 관상기도 운동과 레노바레 운동에 대해 “참여하지 말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양 교단은 각각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위원회에 회부하여 계속 연구토록 함으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 위험성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이들 운동에 대한 충분한 연구자료가 부족한 것이 교계 현실이다. 이에 독자들의 구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양 교단의 총회에 보고된 연구보고서 전문을 하나씩 게재한다. <편집자 주>


리처드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문제점

조진모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한국교회는 작은 돌 하나에도 요동하는 작은 연못과 같다. 누군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하면 그 여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특히 저명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이 연못에 큰 돌을 던지곤 할 때마다 그 파장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교회성장과 성도의 성숙에 결정적인 ‘그 무엇’을 제공해 준다는 말이 들리기만 하면, 이 ‘새로운 것’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과 신학에 대한 검토도 없이 이것은 교회 안에 열병처럼 퍼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잠시 뿐이다. 대부분은 그저 하나의 이벤트로 그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연못은 다시 고요해 진다. 그러다가 다른 돌이 던져지면 연못은 다시 요란해진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레노바레(Renovaré)는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 이 운동은 1988년에 미국과 한국 교계에 잘 알려져 있던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정작 레노바레의 출발지인 미국의 교단들은 양극의 반응을 보여 왔다. 에큐메니칼 정신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적 교단들은 포스터를 크게 환영하였다. 이와 반대로 보수적인 교단은 이 운동에 동조하기는커녕 지금까지 그의 신학적 오류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왔다.

레노바레가 ‘교회 갱신’을 위한 운동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그 당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그 당시 ‘큰 돌’이었던 포스터를 한국교회의 연못을 향해 힘을 모아 던졌다. 작은 연못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세게 출렁거렸다. ‘그 무엇’을 찾고 있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레노바레는 효과가 보장된 영향력을 지닌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기대와 달리 초창기부터 한국교회는 레노바레의 정체성에 대한 상반된 의견으로 인하여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레노바레가 신비주의적이며 가톨릭 영성에 기초하였느냐는 것에 있었다. 레노바레에 긍정적인 목회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였지만, 이 운동에 우려를 표하던 보수적 목회자들의 목소리도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1) 이런 상황에서, 2007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포스터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직접 이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신비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자신이 인용하는 16세기 이전의 사람들이 가톨릭 교인들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신비주의와 가톨릭 영성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2)

그러나 레노바레와 관련된 신학적 논쟁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요즈음도 그칠 줄 모른다.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신비주의와 가톨릭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 레노바레의 대표인 포스터가 공개적으로 부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포스터가 진실을 감추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 신학적 논쟁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포스터와 그가 주도하는 레노바레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석하여 그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1. 베일에 가려져 있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

1) 포스터의 레노바레
리차드 포스터는 1978년에 출판된 <영적 훈련과 성장>으로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3) 그 후로 그는 전보다 훨씬 바쁜 강의와 목회 일정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86년 가을, 그는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결단하였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로 빼앗겼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모든 공적인 일에서 손을 놓은 것이다. 그는 이후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갱신을 도울 수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 운동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8년 11월에 그를 대표로 하는 레노바레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당시 포스터는 앞서 언급한 <영적 훈련과 성장> 외에도, 그가 1985년에 저술한 <돈 섹스 권력>으로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4) 이 책은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불신자와 타 종교인들도 즐겨 찾는 도서가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선지자와 같은 목소리를 지닌 인물로 추앙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터가 레노바레를 소개하자, 그의 책을 통하여 그와 친숙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크게 환영하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유사하게 재현되었다. 기독교 서적을 자주 접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포스터가 저술한 서적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영적 훈련과 성장>, <돈 섹스 권력>이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였음은 물론, 그가 1992년에 저술한 <기도>가 17만권이나 팔리며 그는 한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5) 이렇게 이미 구축된 그의 명성이 ‘포스터의 레노바레’가 한국에 쉽게 상륙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포스터라는 인물이나 레노바레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포스터의 레노바레’로 알려지고 수용된 것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때에, ‘이 시대의 영성을 주도하는 포스터의 레노바레’는 무엇인가 신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2) 레노바레와 내적 갱신
영적 성장과 교회의 근본적인 갱신의 필요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시기부터 각 시대별로 교회가 처해있던 상황 속에서 고민하여 온 주제이다. 그러나 레노바레는 그 출현 초기부터 외적 성장이 아닌 내적 갱신을 강조하였다. 그 당시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처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1955년에 <하나님의 다리> 6) 라는 책을 출판한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은, 1965년 미국의 풀러신학교에 세계선교대학(School of World Mission)을 설립하였다. 이 일은 전 세계의 교회가 ‘교회성장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전 세계의 현대복음주의자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와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교회의 외적 성장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맞추기 위하여 교리적 순수성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였다. 예배의 스타일도 전통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대인의 구미에 맞도록 새롭게 바꾸었다. 강단에서는 가급적이면 죄와 회개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값싼 복음을 외치게 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부터 대형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숫자가 목회자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숫자가 성공의 기준이 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심스럽게 예견되었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외적 성장은 성도들의 내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영적 성숙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다. 교회출석이 곧 신앙의 전부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교회성장은 상대적으로 영적 빈곤을 가져다주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터의 레노바레는 외적 성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내면의 세계를 갱신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레노바레 홈페이지에 ‘레노바레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이 간략하게 나와 있다. “레노바레는 콜로라도주(州) 잉글우드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기독교 단체이다. 우리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원하는 자들에게 좀 더 계획적인 삶과 영적 형성을 제공하고, 장려하고, 설계하고, 옹호하는 일을 탐구한다.” 7)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하던 자들은 포스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급성장을 해오던 한국교회는 80년대 말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침체기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회 안에는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 염려는 중단된 교회의 성장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을 뿐, 성도들이 영적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한 것은 아니었다. 2005년, 레노바레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의 한국교회는 많이 지쳐 있었으며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부흥회와 철야기도 등 ‘열정적인 신앙훈련’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교회에 ‘영적 형성’이 소개되자, 이것을 ‘조용한 신앙훈련’ 내지는 ‘고상한 신앙훈련’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유행으로 번지고 있던 상황에서, 내적 성숙을 강조하는 레노바레는 이 시대에 걸맞는 훌륭한 새로운 영성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포스터의 서적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접하고 있었던 지식층의 기독교인들은 레노바레가 성장주의 등의 외부 지향적인 병폐들을 치유하고, 진정으로 성숙한 성도와 교회로 세우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쉽게 동조할 수 있었다.

3)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
포스터는 레노바레를 시작하면서 일종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특정한 교파 또는 신학적 전통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추어 교계 내의 보다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시작하였다. 1948년에 첫 총회를 가진 WCC 운동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력할 것을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 레노바레가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레노바레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데, “20년이 넘도록 영적 형성 운동에 기초를 둔 레노바레의 방침은 기독교적이며, 그 폭은 에큐메니칼적이며, 그리고 범위는 국제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8)

현재 미국 레노바레 본부에서 사역하는 자들의 교단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침례교, 퀘이커, 성공회, 자유 감리교, 미국 침례교, 로마 가톨릭, 미국 복음주의 장로교, 루터파, 연합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 남침례교, CMA 등에 속해 있다. 9)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포스터가 편집하여 2005년에 출판한 <레노바레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50명이 넘는 집필자들의 프로필에 나타난 다양성이 매우 흥미롭다. 11) 오랫동안 영성 신학을 가르쳤던 미국장로교회(PCUSA) 목사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에서부터 퀘이커 신학교인 조지폭스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하워드 메이시(Howard R. Macy)까지 이 프로필 목록은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한국에 레노바레가 소개될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레노바레는 그 시작과 함께 교단과 신학의 정체성을 뛰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이 도입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과 현재 한국 레노바레를 섬기고 있는 인물들이 속한 교단은 매우 다양하다. 12) 또한 한글로 번역된 <레노바레 성경>도 다를 바가 없다. 이 책의 추천자들과 번역진의 배경이 유난스럽게도 다양하다. 13)

이 책은 마치 주류 교단과 신학교에 레노바레가 널리 수용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홍보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레노바레는 각 교단의 공식적 견해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힘을 합하여 이 운동을 주도해 가고 있다. 14) 한국교회의 각 교단에서 나름대로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의 후원을 받는 일에 성공한 <레노바레 성경>과 레노바레는, 현재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도들의 내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으로 소개된 것이다.

4) 포퓰리즘 뒤에 숨겨진 정체성
지금까지 우리는 레노바레의 대중성과 관련된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하였다. 레노바레는 이 운동의 창시자인 포스터의 개인적 명성에 힘입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보다 쉽게 수용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외적 성장과 상반되는 내적 변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상황에서 소개가 되었으며, 또한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교단과 신학을 초월한 운동으로 그 성격을 굳혔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레노바레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리차드 포스터라는 인물의 포퓰리즘 뒤에 레노바레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국교회보다 한국교회에서 더욱 심각하다. 실상 레노바레가 한국에 소개된 지 수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정체성은 아직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 레노바레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운동이 신비주의이며 가톨릭 영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혀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하는 웹사이트(www.renovare.co.kr)에서도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그러나 미국의 레노바레 홈페이지(www.renovare.us)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 레노바레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운동은 바로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존재들이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통일체를 지녔지만, 우리의 삶은 대부분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의하여 이끌려 간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중심은 우리에게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보는 방법을 구체화하고,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지도하고, 또한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게 한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누구인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내적 생명을 발전하는 데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형성”에 관한 것이다.

“‘영적 형성’은 하나의 과정이며,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여행인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연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방관자가 아니며, 변함없이 우리와 관계를 하시려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레노바레에서 그러한 풍성한 삶이 지금 당장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삶을 받아들임으로서 - 그와 같아지고 - 우리는 매일 매일 확실히 새로워지는 생활과 믿음의 풍족함을 경험하게 된다(골3:10).” 15)

위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운동은 ‘내재하는 영적 중심’, ‘내적 생명의 발전’, ‘내면의 여행’, ‘하나님과 함께 참여’ 등 지금까지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매우 신비한 방법들을 기본 개념들로 삼고 있다. 레노바레는 매우 생소한 방법과 목적을 가지고 내적 성장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이룬다는 당찬 비전에 입각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한국교회 성도와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홍보 차원에서 지금까지 레노바레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인물과 그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이 운동에 참여시킴으로써 매우 훌륭한 마케팅을 해왔다. 그러나 포퓰리즘 뒤에 그것의 정체성을 숨겨둠으로써 미성숙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을 혼동 속에 빠뜨리게 한다면, 이는 포스터가 주장한 성도의 성숙과 교회의 갱신의 목적에 스스로 역행하는 일이다.

2. 레노바레의 기본 사상


1) 성경관
한국 레노바레의 대표인 이동원 목사는 <레노바레 성경>의 추천사에서 “이 성경을 앞에 두고 연구와 묵상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다. 16) ‘연구와 묵상’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행하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행된 성경으로도 가능한데, 무슨 이유로 레노바레에서 ‘연구와 묵상’을 위한 성경을 출판하였을까? 세대주의자였던 사이루스 스코필드(Cyrus I. Scofield)는 1909에 성경을 배우려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신학적 관점으로 해석된 내용을 담아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 후로 특별한 신학적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다양한 주석 성경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서점에는 참으로 다양한 주석 성경이 꽂혀져있다. 그러나 포스터가 편집장을 맡은 <레노바레 성경>은 ‘또 하나의 주석 성경’으로 보기에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레노바레 성경>은 한 마디로 레노바레의 지침서이다. 17)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성경에는 ‘연구와 묵상’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는 물론, 성경의 본문을 묵상하는 방법이나 질문의 예 등을 찾아볼 수 없다. 18)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포스터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통하여 레노바레의 주된 목적인 ‘영성 형성’을 돕는 서적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 전체를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레노바레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The with-God life) 일색이다. 성경의 앞쪽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전체 서문, 파노라마식 개관, 그리고 요약을 기록하였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개하는 소논문을 15편이나 66권의 성경 사이에 나누어 삽입하였다. 그 뿐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50인을 선별하여 그들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설명하면서, 각 개인의 삶에 나타난 특징을 과거와 현재에 ‘영적 형성’을 실천한 인물들의 사상과 연결시키고, 나아가서 독자들을 위한 ‘묵상과 적용’을 위한 질문으로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레노바레 성경> 전체적으로 수십 번 반복된 ‘묵상과 적용’은 성경 말씀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과 같은 방법으로 ‘영적 형성’을 수행한 개인들의 사상에 대한 ‘묵상과 적용’이다. 19) 이와 같이 <레노바레 성경>은 조직적으로 독자들에게 레노바레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도록 유도한다.

<레노바레 성경>는 성경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으로 소개한다. 20) 비록 살아가는 환경과 처지가 달랐어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하셨다는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적인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다. 또한 그는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자신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것을 분부하셨다. 21) 그러므로 <레노바레 성경>이 ‘영적 형성’의 도구라는 것은, 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노바레 성경>는 스스로 새롭게 내린 성경의 정의에 맞추어 색다른 성경 읽는 법을 제시한다. 성경 읽기, 연구, 암송, 그리고 묵상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없으며, 이런 신앙 행위를 통한 목적은 ‘참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시한다. 22)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주관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실재가 독자의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 대신 성경을 읽으면서 내면세계의 개혁이 일어나려면 ‘마음으로 읽는 방법’, 즉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 독서’(lectio divina)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방법은 “말씀의 본문에 굴복하고 내가 말씀을 다루기보다 말씀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나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본문의 극적인 상황에 나의 마음과 생각이 젖어 들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23) 이 방법은 가톨릭교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고대 수도승의 전통에 근거하여 권장하는 성경 읽기법으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레노바레 성경>이 영적 형성을 위한 지침서라는 의미가 좀 더 확실 해졌다. 그들에게 성경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안내서이다. 성경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 이야기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의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구전된 설화식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레노바레 성경>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노골적으로 부인한다.

“창세기는 초기 신앙 공동체 안에서 대대로 구전(口傳)된 설화식 이야기로 시작한다. 모든 가족사가 다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누구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지 점차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반복하여 들으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 형성되었고, 신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중략) 이 시작에 관한 책을 만들기 위해 풍부한 구전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상이한 문학적 자료들을 사용했다. 고대 예배 공동체의 초기 의식에서 비롯됐음직한 유려한 찬송시들도 그 가운데 하나다. 고대 근동의 종교적인 설화와 신화에 병행하는 이야기들이 유일신 사상을 고취하려는 의도 하에 재구성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중요한 사건들이 상세히 기록된 긴 사화(史話, saga)들도 있다. 예배 의식 이야기들은 특정한 예배 장소들이 세워졌음을 설명해 주며 풍습과 장소, 명칭들의 유래를 말해준다. 족보들은 가족 구성원들을 세대별로 열거하고 큰 덩어리로 묶어 통일성 있는 구조로 나타낸다.” 25)

이와 같이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대신 성경의 영감설과 권위를 부정하는 <레노바레 성경>은 레노바레의 신학 사상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문제는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을 다루는가하는 것에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성경에 입각한 신학, 성경대로 믿는 신앙,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강조가 정당화될 수 있다. 1920년대 미국장로교회와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 생겼던 신학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었다. 고등비평을 받아들인 자유주의자들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부인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축자영감과 권위를 수호하려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읽고 있는 성경은 보수주의자들의 성경과 다르다고 비판한 그레셈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자유주의가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토대가 서로 다른 까닭이다. 기독교는 성경의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 자유와 생활을 성경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죄 많은 인간의 변화하는 정서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26) <레노바레 성경>을 수용하는 것은 곧 자유주의의 성경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2) 역사관
포스터는 교회사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풀러신학교에서 상담학으로 목회학 박사를 받고 줄곧 영성신학을 가르쳤던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다. 또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교회 역사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해석하려 한다. 또한 그는 교회 역사의 맥락에서 레노바레 운동의 의의를 찾으려 한다.

우리는 포스터가 1998년에 출판한 <생수의 강> 27) 에서 그의 역사관을 쉽게 접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사의 흐름을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묵상의 전통, 성결의 전통, 카리스마의 전통, 사회 정의의 전통, 복음의 전통, 성육신의 전통이다. 여기서 열거한 전통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포스터의 관심은 제도화된 교회가 남긴 역사의 발자취에 있지 않다. 그보다도 그는 ‘영적 삶의 강물’로 비유되는 교회의 전통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내려하고 있다. 이 강물의 물줄기들은 때로는 고립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신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고립은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일부 귀중한 교훈이나 중요한 경험들이 무시되어 왔으나 적절한 시기에 한 인물 또는 운동이 나타나 이런 소홀함을 바로잡곤 한다. 이들이 새로운 가르침의 영향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고정 관념과 다른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변화되는 일에 대해 저항하게 되고, 새로운 운동을 저해하게 된다. (중략) 이런 현상이 몇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되어 있어났다. 그 결과 삶의 여러 가지 물줄기들- 좋은 물줄기, 중요한 물줄기들-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분리로 인해 우리들은 균형 잡힌 삶의 비전과 믿음을 상실했다. 하지만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그 동안 서로 분리되었던 물줄기들을 모으고 계신다.” 28)

이러한 주장에서 포스터가 말하는 물줄기의 흐름이 기초하는 역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대부분의 교회사가(敎會史家)들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외면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고립, 소외, 그리고 분리되었던 전통들이 이 시대에 새롭게 부상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런 의도로 포스터가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포스터는 자신이 제시한 6가지의 교회사의 흐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고 닮아가는 삶(Christlikeness)을 귀중한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덕을 쌓고, 성령에 충만하고,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였던 개인과 단체에 대해서 교회사적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교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반면, 분명하게 삶의 모범을 제시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느냐의 여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예수를 본받는 일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터가 전통적인 교회사의 서술을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교회사의 흐름을 재편성하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신학 전통의 특성을 아예 무시했다는 점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먼저 ‘묵상의 전통’의 흐름을 나타낸 도표에 포스터의 그의 넓은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다. 29) 그는 여기서 2000년 동안 교회사에 나타난 여섯 가지의 ‘중요한 운동’을 소개하였는데, 사막의 수도사와 수녀들, 베네딕트회 수도회, 성 클라라 수녀회, 공동생활 형제자매회, 모라비안 운동,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 등이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여러 ‘주목할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닛사의 그레고리, 노르위치의 줄리안, 십자가의 요한, 리시우의 테레사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20세기의 인물들로 선정된 세 사람, 캐서린 휴에크 드 도허티,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은 모두 가톨릭이다. 30)

또한 ‘카리스마 전통’의 흐름을 나타낸 도표에서, 포스터는 ‘중요한 운동’을 몬타누스주의 운동, 그레고리안 전례 운동,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재세례파,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의 부흥, 그리고 현대 예배의식 각성을 꼽았다. 31) 또한 ‘주목할 인물’로 몬타누스, 빙겐의 힐데가르드, 조지 폭스, 윌리엄 시모어, 오랄 로버츠, 그리고 존 윔버 등을 들었다. 이들도 모두 보수적인 신학의 전통에서 이탈한 개인과 단체들이다.

그러나 포스터는 그들을 소개하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삶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후대에 좋은 예가 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교회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그가 소개한 대표적 인물과 운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부분이 첨부되어 있다. 아마도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의도와 함께, 교회 역사의 영웅과 같은 그들을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소개하는 글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교회의 살아 있는 역사를 구성하는 인물들과 운동들을 흘끗 살펴보는 일을 즐기기 바란다.” 32)

포스터는 교회의 역사에 대하여 솔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가운데 지난 2천년 동안 이끌어 오신 교회의 흔적을 자신이 만든 ‘영적 삶의 강물’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려 한다. 문제는, 교회 역사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없는 독자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포스터가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교회역사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없는 일반 성도들은 그의 잘못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객관성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교회 역사를 해석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자신이 평생토록 힘써온 ‘영적 형성’의 의미를 찾고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교회사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3) 구원관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척결하고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운동이다. 특히 요한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후대 교회에게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교리를 분명히 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기 독자적인 교리와 역사를 지닌 두 개의 다른 종교가 되었다. 서로를 향한 불필요한 적대심이나 증오감은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두 종교 사이의 교리적 동조는 결코 가능하지 않으며, 어떤 이유에서도 이를 허용할 수 없다.

그런데 포스터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혼합시킴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이 후대에게 물려준 귀중한 유산을 애써 거부하려 한다. 포스터는 2004년 에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속성을 설명하는 ‘Salvation is for Life'라는 논문을 기고하였다. 이 논문에서 포스터는 “구원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비록 그가 선택한 단어는 성경적으로 보이지만, 그 표현의 의미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관으로부터 명백히 이탈한 것이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리가 소유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33)

포스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닌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속사람의 심원이 갱신되어 창조물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완벽한 자녀로 변화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들은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 포스터는 로마 가톨릭의 신인협동론적인 반펠라기안주의를 그대로 도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입된 은혜(infused grace)를 통하여 인간의 행위(work)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나는 ‘은혜 안에서의 성장’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를 말하기를 원하는데, 이 견해들이 이상할 만큼 모순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잘 어울리는 것들이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삶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촉진시키는 신적 은혜의 주입(infusion of divine grace)을 관대하게 허용해야 한다. (중략) 나의 두 번째 견해는 동전의 다른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노력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실제적인 노력이다.” 34)

이처럼 그는 ‘영적 형성’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으로 보았다. 35) 성도들은 “영적 형성”이란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변화에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곧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행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는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법적 선언이라는 것과, 이후로부터 우리는 평생토록 성화의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성화에 이른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포스터는 죽음 이후에나 이루어질 영화가 이 땅에서 성화와 함께 이미 시작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완전한 변화(성화)의 과정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신다. 그것은 현재에 시작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오히려 지금 당장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있으며 반드시 그리 하신다.” 36) 포스터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하여 얻는 새로운 질서의 개념은 요지부동한 중심적 사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포스터의 주장과 정반대로 타락한 인간은 부패와 무능으로 인하여 어떤 노력으로도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고의 거룩한 행위는 결코 반복될 성격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으며, 거룩하게 되고, 나아가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으로써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인위적으로 흉내내며 닮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터의 견해를 선택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반펠라기안주의적 구원관을 수용한다는 것이요, 그것은 곧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3.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사명


1) 신비주의적 내적 변화
포스터의 베스트셀러 <영적훈련과 성장>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37) 그렇다면 그가 1978년부터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레노바레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내적 변화’이다. 그는 이 책에 ‘들어가는 글’을 다음과 같이 마치고 있다. “우리 인생의 내적변화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는 목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38)

포스터가 퀘이커교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내면의 세계에 관심에 갖는 것은 너무 자연스런 일이다. <영적훈련과 성장>을 저술할 당시 그가 목사로 섬겼던 오리건주의 뉴버그 형제교회(Newberg Friends Church)는 1876년에 설립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퀘이커교회였다. 이 교회는 같은 지역에 퀘이커 교도들을 위하여 1885년에 설립된 조지 폭스대학 (George Fox University)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서북지역 퀘이커 교회들의 연례모임이 개최되는 상징적인 교회이다. 그의 신학적 뿌리는 17세기 영국에서 퀘이커교를 단독적으로 창시한 조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 있다. 폭스는 모든 사람 안에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지니고 있는데, 누구든지 스스로 이 빛을 바라볼 때 하나님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신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39)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조지 폭스가 7번 언급되지만, 그의 ‘내면의 빛’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없다. 그렇다고 포스터 자신의 신앙적 뿌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기초위에 자신의 사역과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세 가지를 혼합하였다. 이때부터 포스터는 신비주의적 영성을 간직하게 되었으며, 이 사상에 기초하여 <영적훈련과 성장>을 저술한 것이다. 40) 그러면 그에게 영향을 준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자신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를 체험했던 거장들의 서적을 읽게 된 것이다. 그가 소개하는 글은 모두 내면의 세계를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들인데, 17세기 수도승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의 <하나님의 임재 체험하기>, 16세기 신비주의자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의 <내면의 성>, 18세기 퀘이커 설교자 존 울먼(John Woolman)의 <일기>,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C&MA 목회자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의 <하나님을 바로 알자> 등이다.

둘째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도 카리스마와 열정을 가지고 작은 공동체를 인도하던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를 만난 것이다. 포스터는 자신이 윌라드로부터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써 학문적이며 성경적인 훈련을 통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통합으로 직접 계시를 인정하여 성경을 경시해 온 퀘이커의 전통의 약점을 보완하여 균형을 갖출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포스터와 윌라드는 원래부터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었다. 윌라드는 남침례교에 속해 있지만, 그는 인간의 내적 세계를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가 1988년에 저술한 The Spirits of the Disciplines에 나타난 윌라드의 사상은 포스터와 거의 일치한다. 41) 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도구이다. 42) 구원은 단순한 용서가 아닌 새로운 생명의 질서이다. 43)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영성훈련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 경건의 역사를 중단시켰다고 본다. 44)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a god)에 못지않은 존재이다.” 45) 윌라드는 포스터와 함께 레노바레를 공동으로 창설한 인물이 되었다.

셋째로, 루터교 목사인 윌리암 루터 바스비히(William Luther Vaswig)를 만난 것이다. 포스터가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예수를 특별하게 체험한 거장들의 글에 나타난 내용이 현실에서도 실제적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평신도들까지도 이런 기도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기도할 것을 다짐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기도는 살아있고, 정직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영혼을 꿰뚫고, 유쾌한 기도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마담 기용이 말하는 그 ‘하나님께 달콤하게 빠져드는 일’을 거듭 체험하기 시작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내가 경건한 거장들의 책에서 읽었던 체험들과 같은 느낌과 향취였다.” 46)

포스터가 언급한 마담 기용(Madame Guyon)은 17세기 신비주의자로서,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 중심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내적인 훈련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신적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며 철저하게 관통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47) 바스비히는 2011년 1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레노바레에서 기도를 통한 치유 사역을 책임졌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영적 훈련(Spiritual Discipline)을 내적 훈련(묵상, 기도, 금식, 학습), 외적 훈련(단순성, 홀로 있기, 복중, 섬김), 그리고 단체 훈련(고백, 예배, 인도하심, 축전)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훈련을 더욱 중요시 여겼는데, 내적 변화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그 결과로서 외적 변화를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포스터는 내적 훈련 중에서도 묵상 훈련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서문에 “영적인 삶의 고전적 훈련은 피상적인 삶을 떠나 깊이 있는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고전적 훈련은 영적 세계의 깊은 내부를 탐구할 것을 요구한다. 고전적 훈련은 공허한 세상에 해답이 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라고 기록하였다. 48) 그가 ‘내적 변화’를 위한 훈련은 교회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2) 내적 변화의 방법: 영적 형성
포스터의 내적 변화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였다.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주제로 풀어가는 그의 방식의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성경에 보면 아담, 에녹, 또는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하면서 교제를 나눈 자들이 있다. 그런데 포스터는 지금도 이런 방식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성품을 책임지고 새롭게 형성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창조 이래 항상 이러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인간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레노바레는 ‘영적 형성’을 선택한 것이다. 레노바레는 영적 형성을 매우 심각한 신앙 훈련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一致)를 추구하는 성품과 정체성을 키워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49) 그러므로 <레노바레 성경>은 영적 형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삶에 직접 임재하시는 이로움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생의 방향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하고 개인적인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영성 개발(영적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이 친밀하고 개인적인 의사소통을 지속해야 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확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50)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분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영적 형성’의 주된 사명이다. 이 대화는 중재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도우심이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친밀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대화이다. 그러나 그 대화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 또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이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려온 소수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영적 형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제’가 가능한 성품으로 새롭게 형성된 자들이다. 포스터는 현대인들도 '영적 형성’를 통하여 과거와 동일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Christlikeness)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레노바레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사역의 목적에 둠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제자들로 훈련시키는 것을 영적 형성의 우선적 사명으로 삼는다. 실상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며 그가 성도의 삶 중심에 반드시 그가 계셔야 한다. 그러나 포스터가 의미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은 이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그가 1996년에 Christianity Today에 기고한 ‘그리스와 같이 됨’(Becoming Like Christ)라는 글을 살펴보자. 그는 이곳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평생토록 지녀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되고(form), 일치되고(confirm), 변형되는(transform)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51) 그러나 이러한 변화된 삶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있다. 성령은 교사, 안내자, 그리고 상담자의 역할을 하시면서 확신과 용기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도들은 ‘공식적 방법’인 기도, 학습, 금식, 고독, 단순, 고백, 기쁨 등의 훈련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적 형성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시기 때문이다.

레노바레가 말하는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삶이 습관적으로 자리 잡힐 때 까지 반복적인 훈련을 거듭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녔던 습관을 반복적인 모방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포스터는 이러한 ‘공식적 방법’에 근거한 훈련에 임할 때에 “우리의 열정적이고 바른 정보에 입각한 행동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닮은 습관과 성향(Christlike habits and disposition)을 성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52) 영적인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새로운 거룩한 습성을 지니기 위하여 반드시 연습에 연습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그 결과 내적 성품이 개발되어 자신이 타고난 습성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노바레 성경>이 유도하는 묵상도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제 ‘영성 개발(영적 형성)’의 의미가 아주 명확해졌다. 제자들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마 28;20) 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이란 우리 속사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행동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을 말한다. (중략) 이러한 과정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고 ‘자동적으로’(automatic) 순종하는 것이다. 53)

결국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게 하는 훈련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태의 훈련 중에 포스터가 지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묵상 훈련’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매우 영적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귐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상 훈련’은 곧 ‘하나님과의 대화’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묵상을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실제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묵상은 우리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묵상이 종교 전문가들(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제사장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54)

나아가서 포스터는 ‘영적 형성’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묵상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상상(imagination)에 근거한 묵상이다. 상상이란 상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성경도 이에 대하여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도 포스터는 상상에 근거한 묵상을 소개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늘 상상력에 호소하셨다. 많은 경건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권장한다.” 55)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경건의 거장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프랑수아 드 살르(Francis de Sales)로서 두 사람 모두 신비주의자이다. 이와 같이 포스터는 신비주의자들의 방법을 여과 없이 소개하면서 상상에 근거한 묵상의 정당화를 찾으려하였다.

포스터는 여러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20세기의 최고의 영성가로 알려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을 그의 책에 즐겨 인용한다. <영적훈련과 성장>에서도 묵상을 어렵거나 복잡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포스터는, 특별한 방법을 배우려하지 말고 자유스럽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유하면서 머튼의 글을 인용하며 소개하였다. 56) 머튼은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로서 평생토록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관상기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단어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교훈하면서 이 개념을 소개하였다. 57) 그러나 머튼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연합은 실재의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만남으로서, 머튼은 수도원적 수도사들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적할 때 사용하였던 ‘관상(Contemplation)’이란 단어로 그 뜻을 설명한다. 58)

관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의 영으로 되는 신비한 상태를 가리킨다. 머튼은 <관상의 새로운 씨앗들>(The Seeds of Contemplation)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초월적이며 무한하게 풍성한 근원(Source)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이다. 관상이란 무엇보다 그 근원에 대한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59) 그에게 관상이란 마치 직접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하여 “언제나 우리의 지식, 우리의 판단, 조직적인 체계, 설명, 강화, 그리고 우리 자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60) 결국 머튼이 말하는 관상이란 포스터가 설명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관상에 이르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머튼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감각의 어두운 밤을 지나 관상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밤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밤은 마치 만물이 시야에서 시작되는 때, 두 번째 밤은 자정과 같이 완전한 어둠에 사로잡힌 때, 그리고 세 번째 밤은 빛으로 가까이 다가선 밤의 끝부분이다. 61) 이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리기도 하며 노력한다고 항상 이루어지는 보장도 없다. 어둠의 밤을 지나려면 인내하며 무한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무엇인가? 그것은 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매우 구체적이며 효과 있는 방법이다. 이 기도는 특별한 형식이나 지적인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머튼은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도가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과거 수도원에서 행하여지던 관상기도의 원리를 상실하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관상기도> (Contemplative Prayer)를 저술하면서 수도원적 관상기도의 부활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62) 관상에 이르게 하는 기도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던 것을 중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어두움의 밤이 그치도록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머튼은 반복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관상 기도란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에 그 이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63) 역시 머튼의 관상기도는 포스터의 ‘하나님과의 대화’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무엇을 말하는가? 포스터는 가톨릭 신비주의자인 머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한 것이다. 머튼과 포스터는 동시에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정체성만 있는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관상 기도’가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로 인도하는 도구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묵상이나 기도가 아니다. 어느 종교나 기도를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과 목적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 대상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신하고 그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빛을 기다리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것은 결코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를 신앙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칼빈은, 성도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64)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신학논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답은 너무도 분명하다. 포스터는 신비주의자이며 가톨릭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가 2007년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인용하는 자들이 16세기 이전의 인물들이 모두 가톨릭이라고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신비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의 글과 생각을 여과도 없이 소개하면서도, 그 사상이 신비주의적이며 그들이 신비주의자들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포스터는 비록 그들이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소외되고 거부당했지만,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생명을 유지한 것은 신비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이라고 확신이다.

그가 레노바레의 ‘영적 형성’을 통해 세계 교회를 개혁한다는 비전을 품게 된 것도, 신학 논쟁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퀘이커인 포스터는 가톨릭인 머튼과 나우웬과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다. 65) 포스터와 나우웬이 토마스 머튼의 사상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머튼과 나우웬의 신비주의적 가톨릭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관상기도와 기독교 영성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일반화된 사실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피터 트라벤 하스(Peter Traben Haas)는 지난 25년간 기독교 공동체 안에 관상적 방법이 잘 알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머튼, 리차드 포스터,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도로티 버틀러 배스, 브라이언 맥라렐, 리차드 로어, 버나데뜨 로버츠, 로빈 아미스, 그리고 특별히 토마스 키팅의 사역과 글을 통해서 가능하였다고 하였다. 66) 스캇 맥나이트(Scott McNight)는 요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적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 어떤 책을 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토마스 머튼과 리차드 포스터 그리고 달라스 윌라드 같은 현대 작가의 글을 찾는다. 그러면 그들은 오랜 기간 교회에 영향을 주었던 고전적인 영적 거장들을 소개한다.” 67) 이들과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필립 얀시(Phillip Yancey)도 영적 훈련에 관하여 “요즈음 책은 유진 피터슨, 달라스 윌라드, 그리고 리차드 포스터의 것을, 이전의 책은 토마스 머튼의 책을 권장한다고”하면서 머튼의 영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허버트 더글라스(Herbert E. Douglass)도 토마스 머튼의 사상에 찬성하는 포스터의 기도 방법은 동방 신비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로 인하여 뉴에이지와 동방 신비주의, 보편구속설, 범신론으로 혼합된 관상 기도로 축적된 관상 기도가 기독교에 잠식되고 있다고 하였고 하였다. 68)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하자.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포퓰리즘 뒤에 숨겨져 있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계속된 신학 논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도리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비성경적이며 반종교개혁적인 보이지 않는 큰 힘을 대항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요즈음 영성(spirituality)이 대세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의 독특한 성향이 아니다. 가톨릭, 이슬람, 불교도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은 타 종교가 기독교의 담을 쉽게 넘는 도구가 되었다. 실상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소위 영성의 대가들이 그 증거가 된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리차드 포스너,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등은 모두 같은 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의 프로필과 글에 나타난 접근방법은 서로 달라 보여도, 그들은 신비주의적 가톨릭 영성을 기독교에 심어놓기 위하여 힘을 합쳐 한국교회를 압박하고 있다.

더욱이 포스터가 2009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에 기고한 ‘영성 형성을 위한 우선 과제: 리처드 포스터가 말하는 앞으로 30년’는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선포가 담겨져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지난 30년간 자신의 사역을 돌이켜 본 후, 앞으로 추구할 방향을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는 앞으로 개인의 내적 성장의 사역을 넘어서 앞으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 깊이 전념하는 것이지 분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분리가 아니다. 분열도 아니다. 또한 새로운 교단의 설립도 아니다. 우리는 정해진 교회 구조 안에 머물며, 그 구조 안에서 작은 빛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 69)

그는 계속하여 그 예로 독일 경건주의의 ‘경건한 자들의 모임’, 영국 웨슬리의 모임들, 노르웨이의 한스 닐센 하우게와 국내 선교를 두었다. 이러한 모임은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를 세우는 모임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교회적인 정서를 지닌 자들의 독특한 공동체로서의 모임이었다. 더욱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초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자들 이후로 산발적으로 존재하였던 분파주의자들을 칭하기도 한다. 그 예로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나 포스터가 속한 퀘이커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분리적인 교회론을 통하여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많은 사람들 곁에 사랑으로 다가가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걸어야 할지 깨닫도록 도와줄, 훈련된 영적 지도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영적 군대의 출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인된’ 영적지도자들이 아니라 ‘훈련된’ 영적 지도자라고 한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70) 그의 포퓰리즘으로 레노바레를 쉽게 받아드린 한국교회가 앞으로 그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의 제안도 여과 없이 받아드릴 것인가? 목회자들이 영적인 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교리와 질서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곧 신앙의 척도라고 주장하며 영적 잣대를 임의대로 사용하는 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를 환영하겠는가?

포스터와 레노바레가 한국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형주의와 실용주의로 인한 영적 침체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이다. 또한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내적으로 충실한 성도들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공감하고 있는바, 겸손한 자세로 경청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포스터가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한국교회는 갱신되거나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도리어 더 큰 혼란과 분열에 빠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남겨준 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와 복음의 능력을 붙잡아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성화, 즉 성도의 거룩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성숙의 원칙과 교회 갱신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비약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달려야 한다.

<미주>
1) 2010년에 기독교이단대책협회는 ‘연구평가자료 제16집’, 원문호, <관상기도 레노바레의 정체성> (서울: 진리수호, 2010)을 출판하였다. 레노바레운동과 관상기도에 관계된 광범위한 정보를 집대성하여 놓은 자료집이다.
2) http://newsmission.com/news/2007/10/12/1112.20300.html 을 참고하라.
3) 리차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원제는 Celebration of Discipline : the Path to Spiritual Growth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78)로서, 이 책은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미국복음주의 출판협회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Foster는 자신이 저술한 책이 널리 효과적으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4년 후에 Foster's Study Guide for Celebration of Discipline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82) 이라는 학습서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1988, 1998, 2004년에 각각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도 1986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1995(2002), 2009, 2011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4) 리차드 포스터, <돈, 섹스, 권력> (서울: 두란노서원, 1988). 원제는 Money, Sex & Power : the Challenge of the Disciplined Life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85)로서, 역시 같은 해에 이 책의 학습지침서에 해당하는 Richard J. Foster's Study Guide to Money, Sex & Power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85)를 출판하였다.

5) 리차드 포스터, <기도> (서울: 두란노서원, 1995). 원제는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 HarperSanFrancisco, 1992)이다.
6) Donald McGarvan, The Bridges of God: A Study in the Strategy of Missions (New York: Friendship Press, 1966).
7) http://www.renovare.us/WHOWEARE/WhatisRenovaré/tabid/2475/Default.aspx. "Renovaré is a nonprofit Christian organization headquartered in Englewood, Colorado, and active worldwide. We seek to resource, fuel, model, and advocate more intentional living and spiritual formation among Christians and those wanting a deeper connection with God." 이곳에서는 ‘spiritual formation’(영적형성)이란 단어에만 밑줄이 그어져있고 붉은색으로 적혀있다. 영적형성은 포스터의 레노바레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Spiritual formation은 주로 ‘영적 훈련’ 또는 ‘영성 개발’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논문에서 ‘영적 형성’로 번역하였다. 형상을 이루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formation이 뜻하는 바를 중요시하려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8) http://www.renovare.us/WHOWEARE/WhatisRenovaré/tabid/2475/Default.aspx. "A foundational presence in the spiritual formation movement for over 20 years, Renovaré is Christian in commitment, ecumenical in breadth, and international in scope." 한국 레노바레의 홈페이지인 http://renovare.or.kr에서는 ‘레노바레의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위의 마지막 문장만을 소개하는데, “헌신된 기독교인들이며, 국제적인 안목을 가졌으며, 전 세계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라고 애매하게 번역되었다.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레노바레의 웹사이트에서는 이 운동이 지닌 에큐메니칼 정신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9) http://www.renovare.us/WHOWEARE/MinistryTeamandStaff/RenovaréMinistryTeam/tabid/2367/Default.asp
10) 리차드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서울: 두란노서원, 2006). 원제는 The Renovaré Spiritual Formation Bible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Publishers, 2005). 원제의 그대로 번역하면 <레노바레 영적 형성 성경>이지만, 한국어 번역 제목에는 ‘영적 형성’이 빠져있다. 원제는 이 성경이 ‘영적 형성’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11)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 p. 2215-18.
12) http://renovare.or.kr/bbs/board.php?bo_table=sub01_02
13) <레노바레 성경> , p. 5; pp. 2218-19.
14) 한국교회가 레노바레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지에 대하여 2007년에 개최되었던 ‘레노바레 코리아 컨프런스’의 강의 내용을 담은 두 권의 책을 참고하라. 김명호 편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 (서울: 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2008), <교회 안에서 교회를 새롭게: 기독교 영성의 여섯 가지 위대한 전통> (서울: 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2008).

15) http://www.renovare.us/SPIRITUALRENEWAL/WhyBecomeLikeJesus/Whatisspiritualformation/tabid/2572/Default.aspx. “We are all spiritual beings. We have physical bodies, but our lives are largely driven by an unseen part of us. There is an immaterial center in us that shapes the way we see the world and ourselves, directs the choices we make, and guides our actions. Our spirit is the most important part of who we are. And yet we rarely spend time developing our inner life. That's what spiritual formation is all about.
16) Spiritual Formation is a process, but it is also a journey through which we open our hearts to a deeper connection with God. We are not bystanders in our spiritual lives, we are active participants with God, who is ever inviting us into relationship with him. Jesus said,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abundantly” (Jn. 10:10). We at Renovaré believe that such abundant life is possible here and now, because Jesus showed us the way to it. As we take on the life of Jesus – become like him – we experience a richness in life and faith that is truly renewed day by day (Col. 3:10).”
17)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 p. 4.
18) 위의 책, p. 23. “성경은 기록 과정에서 하나님이 친히 총지휘하셨기에 우리의 영성 개발(형성)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침서이다.”

19) 위의 책, p. 19에서 성경공부의 잘못된 목적을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정보와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다. 역사적인 사실, 신학적, 교리적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거나 혹은 어떠한 구체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인 실수나 다른 신앙의 관점을 하는 것 등이다.” “둘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아 낼 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혹은 구체적인 답을 찾기 위해 특정 성경 구절만을 찾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이 두 가지 목적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를 성경 공부 과정의 주체가 성경이 아닌 독자라고 지적하면서, 결국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포스터는 이곳에서 성경의 참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성경의 객관적 진리를 습득하는 일과 성경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 <레노바레 성경> pp. 963-963에 기록된 다윗을 예로 들어보자. 앞쪽의 설명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다윗은 고독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했던 자임을 설명한다. 두 번째, 고독한 삶의 유익에 관한 포스터와 토마스 머튼의 글과 생각을 소개한다. 세 번째, 성도들도 고독한 삶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고 결론짓는다. ‘묵상과 적용’에는 모두 세 개의 질문이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침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무기력하게 반응하는가 아니면 부드럽게 반응하는가? 하나님의 새로운 길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침묵한 경험이 있는가? 달라스 윌라드는 ‘침묵만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을 의도적으로 고도과 침묵의 훈련으로 인도하실까?”이다. 또한 세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대로, 기도와 감사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님과 보낸 시간의 자연적인 성숙을 통한 겨로가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당신의 모습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는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같도록 변화시킬 부분에 대하여 기도하라.”(p. 965).

21) 위의 책, p. 20.
22) 위의 책, pp. 1559-65.
23) 위의 책, p. 23.
24) 위의 책, p. 27.
25)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로 전개된다. 자세한 내용은 Richard Peace, Contemplative Bible Reading: Experiencing God through Scripture (Colorado Springs: NavPress, 1999)를 참고하라. 이 방법은 포스터와 다른 영성학자들에 의해서 개신교에 소개되었다. Richard J. Foster, Life with God: Reading the Bib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New York: HarperCollins, 2008); Eugene H. Peterson, Eat This Book: A Conversation in the Art of Spiritual Reading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6); Michael Casey, Sacred Reading: The Ancient Art of Lectio Divina (Ligurio: Triumph Books, 1996)를 참고 하라.
26)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p. 64.
27)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서울: 크리스챤비전하우스, 1989), p. 108.
28) 리차드 포스터, <생수의 강: 기독교 영성의 위대한 여섯 가지 전통> (서울: 두란노서원, 1999). 원제는 Richard J. Foster, Streams of Living Water: Celebrating the Great Traditions of Christian Faith (San Francisco: HarpeSanFrancisco, 1998)이다.

29) 위의 책, pp. 15-16.
30) 위의 책, p. 48.
31) 포스터와 토마스 머튼, 그리고 헨리 나우웬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이 논문의 뒷부분을 참고하라.
32) 위의 책, p. 148.
33) 위의 책, p. 429.
34) Richard J. Foster, 'Salvation is for Life' Theology Today 61(2004), p. 297
35) 위의 글, p. 305.
36) 위의 글, pp. 303-305. 포스터는 ‘은혜의 방편’을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기본적인 은혜의 방편’(The foundational means of grace)은 그가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9가지의 훈련을 말한다. ‘일상의 은혜의 방편’(The everyday means of grace)은 고난을 통하여 안내하시는 것으로서, 매일 적극적으로 은혜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37) 위의 글, p. 300.
38) 2011년 2월 현재, <영적 훈련과 성장> 한글번역본 1판(1986)은 10쇄, 2판(1995)은 54쇄, 그리고 3판(2009)은 12쇄를 발행하였다.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 p.43.

39) 조지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은 퀘이커 전통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Ellen T. Berry and David A. Berry는 Our Quaker Ancestors: Finding Them in Quaker Records (Baltimore: Genealogical Publishing Company, 1987), p.18 에서 “폭스는 종교는 지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내면의 빛’ 개념을 고안하였는데, 그것은 개인의 믿음과 행동을 궁극적으로 안내하는 모든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힘이다. 이것이 퀘이커주의의 핵심이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을 내세움으로써 보수를 받는 목회자의 안내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내면의 빛’을 소유하였기에 누구나 자신의 ‘목회자 또는 목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이 체험을 강조하는 퀘이커들은 전통적으로 제도적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40)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 p.19-23.
41) Dallas Willard, 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1988). 은성출판사에서 2008년에 <영성훈련>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42) 윌라드, <영성훈련> , p. 270. “우리는 성경 연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 교회, 역사, 그리고 자연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데 전력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을 읽고 듣고 탐구할 뿐 아니라 묵상도 한다. 우리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그 것에 초점을 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심층에서 역사하실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대해 지니는 의미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고 형성된다.”

43) 위의 책, p. 57. “구원은 우리의 육체에 영향을 줌으로서만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의 행위는 육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육체의 과정을 따라 살아간다. 종교에서 우리의 육체를 제외시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삶이다.”
44) 위의 책, p. 224-25. “죄 사함과 상급을 기독교인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관심사로 귀착시키는 이와 같은 강박 관념 때문에, 기독교의 수도원 조직은 성경적, 심리학적 그리고 영적으로 건전한 영성훈련의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개신교는 계속해서 이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45) 위의 책, p. 94.
46)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 p.22.
47) Jeanne Guyon, Tr. Thomas D. Brook, A Short and Easy Method of Prayer (New York: Cosimo Classics, 2007), p. 20.
48)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 p.29.
49)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 p. 51.
50) 위의 책, p. 52.
51) Richard J. Foster, 'Becoming Like Christ' Christianity Today (Feb. 1996), p. 27.

52) 위의 글, 29.
53) 포스터, <레노바레 성경> , p. 1563.
54)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 pp. 60-61.
55) 위의 책, p.63.
56) 위의 책, p.56.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썼다. ‘묵상은 실제로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정교한 기술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57) 요한 칼빈, <기독교 강요> 3.6.2.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거룩함이 그 연합의 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것을 근거로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 먼저 하나님과 연합 되어 있어야 그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가득 차게 되고,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게 된다 - 하나님의 영광이 악이나 부정과는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는 특징이 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58) 토마스 머튼은 평생토록 신비주의 전통이 가장 본질적으로 여기는 하나님과의 연합에 심혈을 기울인 20세기 트라피스트(Trappist) 수도사였다.
59)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Boston: Shambhala Publications, 1961), p.1. 머튼은 이미 Thomas Merton, What Is Contemplation? (South Bend, St. Mary's 1948), p. 36에서 “관상은 하나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으로서, 그에 의하여 영혼의 가장 높은 곳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두운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준다.”라고 설명하였다.
60)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p.2.
61) Thomas Merton, The Ascent to Truth (New York: Harcout, Brace, 1951), p.52.
62) Thomas Merton, Contemplative Prayer (New York: Doubleday, 1969); Lawrence S. Cunningham, Thomas Merton and the Monastic Vision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9), p.123.
63)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p.238.
64) 요한 칼빈, <기독교 강요> 3.20.4-5.
65) 토마스 머튼은 1915년에 태어나 1968년에 사망하였다. 헨리 나우웬은 1932년 생으로서 머튼의 장례식을 집례 하였다. 나우웬은 1996년에 사망하였으나, 1942년 생으로 현재에도 생존하여 있다.

66) Peter Traben Haas, The God Who is Here: A Contemplative Guide to Transforming Your Relationship with God and the Church (Brooklyn: Lantern Books, 2011), p.9.
67) Scott McKnight, The Jesus Creed: Loving God, Loving Others (Brewster: Paraclete Press, 2004), p. xv.
68) Herbert E. Douglas, Dramatic Prophecies of Ellen White: Stories of World Events Divinely Foretold (Nampa: Pacific Press, 2007), p. 176.
69) 리차드 포스터 ‘영성 형성을 위한 우선 과제’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2009년 4월 호, p. 59.
70) 위의 글, p. 57. <레노바레 성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이 발견된다. "신앙 공동체에 합류함으로써 개인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교회로부터 억압당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교회를 분별할 수 있는 명확한 척도가 된다.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억누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과 공동체를 분별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p.1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