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교회에 대하여

신사도운동에 대한 성경적 비판...2(이인규권사)

주방보조 2011. 2. 7. 00:28

신사도운동의 성경적 비판(2)

 

                                                                                                 이 인규

 

 

(1) 입신

(2) 요엘의 성취

(3) 늦은 비와 이른 비

(4) 그리스도의 신부

(5) 쓰러짐, 웃음등의 무질서한 집회

(6) 신사도운동의 신학적 오류

(7) 예배, 이렇게 드려도 좋은가?

 

 

(1) 입신

 

사람이 죽지 않고 천국과 지옥에 다녀올 수가 있을까? 한마디로 공상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이 지금 기독교에서 대유행을 하고 있다. 너도 나도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고 간증을 하기에 이르렀고, 기독교서점에까지 이러한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소위 입신(入神)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신비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입신(入神)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 성경에는 ‘입신’이란 용어조차 없다.

 

또 입신은 무속적인 용어로서 매우 문제가 많다. 무속신앙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것, 혹은 무아지경에 이르는 상태 등을 입신 혹은 접신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사도운동을 도입하는 사람들은 예배 중에 쓰러지는 현상을 입신이라고 말하는데,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입신은 기독교의 사상이 아니다.

성경은 빈야드운동이나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입신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특별히 성경은 무속신앙적인 입신과 접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27).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최근에 일부 목사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무속화, 무당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들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주장으로 기독교를 무속종교로 만들고 있을까? 입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성경적인 근거로 바울도 낙원을 다녀왔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입신인지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 12:2~6).

 

바울은 낙원에 다녀온 것을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제 삼자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 본문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는 워낙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거나 그 책을 읽어보면 바울과 많은 차이점이 보인다. 게다가 대부분이 비성경적인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염려하여 제 삼자의 입장으로 글을 기록하는 반면에,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는 사람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성경적이며 자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창6:24, 히11:5)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예를 들면, 엘리야의 경우(왕하 2:11)와 같이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 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는 것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낙원을 간 것이 몸 안인지 몸 밖인지를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혼이 몸에서 이탈되어 영혼만이 갔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왜 몸 밖에서 유체이탈되었다고 단정하는가? 그렇다면 왜 바울은 몸 안인지 몸 밖인지 몰랐다고 말할까?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체험을 그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고후11장23-25절에서 그는 거의 죽을 뻔했던 많은 체험들을 말하며, 행 14:19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입신을 주장하는 사람 특히 큰믿음교회나 주님의교회, 혹은 천국간증에 대한 책을 쓴 토마스주남이라는 여인과 같이 수십번을 습관처럼 아주 쉽게 갔다 왔다는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미국의 목사들이 그러한 주장을 자주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원하기만 한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간증의 공통점이 있는데,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명을 갖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넷째, 바울은 그러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다고 말한다.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특히 KJV영어성경과 NIV영어성경이 모두 그러한 번역을 하고 있다. 바울은 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성경의 내용과 달리 자유롭게 말을 하고 있을까?

 

[표준새번역] 이 사람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나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고 또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KJV] How that he was caught up into paradise, and heard unspeakable words, which it is not lawful for a man to utter.

 

[NIV]was caught up to paradise. He heard inexpressible things, things that man is not permitted to tell.

 

다섯째,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경우가 지금도 간혹 있다.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 혹은 무신론자도 그러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학적인 견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 가사상태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만일의 가능성을 위하여 죽은 사람을 곧 매장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고, 삼일장을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타종교와 불신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러한 입신은 기독교만의 상황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지 않는가?심장이 멈춘 사람의 경우, 의학적으로는 죽음의 상태이지만, 인공호흡이나 심장에 전기적인 충격을 줌으로서 소생시키는 방법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어쨌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꿈을 꾸었다는 경험담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 체험이 모두 다르며, 특히 자신이 평소 갖고 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불교인도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말하고, 타종교인 심지어 이단교회도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 7:9-10).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잠2:17-19).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여섯째,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성경은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spirit)은 육신과 분리되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또한 스데반은 죽임을 당하기 직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부르짖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두 죽음의 상태가 영(spirit) 혹은 혼(soul)이 사후에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자 “그 영(sprit)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 나거늘”(눅 8:55)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와 그 아내가 사도들의 발 앞에 팔았던 밭의 값을 속이었을 때에도 "혼(soul)이 떠나갔다"(행5:5. 5: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자의 죽음에 대해서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눅12:20).

다시 말하여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갔다고 하면 그 몸은 죽은 시체가 되며, 성경은 단 한번도 사람이 죽지 않고 영혼과 몸이 분리된 경우를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의 경우도 그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도바울도 몸 밖으로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목사들이 그러한 주장을 많이 하는데,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책을 쓴 토마스 주남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특히 한때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문제의 사람들이 다시 천국과 지옥 간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 임의대로 천국을 황당하게 묘사한다거나,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거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이 어떤 목적을 가진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만일 그러한 체험이 가사상태에서 느끼는 꿈과 같은 환상이라면 우리는 개인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천국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개인의 비성경적이며 주관적인 간증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을 믿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속설에 미혹되지 말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대해서, 헬라어의 원어성경은 이방적(godless)이고 늙은 부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old wive's tale)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요엘의 성취

 

신사도운동을 하는 목사들 중에서는 요엘의 성취가 오순절에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을 하면서, 종말적으로 오순절과 같은 성령 대부흥이 자신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자신들의 단체 명칭을 ‘늦은비운동’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현상적인 집회를 그러한 운동의 일부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에 짜맞추기 위하여 억지 해석을 하며, 자신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들이 직통계시를 받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과 전혀 다르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6~21).

 

(1) 성경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행 2:16에 대한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역성경]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공동번역]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예언된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요엘의 성취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성경에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내용은 단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그렇다면 본문의 예수가 약속하신 성령이 어느 성경에 나타날까?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즉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에게 이미 말씀하셨던 것의 성취이며,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그 성령이었다. 이것을 신사도운동 목사들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지만 전혀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2) 말세에 :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성경 본문에 ‘말세에’ 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이 요엘의 예언은 종말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이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으며 교회사 중간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무지에서 오는 주장이다.

이 ‘말세에’라는 단어는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단어는 ‘끝, 마지막’이라는 뜻도 있지만, 현재 시간을 기준으로 ‘나중, 뒤’라는 의미도 있다. 아래 성경의 구절은,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나중”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성경적인 증거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에스카토스)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에스카토스)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또 ‘에스카토스’는 마지막 종말적인 말세가 아니라, 신약 전체의 시대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스카토스)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스카토스)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20).

 

신학자 조지래드는 예언적 생략법(Fore-shortening)이라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선지자들은 연대에는 관심이 없었고 미래는 언제나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섞어 한 캔버스에 그렸다. 성경의 예언들은 삼차원이 아니라 이차원이며 높이와 넓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먼 사건도 임박이라는 투명함을 통하여 보았다. 초대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산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을 기대하며 사는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 성경적 예언의 본질인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호크마주석과 톰슨주석을 살펴보자

 

(호크마 주석)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욜 3:1)이는 '이후"(아하 레이 켄)로, 70인역(LXX; 욜 3:1)에는 '이(일)후'(메타 타우타)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2:2, 미4:1).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톰슨주석)

말세에: 문자적으로 단순히 “이후에”라는 뜻인데, 구약선지자들은 “메시야 시대”를 가르켜 이 말을 사용하였다(미1:2). 기독교 사회에서 이 말은 보다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전 기간”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였다(딤후3:1, 히1:2)

 

성경에서는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을 종종 ‘말세’로 표현하는데, 이 상당한 간격의 시간을 성경은 하나의 캔버스로 섞어 함께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심판, 재림을 한 신약시대로 표현하였으며 요엘 2:28에서는 ‘그 후에’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지만, 구약에서도 ‘말일’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종말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사 2:2).

 

결국 신사도운동 목사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엉터리 해석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성경에 예언된 것으로 주장하며,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미국의 신사도운동 목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는 큰믿음교회의 변승우 목사도 예외는 아니다,

 

“요엘의 예언은 이중적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날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 증거로 요엘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날에는 단지 15개국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실제로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즉 오순절을 능가하는 더 큰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은 언제일까요? 그 날은 교회사의 중간이 아니라 마지막에 있게 될 것입니다”(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pp.240~241).

 

변승우목사는 그 사도행전의 예언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증거가 15개 국가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아마 변목사는 문자적인 지명을 일일히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서 15개국이라고 하였던 것 같은데, 물론 그 지역 숫자도 정확한 15개국이 아니다.  예를 들면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지역’도 한 국가를 말하는가?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도 한 국가인가?

변승우목사가 성경문맥을 영어로 살펴 보았다면, 그것이 국가명칭이 아니라 ‘지역에 사는 거류인’(dwellers, residents)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부루기아, 밤빌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시리아지역의 거민들로서 헬라어를 언어로 사용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된 ‘유대’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지만, 뒤에 사용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유대인’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뜻한다.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성경은 15개국이 아니라, 천하각국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각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하각국”이라는 헬라어 본문은 변목사에게 헬라어 사전이 있다면 “하늘 아래의 모든 국가”라는 것을 확인하기 바란다. 변목사는 하늘 아래 15개 국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every nation under heaven)

 

15개국 사람에게만 부어주었으니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큰믿음교회 변승우목사의 해석에 기가 막힌다.

 

3) 늦은 비와 이른 비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요엘서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성령강림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른 비’가 오순절의 성령 사건이었고, ‘늦은 비’는 종말적으로 다시 오는 자신들을 통한 대부흥, 즉 예언된 종말적인 성령강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사도운동을 하는 목사들은 늦은비운동이라고 부르는 단체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엉터리 해석이다. 원래 이러한 주장은 안식교 엘렌화잇의 주장이었다. 신사도운동의 주장은 이단들로부터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요엘서 본문을 성령강림으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다. 더욱이 본문은 계절에 따라 적절하게 내려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내용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성경본문에서 ‘이른 비’를 오순절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으며, ‘늦은 비’를 종말적인 성령강림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요엘 본문은 신11:4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신사도운동의 성경해석은 자신들의 주장을 짜맞추기 위한 억지 해석이며, 다른 번역 성경은 오히려 이른 비를 가을비로, 늦은 비를 봄비로 해석하고 있다.히브리어 성경사전을 참고하면 ‘늦은 비’를 뜻하는 ‘말코쉬’라는 히브리어는 3~4월에 내리는 ‘봄비’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성경으로 볼 때에는 유대 지역에서는 오히려 늦은 비가 오순절 즈음에 내리는 봄비를 뜻하는 것이 된다.

히브리어 사전과 호크마주석을 살펴보자.

 

(디럭스 바이블)

말코쉬 : 봄비(3954와 비교), 상징적으로 '유창함', 늦은비

- 늦은 비, 봄비, 팔레스타인의 곡물을 성장시키는 3-4월의 비

 

(호크마주석성경)

-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이른 비'인 '모레'는 '가을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10, 11월에 걸쳐 내리는데, 땅을 부드럽게 하여 경작하기 좋고 싹을 돋우기에 좋다. 또한, '늦은 비'인 '말코쉬'는 '봄비'로 3, 4월에 걸쳐 내린다. 이 비는 추수를 앞두고 내리므로 알곡을 알차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런 비가 적당한 때에 내리지 않으면, 이스라엘 농부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신 11:13-17). 한편, 이런 비는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하곤 하였다(렘 5:2)

 

요엘 2:23의 말씀을 여러 번역본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늦은 비’를 ‘봄비’로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 시온의 자녀들아, 야훼 너희 하느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 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시리니,

 

[표준새번역]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로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주셨다.

 

[NIV] Be glad, O people of Zion, rejoice in the LORD your God, for he has given you the autumn rains in righteousness. He sends you abundant showers, both autumn and spring rains, as before.

 

4) 그리스도의 신부

 

신사도운동은 유난히 신부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어느 단체가 신부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면 90%는 신사도운동이라고 생각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신부라는 용어가 기독교의 용어와 같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신부라는 용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드러난다. 열처녀 모두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의 다섯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령체험을 한 신사도운동의 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성경의 열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들러리를 말한다. 신랑에게 동시에 10명의 처녀가 혼인을 하는가? 그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들러리 처녀인 것이다. 또 그들은 기름을 성령으로 해석하고 성령을 기름부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기름을 성령이라고 직접 해석한다면 다섯처녀는 성령을 사러 갔는가?

 

본문의 초점은 열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무엇인가 혹은 신부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간과하면 안되는 점은 열처녀들이 신부도 아니었으며 들러리 처녀였을 뿐이다. 본문에서 혼인잔치는 구원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이 본문의 교훈은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교훈이 그 본질적인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열처녀는 모두 졸았기 때문이다. 다섯처녀는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고, 다섯처녀도 분명히 기름은 갖고 있었지만 신랑이 늦게 왔기 때문에(더디 올새) 그 기름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만일 기름을 성령으로 단정한다면 다섯처녀도 성령을 갖고 있었으나 부족한 것이 되어버린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랑이 늦게 온 것에 기인한다. 즉 재림이 늦게 오더라도 항상 준비를 하라는 교훈이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신부라는 용어는 일반기독교에서 뜻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용어가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은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들이 해석하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다섯처녀는 바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의 교인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기름부음과 신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약 준비하여야 하는 등잔의 기름이 기름부음을 의미한다면, 모든 열처녀가 기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류적인 성경해석이 되어 버린다.

 

성경에서 어린양의 신부는 무엇을 말할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자”로 교회를 “아내”로 비유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시고, 또한 신랑이 되신다. 이러한 표현은 교회와 예수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비유적인 상징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도들을 처녀로, 남편을 그리스도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이것이 과연 신약에서만 표현된 내용일까?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남편,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54: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다시 말하면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즉 에클레시아(교회)가 곧 신부로 표현된 것이며, 그래서 변절자나 배교자를 간음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단들의 성경해석적인 특징은 항상 성경의 보편적인 단어를 자신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5) 쓰러짐, 웃음등의 무질서한 집회

 

쓰러짐, 진동, 입신, 금가루, 금이빨, 웃음등 무질서한 집회가 최근에 많이 있다. 이러한 집회를 갖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회가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성령의 역사를 유치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보이게 하려는 고의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경에서는 기적과 표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집회에서만 기적과 표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일상적인 삶과 생활에서, 혹은 길에서도 이러한 기적과 표적이 항상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무질서한 집회의 형태는 성경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내용이다. 특별한 안수와 쓰러짐을 강조하는 어느 부흥집회에서 목사는 “안수로 성령을 받으면 쓰러지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일이 지금도 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쓰러진다는 성경구절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쓰러짐이 우리의 신앙에 유익한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쓰러짐을 ‘안식’, 혹은 ‘성령 안에서 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예배를 드리다가 왜 안식을 하는가? 쉬려면 집에서 쉬는 것이 훨씬 좋지 않는가? 성경은 이러한 괴상한 형태의 안식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다.

 

빈야드운동을 하는 목사들은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적절하지 못한 성경인용을 한다. 그들은 넘어지는 현상이 은혜 체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에스겔1:28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엎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앞에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혹간은 고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요 18:6),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마 28:4), 귀신이 고꾸라진 것(막 9:20)을 제시하지만, 이들은 위엄과 권세에 넘어진 것이며,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성령의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전혀 무관하다. 이들은 성령을 받고 쓰러진 것이 아니다. 안수를 받고 쓰러진 것은 더욱 아니다.

 

또 거룩한 웃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라의 웃음’을(창 21:6)을 인용한다.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지 못하는 가운데 웃은 것이며,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웃는 이상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성경 인용은 자신의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성경을 짜맞추는 것이지 성경의 내용과는 관계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성경 해석도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 배경도 없는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성경은 오히려 귀신이 사람을 쓰러지게 한 경우는 있다.

 

막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즉 안식이 아니라 고통을 준 것이며, 오히려 성령의 현상이 아니라, 귀신이 나갈 때에 쓰러진 적은 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4:35)

 

성령을 받고 쓰러진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오면서 쓰러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힌두교와 대순진리교, 무속종교등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또한 집회에서 금이빨로 변하였다는 집회가 있다.

아말감 이빨은 은, 주석, 동이 분말형태로 있는 것을 수은이라는 물질로 개어 경화시킨것이다. 그러므로 아말감이빨의 주요한 성분은 “은”이며 다른 성분(주석, 동, 니켈, 수은등)은 부속성분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말감이빨을 은이빨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색깔은 처음에는 은빛을 띠게 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식물질의 접촉으로 산화하여 회색의 색깔로 변한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아말감의 구리 성분 때문에 구리 빛을 띨 수도 있다 한다. 이 아말감 이빨이 조명을 받으면 금색으로 보인다.

 

금이빨은 금이 50-60% 정도의 함유량을 가지고 나머지는 니켈등의 몇가지 다른 금속성분으로 채워진다. 금이빨이라 하여 순금(99% 함량)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금은 다른 금속에 비하여 무르기 때문에 순금을 쓰면 물러서 이빨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금이빨은 실제로는 금의 합금이빨이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다. 만약 순금이빨로 바뀌었다면 이빨이 물러서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집회에서 소위 금이빨로 변화하였다는 사람의 금을 분석해 본다면 순금이 아니라 금과 여러 가지 다른 금속 성분이 함유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순금으로 이빨을 만드시지 않는다. 그것은 나중에 인체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집회에서 나타나는 금이빨은 치과기공소에서 제작하는 성분과 동일한 여러가지 성분의 금이어야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코메디가 되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치과기공소에서 만드는 것과 동일한 합금 성분으로 금이빨을 만드신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미 지난 1970년대에서 남미에서 금이빨과 금가루 집회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례의 치과적인 치료전력이 없었던 예가 한건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집회에서 금이빨이라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말감 형태의 "은" 이빨로 판명되었으며, 금이빨도 치과에서 치료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해가 어려운 것은 왜 하나님은 순금이 아니라, 치과기공소에서 가공하여 만드는 것과 동일한 형태와 동일한 성분의 합금 이빨로 변화시키시는가? 아픈 이빨을 대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이빨은 합금이 아니라 자연적인 생이빨이다. 이빨을 금이빨로 변화시키는 하나님께서는 왜 생이빨로 만들어주지 않으시는가?

그것을 물질적인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벽돌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또한 치유적인 관점에서는 합금성분의 이빨이 아니라 생이빨로 치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6) 신사도운동의 신학적 오류

 

신사도운동을 하는 목사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로”이다. 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기존 기독교의 정통신학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피터와그너에게는 양태론이 보이며, 손기철장로에게도 양태론이 보인다. 변승우목사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 어느 신사도운동 목사들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이 보이며, 대부분의 신사도운동 목사들에게는 이원론이나 극단적세대주의가 나타나며, 그 특징으로 땅밟기나 영적도해, 백투예루살렘을 주장하거나 때로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른비와 늦은비’는 안식교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며, 신사도운동의 일부 목사들이 사용하는 God-man 은 신인합일론을 주장하는 지방교회의 용어이다. 피터와그너는 베뢰아 성락교회를 극찬하기도 한다.

 

신사도운동의 공통적인 특징은 정통신학을 부정하며, 알레고리적인 비유풀이 성경해석이 보이며, 직통계시와 예언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존재인 천사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샨볼츠라는 목사는 바울이 성경을 쓸 때에 도와준 천사가 변승우목사 옆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성경을 쓸 때에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 아닌가? 어느 성경에 바울 옆에서 천사가 도와 주었다고 기록하였는가?

신디 제이콥스라는 목사는 자신이 기도를 하니 미국에서 여름에 눈이 내려 산불이 꺼졌다고 한다. 과지마라는 아프리카 목사는 죽은 사람을 150명을 살렸다고 큰믿음교회에서 국민일보에 광고를 냈다가 허위광고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타드 벤트리는 여자 문제로 망신을 당하고, 영국 기독교연합단체에서 초청을 거절당하였다고 하며, 적지 않은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이 동성애, 마약, 알콜중독등 다양한 범죄경력과 타락상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인 은사를 자신들의 초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은사는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뜻한다.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의 성경해석 중에서는 완전한 알레고리와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이 많다. 일부는 이단들과 동일한 방식의 비유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거의 이단들의 수준과 같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사도운동에게는 비성경적인 이단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비성경적인 행위를 통하여 교인들을 불러 모으는 숫자적 부흥이 그들의 지상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불신자에게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교인을 불러 모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탄의 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느 극단적인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은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을 기독교와 자신들의 전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7) 예배 이렇게 드려도 좋은가?

 

목회자가 너무 많이 배출되고 목회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교인들은 상가건물에 세를 얻어 시작하는 개척교회를 외면한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목사가 대중설교에 타고난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몇 년 동안 목회를 했지만, 고작 교인은 두 자리 숫자에 머무르고 있으며, 선교는커녕 목회자 개인의 생활비조차 어려운 교회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개척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의 현실이며 고충이다. 이러한 경우 목회자는 새로운 목회방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중에는 소위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열광주의를 표방하는 부흥집회를 시작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소위 기복적인 축복성회, 은사 남용주의와 특별 신유집회가 열리게 된다.

자극적인 집회를 계속하다 보면 좀더 자극적인 것을 시도하게 된다. 이제 웬만한 신비적 현상은 평범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집회 중에 금가루, 금이빨, 쓰러짐, 춤, 웃음과 같이 특이한 현상적 예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너도 나도 천국·지옥 간증을 하게 되었고, 무당과 같이 교인들의 점을 쳐주는 교회가 등장하였고, 이제는 사람이 벽을 뚫고 나갈 수가 있다고 하며, 잘려진 다리가 자라난다고 하며, 죽은 사람이 수십 명 수백 명이 살아났다고 선전을 한다. 그 정도가 아니면 기적으로 쳐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목회의 방법과 목적은 오직 수적 부흥으로 나가게 된다. 이미 몇몇 교회는 말씀을 잃어버렸다. 몇몇 교회는 그 본질과 사명인 ‘믿음과 영생’을 잊은 지 오래 되었고, 이미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잊어버린 교회도 있다. 몇몇 목사들은 능력있는 CEO가 되고 있으며,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는 용한 무당들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이제 쥐의 내장을 터트리는 장풍과 같은 성령불이 등장하고,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바이로케이션(한 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예배시간에 춤을 추는 것을 흡족하게 감상한다는 간증도 나오고, 예수님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나고, 천국에서는 수백, 수천 평의 맨션에서 살게 된다는 간증도 나온다.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은 이미 성경이 필요가 없으며, 바닥에 깔아놓은 스티로폼에 쓰러지고, 넘어지고, 뒹굴고, 소위 거룩한 웃음소리라는 것과 짐승소리가 등장한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를 그리심산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유다 족속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를 어디서 드리는 게 옳은가 질문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in truth)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즉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과연 오늘날 몇몇 교회가 행하고 있는 그러한 무질서하고 기적과 표적의 현상만이 난무하는 집회가 소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인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성령 안(in Spirit)에서 드려지는 페리코레시스적인 영적 예배와 영적 교통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진리 안(in Truth)에서 드려지는 올바른 예배를 말한다.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던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물론 일부 목사들이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영성운동은 성령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들은 표적과 기적의 현상만을 중요시할 뿐,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 목사들은 기적과 표적을 강조함으로서 숫적인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부흥(復興)이라는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명사로서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을 뜻한다. 또한 “부흥”(revival)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은 원래 “회복, 복원”을 의미하는데,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부흥이라는 단어를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거나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목사들도 간혹 있고, 더욱이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자신의 교회로 수평이동하는 것”을 부흥으로 이해하는 목사들조차 있는 것 같다. 특히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고, 과대 선전을 함으로서 교인수를 늘리려는 시도는 부흥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목회성공주의의 한 수단이 될 뿐이다. "성령의 부흥"이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적인 행위이며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질적인 변화”라고 정의된다.

실제로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레에 의하여 성령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술집이 스스로 문을 닫고, 악인들과 범죄자들이 단지 설교 말씀을 듣는 것으로 회개를 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나아가서는 영국 사회 전체가 변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숫적인 변화만이 부흥이 아니며, 내면적인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참된 부흥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짐으로서 나타나는 현상, 즉 하나님께 돌아오는 내적 변화를 말한다. 말씀을 벗어나는 운동은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