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마지막 광화문파

주방보조 2010. 7. 20. 10:18

지지난주 토요일은 소위 말하는 놀토였습니다.
아침 7시에 일찍 충신이를 깨워 그 전 날의 약속을 따라서 광화문까지 청계천 따라 걷기를 하자 했고 충신이는 대답을 네~라고 길게 뱉은 후 일어나는 척 하다가 다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사춘기 접어들기 전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는 것을 특별히 싫어해 온 아들이라 툭 던진 저의 제안에 '가겠습니다' 하고 나서 준 것이 고맙기만 했는데...결국 일어난 시간이 12시 30분이었습니다. 점심 먹고 어영부영 하는 꼴을 보면서 약간 슬픈 마음으로 포기하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지난 주 금요일 드디어 녀석이 방학을 했고 그 다음날 토요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무척 영화가 보고싶다 하고, 제가 강력 추천한 ^^ 슈렉포에버를 보겠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리 영화볼 기분이 아니라서 아이들을 붙여 주며 같이 다녀오라 하였는데 그 아이들 중 한 놈 즉 충신이가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내와 네 아이들의 인터넷 예매가 끝나고(원경이가 학교내 캠프가 있어 7시에 돌아오므로 저녁 7시 50분에 예약을...하였습니다)
불현듯^^ 그 지난주 약속을 깨먹은 일이 떠 올랐습니다.
 
너 나랑 광화문 가자
오늘은 싫은데요

날이 구질구질하고 비도 오고 전 이런 날 나가는 것 싫어해요
아니야 이런 날이 걷기엔 더 좋다. 맑은 날은 요즘은 너무 더워
그래도 싫어요
야 임마 지난 주 약속 깨먹은 것 잊었어? 약속은 지켜야지...
그날은 너무 졸렸어요. 오늘 말고 다른 날 가요.
너 주글래?^^
알았어요ㅜㅜ
 
...
 
우산을 하나씩 들고 우린 집을 떠났습니다. 물론 모두의 전송을 받으며 말이지요^^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해도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아 좋은 오후였습니다. 뚝섬 유원지 역에 붙어 있는 자벌레문화센터?^^도 한번 휘 둘러 보고(녀석이 한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 하여...다른 놈들은 모두 저를 따라 가 보 곳인데 말이죠)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무시하고 예의 그 길을 둘이서 걸어 한강-중량천-살곶이다리-청계천으로 걸어갔습니다.

 

 

 

  
배가 살살 아프니, 다리에 힘이 없니, 비가 와서 짜증이 나니...불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비교적 즐거운 대화를 많이 나누며 걸었습니다. 살곳이 다리에 만들어 놓은 아기들 수영장에서 좀 쉬고(비 때문에 물을 빼 놓아 좀 섭섭했지요) 그때부터 마구 쏟아지는 비를 피해 청계천 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고산자교까지는 고가도로 아랫 길이기 때문에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을 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둘이 마주보며 ...와 이렇게 타이밍이 딱 맞을 수가...서로 감탄을 주고 받았지요.
 
점심 때 설사를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가 출발때 부터 있었는데...마침내 도저히 배고파 못살겠다고 하여 마장동에서 잠시 천변길을 벗어나 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라고 돈을 주었습니다. 커다란 빵 하나와 핫브레이크 두개...를 사왔습니다. 빵은 자기가 먹고 핫브레이크는 둘이 하나씩 먹자나^^...나중에 저의 저혈당증세를 완화시키는 기막힌 역할을 해 내었지요. 선견지명이 특출난 놈이라니까요^^
 
고산자교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갔는데 비록 비가오는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가요. 우리 둘만 걷고 있었습니다. 청계천은 한번 크게 물잔치를 벌여 몸살을 앓은 듯 물가의 식물들이 절반은 넘어져 있었고, 오리도 물에 있지  아니하고 길가에 서성이다 우리들을 피해 풀 섶으로 쏙 들어가곤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학동(맞는 지 모르겠습니다만^^)을 지나는 중에야...왜 그렇게 사람들이 없는 지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청계천 천변 산책로가 막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는 할 수 없이 차도로 올라섰고 어둡고 삭막해 보이는 청계천을 내려다 보면서 우산을 쓰고 계속 걸었습니다.
동대문을 지나고
평화상가를 지나고
31빌딩을 지나고
드디어 청계천 시발점...소라고둥이 보이는 곳까지에 이르었습니다.

 

 

광화문파가 된 인증으로 사진 몇장을 찍고...광화문광장을 멀리서 보고 또 걸어 드디어 명동교자에서 따끈한 칼국수와 만두를 맛있게 먹고  (따끈한 것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2호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철에서 자리가 하나 나길래 앉으라 하였더니...사양 한 번 않고 앉아서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주었지만^^(전...건대역까지 서서ㅜㅜ)
맏아들과의 시간이 저는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
 
집에 돌아오니 저녁 9시 50분
조금 전에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며 아내는 '슈렉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하며 20분이 넘게 그 긴 스토리를 꼼꼼이 제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막내와 막 마지막 광화문파가 된 맏아들은 잠들어 버렸지만
우리 부부는 슈렉 이야기와 광화문파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