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여러분도 대답을 해보시지요. [4]
- 무딘스키
제목 :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우선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람이 죽으면 지옥보냈다가 예수님이 재림해서 다시 지옥에서 끄집어 내 또다시 지옥에 처 넣는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에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 재림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우선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속죄의 범위"에 관한 글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검토해보시고 답을 부탁드립니다.
--------------------------------
하느님은 [누구]이고, 사람은 [누구]이며,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엇]이라는 데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그 문제점의 핵심내용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이론 구성의 끝은 성삼위 하느님의 사역을 인간의 지능속으로 끌어 내려서 재단하고 가져다 덧붙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럴듯한 이론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이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2.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어야 한다.
- >예수님이 대속이 구원을 위한 활용대상(수단)으로 제시됩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의 대속이 나에게 해당된다는 근거는 무엇이고 해당되지 않는다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함구를 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됩니다.
상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대하여 먼저 해결해야만 합니다.
1. 사람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부모님의 출산으로 인해)존재하게된 것이다.
2. 복음을 듣지도 못하는 자가 복음을 들은 자보다 많다.
상기와 같은 전제하에 세가지 이론을 검토해 봅니다.
1. 제한속죄설
예수는 역사상 전 인류중 제한된 사람들만을 대신하여 속죄를 하였다는 주장
2.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설
예수는 전인류를 대신하여 속죄를 하였다는 주장
3. 익명의 그리스도인설
예수의 속제에 대한 강조보다는 예수를 몰라도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넣으려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한 이론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이론구성을 할 경우 상기와 같이 봉착하게 되는 속죄의 범위는 이상 3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3개의 흐름은 각각 다음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제한속죄설
예수의 대속사건이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할 때 하느님은 창세전에 일부는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일부는 하느님에게 속한 존재로 이중 창조를 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유도 된다.
가. 하느님에게 속하든지 아니면 소외되는 문제가 언약 및 복음과는 상관 없이 이루어진다.
나. 인류가 [공동체]가 아닌 [집합체]라는 주장이 된다.
다. 성삼위하느님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분이 되고 만다.
라. 성삼위하느님의 사역은 [병주고 약주는 것]이다.
상기의 이론 구성의 결과에 의하면 "영혼 소멸설"이 상당히 희망적이 메시지로 들리게 만든다.
또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복음의 수신인이 [불특정 다수인]이라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상품]이나 [의약품]처럼 불특정 다수인에게 전달되기 위해 복음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오도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하느님에게 속했다는 사람들에게만 전달되지 아니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은 누구이고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기본전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하느님과 불특정 다수인과의 관계로 오도한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설
제한 속죄에 반하여 예수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한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대속이라는 사건의 전달`이 없이 `대속의 실질적 효과`를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주장 역시 구원의 방편으로서 `예수를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대속 사건 자체를 전달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속이 효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전달 받지 못한 법률행위는 유효한가 아니면 불능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만일 불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모든 이를 위한 대속이라는 주장은 불능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구원사역이 시간과 공간개념에 갇혀 그러한 개념들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오도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제한속죄와 동일한 결론으로 가고 만다.
3.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러한 형태의 이론 구성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에서 `누가 구원 받는가`라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서 상기 두개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구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도들의 필요성(존재이유)을 무시한다는 데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유대인들만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죄사함을 위해 유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으로 몰고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상기의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복음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였을 때 귀결되는 속죄의 범위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속죄의 범위에 관한 이론을 구성할 경우 복음이 [기쁜소식]이 아닌 [재판규범]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그러한 이론 구성들을 주장하는 자가 제시한 구원 받는 수단이 아닌 경우에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복음이 아닌 새로운 재판규범으로 전개될 우려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았다.
예수에 의해 분명히 고지된 심판과 게헨나가 심각한 것이라면 알맹이인 속죄의 범위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우선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람이 죽으면 지옥보냈다가 예수님이 재림해서 다시 지옥에서 끄집어 내 또다시 지옥에 처 넣는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에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 재림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우선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속죄의 범위"에 관한 글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검토해보시고 답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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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누구]이고, 사람은 [누구]이며,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엇]이라는 데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그 문제점의 핵심내용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이론 구성의 끝은 성삼위 하느님의 사역을 인간의 지능속으로 끌어 내려서 재단하고 가져다 덧붙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럴듯한 이론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이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2.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어야 한다.
- >예수님이 대속이 구원을 위한 활용대상(수단)으로 제시됩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의 대속이 나에게 해당된다는 근거는 무엇이고 해당되지 않는다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함구를 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됩니다.
상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대하여 먼저 해결해야만 합니다.
1. 사람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부모님의 출산으로 인해)존재하게된 것이다.
2. 복음을 듣지도 못하는 자가 복음을 들은 자보다 많다.
상기와 같은 전제하에 세가지 이론을 검토해 봅니다.
1. 제한속죄설
예수는 역사상 전 인류중 제한된 사람들만을 대신하여 속죄를 하였다는 주장
2.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설
예수는 전인류를 대신하여 속죄를 하였다는 주장
3. 익명의 그리스도인설
예수의 속제에 대한 강조보다는 예수를 몰라도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넣으려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한 이론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이론구성을 할 경우 상기와 같이 봉착하게 되는 속죄의 범위는 이상 3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3개의 흐름은 각각 다음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제한속죄설
예수의 대속사건이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할 때 하느님은 창세전에 일부는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일부는 하느님에게 속한 존재로 이중 창조를 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유도 된다.
가. 하느님에게 속하든지 아니면 소외되는 문제가 언약 및 복음과는 상관 없이 이루어진다.
나. 인류가 [공동체]가 아닌 [집합체]라는 주장이 된다.
다. 성삼위하느님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분이 되고 만다.
라. 성삼위하느님의 사역은 [병주고 약주는 것]이다.
상기의 이론 구성의 결과에 의하면 "영혼 소멸설"이 상당히 희망적이 메시지로 들리게 만든다.
또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복음의 수신인이 [불특정 다수인]이라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상품]이나 [의약품]처럼 불특정 다수인에게 전달되기 위해 복음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오도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하느님에게 속했다는 사람들에게만 전달되지 아니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은 누구이고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기본전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하느님과 불특정 다수인과의 관계로 오도한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설
제한 속죄에 반하여 예수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한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대속이라는 사건의 전달`이 없이 `대속의 실질적 효과`를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주장 역시 구원의 방편으로서 `예수를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대속 사건 자체를 전달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속이 효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전달 받지 못한 법률행위는 유효한가 아니면 불능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만일 불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모든 이를 위한 대속이라는 주장은 불능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구원사역이 시간과 공간개념에 갇혀 그러한 개념들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오도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제한속죄와 동일한 결론으로 가고 만다.
3.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러한 형태의 이론 구성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에서 `누가 구원 받는가`라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서 상기 두개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구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도들의 필요성(존재이유)을 무시한다는 데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유대인들만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죄사함을 위해 유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으로 몰고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상기의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복음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였을 때 귀결되는 속죄의 범위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속죄의 범위에 관한 이론을 구성할 경우 복음이 [기쁜소식]이 아닌 [재판규범]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그러한 이론 구성들을 주장하는 자가 제시한 구원 받는 수단이 아닌 경우에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복음이 아닌 새로운 재판규범으로 전개될 우려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았다.
예수에 의해 분명히 고지된 심판과 게헨나가 심각한 것이라면 알맹이인 속죄의 범위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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