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함께 집에서 워커힐까지 걸어가겠다고 자발적으로 제안했던 충신이가 감기때문에 그리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딸들은 정장에 구두를 신어야 하니 안 된다고 하였었으며
교신이는 감기가 다 나았고 자기가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같다고 눈빛으로 은근히 말하고 있었지만 감기들어 일주일 고생한 놈을 또 감기들게 할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여...
교신이와 원경이는 엄마와 외할머니와 함께 작은 외삼촌이 모는 차를 타고 가기로 했고
저는 걷기를 포기하고 큰 놈 셋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충신이는 아버지와 함께 걷기로 한 것을 자기 감기때문에 취소시킨 것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기서라도 걸으세요...친절하고도 배려심 깊은 언사를 내뱉었습니다.
저는 이 녀석이 온순해지고 고분고분하며 밝고 명랑함을 보이면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보통은 우중중하고 침침하고 빈정거리고 건들거리며 살거든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 매번 속는 일이기때문에 ... 마음이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녀석이 철저히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밝은 모습이 있고 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어두운 짓이 따랐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외할머니의 팔순으로 온 식구들이 특별히 모이는 날이니 그러려니 믿고 저도 부담없이 녀석의 명랑함에 발 맞추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랜 세월 처가를 철권통치^^ 해 오신 장모님의 팔순 잔치가 그런 잔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례요한 같은 목회자(마눌님의 표현에 따른 것임)의 살벌한 예배^^에 이어... 효자들과 효녀들인 아내의 오빠들과 언니들의 축하연으로 이어졌고 마지막 중국음식 먹기까지 잘 끝내었습니다. 작은 처남의 장모님 이력낭송은 아주 잔치분위기를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되게 만들었으며 세째처형의 편지도 정말 잘 쓴 한편의 수필이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좋은 점만 부각시켰다는, 잔치에 잘 어울리는^^ 약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첼리스트인 제일 큰 외손녀와 함께한 초청 성악가의 축하송도 멋있었고 다들 한복과 양복으로 폼을 내었는데 그 중 이번 잔치를 빌미로 양복을 한벌 해 입은 충신이가 제일 스타일이 좋았습니다. 제 눈엔^^말입니다. 막내 딸인 마눌이 그 중 제일 예쁜 것도 당연하구요. ㅎㅎ
간만에 엄청나게 비싼 점심을 먹었습니다.^^ 음식은 별로였습니다. 비싼 음식은 제 입맛에 잘 안맞거든요.
이어 뒤풀이를 세째동서네 집에서 한다하였습니다. 함께 갈 것을 여럿이서 종용했지만
충신이의 감기가 전염될 것을 염려해 저와 충신이는 빠지기로 하고 큰 처남이 집까지 부득불 태워준다하여 돌아오는 길도 걷기를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음...그래도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서로 명랑하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으니까요.
천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가정에 질서와 평화 그리고 말썽쟁이 녀석의 돌아온 사랑이 있으면 우리 삶이 기대하는 것으로서는 천국의 수준이지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4시 조금 넘어 잠시 눈을 붙이려고 ... 기분 좋은김에 충신이에게 컴퓨터를 하고 싶은대로 하라 하였습니다. 잠간 잠든 사이 전화가 오고 가더니 ... 충신이는 사라졌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놈이...고2나 된 놈이...몇번이나 들어 푹 쉬고 나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놈이...
8시7분에 녀석은 핼쓱해진 얼굴로 살짝 들어섰습니다. 몇가지 변명을 겸한 거짓말이 이어지고...
저는 녀석을 자기 방에 들어가 반성하라 한 다음...여러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일요일
오후 예배가 2시30분에 끝나고
충신이는 사라졌으며
또
어제에 이어 9시 20분이 되어서야 예의 그 핼쓱한 얼굴로 슬쩍 집에 들어섰습니다.
내 마음의 지옥이 마침내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참았던 분노가 화산처럼 분출하였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그동안 탈출의 요람이었던 야자를 금지하고
반드시 집으로 곧 오라 했고 그러겠다 굳게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끝나면 음악실에 가서 두시간 놀아야 하고, 덤으로 축구를 한두시간 더 하기도 해야 하고, 주말이면 반드시 게임방에 가서 시간을 한없이 죽이고 와야 한다면 ... 그전의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토록 공부하는 것이 싫다면 학교는 무엇때문에 다녀야 하는 것이냐.
내일 학교는 자퇴를 하고 이 집에서도 더 이상 살지말고 나가서 너 혼자 알아서 살도록 해라. 왜 내가 너를 낳았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식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느냐? 하나님도 인내에 한계가 있으시다. 나는 이미 그 한계를 예전에 넘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리는 중인데 이젠 정말 지친다. 비겁하게 아비 눈치보지말고 너도 자유롭게 나가서 게임방 알바같은 것 네 소원대로 원껏 하며 지내라.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느냐. 그리고 매일 함께 놀러다니는 놈들 연락해서 재워달라고 해보고...
그리고 나실이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한달전에 그러니까 학기초에 충신이가 연속으로 일주일간을 제 거듭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저녁9시전후로 게임방만 줄창 다니다가 결국 제가 녀석에게 가방을 던져주고 집에서 나가라고 했을 때 ... 녀석의 눈물에 속아
나실이가 울며불며 제게 ' 앞으로 한번만 충신이가 이런 짓을 더 한다면 자기도 같이 집을 나가겠다고' 보증을 섰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날 다른 사고를 친 충신...가족 모두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잘못을 하지 않고 공부도 성실히 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지요. 그래도 그건 게임방에가서 늦게 오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넘어갔구요.
요즘 충신이의 상태에 대하여(나실이는 학교에서 늦게 오기때문에 잘 모르므로)설명을 하고 토요일과 그날 있었던 일 즉 게임방에 가서 줄창 시간을 보내다 늦게 온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함부로 보증을 선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으므로 너도 집을 나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나실이에게는 약간의 온정을 베풀었지요. 일주일간의 시간여유를 주었거든요.
나실이는 "네 알았어요~"하고 대답하고는 눈물이 온 얼굴을 덮어갔습니다. 제 가슴도 무척 아팠구요.
오직 충신이란 놈만
'누나한테는 미안하고 아빠한테는 죄송하지만요...저는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구요, 집에서도 나가기 싫어요'하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실이는 '저런 이기적인 놈을 위해 내가 보증을 서다니...난 너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는데...넌 오직 너 자신만 하고 싶은대로 살겠다고 하는구나?" 원망과 탄식을 섞어 내뱉었습니다.
나실이도 당연히 집에서 쫓겨 나가기 싫겠지요. 하루라 해도...친구집이든 친척집이든 혹 갈 수 있는 곳이 있다해도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실이 눈물때문에...그래서 열기가 식어 지친듯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지옥의 병뚜껑을 닫으며 ... 저는 충신이에게 되물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학교도 계속 다니고 집에서도 계속 살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줄테냐?
게임방에 안 가겠어요.
그런 식의 약속은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줄곧 해왔던 약속이고 일주일을 못 넘겨 깨뜨린 약속들이지 않느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첫째로...학교 수업 후에 이루어지는 모든 친구관계를 끊어라.
아!...예...
둘째로...매일 영어단어, 한자어, 수학문제...일정량을 외우고 풀어서 내게 검사를 맡아라.
휴...예...
세째로 이 테스트는 일주일간 시행하겠다. 만약 개선의 여지가 보인다면이어니와 그렇지 않다면 너는 다음날로 집을 나가야 할 것이고 나실이도 일주일 안에 집을 나가야 할 것이다.
예...
...
손을 잡고 나실이를 새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녀석은 너무나 놀라고 섭섭했는지...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너한테는 참 미안하다...말했지만요.
사람 사는 것이 그렇습니다.
못된 놈 옆에 서 있으면...낭패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친구든 형제든 ...
보증서는 일의 중차대함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만...혹 이 일로 다른 이들을 위해 잘 나서서 변호해 주던 나실이만의 그 아름다운 용기를 잃어버릴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
오늘 아침
충신이가 인사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학교를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마음이 짠...했습니다.
"ㅎㅎ... 제가요 우리 아빠 흰머리 제조기예요...ㅎㅎ"...엇그제 천국에서 다른 이들에게 떠들던 녀석의 유머?가 떠올라 ...더 그랬습니다.
-
장모님 팔순이셨군요. 다음 날인 주일이, 제 장모님 생신이었는데...^^
답글
언제고...충신이가 철들면
부모 입장에선 흐믓할진 몰라도...재미는 없을 겁니다.
삐딱함이 있기에 바름이 돋보이고, 한심함이 있기에 제대로가 좋듯이...
경중의 차이...때의 차이...어쨌든 충신이는 아찔했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사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다...충신아^^ -
한얼이의 사춘기가 생각납니다.
답글
지금도 한얼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구요.
피시방 출입을 밥먹듯했었는데
언젠가 집을 나가서 평소 예뻐하던 피시방 아줌마가 하룻밤을 재우고
집으로 연락을 했더군요.
그러한 우여곡절을 넘기고나니 또한 기쁨을 선물도 하더군요.
충신이의 일상들이 그려지고 부모님의 걱정과 화가 나는 심정등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비록 차이는 좀 있지만 한빛이도 예외는 아니거든요.
겉으로 드러나게 애를 먹이는 건 아닌데 은근한 고집과 집착등은
한얼이보다 쿨하지 못하답니다.
따지고보면 모범생의 생활은 참 무미건조할 것 같아요.
그래도 목표를 향해 게을리 하지 않는 아이들이길 바라는데
부모의 뜻 만큼 잘 안되는 게 당면 과제가 됩니다.
착한 충신이가 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멋진 사회인이
될 것 같은데 너무 극단적인 처방은 피하는 게 또한 부모의 몫이다 싶습니다.
극단적인 언어나 처방이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다 싶거든요.
막상 눈에서 벗어나면 걱정은 배로 증가할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기도가 헛도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듬직한 누나인 나실이가 짠하네요.
형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구요.
충신이가 부모님 마음에 흡족하시게끔 돌아오기를 빌겠습니다.-
주방보조2010.04.18 01:22
충신이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자기 기준'에 비추어 전혀 잘못인지 모른다는
기질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그 기준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재조정하여 녀석을 압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녀석의 기준대로 놔두면...얼마안가서 폐인이 될 것이 분명하거든요. 돈은 많을 수록 좋고, 자유도 많을수록 좋고, 의무나 책임은 없을수록 좋고, 내일일은 생각하지 않을 수록 좋고,
이미 중3,고1...2년을 꽉 채워 '자유'를 주었었답니다. 잘못하는 짓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준 일들이 부지기수이고...
이제 겨우 1년반이 남았으니...마지막으로 제가 발악을 해보는 것이지요.
이 녀석은 선생님들에게 아버지가 너무 억압한다 떠들고 다니나 봅니다. 휴...
이번 일주일간은...일찍 와서 공부하는 척은 해 주었습니다.^^
결코 쉽게는 고쳐지지 않겠지만...먼 훗날 그래도 마지막 가까이 가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남도록은 해 주고 싶습니다.
ㅎㅎ...극단적인 처방이 안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전쟁을 할 각오를 해야...전쟁이 막아지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어쩜 저와 충신의 관계는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염려해 주셔서...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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