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강병송님의 글 모음

교파형성...

주방보조 2008. 7. 9. 17:43
  • 종교토론 그리스도교 교파의 형성과정과 이해 [5]
  • 무딘스키무딘스키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85279 | 2007.09.07 IP 221.158.***.153
  • 조회 100 주소복사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구세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죄의 댓가인 죽음을 인류대신 담당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한 인간이 '나를 믿으시오'하면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리겠다는 하느님 언약을 완성하겠다는 구약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유대민족의 대중을 만나지도 아니하였으며, 로마의 관리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려라.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것이다.

오순절날에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님이 시키는대로 제자들은 여러가지 외국어로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일어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 시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오순절 이후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는 교회가 하나였습니다. 사도들 신앙이 하나로 일치된 상태에서 지역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령과 친교를 누리고, 감독과 원로 그리고 봉사자라는 직책을 구성하였으며, 교회 동동체가 모여 감사의 성사(성찬식,eucharistia)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감독과 원로그리고 봉사자라는 3중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교회가 있는 곳마다 끼리아끼라고 하는 주일날마다 모여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나 이슬람제국이 등장하면서 교회가 로마제국 밖의 교회와 로마제국 내의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 밖의 교회는 이집트의 콥틱, 이디오피아, 인도의 사도 도마가 세운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시리아 교회 등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다 하여 '단성론파'라고 이름이 불리워져 로마제국내의 교회들로 부터 이단시되었으나, 현재는 서로의 오해를 풀고 일치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로마제국 밖의 교회중에 네스토리안파가 있는데 현재에도 이란에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무시하지 말하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신성과 인성이 별개로서 상호 도킹되어 있는 관계를 고집한다고 오해를 받아 로마제국의 감독협의회(synod)에서 축출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인도를거쳐 파르티아 왕국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와 당나라시대에 융성하였다가 원나라때 야리가온교로 재차 등장하였습니다.

근래에 중국의 경교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진경교비문과 당시의 경교문헌인 '세존포시론' 등의 문헌을 통해 본 경교의 신앙내용이 많은 괌심을 끌고 있습니다.

당나라 고종 당시에 경교의 대덕(감독)이 지금의 문화부장관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경교의 예식서와 불경을 함께 번역하였습니다.

불교는 경전이 많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명칭들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부는 元尊, 성자는 世尊, 성령은 정풍이라고 불럽다 합니다.

그리고 그 世尊은 시작이 없는 분(先先而無元後後而妙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를 세존이라고 칭하므로 결국 중국에는 두명의 세존이 소개된 결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불교에서 말하는 세존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 세존인지 여부를 질문하게 만드는 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목탁(초대 기독교 박해시기 수도원의 목탁), 49제(그리스도교 장례 예식 3일,6일,40일), 염주(현재에도 사용되는 정교회의 꼼뽀스끼니)등이 타종교에서도 사용되는 경우를 볼 때 중국의 그리스도교인 경교회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三一妙身'혹은'三而一神'이라고 불렀으며, 야훼를 如來라고 쓰고 알로하로 읽었답니다.

알로하는 하느님이란 시리아어로 시리아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욜닷 알로하'라고 하여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답니다.

로마제국내의 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로마 5개의 총대주교구로 나뉘어져 정립하고 있었는데,

각 총대주교구들은 독립적이었고 상호 불가침이었습니다. 신앙에서만 일치하였답니다.

다만 필요시에는 감독들의 회의인 시노드를 개최하였는데 로마제국내의 5개 총대주교가 모두 참석하는 시노드에서는 로마의 총대주교가 의장이 되었습니다.

총대주교란 감독의 일원으로서 필요에 의하여 도시의 서열을 중심으로 감독간의 위계를 정한 것입니다만 모든 감독은 평등합니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이 멸망당하고 그 지역에 프랑크제국이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프랑크왕국의 임금은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자 동로마에 사절을 파견하였답니다.

그런데 동로마제국에서는 프랑크제국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인정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때 '교황 대리권'이 등장합니다.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이며, 교황이 프랑크제국의왕을 서로마제국의 왕으로 임명하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가 임명한것이다]라는 주장이 되는 것이죠.

이 교황대리권은 [예수님이 대리인을 필요로하는 메시아인가]하는 문제와 [성령은 결국 대리인의 조력자인가]라는 의구점을 실질적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따라서 교황대리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머지 4개의 총대주교청과 로마 총대주교청이 결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교황대리권이라는 개념과 교황수위권이라는 개념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4개의 총대주교청은 정통이며 보편적인 교회라는 이름 즉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로마 가톨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주교라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로마 총대주교청과 4개의 총대주교청이 1054년에 분리된 이후에 로마총대주교청의 영내인 서유럽에서 1517년경에 구원론에 심각한 이견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했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게르만 등의 지역에서 로마 총대주교청으로부터의 정치적,종교적 독립을 추진하는 운동이 발생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헨리8세가 로마총대주교구와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감독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개혁을 추진한 결과 감독, 원로, 봉사자라는 3중직이 유지된 상태에서 로마가톨릭과 결별을 하고,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신교와 구교를 아우를 수 있는 폭 넓은 개방성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즉 게르만 지역에서는 감독들은 제외된 상태에서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원로들과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이 추진됩니다.

그러나 이 루터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교회들은 감독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또 원로와 봉사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성직의 정당성((identity)를 의심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구교간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사도계승권'문제입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스코틀랜드 등의 지역에서는 평신도인 캘빈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예정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장로교입니다. 이 장로교는 루터교와 마찬가지로 사도계승권문제로 인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재세례파가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기존 교회의 모든 직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예수 믿은 성년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다시 세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이 개인주의적 사고에 가장 부합하였습니다. 이들이 침례교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눈여겨 살펴봐야 할 점은 사도계승권의 문제에 봉착한 교회들에서 세가지의 핵심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성찬식(eucharistia)이 제사(thysis)라는 히브리서상의 개념이 사라져 버리고, 기억 혹은 축하 등의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뚤째 예배와 성경이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예배는 리뚜르기아라고 하여 그 안에 성찬식(eucharistia)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식 이전에 사도서신과 복음서 등이 봉독되고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 예배에서 봉독되던 복음서, 사도행전, 묵시록, 사도서신등을 모아 놓은 것이 신약성경 27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후예들에 의하여 성경책이 전도를 위한 책으로 와전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셋째로는 교회와 성경, 성경과 성찬식 등이 서로 대립관계로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AD 16세기 이전에는 정통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없었던 것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회로부터 감리교가 갈라져나왔고,

오순절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순복음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우리나라와 동양지역에서 선교과정에 4중복음을 강조하는 성결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교파의 형성과 분열은 겉으로보면 정치적인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교리적인 문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교리를 특정지역의 문화와 동일시하거나 교회의 특정 직책의 주장과 동일시 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종교 혹은 풍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안주하는 것들이 교회의 분열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가를 심각하게 검토하여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와 우리 > 강병송님의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강의 들어...  (0) 2008.07.09
비교신학 국정교회...  (0) 2008.07.09
개신교도 모르는...  (0) 2008.07.09
우리역사...  (0) 2008.07.09
고종황제...  (0) 2008.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