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관한 어떤 신부님의 글 [11]
- 무딘스키
아래의 글은 저의 글이 아닙니다.
신부님의 글입니다.(http://sspxkorea.netian.com/clergys/buddhism.htm)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 신부님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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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불교의 기원
서언
인도에는 역사를 기록 보존하는 관습이란 게 없었다. 연대기도 없었다. 있다면 인도의 중요한 가족에 대한 기록이, 많건 적건 전설과 신화로 섞여 남아있을 따름이다. 인도인들은 유럽 문명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기에 유럽의 역사와 고대 인도의 유적이나 기록 및 전설 등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몹시 어렵다. 인도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내용에 대해 그 연대를 정확히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son)은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인도를 여행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컨대 그것이 최고의 브라만(Brahman, 주: 인도의 카스트에서 최고계급)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브라만들조차 자기네 선조가 그 건립 초기에서부터 일해 온 사원의 연대에 대해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확한 자료로 미루어, 건축된 지 200∼300년밖에 되지 않았음이 분명한 여러사원에 대해서 1,000년이나 2,000년이 됐노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라고.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고대 인도의 역사를 죄다 조작해서는 서양 역사의 틀 속에 밀어 넣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발굴된 유적이 그 조작된 역사의 틀에 짜 맞춰져서 평가된 일이 잦았다. 특히 그 역사의 틀 속에 유적의 연대를 끼워 맞출 수 없을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들은 결코 그 틀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뉴먼 추기경은 릴리(W. S. Lilly)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인도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설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 복음서의 연대를 결정한다든지 복음서가 올바르고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대에 관한 다양한 사본, 여러 계통의 사본, 교부들의 저작물에서 인용한 것 혹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를 인용한 것에서 얻은 증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더욱이 현대 비판가들의 날카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갖가지 사본의 문장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해야 한다.
발견된 모든 사본에서 특정 문장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 문장은 후세에 써넣은 것이라고 생각되어 가차없이 내버려진다. 부처의 참된 역사에 관해서 볼 것 같으면 복음서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빈틈없는 증거를 요구하지도 않은 채 납득이 안 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인도의 학자들이 비판 정신을 가지기는커녕 불교 전설을 그토록 쉽사리 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신약성서 사본의 '모순'에 대해서라면 좋은 기회라는 듯 극심한 공격과 비판을 가하는 현대주의자의 해석학이 있는 이 현대에 와서! 그리스도교 역사의 원본에 대해서는 그토록 엄중한 경계의 눈초리를 던지면서도, 그 동안 부처의 전설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한 관용을 받아온 상태다. 여기에는 역사가들의 성실성에 의혹을 품을 정도로 이중의 잣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 원본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본은 서기 70년 이전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 현대의 파피루스 관련 학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손안에 있는 것으로 불교경전의 사본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래 봤자 13, 14세기와 같이 상당히 현대적인 시기에 이루어졌다.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상의 발굴 중에서 많은 것, 특히 금세기 초엽 이후의 것과 같은 일부는 위에서 언급했던 식의 역사 구조에 대해 완전히 자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자신의 선임자들이 만든 역사의 여기저기에 의문부호를 남기면서도 그대로 따라갔다. 지금부터 우리가 언급하는 고고학상의 유물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발견도, 조작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적어도 중앙 아시아의 고고학 전문가에 의해서 잘 알려져 있는 발굴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결론은 요즘의 학
교 교육 시스템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과서의 연대기에는 맞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때마다 도움이 되는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문명의 전파
인도의 문명을 예찬하는 자는 인도만이 모든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인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관념이 본래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기서 모습을 바꾸고 세계의 갖가지 종교로 나뉘었다고 한다. 인도를 예찬하는 자가 쓴 책을 볼라치면 어디에나 그런 내용이 씌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런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중앙 아시아와 인도는 그 문명을 서양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서양문명을 전하는 개척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에 문명을 전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하기 전에 벌써 다리우스 왕(재위 B.C.522-486)이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가 신드(Sind) 골짜기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지방총독 제도를 펴는 동시에 중앙 집권제를 시행하였다. 인도에 남아있는 유적은 바빌론 및 페르시아의 유적과 똑같은 것이다. 페르시아 다음 에는 알렉산더 대왕(재위 B.C.336-323)이 다스리던 희랍인이 인도에 침입하였다.그들은 펀자브 지방에 희랍 풍의 왕국을 여러 개 세웠다.
그리고 나서 희랍계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희랍 문명(주: 헬레니즘 문명)을 중앙 아시아에 전하였다. 예컨대 박트리아 왕국(B.C.255-139)은 알렉산더가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잔
류한 희랍인의 자손이 중앙 아시아의 '암'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그 박트리아 및 소그드 지방(주: 박트리아 지방과 소그드 지방은 거의 같은 장소를 가리킴)의 왕국은 힌두교의 문헌을 남기고 있지만, 거기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 유적에는 희랍과 로마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꽁트고브레 달비엘라(Comte Goblet d'Alviella)는 <인도가 희랍에게서 받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조각, 회화, 문학 그리고 연극에 이르기까지 희랍 문명의 요소를 전부 다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도의 서해안에서는 고대 로마제국과 인도 사이에 무역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로마 유적도 출토되고 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신전을 건설하는 데 필요로 했던 고가의 목재를 인도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라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다. 기원 후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의 침략은 서양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은 러시아의 남쪽 카스피해의 남동쪽으로부터 밀려와 인도를 침략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했지만 문명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기원 후 2, 3세기에 그들은 새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러 민족에 대해 교량역할을 하였다.
민족 대이동 때의 상황을 보건대, 북 아시아로부터 남하한 민족은 이동할 때에는난폭하게 파괴하였으나 일단 그 땅에 정착하고 나면 서양의 희랍, 라틴, 그리스도교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의 전파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 희랍인, 스키타이 족이 수세기에 걸쳐서 힌두스탄(현재의 인도와 파키스탄을 합한 지역)의 북서 지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공동체가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정착한 일은 있어도, 유럽이 인도의 침략을 받은 일은 한 번도 없다. 유럽에는 인도의 사원도 없다. 인도에 남은 유적을 살펴보면 페르시아나 희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소아시아나 이집트의 유적에는 인도의 발자취는 그림자도 없다. 희랍과 라틴의 고전 문학 속에는, 다시 말해서 기원 후 2세기 이전의 고대 동양계의 문학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불교 이야기 같은 것은 눈
에 띄지 않는다.
인도인이 신으로 섬기는 보타(Botta)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데의 '스트로마데스'인데, 이것은 기원 후 2세기말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처(주: 불타, 이하 부처라고 하기로 함)의 가르침은 바빌로니아이건 시리아이건 이집트이건 그 어디로도 들어간 적이 결코 없었다. 인도에 인접한 서양이나 중동에는 부처의 종교가 전해졌으리라는 흔적이 눈곱만큼도없다. 그런 일은 한 순간도 없었다.
부처(불타)가 살던 시대
정말이지 기원전에 부처가 살고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막스 뮐러(Max Mller)는 인도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일생에 걸쳐 불교가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아내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부처에 대한 숭배는 박트리아와 소그드 지방의 스키타이 족의 왕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같은 최초의 숭배는 현 페샤와르의 고을(현 파키스탄의 북부)인 간다라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스키타이 족의 자손인 쿠샨 왕조 밑에서 기원 후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발전하였다.
마하반사(Mahavansa)를 보면 아소카 왕의 전설이 들어 있다. 마하반사에 의하면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 왕은 '경건한 왕 샤크라바틴(Chakravartin)'이며, 역사가에 의하면 기원전 273년경에서 232년경에 재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그의 치세에 고대 인도에서 영토를 제일 많이 확장하고, 포교 및 불교 경전을 모으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하반사는 기원 후 5세기의 것이다. 아소카왕은 사르나드라는 장소 말고도 인도 각지에 왕의 이름을 새긴 철기둥과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 어떤 곳을 보면 알렉산드리아라는 마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가는 그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와 동일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이집트에는 인도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박트리아나 지방이나 소그디아나 지방의 중앙 아시아 산간 지역에서 희랍계의 작은 왕국이 후세까지, 즉 기원 후 7세기에 이슬람교 국가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작은 희랍계 왕국의 왕들은 희랍인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거듭하건대 특히 코카서스 지방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마을이 그것 말고도 많이 있었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에는 희랍 왕의 옆에 훈족 왕들의 이름도 열거하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그 왕들의 이름은 중앙 아시아 작은 왕국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임스 프린제프(James Prinzep)라는 박학한 영국인은 비문의 몇 개 문장을 해독해 놓았다. 그에 의하면 '신들과 법의 친구'라는 아소카는 자기가 부처의 가르침으로 귀의케 한 민족을 열거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을 지칭함)의 왕 이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안디고노스, 안디오고스가 있다. 그것을 보고 역사가들은 그 왕들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자손으로 아소카는 기원 전 3세기에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소카는 탁실라(Taxila)라는 마을의 왕이었지만 그것은 간다라의 아주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치 않게 인도 각지를 정복한 '인도의 제왕'으로 아소카를 높이 떠받듦은 물론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또 아소카 왕은 동서남북을 상징한다는 4종의 동물(주: 수소, 코끼리, 말, 사자),샤크라(Chakra, 주: 법륜이라고 번역되며 윤은 차륜의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최고의 신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샤크라 자체는 불교만의 상징이 아니며 금세기의 마하트마 간디는 피륙을 짜는 데 명주의 륜(輪)을 샤크라의 상징으로 삼았다), 4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돌기둥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대지의 여신인 야크시(Yakshi) 상과 대지의 남신인 야크샤(Yaksha) 상이 만들어진 듯하다. 당시의 조각은 표면 가공이 특징적이다.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여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물이란 본래 부처의 유골을 보관하기 위한 일종의 분묘로 지금은 '부처의 열반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고들 있다. 그렇지만 여물에 있는 부처의 생애와 본생경(本生經), 자타카(Jataka), 주: 부처의 전생에 대한 설화집)이라는 부조를 보면 부처의 모습이 눈
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말 탄 사람이 없는 '말'은 왕자의 출가,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 '두 개의 발자국'은 세상의 왕인 부처, 고귀한 사람에게 떠받쳐져 있는 책은 제각각 부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 시대에도 역시 상술한 대지의 여신 야크시가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고, 이제 바로 꽃피려고 하는 초목에 발을 묶어놓아 풍요의 신으로 등장한다.
후에 안드라라고 불리는 왕조(B.C.27∼A.D.336년경)가 번성하는데, 그 시대에는산치(Sanchi)에 대 여물이 세워지게 된다. 산치의 여물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같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여물을 둘러싼 듯한 일종의 담장이 있으며, 그 동서남북에 탑 모양의 문이 달려 있다. 그 탑 모양으로 된 문의 조각은 '법륜'과'삼보표'(주: 부처, 법, 승려를 상징함)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민간 신앙의 우상들과 더불어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문을 지키는 우상으로 야크샤와 야크시가 눈에 띈다. 야크샤와 야크시들은 머리를 독특하게 묶고 가슴 장식과
귀걸이, 둥근 형태의 팔찌와 발찌를 했으며 뒤 허리 쪽에 리본을 묶었을 뿐인 나체이다. 조각을 보면 야크샤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고 물소, 사자,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등 많은 동물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으며, 코끼리의 무리가 여물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 편 오른쪽에는 기괴한 얼굴을 한 크고 작은 악마들이 다수 있고 좌측에는 보리수 등이 있지만 여기에도 아직 부처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보리수와 여물이 부처를 표시하고 있다고 할뿐이다.
그러나 야크시 및 야크샤들 그리고 동물들의 생동감과 현실감을 볼 때, 어째서 부처만이 보리수 혹은 움직임이 없는 여물 정도로만 표현되었는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궁금증이 더해진다. 그것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산치의 야크샤들이 있는데, 그 근방 가쥬라프의 남녀 상의 옷차림과 매우 닮아 있다. 가쥬라프에는 9∼10세기경에 만들어진 힌두교와 자이나교(Jainism) 사원의 유적이 있다. 그 남녀 상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은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시대로부터 중세 인도의 '가마, 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산치의 여물도 불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여기에 있는 유적의 부조를 볼 것 같으면, 동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는 종려나무의 잎을 형상화한 동자(Barmitz)와 날개가 있는 사자, 뿔이 있는 사자, 사람 얼굴을 한 사자,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그리핀(Griffin, 주: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몸뚱
이를 한 괴물) 등 많은 것이 서방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부처의 모습이 돌연 등장하는 것은 기원 후 간다라(Gandhara) 미술의 시기이다.
또 간다라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인도의 마투라(Mathura)에서 독특한 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마투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니스카 왕 입상은 명백히 로마의 복식이라 생각되는 기법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다라에서 갑자기 나타난 최초의 불상은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부처는 똑바로 서서 오른손을 위로 들고 있다. 얼굴은 고전적인 데다가 완전히 희랍 풍이다. 코도 그렇고 어깨도 반듯하며 머리는 깎은 상태다. 이는 영락없이 제자를 데리고 산책하되 희랍 풍의 토가(toga, 주: 옛 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철학자의 모습이다.
부처에게 후광이 붙여진 시기로 미루어 그것은 바로 희랍의 아폴로(주: 희랍 신화에서 음악, 의술, 궁술, 예언과 광명의 신으로 태양과 동일시함)였다.인도의 기후로 인하여 당시의 벽화는 소실됐고, 남은 것이라곤 조각품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간다라 미술이 인도 최초의 불교 미술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간다
라 미술은 본디 희랍과 로마의 미술이라는 것을. 부처는 결코 후세의 인도 사원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간다라 미술에서는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에밀 말르(Emile Male)라는 유명한 그리스도교 예술의 사가(史家)에 의하면, 갈리아(옛날의 프랑스)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주: 대 성전 교회 건물) 중 아주 오래된 것은 그리스도교 예술가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건축 및 조각과 장식 모양도 시리아, 그리스도교 유적에서 그 기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는 간다라의 얕은 돋을 새김(주: 얕게 판 부조를 말함)과 카타콤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관,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로빈키아 아트 제작소의 관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매우 닮아 있어서 거의 같은 기법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것을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는 고풍스런 옷을 감아 걸친 모양을 하고 있고, 가는 기둥과 잎이 무성한 나무 줄기로써 다른 장소와 분리된 벽감(주: 벽에 조각품 등을 세워 놓기 위해서 만든 오목한 부분)에 평행하게 놓여 있다. 그들은 둘 다 선 채로 한 손을 들고 있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제자들의 표정으로 보아 스승의 가르침에 동의를 표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으로 미루어 에밀 말르는 예술가 한 사람이 그 두 곳에서 종사했으며 그 조각품을 제작한 곳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간다라 미술에서 부처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는 얕은 돋을 새김에는 움직임이 없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코린트식 석주의 장식에 새겨져 있다. 파슈느거르에서 발견된 불상의 발판에는 274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만일 콘드파레스 왕이 즉위한 때를 시점으로 해서 계산된 연대라면 기원 후 214년이다.콘드파레스는 기원 후 1세기 인도의 왕으로서 파르티아 인이었다. 그는 칸드라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아브라가레스가 콘드파레스의 뒤를 잇고 기원 후 70년에 왕좌에 앉은 것 같다. 그것이 만일 샤카 족의 시대라면 기원 후 352년인 것이다. 샤카는 스키타이 인을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표현한 것이다.
마니교
마니교는 스스로를 '빛의 종교' '정의의 종교'라고 칭하였다. 마니교의 교회에는 '청중'이라 불리는 '구도자'와 '성인'이라 불리는 '상층부'가 있었다. 야마다 쇼 교수는 <아우구스티노의 근본문제>라는 저서에서 아우구스티노가 받아들였던 마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니교'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이다. 그것은 영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내세운다. 전자는 선과 빛과 신이며, 후자는 악과 어둠과 악령이다. 현실 세계는 그 선악이 대립되어 쟁투하는 곳이다.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은 영으로 있는 한에서는 신이지만 육으로 있는 한에서는 물질이다. 영적인 인간은 육체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마치 잘게 쪼개져서 작은 조각이 된 신(神)이 물질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인간을 그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하여,빛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빛의 아들이다. 이와 같이 마니교는 교묘하게 그리스도를 자기네 가르침 안에 받아들였지만, 구약의 신은 완전히 부정한다. 구약의 종교는 유데아 인이 고안해 낸 미신며 '유데아 인의 신'과 '그리스도'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마니교는 구약과 신약의 신이 같다고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를 거스른다.
그러면서도 영과 육의 대립을 설파한 바오로 종도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마니교의 사도 중 한사람으로 내세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노의 시대에 마니교는 이교가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일개 지파였으며, 그보다도 마니교도들에게는 마니교만이 참된 그리스도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이언론적(二言論的)인 마니교에게 있어서 구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은 선이고 물질이 악이라면, 모든 불행이 물질에 기인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구제는 물질로부터 이탈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가 있는 한 육체 나름의 욕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물질에 뿌리를 박고 있음으로 해서 악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활을 하려는 자는 일체의 육신의 욕구에서 떠나야 한다. 그에 따라서 결혼과 육식이 금지된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결혼도 육식도 하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마니교는 두 계급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그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로, 육식과 처를 두지 않고 정결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선택된 사람들(electi)'로'성자(Sancti)'라고도 한다. 다른 한 편인 일반 신자들은 자신이 그처럼 청정한 생활을 할 수는 없지만, 성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재물을 공양하고 그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구함을 받는 것에 동참한다. 그들을 청문자(聽聞者, auditores)라고 한다. 결국 마니교에서는 성자 계급과 청문자 계급이 마치 출가(出家) 계급과 재가(在家) 계급처럼 명확히 구별된다."
"결국 마니교는 성자에게는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는 한 편으로, 일반 신자에게는 관대하였다. 그에 따라서 일반 신자는 자기 힘만으로는 구원되기가 어려운 열등한 그릇인 까닭에 열등한 그릇에 걸맞게 감성적인 구제의 수단이 그들에게 베풀어졌다. 마니교에는 진언밀교(주: 진언종-불교 종파의 하나)에 비견되는 화려한 의식과 채색으로 꾸며진 공상으로 점철된 구제에 관한 신화가 있었다."
야마다 교수는 다시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노 강화(講話)>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나의 추측으로서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높은 야산의 진언종을 생각하게 한다. 나도 그곳에 한 번 가보았지만, 벽화라든지 그 밖의 여러 가지가 마니교의 것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색채가 강렬함과 동시에 높은 야산의 묘를 보고 느낀 것은 오사카의 유곽이다. 거기에는 모종의 신자가 매우 많다고 한다. 나는 생각했다, '홍법대사를 비롯하여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이 이 산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대사(大師)는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서 구렁텅이에 빠진 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창녀 혹은 온갖 최하계급의 사람들을 구해 준다.그
와 같은 종류의 신앙이 마니교 안에도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이론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느낌이 그랬다."
그런데 마니교의 창설자는 스키티아노스(Scyhthianos)라는 사람으로 이는 스키타이 인이라는 뜻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종도들이 살아 있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Gnosis,주: 영적 지식, 즉 신비적 직관)를 설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제자였던 테레빈토스는 그의 가르침에 관한 책 4권을 썼다. 그 제목은 각각 '현의', '교리요강','복음', '보배'들이다.
존경하는 스승이 죽은 후 테레빈토스는 바빌로니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산 위에서 천사의 양육을 받은 '깨달은 자,즉 부처'라는 이름을 대었다. 그렇게 이루어지되 그노시스에 관련된 교회의 명칭에 자기 이름을 붙인 자는 마니(A.D.216-277)라고 하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는 마니케우스라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 시대의 사산 왕조 초기에 살았는데, 종교의 창립자 혹은 사상가라고 하기보다는 당시에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 퍼져 있던 그노시스 파 교회를 능숙하게 조직한 남자였다. 최근에 발견된 희랍어'케른 파피루스(Cairn papyrus, 주: 케른이란 기념비 혹은 묘비를 말하여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것)'에 의하면, 마니는 청년 시대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유데아 기독교(주: 유데아 기독교란 유데아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 아닌 절충 교파임) 중에서도 그노시스주의(역자 주: 1-4세기에 널리 퍼진 영지(靈智)를 숭상하던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였던 엘카사이 파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니의가
르침은 다마 말키온과 바실리트가 설교하고 있던 그노시스주의로 그리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특히 세상의 2대 원리를 강조하였다. 결국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어서 그 싸움이 영원하다는 것, 또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마니'라고 불렀다. '마니'라는 것은 산스크리트 어(범어)로'보석'이라는 뜻이다. 마니교의 찬송가에 <토마스의 행전>이라는 신비적 직관에 대한 책에서 취한 '진주의 노래'가 있지만 그 속에서 마니는 '왕의 아들'로 나와 있다. 그 '진주의 노래'를 보건대, 창조주가 아담의 몸 속에 귀한 진주를 묻어버렸
고, 그 진주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다가 마리아의 태내에서 탄생한 예수에게 전해졌노라고 노래되고 있다. 마니 자신도 성령의 역사로 미망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로 묘사되고 있다. 묘하게도 현대에 이르러 프리메이슨도 자기들을 일컬어 '미망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하고 있다. 마니도 저 진주에서 태어난 '보석'이요, 자신의 스승 테레빈토스와 같이 바빌론에 살았다고 한다.
마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육신의 교회가 높은 곳에 올려진 후에 너희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나의 사도직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이래로 진리의 영이신 위로의 주께서 파견되어, 이 최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들에게로 왔다. 이는 예수가 말한 그대로다..." 마니는 다시 페르시아(226-651) 사산조의 초대 왕 알데씨르(재위 226-240)가 통치하던 시대에 "위로의 주는 자신이 머물 곳으로 왔다. 그와 대화했다. 그에게 감추어진 현의를 계시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는 성령과 한
몸이라고 주장했다. 그노시스가 그리스도교라는 줄기를 이용해서 거기에 기생하는 이물질인 것처럼, 마니교도 그리스도교의 용어와 가르침에 기생하는 암세포였다. 마니는 스스로에 대해 이르기를 예수의 충실한 사도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쓴 편지에는 머리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마니'라고 썼다. 마니는 예수를 찬미한답시고 송가를 썼다. 마니의 제자들은 마니를 찬미하는 찬가를 썼다.
마니교의 '게파라이아-교리요강'이라는 책의 서두에는 "깨달은 자(부처)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알데씨르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마지막에 나는 설교하러 떠났다. 나는 인도인의 나라로 가는 탈것에 몸을 실었다. 나는 생명의 희망에 대해서 설교하였다.거기서 나는 선발된 자들을 뽑았다. 알데씨르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샤프르가 왕좌를 이어받고 나서는 그 해에 나를 가까이 불렀다. 나는 탈것을 타고 인도인의 나라에서 페르시아인의 나라로 갔다가 페르시아에서 바빌론으로 갔다."
마니는 이 '게파라이아-교리요강'의 첫 부분에서 선구자인 세 사람의 이름을 든다. 그 세 사람은 예수와 사라데스와 부처다. 마니는 그 세 사람이 형제이며, 같은 지혜를 통역하는 자라고 말한다. 마니는 예수와 사라데스와 부처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제일 먼저 예수의 이름을 들고, 나머지 두 사람은 마치 예수의 제자인 듯 취급한다. 마니는 자신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르침과 같다고 주장한다. 마니는 종교의 창립자는 아니고 그노시스의 교회를 퍼지게 하는 자라고 한다.
마니와 불교
마니의 가르침을 볼 것 같으면 '마니 이전에 가르치고 있던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그림자도 없다. 마니의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불교가 없다.
버키트(Burkitt)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마니 자신의 가르침에는 불교가 그의 가르침의 구성 요소라는 흔적이 전혀 없다. 마니는 존경심을 갖고 부처의 이름을 받들지만, 그것은 그가 플라톤과 헤르메스 및 도리스메기스트의 이름을 받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알프릭(Alfric)에 의하면 마니는 부처를 몰랐다고까지 말한다.이는 무슨 말인가? 마니가 받드는 부처는 도대체 누구인가? 마니는 도대체 누구를 부처라고 일컫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니로부터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그들더러 마니교의 가르침을 버리겠다는 서원을 하라고 했었다. 정통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그들에게 "스키티아노스와 사라데스와 부처와 마니의 가르침을 끊어버립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 네 사람 이름의 순번이 같은 종교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하는 부처란 마니의 스승이었던 테레빈토스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니의 직속 후계자는 마르 시신(Mar Sisin)이다. 시신을 희랍어로는 시시니오스라고 한다. 그는 투옥되어 있던 마니에게서 서품을 받아 순교하고, 자기를 '깨달은 자, 빛을 받은 자(부처)'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타(부처)는 산스크리트 어이며,그 뜻은 라틴어 일루미나투스(illuminatus)이다. 불타(佛陀-부처)는 산스크리트어인 '붓타'의 음을 베낀 것이다.
시신의 이름은 마니의 다른 초기 제자들의 이름과 함께 마니의 사망일(페마의 축일)에 언급된다. 시신 이외의 제자들은 토마스(주: 대체로 토마스 복음이라고 하는 그노시스 복음의 저자 토마스), 앗타스(주: 혹은 앗트, 앗타이라고도 한다.라틴어 이름은 아디만스(Adimans)이므로 앗타이를 12종도 중 한 사람인 '다두'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임)와 헤르메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디만스의 저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모두 부처라고 불렀다.
만일 마니가 말하는 부처, 즉 '빛을 받은 자', '깨달은 자'가 테레빈토스였다면 마니교를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현재 옛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교는 마니교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부처의 생애는 대부분 마니교의 문헌으로부터 글자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대단히 많다.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부처의 생애는 후대에 상당히 많은 전설을 삽입하거나 손질한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왜곡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본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복원시켜 보련다.
부처는 '석가모니'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샤카 족, 즉 스키타이 족의무니(성자)로 인도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서방에서 온 스승이다. 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으로서 자칭 '왕자'라고 하던 마니와 같은 부류다. 석가모니는 마야 데비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슈트나 왕의 처(妻)로서, 자기가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현몽을 통해 알았다. 결국 석가모니는 '동정녀'의 아들인 셈이다. 그의 모친은 아카시아 나무에 의지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카시아 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려서 신생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외경에 해당되는 '성서'에 실려 있다(주: 성서는 사실상 책 한 권이 아니고 72권으로 되어 있다. 성서에서 최고의 저자는 천주 자신이다. 그것을 기록한 인간은 수단 및 도구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작가는 천주께서 구술하시는 것을 받아쓰지도 않았으려니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쓰지도 않았다. 자유와 개성과 교양을 지닌 상태에서 천주의 초자연적인 간섭과 감도하심에 의해 성서를 기록한 것이다. '정경'이라고 하는 성서 72권을 지정 공인한 것은 가톨릭 교회가 종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대로 전해 온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경 여부가 의문시된 것도 있지만 나중에 다시 그 정경의 성격이 인정되어 정경임에 틀림없다고 선언된 것도 있다. 16세기에 이르자 오랜 옛날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성신의 감도하심에 의
한 정경이라고 한 책에 대해서는 '원 정경'이라고 하고, 또 전에 영감을 받은 것인지를 가늠함에 있어서 의혹이 있었던 몇 권의 책은 '제2 정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경'이란 교회가 처음부터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은 책을 말한다. 그 외경들은 대부분 정경에 의거한 것이라고는 하나 정경에서 탈락된 것으로 유치하거나, 공상이거나 혹은 이단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그 모친의 오른쪽 허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아름답고,빛나고, 보석(마니)과 같이 순수하며, 색동의 아름다운 옥양목 위에 놓였다'. 이 이야기는 그노시스의 '유아기 복음'과 '야고버 복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지혜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부자 아시다라는 노인이 신약 성서 속의 늙은 시메온처럼 찾아와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인사하고, 그의 높은 운명을 예언한다. 노인 아시다는 그 아이가 오래 동안 살지 못한 채 증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린다.
부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무화과나무는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처는 49일간 단식한다. 그리고 악인(마다)의 유혹을 받는다.마다는 부처에게 세상 영화를 보여주면서 열반에 들어가게 해 주리라고 약속한다. 부처는 그에게 저항하며, 암흑의 군주 군단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자신의 몸이 빛나는 몸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한다.
또 복음으로부터 빌렸음이 분명한 이야기도 있다. 예컨대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의 이야기, 우물에서 비천한 계급의 여자와 만난 이야기 등등.
부처는 그 후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가비라 성(가비라 바스도)에 장엄하게 입성한다. 그는 그 동네의 장래를 예언한다. 제자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든다.다바다따라는 배신자가 제자들의 무리에 들어간다. 부처의 죽음에 즈음하여 태양이 어두워지고, 별은 떨어지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태양이 흔들리며 움직이고, 무서운 바람이 지상을 휩쓴다.
석가모니의 전설(특히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라는 책)과 그리스도교의 위경(僞經)이 매우 닮아 있다. 이처럼 복음과 너무나도 닮은 기사(奇事)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마니는 인도의 북서쪽 박트리아 지방(소그드 지방)의 그리스, 스키타이게과 파르티아게의 왕국에서 그노시스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또 기원 후 3세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두 갈래의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다.
하나는중앙 사막과 고비 사막의 북부를 통해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며, 또 하나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과 티베트로 이어진 길이다. 그 두 개의 길을 잇는 마을에는 3세기경에 만들어진 궁궐이 있다. 그 유적들은 폐허 속에 있다가 19세기에 발굴되었다. 그 스타일, 건축 양식, 장식, 얕은 부조(浮彫), 그림 등은 분명히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은 이란 예술에서 온 것이었다. 예술가는 시리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있는 불상은 간다라 미술의 특징을 갖고 있다. 로브노(Lobnor)의 남쪽 미란(Miran)에 있는 불교 사원에는 폼페이에 필적하는 프레스코 화(畵)가 있다. 그 그림을 보건대 부처는 제자인 승려와 프리지아(주: 식물 이름) 모자를 쓴 수염이 없는 사람들, 천사처럼 날개가 달린 요정, 로마 풍의 사등립(四等立)이륜 전차에 둘러싸여 있다. 그 그림을 그린 자는 디타라는 사람다. 양식은 로마와 시리아 풍이다. 빅또르 골루보프(Victor Goloubov)는 "결론을 내리건대, 화가는 안티오키아 혹은 바그다니아의 공방에서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닐까,"라고 쓴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것은 파르티아 인 또는 인도 스키타이 인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온 이란과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이었다. 진(晋)나라의 도읍 낙양에 정착한 최초의 불교 공동체 창립자는 파르티아 인이었다. 감숙(甘肅)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敦惶)은 석굴 사원인 천불동으로 유명하다. 돈황에는 벽화도 잘 보존되어 있다. 영국인 오렐 스타인(Aurel Stein)과 불란서인 뻬리오(Pelliot)는 금세기에 수천의 '돈황 문서'라고 부르는 옛 사본을 발견하였다. 그 사본을 찾아냈을 때 현지의 불교승은 거기에 무엇이 써 있는지를 해독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불교승에게서 '돈황 문서'를 사 들였다. 그 사본에는 불교 사본도 있었지만 상당량은 마니교의 사본이었다.
우선 731년에 이란 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마니가 이룬 빛의 불타 종교의 교리'라고 하는 사본에 의하면, '빛의 부처인 마니는 2월 8일 서역의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다. 같은 책에 관한 것으로 스타인 단편이라고 하는 다른 단편도 찾아냈다.
그들은 페르비어와 소그드 문자, 고(古) 투르크 문자, 위구르 문자, 중국어로 쓰여진 사본을 해독해 나갔다. 그것에 의하면 '빛의 두 원리에 의한 3가지 운동'이라는 종교가 설명되고 있다. 다시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마니교에서는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돈황 문서'를 보면 악보가 붙은 기도와 찬송가 집이 눈에 띈다. 라들로프(Radloff)는 불교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백의 기도에 관한 단편을 하나 하나 복원하였다. 공동체의 회칙도 눈에 띄었다. 입회자의 조건,사원을 만드는 것 등이 씌어 있었다. 외경의 복음서도 보였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단편, 북경에서 발행된 '페르시아 종교의 미완성 성서'도 돈황에서 찾아냈다.그것은 필시 서기 900년경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마니교의 책이다.
막대한 수의 마니교 사본이 중앙 아시아의 여러 불교 승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교의 사본과 마니교의 사본이 가르치는 내용은 똑같았다. 실로 불교승들이란 그 가르침에 따른 부처라는 마니였던 것이다. 마니인 부처의 제자들은 자기네에게 '마니교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역사가들이 그들을 마니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그들은 자기들을 빛의 자식들이라든지, 부처(깨닫는 자)의 제자라든지, '빛나는 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는 불교가 마니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에 가로막혀 온갖 고생을 다한다. 결국 역사가는 마니교가 종교를 체계적으로 절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가는 위구르인에게 있어서 불교는 마니교와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Henri-Charles Puech)는 자신의 마니교에 관한 책에서 마니와 불교 문헌을 비교하였다. 스타인 단편이라고 부르는 '중국어 교리의 책'에는 도교와 불교와 마니교가 섞여 있다고 한다. 토로번(吐魯蕃)에서 찾아낸 단편에는'인류의 예언자 명단'으로 '셈, 셰무, 에노슈, 니코데, 에녹, 예수'의 이름이 보인다.
마니는 그림과 조각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아시아에서 유명해졌다. 마니는 인도스탄과 도르키스탄을 돌아다녔다. 도르키스탄 전역은 마니의 '빛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마니교 공동체는 파르드게와 스키다이게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중앙 아시아의 여러 왕국으로 퍼졌다. 도르판에서 찾아낸 사본에 의하면 마니의 후계자인 부처들, 즉 사라반(Saravan)과 이맘(Imam)이라고 하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지도에 따라 여기 저기에 '교회를 겸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마니자신은 사후에 '빛의 기둥'에 오르고, 다시 달과 태양에까지 가서 최후에는 '휴식과 기쁨의 나라', '닐바나, 즉 열반', '영원한 빛의 왕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도르판사본에 의하면 마니는 '예언자들의 낙인', '최후 시대의 사도'라고 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결론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에 의하면, 예컨대 도르판의 근처에 있는 베제클릭(Bezeklik)의 불교 사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니교의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중앙 아시아의 불교 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마니교의 전례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마니교의 전례와 불교의 전례의 관계를 조금씩 밝혀 나갔다.
마니교는 그노시스주의이며, 온 우주는 보편 원리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한다. 보편 원리란 세상의 영혼이며, 신의 빛이다. 빛나는 세상의 영혼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비롯한 만물에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있다. 어떤 생물이건 기쁨과 괴로움을 갖고 그 세계 보편의 영혼에 의해서 살게 되고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과일을 딴다든지, 야채를 채취한다든지, 나무를 자른다든지,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결혼도 안 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그처럼 허무맹랑한 사고방식은 그노시스의 특징이며, 마니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선발된 자', '깨끗한 자'는 하루에 한 차례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그들은 먹기전에 먹을 것을 향해서 "당신을 베어낸 것은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자른 것도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반죽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요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당신이 고통받은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거룩한 밥공기를 들고 서서 혹은 앉아서 식사를 한다. 정해진 의식에 따라서 식사를 개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소화가 이루어지는 중에는 음식물 속에 갇혀있던 신의 혼이 풀려나 자기네 위장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들은 먹는 것을 통하여 갇혀 있던 빛인 신을 물질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신성한 행위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준 친절한 '구도자'들에게 용서를 베푼다.
다시금 빗슈는 불교승의 '고백으로 인도함'를 중앙 아시아에서 발굴한 사본과 비교하였다. 그는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컨대 마니교의 '선발된 자'는 매주 월요일 일동이 형제로서 모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불교승은 15일에 한번 빠디못카를 불러 같은 기도의 글을 사용하여 고백한다.
불교승의 죄는 모두 빛과 지혜(주: 그노시스식 지혜임)를 거부한 것으로 집중된다. 불교 사본으로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중세 후기의 것이다. 즉,13세기부터 14세기의 것이다. 그보다 오래된 것은 이미 살펴본 돈황 문서 등의 마니교 사본뿐이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가 있는데, 그 제목은 '붓다-카리타(Bouddha-Charita)'이다. 인도에서 그것을 최초로 언급한 때는 기원 후 673년이다. 또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의 중국어판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기원 후 6세기 것이다. '미란다(Milanda)의 대화'는 기원 후 6세기의 중국어판으로 지금도 전래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왕 미란다가 어떤 불교승의 도움으로 회개하는 이야기다. 역사가는 그것을 가지고 미란다가 기원전 1세기에 살고 있었던 희랍 왕 메난드로스(Menandros)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다수의 다른 학자들이 제기하는 반론의 대상이다. 프르타르고스가 기원 후 2세기에 쓴 책에 메난드로스 왕의 생애가 적혀있어서 우리는 메난드로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와도 불교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이상의 것으로 미루어 마니교가 불교 쪽으로 흐른 것임을 안다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리라.
부처의 가르침은 서방으로부터 인도로 전래된 것이지, 인도에서 시작해서 서방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다. 그 증거가 되는 예로 인도가 서방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것을 비롯한 다른 것이 예거되고 있다. 다음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티베트의 불교
기욤 드 루브룩(Guillaume de Rubruck)은 1246년에 불란서 왕 성 루이 9세의 명을 받아 영주의 나라들을 방문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다. 그는 가라콜므(몽골 제국의 수도)에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 망그 헌(헌종)을 만났다. 그는 그 나라를 돌아보고 그리스도교의 전례와 불교의 전례가 닮아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사라센 사람(회교도)과 네스토리우스파와 우상숭배자(불교도)는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한다. 위구르인의 불교 사원에 들어가자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내가 그들의 사원에 들어갔을 때, 불란서인 사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1762년 <알파베툼 티베타눔(Alphabetum thibetanum, 티베트 문자)>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책을 출판한 사제는 로마의 수도자 사제로 베네딕트 14세의 친구였다. 그는 티베트에 전교를 하러 떠난 카푸친회의 수사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 선교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결과, 불교에 대해 이르기를 마니교도들의 음험한 행위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의 모조품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후크(Huc) 신부는 티베트와 중국을 여행하고 나서는 그리스도교와 유사함에 매우 놀랐다. 라마승에 대한 존경, 주교장과 비슷한 지팡이, 주교가 쓰는 미트라와 비슷한 모자, 그리스도교의 제의인 달마티카와 비슷한 옷, 갑바, 편태(채찍질)용의 막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덮는 강복, 두 개의 성가대와 설교가 있는 예배의 식, 성영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장단의 기도, 연도(連禱), 장궤, 성 유해에 대한 경배, 성수, 구마, 로사리오(묵주)와 비슷한 염주, 방울, 종, 향로, 꽃으로 꾸민제단,성화, 예컨대 관을 쓴 아이를 품에 안고 용을 짓밟고 있는 여자의 그림, 단테의지 옥을 연상케 하는 듯 악마가 죽은 자를 괴롭히는 지옥을 그린 그림, 사원의 내부와 외부의 행렬, 지원기를 지나서 입회하는 불교승, 서품식과 비슷한 의식, 순명과 정결과 청빈의 서원, 죄의 고백, 삭발한 머리, 장상의 지도 아래 승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 여자 승원도 존재하는 것, 그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 교황(달라이라마)이 있고 그에게 시종하는 추기경(판첸 라마)이 있는 것, 후크 신부는 그같은 조직이 13세기부터 몽골 제국과 서양의 그리스도교 제국이 교류한 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직접적인 모델로 하여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교(政敎) 양권을 쥔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15세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제도를 만든 것은 쓰온카파(1357-1419)인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사제 안또니오 데 안드라데는 1624년에 타파랑(Taaparang)에서 살았다. 그는 티베트 인들이 부처를 향해 기원하는 주문의 문구가 '옴, 마니, 빠드메,훔'이라고 알려준다. 티베트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이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풀이하듯이 티베트에서는 언제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구원의 주이신 신을 '마니'라고 부른다. 이 말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과 티베트의 종, 기도하는 다른 곳에도 씌어 있다.
크리슈나에 대한 숭배
인도에서 제일 처음 '성립'됐다는 종교는 베다를 성전(聖典)으로 하고,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바라문교라고 한다. 바라문교는 인도에 침입했던 아리아인의 종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자연계의 현상을 신격화한 범신론이었다. 그것은 천둥의 신인 인드라신(주: 아리아 민족의 신이었던 것 같다), 태양신인 스랴신, 물의 신인바르나신, 불의 신인 아그니신, 바람의 신인 바그신 등이 중심이다.
'리그 베다' 중 4분의 1은 인드라 찬가(贊歌)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바라문교는 특정한 교조(敎組)도 없으면서 카스트 최고위의 사제 계급 (주: 브라만 또는 바라문이라고도 함)에 의해 새로운 종교로 변모해 갔다. 그들의 이론을 붙여 가면서 지방 토착의 미신과 화신(化身) 사상을 흡수하여 오랜 동안에 걸쳐 누적된 것이 힌두교다. 그 때문에 종교 이론도, 통일된 체계도 없다. 그런식으로 각지의 미신과 신화를 부정하지 않은 채 포섭하는 방법으로 바라문교는 힌두교로 모습을 바꾸어 가지만, 그 변천 과정에서 최고의 신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이다. 이를테면 신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 왕과 독자적인 신화 체계를 갖는 크리슈나가 있고, 이전에는 각각 별도의 종교였던 것같으나 나중에 라마 왕도 크리슈나도 비슈누 신의 화신이라고 했다. 종파의 융성과 쇠퇴에 따라서 신들의 인기도 변했다. 바라문교의 주역이었던 신들은 지금에 와서는 힌두교 신화의 조역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 전해진 범천(梵天)은 브라프마, 수천(水天)은 바르나, 제석천(帝釋天)은 인드리, 병천(秉天)은 사라스바디(지혜의 여신)라고 하는 바라문교 신화의 신들이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카스트 제도를 배척하였다. 부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설파하고 상층 계급의 사람이나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처 가로되, "제자여, 브라만(Brahman,최상계급)도 최하층의 잔다르(수드라)와 똑같이 여자에게서 났건만, 그가 수드라(최하층)에게는 구원의 문을 닫누나." 부처의 가르침은 비슈누의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예배를 뚫고 들어왔으며, 브라만은 부처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처음의 비슈누에 대한 예배 의식은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또한 대 전쟁의 유명한 영웅인 크리슈나와 동일시함으로써 다시금 민중에게 퍼졌다.
리그 베다에 의하면 크리슈나란 '검은 것(黑)'을 뜻한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인드라 신의 원수로, 악마들을 의미했다. 크리슈나는 계속해서 대 전쟁의 영웅으로 나타나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있던 브라만의 종교가 다시금 민중의 인기를 얻게 하였다. 크리슈나를 내세움으로써 브라만은 무사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다가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들을 브라만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처를 비슈누 최후의 화신의 하나로 힌두의 신들 속에 집어넣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의하면 브라만들은 다음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서양에 보내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연구하게 했다. 그 그리스도교에 관한 지식을 이용하여 그들은 종교의 개념을 새로이 꾸며 부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진전을 막으려 했다. 크리슈나와 그리스도교의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브라만들은 바그하바드 지타(Baghavad-Gita)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이는 크리슈나에 관한 신화로 13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서 발전하였다. 크리슈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어떤 전례를 치르는지에 대해 기술된 책이 있는데, 그것을 브라나라고 한다. 브라나를 보면 크리슈나가 태어났을 때, 어미의 가슴에 안기되 양 우리에서 목자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또 난다와 그의 처마도라는 공물을 바치러 먼길을 떠나고 크리슈나가 태어난 우리에는 소와 그 밖의 가축이 있었던 일, 등이 굽은 자(곱추)가 나았다는 것, 크리슈나의 머리에 향수를 뿌린 구비야라는 여자의 이야기 등도 써 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으로부터 도망치신 이야기를 빌린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와 죄 없는 갓난아기의 학살 이야기, 유아기의 기적이야기, 유혹을 받은 이야기, 현성용의 이야기 등도 실려 있다. 브라만은 크리슈나의 신심을 도입함과 함께 신들이 여러 가지 화신이 된다는 설을 퍼뜨렸다.
크리슈나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브라만 종교가 흐려지고 악이 승리할 때에는 언제나' 몇 번이고 사람이 된 최고의 신이라고 일컬어졌다. 크리슈나는 가르침을 적은 후 비명에 가는 죽음을 당하고, 제자들에게는 버림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크리슈나는 지식과 고행보다 사랑을 우선한다. 바그하바드 지타에 의하면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범신론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의 생명(세상을 살리는 영혼)이며, 세상을 떠받치는 자이며, 세상의 길, 그 피난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사물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나는불사(不死)이며, 죽음이다"(이는 만물이 다 신이라고 하는 범신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삶을 여러 번 반복하고(윤회전생(輪廻轉生) 혹은 환생(還生)), 너희도 삶을 여러 번 반복한다. 나는 그 모든 삶을 알고있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전혀 모른다."
크리슈나는 카스트 제도(주: 인도의 계급제도)를 지키도록 가르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신속에 녹아들라고 가르친다. 브라만 계급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제하면서도, 범신론과 윤회전생, 마지막에는 무(無, 열반의 세계)로 용해되고 마는 것 등, 부처의 기본 가르침은 보존한다.
19세기에 이미 인도에 대해 연구했던 학자는 인도의 유적과 그리스도교의 아이콘(Icon, 주: 성상, 성화)이 유사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많은 유적이 서양의그리스도교계로부터 인도로 차용(借用)되었음을 지적한다. 인도학의 권위자인 알브레헤트 베버(Albrecht Weber)는 그의 저서 <산스크리트 문학사>에서 "크리슈나를 신으로 간주하는 숭경(崇敬)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태리의 인도학자 안젤로 데 구베르나티스(Angelo de Gubernatis)는 모호우화(주: 번데기를 성총인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한다. 브라만들의 창작 신화를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이 인도에까지 전해져서, 그 지식에 의해서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럴듯하게 변모되어 이용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베버가 지적하듯이 그 지식이 크리슈나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고 그의 생애와 관련된 갖가지 에피소드를 만든 것 같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성실한 학자들은 오히려 인도가 그리스도교 국가인 서양의 흉내를 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인도가 성서를 흉내낸 것이요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크리슈나는 하층 계급이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이 설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브라만 계급이 하층 계급보다 상등한 지위를 유지하려는 뜻에서 부처와 그리스도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에서 만들어 낸 근대의 날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최근 힌두교도들이 성삼위일체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힌두의 브라만 계급에서 삼위일체를 닮은 개념이 등장한 것은 중세 때다. 중세에 씌어진 <쁘라나>라는 책 속에 그것이 기술됐을 뿐이다. 안젤로 데 구베르나티스가 매우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듯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흉내내어 형체를 망가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만들은 비슈누 신과 시바 신이라는 최고의 그룹에 자기네 브라만 신을 끌어들이고, 그 세 이름은 하나인 신의 형체와 존재 양식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일뿐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리믈디(삼중의 형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용어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힌두교에도 어떤 '신학'이 있는 것처럼 서양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니교와 불교는 혼합된 것인가? 절충한 것인가? 공존하는 것인가? 어째서 마니를 부처라고도 하는가? 어찌하여 부처의 전기는 그리스도의 전기와 너무나도 닮았는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복사한 것인가?
마니교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때에 십자가에 대한 경배와 희생이라는 관념과 성사를 제외시켰는데, 어째서 불교에는 그런 관념이 없는가? 그노시스주의의 마니교는 외경의 복음을 자기 것으로 삼아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찌하여 불교에도 그 노시스의 외경의 복음 이야기가 들어있는가?
중앙 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는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페르시아와 스키타이 족의 왕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도에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오래 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영향을 미친 것은 일시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브라만들이 불교를 적대시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비슈누 신의 화신의 하나로 부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 살펴 보건대 불교가 인도에 들어오면서 부처의 가르침 자체도 힌두교를 받아들였으니, 예컨대 불교의 신화 속에 인드라신이 도입되었는데, 인드라는 싸움에서 불교의 신에게 져서 불교를 지키는 하늘의 한 사람이 되고 인드라의 무기 바쥬라(주: 금강저, 즉 금방망이)도 불법(佛法)을 지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불교는 점차 변화되고,왜곡되며, 밀교(불교의 한 분파)로 변화되어 간다.
불교사에 관한 교과서는 그 변천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근본 불교, 원시 불교, 부파(部派) 불교, 대승 불교,밀교로 구분한다. 부파 불교의 시기에 이르러 그 때까지 가까스로 입으로만 전래되던 가르침(수 백년동안이나 '정확하게' 구전돼 왔다는 것인가!!??)을 붓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원시 불교, 부파 불교에 있어서 이미 부처의 가르침은 더 없는 저술로 변화돼 갔다. 다시 대승 불교에서는 다른 것들이 너무도 많이 보태졌기에 많은 불교학자는 한 목소리로 대승을 '비불설(非佛設)'이라고 칭한다. 예컨대 '아미타불'등은 전적으로 대승교전(大乘敎典)의 창작이다. 7세기에는 이미 밀교가 태어나고, 9세기에는 힌두교의 성력파(性力派)와 결합하며, 외설적인 행법을 만들어 병적인 상태에 빠졌다. 또 '다라 보살'에서 볼 수 있듯이 8∼9세기에는 풍부한 유방과 부드러운 육체를 갖되 극히 힌두적인 여성의 밀교 보살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여성 숭배, 마신(魔神) 숭배를 행하는 등, 최후에는 불교의 이름을섬뜩하게 하는 마교(魔敎)로 변하고, 1203년 인도의 비하르에 있던 비그르마시르 사원이라고 부르는 밀교 교학의 중심지가 이슬람교도에 의해 파괴되어 그 때를 끝으로 인도에서는 불교가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결론
불교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의 북서쪽 소그디아나에서 희랍계의 스키타이 인과이란계의 파르티아 인의 왕국에서 등장했다.
마니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서 깨달은 자(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불교는 그노시스의 마니교가 아시아에 퍼진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는 진짜로는 마니이며,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마니의 가르침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민중의 많은 전설, 신화, 미신이 섞여들어 그 가르침의 본질이 변질된 것의 형태로 발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로써 어째서 기원 후 5, 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도와 아시아의 여기저기에 마니교와 불교의 승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어째서 그 시기에 미란다, 아소카, 부처의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져서 기술되기 시작했는지도 잘 납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6세기에는 중국에도 달하여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의 불교승들이 복사한 8∼10세기 마니교에 관한 책 여러 권이 상술한 지역에 있던 승원의 폐허 속에서 발견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모든 면에서 이치에 맞다. 이로써 다른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한 사실의 자연스런 역사적 흐름과 자연스런 논리를 역사적 틀의 범위 안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억지로 밀어 부친 부처의 가르침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역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를 깎아 내리려는 의향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도학의 권위자라는 에우게네 부르노프(Eugene Burnouf)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리스도교가 엣센파를 통하여 인도에서 성립됐다는 것을 애써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단, 이상은 그저 연구 단계일 뿐이며, 좋은 의견이나 제안이 있을 경우에는언제든지 환영한다.
+ 마리아의 토마스 오노다 신부
신부님의 글입니다.(http://sspxkorea.netian.com/clergys/buddhism.htm)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 신부님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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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불교의 기원
서언
인도에는 역사를 기록 보존하는 관습이란 게 없었다. 연대기도 없었다. 있다면 인도의 중요한 가족에 대한 기록이, 많건 적건 전설과 신화로 섞여 남아있을 따름이다. 인도인들은 유럽 문명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기에 유럽의 역사와 고대 인도의 유적이나 기록 및 전설 등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몹시 어렵다. 인도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내용에 대해 그 연대를 정확히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son)은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인도를 여행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컨대 그것이 최고의 브라만(Brahman, 주: 인도의 카스트에서 최고계급)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브라만들조차 자기네 선조가 그 건립 초기에서부터 일해 온 사원의 연대에 대해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확한 자료로 미루어, 건축된 지 200∼300년밖에 되지 않았음이 분명한 여러사원에 대해서 1,000년이나 2,000년이 됐노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라고.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고대 인도의 역사를 죄다 조작해서는 서양 역사의 틀 속에 밀어 넣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발굴된 유적이 그 조작된 역사의 틀에 짜 맞춰져서 평가된 일이 잦았다. 특히 그 역사의 틀 속에 유적의 연대를 끼워 맞출 수 없을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들은 결코 그 틀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뉴먼 추기경은 릴리(W. S. Lilly)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인도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설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 복음서의 연대를 결정한다든지 복음서가 올바르고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대에 관한 다양한 사본, 여러 계통의 사본, 교부들의 저작물에서 인용한 것 혹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를 인용한 것에서 얻은 증언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더욱이 현대 비판가들의 날카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갖가지 사본의 문장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해야 한다.
발견된 모든 사본에서 특정 문장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 문장은 후세에 써넣은 것이라고 생각되어 가차없이 내버려진다. 부처의 참된 역사에 관해서 볼 것 같으면 복음서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빈틈없는 증거를 요구하지도 않은 채 납득이 안 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인도의 학자들이 비판 정신을 가지기는커녕 불교 전설을 그토록 쉽사리 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신약성서 사본의 '모순'에 대해서라면 좋은 기회라는 듯 극심한 공격과 비판을 가하는 현대주의자의 해석학이 있는 이 현대에 와서! 그리스도교 역사의 원본에 대해서는 그토록 엄중한 경계의 눈초리를 던지면서도, 그 동안 부처의 전설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한 관용을 받아온 상태다. 여기에는 역사가들의 성실성에 의혹을 품을 정도로 이중의 잣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 원본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본은 서기 70년 이전의 필사본이 현존하고 있다. 현대의 파피루스 관련 학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손안에 있는 것으로 불교경전의 사본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래 봤자 13, 14세기와 같이 상당히 현대적인 시기에 이루어졌다.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상의 발굴 중에서 많은 것, 특히 금세기 초엽 이후의 것과 같은 일부는 위에서 언급했던 식의 역사 구조에 대해 완전히 자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자신의 선임자들이 만든 역사의 여기저기에 의문부호를 남기면서도 그대로 따라갔다. 지금부터 우리가 언급하는 고고학상의 유물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발견도, 조작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적어도 중앙 아시아의 고고학 전문가에 의해서 잘 알려져 있는 발굴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결론은 요즘의 학
교 교육 시스템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과서의 연대기에는 맞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때마다 도움이 되는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문명의 전파
인도의 문명을 예찬하는 자는 인도만이 모든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인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관념이 본래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기서 모습을 바꾸고 세계의 갖가지 종교로 나뉘었다고 한다. 인도를 예찬하는 자가 쓴 책을 볼라치면 어디에나 그런 내용이 씌어 있다. 그러나 사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런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중앙 아시아와 인도는 그 문명을 서양으로부터 이어 받았다. 서양문명을 전하는 개척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에 문명을 전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하기 전에 벌써 다리우스 왕(재위 B.C.522-486)이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가 신드(Sind) 골짜기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지방총독 제도를 펴는 동시에 중앙 집권제를 시행하였다. 인도에 남아있는 유적은 바빌론 및 페르시아의 유적과 똑같은 것이다. 페르시아 다음 에는 알렉산더 대왕(재위 B.C.336-323)이 다스리던 희랍인이 인도에 침입하였다.그들은 펀자브 지방에 희랍 풍의 왕국을 여러 개 세웠다.
그리고 나서 희랍계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희랍 문명(주: 헬레니즘 문명)을 중앙 아시아에 전하였다. 예컨대 박트리아 왕국(B.C.255-139)은 알렉산더가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잔
류한 희랍인의 자손이 중앙 아시아의 '암'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그 박트리아 및 소그드 지방(주: 박트리아 지방과 소그드 지방은 거의 같은 장소를 가리킴)의 왕국은 힌두교의 문헌을 남기고 있지만, 거기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 유적에는 희랍과 로마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꽁트고브레 달비엘라(Comte Goblet d'Alviella)는 <인도가 희랍에게서 받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조각, 회화, 문학 그리고 연극에 이르기까지 희랍 문명의 요소를 전부 다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도의 서해안에서는 고대 로마제국과 인도 사이에 무역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로마 유적도 출토되고 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신전을 건설하는 데 필요로 했던 고가의 목재를 인도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라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다. 기원 후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의 침략은 서양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스키타이 족이나 파르티아 족은 러시아의 남쪽 카스피해의 남동쪽으로부터 밀려와 인도를 침략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했지만 문명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기원 후 2, 3세기에 그들은 새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러 민족에 대해 교량역할을 하였다.
민족 대이동 때의 상황을 보건대, 북 아시아로부터 남하한 민족은 이동할 때에는난폭하게 파괴하였으나 일단 그 땅에 정착하고 나면 서양의 희랍, 라틴, 그리스도교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의 전파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 희랍인, 스키타이 족이 수세기에 걸쳐서 힌두스탄(현재의 인도와 파키스탄을 합한 지역)의 북서 지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공동체가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정착한 일은 있어도, 유럽이 인도의 침략을 받은 일은 한 번도 없다. 유럽에는 인도의 사원도 없다. 인도에 남은 유적을 살펴보면 페르시아나 희랍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소아시아나 이집트의 유적에는 인도의 발자취는 그림자도 없다. 희랍과 라틴의 고전 문학 속에는, 다시 말해서 기원 후 2세기 이전의 고대 동양계의 문학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불교 이야기 같은 것은 눈
에 띄지 않는다.
인도인이 신으로 섬기는 보타(Botta)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데의 '스트로마데스'인데, 이것은 기원 후 2세기말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처(주: 불타, 이하 부처라고 하기로 함)의 가르침은 바빌로니아이건 시리아이건 이집트이건 그 어디로도 들어간 적이 결코 없었다. 인도에 인접한 서양이나 중동에는 부처의 종교가 전해졌으리라는 흔적이 눈곱만큼도없다. 그런 일은 한 순간도 없었다.
부처(불타)가 살던 시대
정말이지 기원전에 부처가 살고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막스 뮐러(Max Mller)는 인도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일생에 걸쳐 불교가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아내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부처에 대한 숭배는 박트리아와 소그드 지방의 스키타이 족의 왕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같은 최초의 숭배는 현 페샤와르의 고을(현 파키스탄의 북부)인 간다라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스키타이 족의 자손인 쿠샨 왕조 밑에서 기원 후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발전하였다.
마하반사(Mahavansa)를 보면 아소카 왕의 전설이 들어 있다. 마하반사에 의하면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 왕은 '경건한 왕 샤크라바틴(Chakravartin)'이며, 역사가에 의하면 기원전 273년경에서 232년경에 재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그의 치세에 고대 인도에서 영토를 제일 많이 확장하고, 포교 및 불교 경전을 모으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하반사는 기원 후 5세기의 것이다. 아소카왕은 사르나드라는 장소 말고도 인도 각지에 왕의 이름을 새긴 철기둥과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 어떤 곳을 보면 알렉산드리아라는 마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가는 그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와 동일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이집트에는 인도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박트리아나 지방이나 소그디아나 지방의 중앙 아시아 산간 지역에서 희랍계의 작은 왕국이 후세까지, 즉 기원 후 7세기에 이슬람교 국가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작은 희랍계 왕국의 왕들은 희랍인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거듭하건대 특히 코카서스 지방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마을이 그것 말고도 많이 있었다. 아소카 왕의 철기둥에는 희랍 왕의 옆에 훈족 왕들의 이름도 열거하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그 왕들의 이름은 중앙 아시아 작은 왕국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임스 프린제프(James Prinzep)라는 박학한 영국인은 비문의 몇 개 문장을 해독해 놓았다. 그에 의하면 '신들과 법의 친구'라는 아소카는 자기가 부처의 가르침으로 귀의케 한 민족을 열거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야바나 인(주: 희랍인을 지칭함)의 왕 이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안디고노스, 안디오고스가 있다. 그것을 보고 역사가들은 그 왕들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자손으로 아소카는 기원 전 3세기에 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소카는 탁실라(Taxila)라는 마을의 왕이었지만 그것은 간다라의 아주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치 않게 인도 각지를 정복한 '인도의 제왕'으로 아소카를 높이 떠받듦은 물론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또 아소카 왕은 동서남북을 상징한다는 4종의 동물(주: 수소, 코끼리, 말, 사자),샤크라(Chakra, 주: 법륜이라고 번역되며 윤은 차륜의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최고의 신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샤크라 자체는 불교만의 상징이 아니며 금세기의 마하트마 간디는 피륙을 짜는 데 명주의 륜(輪)을 샤크라의 상징으로 삼았다), 4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돌기둥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대지의 여신인 야크시(Yakshi) 상과 대지의 남신인 야크샤(Yaksha) 상이 만들어진 듯하다. 당시의 조각은 표면 가공이 특징적이다.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여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물이란 본래 부처의 유골을 보관하기 위한 일종의 분묘로 지금은 '부처의 열반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고들 있다. 그렇지만 여물에 있는 부처의 생애와 본생경(本生經), 자타카(Jataka), 주: 부처의 전생에 대한 설화집)이라는 부조를 보면 부처의 모습이 눈
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말 탄 사람이 없는 '말'은 왕자의 출가,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 '두 개의 발자국'은 세상의 왕인 부처, 고귀한 사람에게 떠받쳐져 있는 책은 제각각 부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 시대에도 역시 상술한 대지의 여신 야크시가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고, 이제 바로 꽃피려고 하는 초목에 발을 묶어놓아 풍요의 신으로 등장한다.
후에 안드라라고 불리는 왕조(B.C.27∼A.D.336년경)가 번성하는데, 그 시대에는산치(Sanchi)에 대 여물이 세워지게 된다. 산치의 여물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같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여물을 둘러싼 듯한 일종의 담장이 있으며, 그 동서남북에 탑 모양의 문이 달려 있다. 그 탑 모양으로 된 문의 조각은 '법륜'과'삼보표'(주: 부처, 법, 승려를 상징함)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민간 신앙의 우상들과 더불어 불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문을 지키는 우상으로 야크샤와 야크시가 눈에 띈다. 야크샤와 야크시들은 머리를 독특하게 묶고 가슴 장식과
귀걸이, 둥근 형태의 팔찌와 발찌를 했으며 뒤 허리 쪽에 리본을 묶었을 뿐인 나체이다. 조각을 보면 야크샤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고 물소, 사자,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등 많은 동물들이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으며, 코끼리의 무리가 여물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 편 오른쪽에는 기괴한 얼굴을 한 크고 작은 악마들이 다수 있고 좌측에는 보리수 등이 있지만 여기에도 아직 부처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보리수와 여물이 부처를 표시하고 있다고 할뿐이다.
그러나 야크시 및 야크샤들 그리고 동물들의 생동감과 현실감을 볼 때, 어째서 부처만이 보리수 혹은 움직임이 없는 여물 정도로만 표현되었는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궁금증이 더해진다. 그것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산치의 야크샤들이 있는데, 그 근방 가쥬라프의 남녀 상의 옷차림과 매우 닮아 있다. 가쥬라프에는 9∼10세기경에 만들어진 힌두교와 자이나교(Jainism) 사원의 유적이 있다. 그 남녀 상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은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시대로부터 중세 인도의 '가마, 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산치의 여물도 불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여기에 있는 유적의 부조를 볼 것 같으면, 동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는 종려나무의 잎을 형상화한 동자(Barmitz)와 날개가 있는 사자, 뿔이 있는 사자, 사람 얼굴을 한 사자,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그리핀(Griffin, 주: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몸뚱
이를 한 괴물) 등 많은 것이 서방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부처의 모습이 돌연 등장하는 것은 기원 후 간다라(Gandhara) 미술의 시기이다.
또 간다라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인도의 마투라(Mathura)에서 독특한 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마투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니스카 왕 입상은 명백히 로마의 복식이라 생각되는 기법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다라에서 갑자기 나타난 최초의 불상은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부처는 똑바로 서서 오른손을 위로 들고 있다. 얼굴은 고전적인 데다가 완전히 희랍 풍이다. 코도 그렇고 어깨도 반듯하며 머리는 깎은 상태다. 이는 영락없이 제자를 데리고 산책하되 희랍 풍의 토가(toga, 주: 옛 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철학자의 모습이다.
부처에게 후광이 붙여진 시기로 미루어 그것은 바로 희랍의 아폴로(주: 희랍 신화에서 음악, 의술, 궁술, 예언과 광명의 신으로 태양과 동일시함)였다.인도의 기후로 인하여 당시의 벽화는 소실됐고, 남은 것이라곤 조각품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간다라 미술이 인도 최초의 불교 미술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간다
라 미술은 본디 희랍과 로마의 미술이라는 것을. 부처는 결코 후세의 인도 사원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간다라 미술에서는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에밀 말르(Emile Male)라는 유명한 그리스도교 예술의 사가(史家)에 의하면, 갈리아(옛날의 프랑스)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주: 대 성전 교회 건물) 중 아주 오래된 것은 그리스도교 예술가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건축 및 조각과 장식 모양도 시리아, 그리스도교 유적에서 그 기법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는 간다라의 얕은 돋을 새김(주: 얕게 판 부조를 말함)과 카타콤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관,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로빈키아 아트 제작소의 관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매우 닮아 있어서 거의 같은 기법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어느 것을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는 고풍스런 옷을 감아 걸친 모양을 하고 있고, 가는 기둥과 잎이 무성한 나무 줄기로써 다른 장소와 분리된 벽감(주: 벽에 조각품 등을 세워 놓기 위해서 만든 오목한 부분)에 평행하게 놓여 있다. 그들은 둘 다 선 채로 한 손을 들고 있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제자들의 표정으로 보아 스승의 가르침에 동의를 표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으로 미루어 에밀 말르는 예술가 한 사람이 그 두 곳에서 종사했으며 그 조각품을 제작한 곳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간다라 미술에서 부처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는 얕은 돋을 새김에는 움직임이 없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코린트식 석주의 장식에 새겨져 있다. 파슈느거르에서 발견된 불상의 발판에는 274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만일 콘드파레스 왕이 즉위한 때를 시점으로 해서 계산된 연대라면 기원 후 214년이다.콘드파레스는 기원 후 1세기 인도의 왕으로서 파르티아 인이었다. 그는 칸드라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조카 아브라가레스가 콘드파레스의 뒤를 잇고 기원 후 70년에 왕좌에 앉은 것 같다. 그것이 만일 샤카 족의 시대라면 기원 후 352년인 것이다. 샤카는 스키타이 인을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표현한 것이다.
마니교
마니교는 스스로를 '빛의 종교' '정의의 종교'라고 칭하였다. 마니교의 교회에는 '청중'이라 불리는 '구도자'와 '성인'이라 불리는 '상층부'가 있었다. 야마다 쇼 교수는 <아우구스티노의 근본문제>라는 저서에서 아우구스티노가 받아들였던 마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니교'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이다. 그것은 영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내세운다. 전자는 선과 빛과 신이며, 후자는 악과 어둠과 악령이다. 현실 세계는 그 선악이 대립되어 쟁투하는 곳이다.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은 영으로 있는 한에서는 신이지만 육으로 있는 한에서는 물질이다. 영적인 인간은 육체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마치 잘게 쪼개져서 작은 조각이 된 신(神)이 물질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인간을 그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하여,빛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빛의 아들이다. 이와 같이 마니교는 교묘하게 그리스도를 자기네 가르침 안에 받아들였지만, 구약의 신은 완전히 부정한다. 구약의 종교는 유데아 인이 고안해 낸 미신며 '유데아 인의 신'과 '그리스도'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마니교는 구약과 신약의 신이 같다고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를 거스른다.
그러면서도 영과 육의 대립을 설파한 바오로 종도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마니교의 사도 중 한사람으로 내세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노의 시대에 마니교는 이교가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일개 지파였으며, 그보다도 마니교도들에게는 마니교만이 참된 그리스도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이언론적(二言論的)인 마니교에게 있어서 구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은 선이고 물질이 악이라면, 모든 불행이 물질에 기인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구제는 물질로부터 이탈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가 있는 한 육체 나름의 욕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물질에 뿌리를 박고 있음으로 해서 악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활을 하려는 자는 일체의 육신의 욕구에서 떠나야 한다. 그에 따라서 결혼과 육식이 금지된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결혼도 육식도 하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마니교는 두 계급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그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로, 육식과 처를 두지 않고 정결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선택된 사람들(electi)'로'성자(Sancti)'라고도 한다. 다른 한 편인 일반 신자들은 자신이 그처럼 청정한 생활을 할 수는 없지만, 성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재물을 공양하고 그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구함을 받는 것에 동참한다. 그들을 청문자(聽聞者, auditores)라고 한다. 결국 마니교에서는 성자 계급과 청문자 계급이 마치 출가(出家) 계급과 재가(在家) 계급처럼 명확히 구별된다."
"결국 마니교는 성자에게는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는 한 편으로, 일반 신자에게는 관대하였다. 그에 따라서 일반 신자는 자기 힘만으로는 구원되기가 어려운 열등한 그릇인 까닭에 열등한 그릇에 걸맞게 감성적인 구제의 수단이 그들에게 베풀어졌다. 마니교에는 진언밀교(주: 진언종-불교 종파의 하나)에 비견되는 화려한 의식과 채색으로 꾸며진 공상으로 점철된 구제에 관한 신화가 있었다."
야마다 교수는 다시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노 강화(講話)>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나의 추측으로서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높은 야산의 진언종을 생각하게 한다. 나도 그곳에 한 번 가보았지만, 벽화라든지 그 밖의 여러 가지가 마니교의 것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색채가 강렬함과 동시에 높은 야산의 묘를 보고 느낀 것은 오사카의 유곽이다. 거기에는 모종의 신자가 매우 많다고 한다. 나는 생각했다, '홍법대사를 비롯하여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이 이 산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대사(大師)는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서 구렁텅이에 빠진 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창녀 혹은 온갖 최하계급의 사람들을 구해 준다.그
와 같은 종류의 신앙이 마니교 안에도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이론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느낌이 그랬다."
그런데 마니교의 창설자는 스키티아노스(Scyhthianos)라는 사람으로 이는 스키타이 인이라는 뜻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종도들이 살아 있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Gnosis,주: 영적 지식, 즉 신비적 직관)를 설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제자였던 테레빈토스는 그의 가르침에 관한 책 4권을 썼다. 그 제목은 각각 '현의', '교리요강','복음', '보배'들이다.
존경하는 스승이 죽은 후 테레빈토스는 바빌로니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산 위에서 천사의 양육을 받은 '깨달은 자,즉 부처'라는 이름을 대었다. 그렇게 이루어지되 그노시스에 관련된 교회의 명칭에 자기 이름을 붙인 자는 마니(A.D.216-277)라고 하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는 마니케우스라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 시대의 사산 왕조 초기에 살았는데, 종교의 창립자 혹은 사상가라고 하기보다는 당시에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 퍼져 있던 그노시스 파 교회를 능숙하게 조직한 남자였다. 최근에 발견된 희랍어'케른 파피루스(Cairn papyrus, 주: 케른이란 기념비 혹은 묘비를 말하여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것)'에 의하면, 마니는 청년 시대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유데아 기독교(주: 유데아 기독교란 유데아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 아닌 절충 교파임) 중에서도 그노시스주의(역자 주: 1-4세기에 널리 퍼진 영지(靈智)를 숭상하던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였던 엘카사이 파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니의가
르침은 다마 말키온과 바실리트가 설교하고 있던 그노시스주의로 그리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특히 세상의 2대 원리를 강조하였다. 결국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어서 그 싸움이 영원하다는 것, 또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마니'라고 불렀다. '마니'라는 것은 산스크리트 어(범어)로'보석'이라는 뜻이다. 마니교의 찬송가에 <토마스의 행전>이라는 신비적 직관에 대한 책에서 취한 '진주의 노래'가 있지만 그 속에서 마니는 '왕의 아들'로 나와 있다. 그 '진주의 노래'를 보건대, 창조주가 아담의 몸 속에 귀한 진주를 묻어버렸
고, 그 진주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다가 마리아의 태내에서 탄생한 예수에게 전해졌노라고 노래되고 있다. 마니 자신도 성령의 역사로 미망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로 묘사되고 있다. 묘하게도 현대에 이르러 프리메이슨도 자기들을 일컬어 '미망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하고 있다. 마니도 저 진주에서 태어난 '보석'이요, 자신의 스승 테레빈토스와 같이 바빌론에 살았다고 한다.
마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육신의 교회가 높은 곳에 올려진 후에 너희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나의 사도직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이래로 진리의 영이신 위로의 주께서 파견되어, 이 최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들에게로 왔다. 이는 예수가 말한 그대로다..." 마니는 다시 페르시아(226-651) 사산조의 초대 왕 알데씨르(재위 226-240)가 통치하던 시대에 "위로의 주는 자신이 머물 곳으로 왔다. 그와 대화했다. 그에게 감추어진 현의를 계시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는 성령과 한
몸이라고 주장했다. 그노시스가 그리스도교라는 줄기를 이용해서 거기에 기생하는 이물질인 것처럼, 마니교도 그리스도교의 용어와 가르침에 기생하는 암세포였다. 마니는 스스로에 대해 이르기를 예수의 충실한 사도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쓴 편지에는 머리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마니'라고 썼다. 마니는 예수를 찬미한답시고 송가를 썼다. 마니의 제자들은 마니를 찬미하는 찬가를 썼다.
마니교의 '게파라이아-교리요강'이라는 책의 서두에는 "깨달은 자(부처)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알데씨르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마지막에 나는 설교하러 떠났다. 나는 인도인의 나라로 가는 탈것에 몸을 실었다. 나는 생명의 희망에 대해서 설교하였다.거기서 나는 선발된 자들을 뽑았다. 알데씨르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샤프르가 왕좌를 이어받고 나서는 그 해에 나를 가까이 불렀다. 나는 탈것을 타고 인도인의 나라에서 페르시아인의 나라로 갔다가 페르시아에서 바빌론으로 갔다."
마니는 이 '게파라이아-교리요강'의 첫 부분에서 선구자인 세 사람의 이름을 든다. 그 세 사람은 예수와 사라데스와 부처다. 마니는 그 세 사람이 형제이며, 같은 지혜를 통역하는 자라고 말한다. 마니는 예수와 사라데스와 부처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제일 먼저 예수의 이름을 들고, 나머지 두 사람은 마치 예수의 제자인 듯 취급한다. 마니는 자신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르침과 같다고 주장한다. 마니는 종교의 창립자는 아니고 그노시스의 교회를 퍼지게 하는 자라고 한다.
마니와 불교
마니의 가르침을 볼 것 같으면 '마니 이전에 가르치고 있던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그림자도 없다. 마니의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불교가 없다.
버키트(Burkitt)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마니 자신의 가르침에는 불교가 그의 가르침의 구성 요소라는 흔적이 전혀 없다. 마니는 존경심을 갖고 부처의 이름을 받들지만, 그것은 그가 플라톤과 헤르메스 및 도리스메기스트의 이름을 받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알프릭(Alfric)에 의하면 마니는 부처를 몰랐다고까지 말한다.이는 무슨 말인가? 마니가 받드는 부처는 도대체 누구인가? 마니는 도대체 누구를 부처라고 일컫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니로부터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그들더러 마니교의 가르침을 버리겠다는 서원을 하라고 했었다. 정통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그들에게 "스키티아노스와 사라데스와 부처와 마니의 가르침을 끊어버립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 네 사람 이름의 순번이 같은 종교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하는 부처란 마니의 스승이었던 테레빈토스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니의 직속 후계자는 마르 시신(Mar Sisin)이다. 시신을 희랍어로는 시시니오스라고 한다. 그는 투옥되어 있던 마니에게서 서품을 받아 순교하고, 자기를 '깨달은 자, 빛을 받은 자(부처)'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타(부처)는 산스크리트 어이며,그 뜻은 라틴어 일루미나투스(illuminatus)이다. 불타(佛陀-부처)는 산스크리트어인 '붓타'의 음을 베낀 것이다.
시신의 이름은 마니의 다른 초기 제자들의 이름과 함께 마니의 사망일(페마의 축일)에 언급된다. 시신 이외의 제자들은 토마스(주: 대체로 토마스 복음이라고 하는 그노시스 복음의 저자 토마스), 앗타스(주: 혹은 앗트, 앗타이라고도 한다.라틴어 이름은 아디만스(Adimans)이므로 앗타이를 12종도 중 한 사람인 '다두'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임)와 헤르메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디만스의 저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모두 부처라고 불렀다.
만일 마니가 말하는 부처, 즉 '빛을 받은 자', '깨달은 자'가 테레빈토스였다면 마니교를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현재 옛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교는 마니교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부처의 생애는 대부분 마니교의 문헌으로부터 글자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대단히 많다.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부처의 생애는 후대에 상당히 많은 전설을 삽입하거나 손질한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왜곡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본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복원시켜 보련다.
부처는 '석가모니'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샤카 족, 즉 스키타이 족의무니(성자)로 인도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서방에서 온 스승이다. 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으로서 자칭 '왕자'라고 하던 마니와 같은 부류다. 석가모니는 마야 데비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슈트나 왕의 처(妻)로서, 자기가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현몽을 통해 알았다. 결국 석가모니는 '동정녀'의 아들인 셈이다. 그의 모친은 아카시아 나무에 의지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카시아 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려서 신생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외경에 해당되는 '성서'에 실려 있다(주: 성서는 사실상 책 한 권이 아니고 72권으로 되어 있다. 성서에서 최고의 저자는 천주 자신이다. 그것을 기록한 인간은 수단 및 도구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작가는 천주께서 구술하시는 것을 받아쓰지도 않았으려니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쓰지도 않았다. 자유와 개성과 교양을 지닌 상태에서 천주의 초자연적인 간섭과 감도하심에 의해 성서를 기록한 것이다. '정경'이라고 하는 성서 72권을 지정 공인한 것은 가톨릭 교회가 종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대로 전해 온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경 여부가 의문시된 것도 있지만 나중에 다시 그 정경의 성격이 인정되어 정경임에 틀림없다고 선언된 것도 있다. 16세기에 이르자 오랜 옛날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성신의 감도하심에 의
한 정경이라고 한 책에 대해서는 '원 정경'이라고 하고, 또 전에 영감을 받은 것인지를 가늠함에 있어서 의혹이 있었던 몇 권의 책은 '제2 정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경'이란 교회가 처음부터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은 책을 말한다. 그 외경들은 대부분 정경에 의거한 것이라고는 하나 정경에서 탈락된 것으로 유치하거나, 공상이거나 혹은 이단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그 모친의 오른쪽 허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아름답고,빛나고, 보석(마니)과 같이 순수하며, 색동의 아름다운 옥양목 위에 놓였다'. 이 이야기는 그노시스의 '유아기 복음'과 '야고버 복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지혜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부자 아시다라는 노인이 신약 성서 속의 늙은 시메온처럼 찾아와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인사하고, 그의 높은 운명을 예언한다. 노인 아시다는 그 아이가 오래 동안 살지 못한 채 증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린다.
부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무화과나무는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처는 49일간 단식한다. 그리고 악인(마다)의 유혹을 받는다.마다는 부처에게 세상 영화를 보여주면서 열반에 들어가게 해 주리라고 약속한다. 부처는 그에게 저항하며, 암흑의 군주 군단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자신의 몸이 빛나는 몸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한다.
또 복음으로부터 빌렸음이 분명한 이야기도 있다. 예컨대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의 이야기, 우물에서 비천한 계급의 여자와 만난 이야기 등등.
부처는 그 후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가비라 성(가비라 바스도)에 장엄하게 입성한다. 그는 그 동네의 장래를 예언한다. 제자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든다.다바다따라는 배신자가 제자들의 무리에 들어간다. 부처의 죽음에 즈음하여 태양이 어두워지고, 별은 떨어지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태양이 흔들리며 움직이고, 무서운 바람이 지상을 휩쓴다.
석가모니의 전설(특히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라는 책)과 그리스도교의 위경(僞經)이 매우 닮아 있다. 이처럼 복음과 너무나도 닮은 기사(奇事)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마니는 인도의 북서쪽 박트리아 지방(소그드 지방)의 그리스, 스키타이게과 파르티아게의 왕국에서 그노시스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또 기원 후 3세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두 갈래의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다.
하나는중앙 사막과 고비 사막의 북부를 통해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며, 또 하나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과 티베트로 이어진 길이다. 그 두 개의 길을 잇는 마을에는 3세기경에 만들어진 궁궐이 있다. 그 유적들은 폐허 속에 있다가 19세기에 발굴되었다. 그 스타일, 건축 양식, 장식, 얕은 부조(浮彫), 그림 등은 분명히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은 이란 예술에서 온 것이었다. 예술가는 시리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있는 불상은 간다라 미술의 특징을 갖고 있다. 로브노(Lobnor)의 남쪽 미란(Miran)에 있는 불교 사원에는 폼페이에 필적하는 프레스코 화(畵)가 있다. 그 그림을 보건대 부처는 제자인 승려와 프리지아(주: 식물 이름) 모자를 쓴 수염이 없는 사람들, 천사처럼 날개가 달린 요정, 로마 풍의 사등립(四等立)이륜 전차에 둘러싸여 있다. 그 그림을 그린 자는 디타라는 사람다. 양식은 로마와 시리아 풍이다. 빅또르 골루보프(Victor Goloubov)는 "결론을 내리건대, 화가는 안티오키아 혹은 바그다니아의 공방에서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닐까,"라고 쓴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것은 파르티아 인 또는 인도 스키타이 인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온 이란과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이었다. 진(晋)나라의 도읍 낙양에 정착한 최초의 불교 공동체 창립자는 파르티아 인이었다. 감숙(甘肅)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敦惶)은 석굴 사원인 천불동으로 유명하다. 돈황에는 벽화도 잘 보존되어 있다. 영국인 오렐 스타인(Aurel Stein)과 불란서인 뻬리오(Pelliot)는 금세기에 수천의 '돈황 문서'라고 부르는 옛 사본을 발견하였다. 그 사본을 찾아냈을 때 현지의 불교승은 거기에 무엇이 써 있는지를 해독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불교승에게서 '돈황 문서'를 사 들였다. 그 사본에는 불교 사본도 있었지만 상당량은 마니교의 사본이었다.
우선 731년에 이란 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마니가 이룬 빛의 불타 종교의 교리'라고 하는 사본에 의하면, '빛의 부처인 마니는 2월 8일 서역의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다. 같은 책에 관한 것으로 스타인 단편이라고 하는 다른 단편도 찾아냈다.
그들은 페르비어와 소그드 문자, 고(古) 투르크 문자, 위구르 문자, 중국어로 쓰여진 사본을 해독해 나갔다. 그것에 의하면 '빛의 두 원리에 의한 3가지 운동'이라는 종교가 설명되고 있다. 다시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마니교에서는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돈황 문서'를 보면 악보가 붙은 기도와 찬송가 집이 눈에 띈다. 라들로프(Radloff)는 불교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백의 기도에 관한 단편을 하나 하나 복원하였다. 공동체의 회칙도 눈에 띄었다. 입회자의 조건,사원을 만드는 것 등이 씌어 있었다. 외경의 복음서도 보였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단편, 북경에서 발행된 '페르시아 종교의 미완성 성서'도 돈황에서 찾아냈다.그것은 필시 서기 900년경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마니교의 책이다.
막대한 수의 마니교 사본이 중앙 아시아의 여러 불교 승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교의 사본과 마니교의 사본이 가르치는 내용은 똑같았다. 실로 불교승들이란 그 가르침에 따른 부처라는 마니였던 것이다. 마니인 부처의 제자들은 자기네에게 '마니교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역사가들이 그들을 마니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그들은 자기들을 빛의 자식들이라든지, 부처(깨닫는 자)의 제자라든지, '빛나는 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는 불교가 마니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에 가로막혀 온갖 고생을 다한다. 결국 역사가는 마니교가 종교를 체계적으로 절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가는 위구르인에게 있어서 불교는 마니교와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Henri-Charles Puech)는 자신의 마니교에 관한 책에서 마니와 불교 문헌을 비교하였다. 스타인 단편이라고 부르는 '중국어 교리의 책'에는 도교와 불교와 마니교가 섞여 있다고 한다. 토로번(吐魯蕃)에서 찾아낸 단편에는'인류의 예언자 명단'으로 '셈, 셰무, 에노슈, 니코데, 에녹, 예수'의 이름이 보인다.
마니는 그림과 조각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아시아에서 유명해졌다. 마니는 인도스탄과 도르키스탄을 돌아다녔다. 도르키스탄 전역은 마니의 '빛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마니교 공동체는 파르드게와 스키다이게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중앙 아시아의 여러 왕국으로 퍼졌다. 도르판에서 찾아낸 사본에 의하면 마니의 후계자인 부처들, 즉 사라반(Saravan)과 이맘(Imam)이라고 하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지도에 따라 여기 저기에 '교회를 겸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마니자신은 사후에 '빛의 기둥'에 오르고, 다시 달과 태양에까지 가서 최후에는 '휴식과 기쁨의 나라', '닐바나, 즉 열반', '영원한 빛의 왕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도르판사본에 의하면 마니는 '예언자들의 낙인', '최후 시대의 사도'라고 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결론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에 의하면, 예컨대 도르판의 근처에 있는 베제클릭(Bezeklik)의 불교 사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니교의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중앙 아시아의 불교 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마니교의 전례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마니교의 전례와 불교의 전례의 관계를 조금씩 밝혀 나갔다.
마니교는 그노시스주의이며, 온 우주는 보편 원리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한다. 보편 원리란 세상의 영혼이며, 신의 빛이다. 빛나는 세상의 영혼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비롯한 만물에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있다. 어떤 생물이건 기쁨과 괴로움을 갖고 그 세계 보편의 영혼에 의해서 살게 되고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과일을 딴다든지, 야채를 채취한다든지, 나무를 자른다든지,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결혼도 안 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그처럼 허무맹랑한 사고방식은 그노시스의 특징이며, 마니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선발된 자', '깨끗한 자'는 하루에 한 차례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그들은 먹기전에 먹을 것을 향해서 "당신을 베어낸 것은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자른 것도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반죽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요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당신이 고통받은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거룩한 밥공기를 들고 서서 혹은 앉아서 식사를 한다. 정해진 의식에 따라서 식사를 개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소화가 이루어지는 중에는 음식물 속에 갇혀있던 신의 혼이 풀려나 자기네 위장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들은 먹는 것을 통하여 갇혀 있던 빛인 신을 물질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신성한 행위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준 친절한 '구도자'들에게 용서를 베푼다.
다시금 빗슈는 불교승의 '고백으로 인도함'를 중앙 아시아에서 발굴한 사본과 비교하였다. 그는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컨대 마니교의 '선발된 자'는 매주 월요일 일동이 형제로서 모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불교승은 15일에 한번 빠디못카를 불러 같은 기도의 글을 사용하여 고백한다.
불교승의 죄는 모두 빛과 지혜(주: 그노시스식 지혜임)를 거부한 것으로 집중된다. 불교 사본으로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중세 후기의 것이다. 즉,13세기부터 14세기의 것이다. 그보다 오래된 것은 이미 살펴본 돈황 문서 등의 마니교 사본뿐이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가 있는데, 그 제목은 '붓다-카리타(Bouddha-Charita)'이다. 인도에서 그것을 최초로 언급한 때는 기원 후 673년이다. 또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의 중국어판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기원 후 6세기 것이다. '미란다(Milanda)의 대화'는 기원 후 6세기의 중국어판으로 지금도 전래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왕 미란다가 어떤 불교승의 도움으로 회개하는 이야기다. 역사가는 그것을 가지고 미란다가 기원전 1세기에 살고 있었던 희랍 왕 메난드로스(Menandros)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다수의 다른 학자들이 제기하는 반론의 대상이다. 프르타르고스가 기원 후 2세기에 쓴 책에 메난드로스 왕의 생애가 적혀있어서 우리는 메난드로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와도 불교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이상의 것으로 미루어 마니교가 불교 쪽으로 흐른 것임을 안다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리라.
부처의 가르침은 서방으로부터 인도로 전래된 것이지, 인도에서 시작해서 서방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다. 그 증거가 되는 예로 인도가 서방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것을 비롯한 다른 것이 예거되고 있다. 다음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티베트의 불교
기욤 드 루브룩(Guillaume de Rubruck)은 1246년에 불란서 왕 성 루이 9세의 명을 받아 영주의 나라들을 방문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다. 그는 가라콜므(몽골 제국의 수도)에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 망그 헌(헌종)을 만났다. 그는 그 나라를 돌아보고 그리스도교의 전례와 불교의 전례가 닮아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사라센 사람(회교도)과 네스토리우스파와 우상숭배자(불교도)는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한다. 위구르인의 불교 사원에 들어가자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내가 그들의 사원에 들어갔을 때, 불란서인 사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1762년 <알파베툼 티베타눔(Alphabetum thibetanum, 티베트 문자)>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책을 출판한 사제는 로마의 수도자 사제로 베네딕트 14세의 친구였다. 그는 티베트에 전교를 하러 떠난 카푸친회의 수사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 선교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결과, 불교에 대해 이르기를 마니교도들의 음험한 행위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의 모조품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후크(Huc) 신부는 티베트와 중국을 여행하고 나서는 그리스도교와 유사함에 매우 놀랐다. 라마승에 대한 존경, 주교장과 비슷한 지팡이, 주교가 쓰는 미트라와 비슷한 모자, 그리스도교의 제의인 달마티카와 비슷한 옷, 갑바, 편태(채찍질)용의 막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덮는 강복, 두 개의 성가대와 설교가 있는 예배의 식, 성영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장단의 기도, 연도(連禱), 장궤, 성 유해에 대한 경배, 성수, 구마, 로사리오(묵주)와 비슷한 염주, 방울, 종, 향로, 꽃으로 꾸민제단,성화, 예컨대 관을 쓴 아이를 품에 안고 용을 짓밟고 있는 여자의 그림, 단테의지 옥을 연상케 하는 듯 악마가 죽은 자를 괴롭히는 지옥을 그린 그림, 사원의 내부와 외부의 행렬, 지원기를 지나서 입회하는 불교승, 서품식과 비슷한 의식, 순명과 정결과 청빈의 서원, 죄의 고백, 삭발한 머리, 장상의 지도 아래 승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 여자 승원도 존재하는 것, 그 종교의 최고 지도자에 교황(달라이라마)이 있고 그에게 시종하는 추기경(판첸 라마)이 있는 것, 후크 신부는 그같은 조직이 13세기부터 몽골 제국과 서양의 그리스도교 제국이 교류한 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직접적인 모델로 하여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교(政敎) 양권을 쥔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15세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제도를 만든 것은 쓰온카파(1357-1419)인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사제 안또니오 데 안드라데는 1624년에 타파랑(Taaparang)에서 살았다. 그는 티베트 인들이 부처를 향해 기원하는 주문의 문구가 '옴, 마니, 빠드메,훔'이라고 알려준다. 티베트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이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풀이하듯이 티베트에서는 언제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구원의 주이신 신을 '마니'라고 부른다. 이 말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과 티베트의 종, 기도하는 다른 곳에도 씌어 있다.
크리슈나에 대한 숭배
인도에서 제일 처음 '성립'됐다는 종교는 베다를 성전(聖典)으로 하고,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바라문교라고 한다. 바라문교는 인도에 침입했던 아리아인의 종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자연계의 현상을 신격화한 범신론이었다. 그것은 천둥의 신인 인드라신(주: 아리아 민족의 신이었던 것 같다), 태양신인 스랴신, 물의 신인바르나신, 불의 신인 아그니신, 바람의 신인 바그신 등이 중심이다.
'리그 베다' 중 4분의 1은 인드라 찬가(贊歌)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바라문교는 특정한 교조(敎組)도 없으면서 카스트 최고위의 사제 계급 (주: 브라만 또는 바라문이라고도 함)에 의해 새로운 종교로 변모해 갔다. 그들의 이론을 붙여 가면서 지방 토착의 미신과 화신(化身) 사상을 흡수하여 오랜 동안에 걸쳐 누적된 것이 힌두교다. 그 때문에 종교 이론도, 통일된 체계도 없다. 그런식으로 각지의 미신과 신화를 부정하지 않은 채 포섭하는 방법으로 바라문교는 힌두교로 모습을 바꾸어 가지만, 그 변천 과정에서 최고의 신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이다. 이를테면 신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 왕과 독자적인 신화 체계를 갖는 크리슈나가 있고, 이전에는 각각 별도의 종교였던 것같으나 나중에 라마 왕도 크리슈나도 비슈누 신의 화신이라고 했다. 종파의 융성과 쇠퇴에 따라서 신들의 인기도 변했다. 바라문교의 주역이었던 신들은 지금에 와서는 힌두교 신화의 조역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 전해진 범천(梵天)은 브라프마, 수천(水天)은 바르나, 제석천(帝釋天)은 인드리, 병천(秉天)은 사라스바디(지혜의 여신)라고 하는 바라문교 신화의 신들이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카스트 제도를 배척하였다. 부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설파하고 상층 계급의 사람이나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처 가로되, "제자여, 브라만(Brahman,최상계급)도 최하층의 잔다르(수드라)와 똑같이 여자에게서 났건만, 그가 수드라(최하층)에게는 구원의 문을 닫누나." 부처의 가르침은 비슈누의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예배를 뚫고 들어왔으며, 브라만은 부처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처음의 비슈누에 대한 예배 의식은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또한 대 전쟁의 유명한 영웅인 크리슈나와 동일시함으로써 다시금 민중에게 퍼졌다.
리그 베다에 의하면 크리슈나란 '검은 것(黑)'을 뜻한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인드라 신의 원수로, 악마들을 의미했다. 크리슈나는 계속해서 대 전쟁의 영웅으로 나타나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있던 브라만의 종교가 다시금 민중의 인기를 얻게 하였다. 크리슈나를 내세움으로써 브라만은 무사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다가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들을 브라만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처를 비슈누 최후의 화신의 하나로 힌두의 신들 속에 집어넣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의하면 브라만들은 다음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서양에 보내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연구하게 했다. 그 그리스도교에 관한 지식을 이용하여 그들은 종교의 개념을 새로이 꾸며 부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진전을 막으려 했다. 크리슈나와 그리스도교의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브라만들은 바그하바드 지타(Baghavad-Gita)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이는 크리슈나에 관한 신화로 13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서 발전하였다. 크리슈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어떤 전례를 치르는지에 대해 기술된 책이 있는데, 그것을 브라나라고 한다. 브라나를 보면 크리슈나가 태어났을 때, 어미의 가슴에 안기되 양 우리에서 목자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또 난다와 그의 처마도라는 공물을 바치러 먼길을 떠나고 크리슈나가 태어난 우리에는 소와 그 밖의 가축이 있었던 일, 등이 굽은 자(곱추)가 나았다는 것, 크리슈나의 머리에 향수를 뿌린 구비야라는 여자의 이야기 등도 써 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으로부터 도망치신 이야기를 빌린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와 죄 없는 갓난아기의 학살 이야기, 유아기의 기적이야기, 유혹을 받은 이야기, 현성용의 이야기 등도 실려 있다. 브라만은 크리슈나의 신심을 도입함과 함께 신들이 여러 가지 화신이 된다는 설을 퍼뜨렸다.
크리슈나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브라만 종교가 흐려지고 악이 승리할 때에는 언제나' 몇 번이고 사람이 된 최고의 신이라고 일컬어졌다. 크리슈나는 가르침을 적은 후 비명에 가는 죽음을 당하고, 제자들에게는 버림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크리슈나는 지식과 고행보다 사랑을 우선한다. 바그하바드 지타에 의하면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범신론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의 생명(세상을 살리는 영혼)이며, 세상을 떠받치는 자이며, 세상의 길, 그 피난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사물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나는불사(不死)이며, 죽음이다"(이는 만물이 다 신이라고 하는 범신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나는 삶을 여러 번 반복하고(윤회전생(輪廻轉生) 혹은 환생(還生)), 너희도 삶을 여러 번 반복한다. 나는 그 모든 삶을 알고있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전혀 모른다."
크리슈나는 카스트 제도(주: 인도의 계급제도)를 지키도록 가르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신속에 녹아들라고 가르친다. 브라만 계급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제하면서도, 범신론과 윤회전생, 마지막에는 무(無, 열반의 세계)로 용해되고 마는 것 등, 부처의 기본 가르침은 보존한다.
19세기에 이미 인도에 대해 연구했던 학자는 인도의 유적과 그리스도교의 아이콘(Icon, 주: 성상, 성화)이 유사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많은 유적이 서양의그리스도교계로부터 인도로 차용(借用)되었음을 지적한다. 인도학의 권위자인 알브레헤트 베버(Albrecht Weber)는 그의 저서 <산스크리트 문학사>에서 "크리슈나를 신으로 간주하는 숭경(崇敬)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태리의 인도학자 안젤로 데 구베르나티스(Angelo de Gubernatis)는 모호우화(주: 번데기를 성총인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한다. 브라만들의 창작 신화를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이 인도에까지 전해져서, 그 지식에 의해서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럴듯하게 변모되어 이용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베버가 지적하듯이 그 지식이 크리슈나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고 그의 생애와 관련된 갖가지 에피소드를 만든 것 같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성실한 학자들은 오히려 인도가 그리스도교 국가인 서양의 흉내를 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인도가 성서를 흉내낸 것이요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크리슈나는 하층 계급이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이 설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브라만 계급이 하층 계급보다 상등한 지위를 유지하려는 뜻에서 부처와 그리스도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에서 만들어 낸 근대의 날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최근 힌두교도들이 성삼위일체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힌두의 브라만 계급에서 삼위일체를 닮은 개념이 등장한 것은 중세 때다. 중세에 씌어진 <쁘라나>라는 책 속에 그것이 기술됐을 뿐이다. 안젤로 데 구베르나티스가 매우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듯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흉내내어 형체를 망가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브라만들은 비슈누 신과 시바 신이라는 최고의 그룹에 자기네 브라만 신을 끌어들이고, 그 세 이름은 하나인 신의 형체와 존재 양식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일뿐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리믈디(삼중의 형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용어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힌두교에도 어떤 '신학'이 있는 것처럼 서양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니교와 불교는 혼합된 것인가? 절충한 것인가? 공존하는 것인가? 어째서 마니를 부처라고도 하는가? 어찌하여 부처의 전기는 그리스도의 전기와 너무나도 닮았는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복사한 것인가?
마니교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때에 십자가에 대한 경배와 희생이라는 관념과 성사를 제외시켰는데, 어째서 불교에는 그런 관념이 없는가? 그노시스주의의 마니교는 외경의 복음을 자기 것으로 삼아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찌하여 불교에도 그 노시스의 외경의 복음 이야기가 들어있는가?
중앙 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는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페르시아와 스키타이 족의 왕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도에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오래 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영향을 미친 것은 일시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브라만들이 불교를 적대시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비슈누 신의 화신의 하나로 부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 살펴 보건대 불교가 인도에 들어오면서 부처의 가르침 자체도 힌두교를 받아들였으니, 예컨대 불교의 신화 속에 인드라신이 도입되었는데, 인드라는 싸움에서 불교의 신에게 져서 불교를 지키는 하늘의 한 사람이 되고 인드라의 무기 바쥬라(주: 금강저, 즉 금방망이)도 불법(佛法)을 지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불교는 점차 변화되고,왜곡되며, 밀교(불교의 한 분파)로 변화되어 간다.
불교사에 관한 교과서는 그 변천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근본 불교, 원시 불교, 부파(部派) 불교, 대승 불교,밀교로 구분한다. 부파 불교의 시기에 이르러 그 때까지 가까스로 입으로만 전래되던 가르침(수 백년동안이나 '정확하게' 구전돼 왔다는 것인가!!??)을 붓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원시 불교, 부파 불교에 있어서 이미 부처의 가르침은 더 없는 저술로 변화돼 갔다. 다시 대승 불교에서는 다른 것들이 너무도 많이 보태졌기에 많은 불교학자는 한 목소리로 대승을 '비불설(非佛設)'이라고 칭한다. 예컨대 '아미타불'등은 전적으로 대승교전(大乘敎典)의 창작이다. 7세기에는 이미 밀교가 태어나고, 9세기에는 힌두교의 성력파(性力派)와 결합하며, 외설적인 행법을 만들어 병적인 상태에 빠졌다. 또 '다라 보살'에서 볼 수 있듯이 8∼9세기에는 풍부한 유방과 부드러운 육체를 갖되 극히 힌두적인 여성의 밀교 보살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여성 숭배, 마신(魔神) 숭배를 행하는 등, 최후에는 불교의 이름을섬뜩하게 하는 마교(魔敎)로 변하고, 1203년 인도의 비하르에 있던 비그르마시르 사원이라고 부르는 밀교 교학의 중심지가 이슬람교도에 의해 파괴되어 그 때를 끝으로 인도에서는 불교가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결론
불교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의 북서쪽 소그디아나에서 희랍계의 스키타이 인과이란계의 파르티아 인의 왕국에서 등장했다.
마니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서 깨달은 자(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불교는 그노시스의 마니교가 아시아에 퍼진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는 진짜로는 마니이며,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마니의 가르침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민중의 많은 전설, 신화, 미신이 섞여들어 그 가르침의 본질이 변질된 것의 형태로 발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로써 어째서 기원 후 5, 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도와 아시아의 여기저기에 마니교와 불교의 승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어째서 그 시기에 미란다, 아소카, 부처의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져서 기술되기 시작했는지도 잘 납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6세기에는 중국에도 달하여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의 불교승들이 복사한 8∼10세기 마니교에 관한 책 여러 권이 상술한 지역에 있던 승원의 폐허 속에서 발견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모든 면에서 이치에 맞다. 이로써 다른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한 사실의 자연스런 역사적 흐름과 자연스런 논리를 역사적 틀의 범위 안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억지로 밀어 부친 부처의 가르침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역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를 깎아 내리려는 의향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도학의 권위자라는 에우게네 부르노프(Eugene Burnouf)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리스도교가 엣센파를 통하여 인도에서 성립됐다는 것을 애써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단, 이상은 그저 연구 단계일 뿐이며, 좋은 의견이나 제안이 있을 경우에는언제든지 환영한다.
+ 마리아의 토마스 오노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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